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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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언젠가부터 김사인에게 삐껴 있었다.

내가 삐치던 말던 작가는 모를 일이고, 상관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의 전작 '시를 어루만지다' 의 책머리를 읽다가,

작가의 처연한 고고함을 편협함으로 착각했었다.

 

나는, 시 쓰기는 제 할 말을 위해 말을 잘 '사용하는' 또는 '부리는'데 있지 않다고 말해왔다. 시공부는 말과 마음을 잘 '섬기는' 데에 있고, 이 삶과 세계를 잘 받들어 치르는 데 있다고 말해왔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과 시의 뿌리가 다르지 않으며, 시의 기술은 곧 사랑의 기술이요 삶의 기술이라고 말해왔다.
생각건대 쓰기뿐 아니라 읽기 역시 다르지 않아, 사랑이 투입되지 않으면 시는 읽힐 수 없다. 마치 전기를 투입하지 않으면 음반을 들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단언하자면 시 쓰기와 똑같은 무게로 시 읽기 역시 진검승부인 것이며, 시를 읽으려는 이라면 앞에 놓인 시의 겉이 '진부한 서정시' 이건 '생경한 전위시' 이건 다만 사랑의 절실성과 삶의 생생함이란 더 깊은 준거 위에서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자 애쓰는 것이 마땅하다.

                                                                                             '시를 어루만지다'의 '책머리에서'부분 인용

 

'가만히 좋아하는'의 '조용한 일' 같은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시쓰기에 대해 얘기하면서,

말을 잘 사용하는지, 부리는지, 

또는 말과 마음을 섬기는 지, 받들어 치르는지, 에 대해서 이러구 저러구 중언부언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집을 선물 받아 읽으면서,

'시를 어루만지다'에서의 중언부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언어를 잘 벼리는 사람은, 마음도 잘 벼리는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처연하고 맑고 고고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심뽀(심포를 얘기하는게 아니라, 놀부의 '심술보'이기도 한 그것, ㅋ~.)를 곱게 쓸 수밖에 없을테니까 말이다.

 

나도 그렇고,

지인이나 친구들도 그렇지만,

오장 육부, 내지는 육장 육부 외에, 심술보를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게 행동을 할때가 있다.

 

그게 심술보를 하나 더 가지고 있어서 심통맞아 그런 것이 아니라,

심성은 착하고, 마음은 그지 없이 곱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쑥스럽고 낯 간지러워서,

맘이랑 정 반대로 행동하고,

반어법으로 얘기하는 거라는 건,

내 자신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걸 인식하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던 것들이다.

 

'못난이'나 '짜샤'따위의 호칭을 들이대면,

처음엔 서운해서 찔끔거리고 울었었는데,

이젠 '볼수록 이뻐진다'의 '볼.이.'='보리'라든지,

'원래(월래) 이뻤다'의 '월.이.'= '워리'라고 불러달라고 주문한다.

 

그렇다.

모든 글들이 그렇지만,

시란 것도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어야 울림이 큰 법이다.

 

암튼,

시집의 제목만 듣고는 '사석원'을 떠올렸고,

읽으면서 내내 찔찔거렸다.

 

 

시집의 맨 뒤 '시인의 말'에 가서야,

 

그도 나와 내 친구, 지인들처럼,

맘이랑 정 반대로 행동하고 반어법으로 얘기하는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린 당나귀가 있고 나는 그 곁에 있습니다.

나는 어쩌다가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이놈과 있게 되었나요. 곁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요.

언젠가 그를 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몹시도 슬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곁에 있다는 것에 오늘 나는 이토록 사무쳐 있습니다.

독한 술을 들이켜고 한숨 잘 잤으면 싶습니다.

아침이면 어디로 떠나고 없기를 바랍니다. 어미에게 갔건, 바람이 났건.

그러나 아마 그런 기특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난 김사인의 당나귀가 아니라, 사석원의 그림 속의 '당나귀'이고 싶다.

'곁에 있다는 건' 실제적인 거리가 아니라, 공감과 소통이 빚어낸 관계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견디거나 버리거나 슬프거나 사무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도 선물이고 축복인 그런게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걸 김사인은 시인답게 반어법으로 얘기하고 있는 걸게다.

 

때문에, 달팽이의 그것은,

귀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그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네 개의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길을

                                  (달팽이, 부분)

네개의 뿔이 아니라,

귀를 잃어버린 후에나 제대로 갖게 되는,

진정한 소통과 공감의 더듬이가 아닐까?

정작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고,

온몸으로,

아니 온몸의 감각이 집중된 더듬이,

아니 네 개의 뿔로,

공감각해야 하는 것이고,

다시 얘기하자면,

'곁에 있다는 건' 실제적인 거리가 아니라, 공감과 소통이 빚어낸 관계의 그것이다.

 

눈물이 나면 침을 꼴깍 눌러 삼키듯 그렇게 눌러 삼키면, 어느 정도 진정된다.

하지만, 이런 자체 처방에도 불구하고,

찔찔거리다가, '꺼이, 꺼이~'울고 만 시가 있다.

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열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난 몸뻬가 많이 헐겁지도 않을텐데 목이 멘다.

눈물은 찔찔 흩뿌리면서도 목을 매지는 못한다.

 

좋은 시가 여럿이지만,

우느라 다 옮겨적지 못한다.

그리고 반어법으로 읊조린다, 시가 웃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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