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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나의 종교 - 세기말, 츠바이크가 사랑한 벗들의 기록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오지원 옮김 / 유유 / 2016년 5월
평점 :
김탁환의 '아비 그리울때 보아라'를 보게 되면,
책의 말미에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를 인용하고 있는데,
아주 짧은 인용문인데도 불구하고, 내내 읽은 김탁환 만큼이나 강렬하였었다.
요번, '세기말, 츠바이크가 사랑한 벗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 '우정, 나의 종교'는 그때의 기억이 강렬해서 읽게 되었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내 취향이 아니었던 가장 큰 이유를 들라고 한다면,
이 책의 겉날개 안쪽 프로필을 언급해야 할 것 같은데,
난 전기작가라면 있는 그대로의 전달에 집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탁월한 이야기꾼의 자질은 차후의 문제라고 여겼었나 보다.
아니, 어쩌면 인물의 전기를 쓰는데 있어서 탁월한 글솜씨는 인물을 두드러지게 하는데, 인물의 본성을 가리우는 마이너스적인 요소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또 한가지, 난 글이 담백하고 무미건조한 걸 좋아하는 편이다.
일상이 주는 감동이라고 해야할까?
산다는 건, 그것이 아무리 위인전에 등장할 정도의 훌륭한 인물이라도,
실상은 그렇게 화려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란걸,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몸으로 느꼈다고나 할까?
때문에 다양한 수사법과 문장 기교를 쓰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냈을 때,
더 큰 울림을 주기도 하더라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떠돌며 지내다가 우울증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부인과의 동반 자살은,
(내가 그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없는 고로, 섣부르게 판단할 사안은 아니지만,)
좀 비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그가 좋았던 것은, '어제의 세계'가 자전적 삶의 기록이었기 때문인가 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우정, 나의 종교'는,
로맹 롤랑이 츠바이크에 대해 언젠가 언급한 내용을 취한 것이라고 하는데,
츠바이크는 말만 하는게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이것이 그가 많은 사람과 교류할 수 있었던 근원이었다.
츠바이크의 글쓰기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인물의 성격묘사가 정밀한 것을 들 수 있단다.
이게 자신이 연구하던 학문에 조예가 깊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예를 들면 그와 나이 차이가 스물다섯이나 났음에도 '망년지교'를 나누었던 프로이트와 그의 심층 심리학에 대한 연구는,
츠바이크가 인물의 마음과 사건의 핵심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글쓰기를 하는데,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내향적인 성격인데다가, 소심해서 타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았지만,
그가 교류했던 몇몇 작가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들과는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소통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나온 글들은 그런 그의 폭넓은 교류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데,
장례식에서 한 연설, 만남을 회고하는 회고록의 형태 등,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한결 같이 그와 우정을 나누었던 인물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느낄 수 있는 헌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분위기를 바꾸어, 친구와 다퉜다.
다퉜다고 하여, 애들처럼 티격태격한건 아니고,
'우정, 나의 종교'를 읽으며,
나의 우정이란 것의 무게가 너무나 하찮고 가벼움에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허허로움을 아는지,
사실은 자신도 가짜라고 하며, 자신도 부질없다고 하는데... 서러움이 복받쳤다.
그래,
어쩜 관계는 다 별거 아닐지도 모르고,
가볍게 흐르는것일지도 모르고,
그러다보면 남는건 나 하나일지도 모른다.
어쩜 그 말이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짜, 가짜나 참과 거짓 같은 가치판단이 과연 필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진짜,가짜나 참과 거짓 같은 가치판단이 요구된다면,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구실의,
아니 누구의 삶이든...삶이란 것 자체를 화려하게 포장하고 수식하는 그런 문장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상대방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나도 내 자신을 잘 몰라서 맨날 시행착오를 겪는데,
어떻게 상대방을, 친구를, 우정을... 종교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이것 저것 다 차치하고라도,
자살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부인과의 동반 자살은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비겁한 일이다.
우정, 친구가 종교 마냥 신성한 것이 아닌 이유는,
내 삶이 남루하고 초라할지라도,
이렇게 보대끼며 숨쉬며,
이땅에 발 붙이고 머리로 하늘을 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