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 오랜 친구가 전화기를 붙잡고 울어대는 통에 잠을 못잤다.
내가 누굴 만나고 무엇을 해도 무한 너그러운 우리집 남자가 만나는걸 아주 싫어하는 (무려 여자인) 친구다.
우리집 남자가 만나지 말란다고 내가 그 말을 꼭 들을 위인은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만나지는 못 하고 가끔 전화로 안부만 묻고 지냈었다.
내 친구는 20대 초반에 남편이랑 이혼을 한 뒤,
대외적으론 클래식바라고 부르지만, 내가 보기엔 음침한 냄새가 나는 룸쌀롱 사장으로 살며, 악착같이 돈만 벌었었다.
2~3년 전이던가 어디 항공사 부기장이라는 남자를 만난다고 하더니,
얼마전 그 남자가 룸쌀롱을 정리하고 같이 살자고 하더라면서 좋아했었는데,
지난 밤에 전화해서는,
'알고보니 제비였네, 그놈이 해외로 튀었네' 해가며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거다.
친구가 하는 얘길 추려보니,
같이 살자고 해서 다 정리를 하고 집을 얻는데 보태라고 돈을 맡겼는데,
알고보니 같이 살자던 곳이 해외라는 것이었다.
남자가 안 데려가겠다고 했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그럼 그 사람은 틀린 말 한게 없는데, 같이 나가서 살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했더니,
자기는 체질적으로 비행기를 탄다는 것 자체가 싫고,
무엇보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곳에서 '외로워서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하소연도 들어줄만큼 들어줬겠다, 그쯤에서 좀 자라고 한마디만 했으면 됐을것을,
빈말 못 하고 할 말 못할 말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
그동안 니네 가게로 불러들여 벗겨먹은 그 남자들 중에 뉘집 남편들도 있었을텐데,
그 남편들 기다리느라 집에서 외로웠을 아내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보시했다 치고 덮으라고 했다.
내 보기엔 그 남자가 제비도 아니었지만,
그 남자가 제비라고 치고,
제비를 따라 해외로 가든, 제비를 보내고 이곳에 혼자 머물든 간에,
그런 정신 상태로라면 외롭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의사표현 할 수 있는 언어로 말을 하고, 그런 사람들 속에 있어도 외롭다는 사람들이 쌔고 쌘걸 보면,
외로움은 공감이나 소통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감성이 아니라,
한번 외로움을 알아버리면 떨쳐버릴 수 없는 일종의 버릇이고 습관인가 보다.
전에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인간 관계를 앞에 두느라 참았었다.
참으니까 관계는 나아지고 남들로부터 착하다는 소리는 듣는데, 실상 내 속은 지옥이었다.
지금은 착하다는 소릴 못 들어도 그만이고, 인간 관계에 실패하더라도 내 마음이 천국인게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할말은 하고 살자'고 하고 싶은 대로 일단 내지르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노유진'의 '생각해봤어?'를 잼나게 읽었던지라, '할말은 합시다' 또한 완전 기대된다.
노유진의 할 말은 합시다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지음 /
쉼(도서출판) /
2016년 4월
하려던 얘긴 이게 아니고 시집 얘기인가 보다.
시의 정거장
장석남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예전엔 여러 시인의 시들을 묶은 옴니버스 형태의 시 모음집 내지는 시 해설서 따위가 자주 나왔었는데, 언제부턴가 뜸해졌었다.
그건 예전에 비해 시를 묶어내는 능력이 부족하거나 시를 해설해내는 품이 형편없어서, 가 아니라,
시를 재인용할 경우 시 한편 당(시인과 그 시인의 시를 관리하는 출판사에게 각각 6만원과 3만원) 도합 9만원의 저작권료를 지급해야 하는데, 안 그래도 열악한 시 시장에 수지타산이 안 맞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그렇지, 시 해설서에 해설하고자 하는 원래의 시가 빠지다니,
궁색해도 너무 궁색한 변명이다.
게다가 이 책을 묶고 엮은 장석남 또한 시인이라는걸 고려한다면, 좀 비겁한 처사라는 느낌마저 든다.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3월
그동안 내가 읽은 시 모음집이나 시 해설서 형태의 것 중 가장 좋았던 것 중의 하나는,
(시를 재인용할때 생기는 저작권료에 대한 규칙이 이전인지 이후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안도현의 시작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인데,
시를 쓰기 위한 작법서로 뿐만 아니라,
시에 한발 다가가고 가까워져서, 시를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는 매개로써의 역할도 톡톡히 수행해 내고 있다.
시를 이렇게 쓰라는 얘기는 독자들이 이런 시를 읽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먼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쓰라며, 이정록을 인용한다.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당신이 지금 전화를 하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는 것을 말해보라고 한다. 그걸 쓰라고 한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고 한다. 단언컨데,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안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다면 어찌 문 밖 사람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안도현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중 54쪽, 이정록의 '문지방 삼천리'
언젠가 이정록 시인이 보내준 사진 한장이다.
이 사진을 보면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사는 것이,
시에 (그리고 시의 자리에 사람을 대입시켰을 때도 묘하게 통용된다~^^)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비법임을 알 수 있다.
쓸데없이 주절거리던 얘기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앉아있었던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어 께름칙해서 였다.
이 페이퍼 전체에 걸쳐서 내가 하고싶었던 얘기는,
속에 담아두지 말고 '할'말은 하고 살자는 것이었지만, 한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말이나 헤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해도 되는 말과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의 경계를 지키는 일은 어렵다.
그러고보면 요즘 세상에 해도 되는 말 따윈 없는 듯 싶기도 하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