고마워 영화
배혜경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17년 11월
우주의 질서가 '저절로, 자연스럽게' 그러하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것 또한 그러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조화를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사람 뿐만 아니라 책이나 영화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책만 하더라도 그렇다.
마구잡이로 들인다고 다 읽는 것이 아니고,
책과 나의 연이 맞아야 읽게 되는 것이고,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놓고 봤을때 난 영화와의 인연은 좀 소극적일 수 있는데,
시각적 충격을 주거나 잔상이 오래 남는 영화는 안(또는 '못') 보는 경향이 있다.
때로 리뷰를 쓸 수 없는 책들이 있다.
한때는 글을 잘 쓰고 싶어 안달을 한 적도 있으나,
이제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니 글쓰기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점점 더 즉흥적이 되어서,
그때 그때 느낌을 춘향이의 그이 이몽룡도 아니면서 일필휘지로 그려내는 지라,
리뷰라는 말이 송구하고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리뷰를 쓰는 책들은 직접 사서 읽으려고 한다.
이 책도 서재 프로필에서 본 지는 좀 됐는데,
보내주신다고 하셨을때까지 알라딘DB에 뜨지 않았었다.
귀한 책을 읽을 수 없을까봐, 얼른 보내달라고 했다.
책의 내용들은 알라딘 서재를 통해서 봤던 내용들도 있고 해서 크게 낯설지 않았다.
알라딘 서재에 뜨문 뜨문 한편씩 올라오는 글을 읽는 것과는 다르게,
글을 쭈욱 연결해서 읽으니 저자의 개성을 알 수 있겠다.
글이 시원시원하고 군더더기 없이 흐른다.
내동 객관성을 유지한다.
설핏 저자의 개인사가 언급되는가 싶다가도,
저자는 영악하게 빠져나오고,
그 자리에 영화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만 남는다.
내가 이 책을 두고 리뷰로 쓸 수 없다고 한 것은,
51편의 영화 중 내가 제대로 본 것은 10편 남짓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10편도 저자처럼 농밀하게 본 것이 아니라서,
말을 보태거나 훈수를 두기 민망한 정도이다.
그런데,
글씨 얘기는 좀 해야겠다.
난 글뿐만 아니라 글씨도 그 사람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엄청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글씨에 모종의 패티쉬가 있는 것 같다.
(우리 남편에게 필이 꽂히게 된 것도 연습장 글씨를 너무 차근차근 잘써서 였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다, ㅋ~.)
글씨가 큼지막할뿐더러 뻗는 획도 시원시원하다.
글씨가 그러하듯 글에도 군더더기 없는 것이 시원하다.
가슴이 뻥 뚫리고 시야가 훤히 트인다.
덕분에 나도 책은 물론이고 영화도 밝은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 프롤로그를 보면 내가 위에서 얘기한 '인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이 그렇듯 영화도 시절인연이 있다. 시의적절한 충고를 해주는 영화에서 빠져 나오면 조금은 나은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화 속 인물과 대사가 절묘한 처방약이 되고 풍경이 더없는 위안의 손길이 될 때마다 자작자작 마음 밑바닥이 젖어들었다. 넘어져도 덜 다치고 씩씩하게 다잡는 맷집도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조금은 자라서 가볍게 날 듯했다. 영화는 그렇게 미욱한 나를 키웠다.(프롤로그 중에서)
차근 차근 아껴읽고 보다보면 나도 한뼘쯤 깊어지고 그윽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에필로그를 읽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영화는 날마다 태어나고 행복은 그러므로 보장된 셈이다.
부디 날마다 행복하시라.
건필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