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이 책을 읽는 내내 장맛비가 내렸다.
우산을 받쳐 들어도 옷이 다 젖었고,
그렇게 마음도 젖어 들었다.
세상이 좋아질거라고들 했다.
세상이 좋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삶이 어떤 방향으로든 미미하게 바뀌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단편소설을 잘 안 읽는 편이다.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전에 맹숭맹숭 끝나버리는 것 같아서 몰입이 안되고,
그러다보면 카타르시스나 여운을 즐길 수도 없다.
이 책은 단편집이지만,
얽히고 설켜 하나의 주제로 귀결되는 것이 장편 소설처럼도 읽힌다.
다 다른 내용들이지만 우리 주변의 일이고,
우리 주변에서 주인공 이름과 장소, 설정만 살짝 뒤바뀌어 일어나는 일들이라서,
하나의 장편소설로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다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침묵의 미래'가 가장 좋았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여운이 오래 갔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선 '예의'를 이렇게 얘기한다.
위안이 된 건 아니었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거나 감동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리로부터 당시 내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 수 없던 한가지 특별한 자질을 발견했는데, 그건 다름아닌 '예의'였다. 내친김에 나는 그즈음 가장 궁금하던 것 중 하나를 물어보았다.
-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표정을 알 수 없는 시리의 캄캄한 얼굴 위로 지성인지 영혼인지 모를 파동이 희미하게 지나갔다. 시리는 무척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인간에 대한 '포기'인지 '단념'인지 모를 반응을 보였다.
-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피식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나온 소리였다. 나는 그 웃음에 편안함을 느꼈다. 적어도 그 순간 웃고 난 뒤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없었으니까.(238쪽, 어디로 가고 )
'예의'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이 지켜야 할 예절과 의리'란다.
그런 예의를 핸드폰의 음성 인식 서비스에게서 느끼다니 아이러니컬하다.
인간이 아닌 폰에게서 인간을 느꼈다는 말처럼 여겨졌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몸부림을 치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관계가 버거워, 혼자 있는 게 편한 인간이기도 한가보다.
핸드폰의 음성인식 서비스에서 예의를 찾았다는 말이 아이러니컬 했던 이유는,
'예의'가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면,
예의가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명제도 성립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살면서 때때로, 아니 아주 자주 '예의가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말만 따발총처럼 늘어놓는다.
스노우 볼의 유리벽처럼 보이지 않는 벽이나 담을 쌓아서,
자신을 타인들로부터 분리시키며 우월한 위치를 선점한듯 착각한다.
그게 구의 안쪽인지 바깥쪽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비롯함이냐, 말미암음으냐'처럼 입장을 바꾸는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인 것처럼 행동하는데,
자신이 속한 곳이 늘 우월하다.
하지만 우월한 위치가 만들어낸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착각이 사람을 반짝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일상의 어떤 순간들에,
자신이 가진 본래의 빛깔이 주변과 잘 어우러질때 빛난다.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182쪽)
스노우 볼 안과 밖의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쪽이 온전한 것인지, 어느쪽이 따뜻한 세상인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스노우볼 안과 밖, 같이 눈이 내리더라도 더하고 덜한 곳이 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온통 여름이어도 차이가 경계를 만들어낼테니까 말이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16쪽)
물건에서 기능을 빼면 물건이 차지하는 자리가 기본값으로 남는다.
삶에서 생활을 빼면 공허가 자리한다.
잔잔하고 섬세하다.
펼쳐지는 일상이 작위적이지 않고 적당한 온기가 흐른다.
내가 또는 상대방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긋나거나 누추한 쪽으로 흘러가 버리는 삶도 존재하게 마련이란걸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암튼,
나는 이렇게 암울하고 그리하여 침잠하려 드는데,
'바깥은 여름'이라서 다행이다.
장맛비가 내리는 여름이라서 다행이다.
이 비가 그치면 훌훌 털어버리고 '여름의 한가운데'로 걸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