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동의 손바닥 아트
박재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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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리는 모래처럼 느껴지는건 나이를 먹었다는 얘기렷다.

소싯적엔 그렇게 쓰라고 노래를 불러도 쓰기 싫던 일기가,

언제부턴가 순간을 붙잡아 둘 수 있는건 기록뿐이지 싶어졌다.

예전엔 완전 범죄에 위해 증거인멸에 어려움이 있는 사진과 동영상 따위는 무슨일이 있어도 찍히면 안되는줄 알았었다.

어쩌다 그때 증거들을 만나게 되면, 후회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영 아닌 얼굴에 이빨이라도 옥수수처럼 드러내고 찍으면 그나마 좀 나을텐데, 우거지 죽상도 그런 우거지 죽상이 없다.

그런데 괜찮은 줄 알았던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다는걸 깨달은 어느 순간,

그때가 순간을 붙잡아 둘 수 있는건 기록뿐이라는걸 깨달은 그 즈음이지 싶은데,

이젠 찌그러진 얼굴일지라도 그 순간의 느낌에 가까운 사진이면 기록으로 남긴다.

종종 셀카도 찍는다.

 

이 책의 제목은 '손바닥 아트'지만, 기회가 있을때마다 사람이든, 풍경이든, 사물이든, 박재동의 마음이든, 을 그리고 쓴 일종의 그림일기란다.

사실 난 이 책을 그림 보고 그리기 내지는 그림 따라 그리기 연습을 할 요량으로 언젠가 구입해 뒀었는데,

어쩌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이 책을 이렇게 읽자, 이 사람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맘에 들어,

이 사람의 그림만이 아니고, 삶 전반에 걸쳐서 본받고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체가 다소 코믹스러워서 그렇지만,

이 네 작품을 통하여 박재동 님의 예술 세계를 엿본 소감을 얘기해보라면, 몸매가 완전 예술이라는거다.

그런데 박재동 님은 부러워하지만 말고,

'예술이란 특별한 예술가들이 대중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꽃피워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책 날개를 빌어 슬며시 꼬신다.

 

첫번째 그림의 경우,

머리카락의 방향과 뒤로 젖힌 손의 각도,

티셔츠 주름의 방향이 그려내는 각도가 거친듯 단조롭지만 통일되었다.

멋지다.

두번째 그림 '배에 힘주고'는 그 밑의 '뱃살을 빼야해'와 묘한 대조와 대구를 이룬다.

세번째 그림은 실루엣만으로도 율동감이 느껴진다.

 

이 네 편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건 그림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고,

박재동 님이 말하는 바가 뭔지 쉽게 전달되어 온다는 것이고,

또 하나,

그렇지만 그림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아움직이는 듯 느껴지지,

어느 한구석 소외되거나 미완성된것처럼 허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극과 극은 통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가 아둥바둥하는 것은 어느 단계에 이르기까지인 것 같다.

그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그러면 찾아드는 허허로움을,

박재동 님의 경우,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다가도,

나이 들어 찾아드는 마음의 편안함,

나이 들면서 쌓이는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이라고 표현하며,

그것을 젊음과 바꾸기는 '너무' 아깝다고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54쪽)

 

또 하나 박재동 님의 '손바닥 아트' 이 책을 보면서 든 느낌은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그걸 박재동 님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먼저 사람이 되거라

 

이 그림을 다시 보고 다시 감회에 젖는다. 재능과 기술과 학문 등을 연마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거니와 먼저 인격을 갖추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젊을 때 "먼저 사람이 되거라"는 이야기는 나한테 얼마나 진부한 잔소리로 들렸던가. 이 나이에 생각해보면 이제야 와 닿는 이야기다. 사람됨 없이 쌓아진 모든 것들은 흔들리는 이빨처럼 무너져 위태롭더라. 그래서 요즘, 어떤 상황에서 행동 판단이 어려울 때 가끔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생각해본다.(135쪽)

 

재능과 기술과 학문 등을 연마하는 것들도 그렇지만,

사람이 하는 모든 일들은, 사람을 위해서이다.

 

여기서 박재동 님과 내가 견해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등장한다.

오래전에 박재동 님이 누군가의 캐리커쳐를 그려줬는데,

많은 사람들은 똑같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는데 정작 장본인은 그림을 구겨버렸단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는단다.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그림이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런 그림이 과연 예술일까 고민했으며,

그때부터 단점은 감추고 장점을 부각해서, 상처가 되는 그림은 그리지 않게 되었단다.

 

사람은 어느 정도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사진이 됐든, 그림이 됐든, 실물은 아닌 것이고,

실물이 아닌 그것을 보고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 되는게 사람이더라~--;

 

나 또한 완전 소심 덩어리 그 자체여서, 옛날 같았으면,

박재동 님처럼 다른 사람이 즐거워 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겠지만,

지금은 내 자신이 만족스럽고 내 자신이 즐거운 그림을 그리는게 우선이다.

 

그렇다고 이 둘이 완전 상반된 견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을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내 자신이 만족하고 즐거워야 상대방도 같이 즐거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죽재킷을 즐겨입는 걸 보고 누군가가 나 때문에 죽어나간 동물들을 생각하라는 말을 했다.

가죽재킷을 입는 것을 잘했다고 정당화하는게 아니라,

그건 그렇게 비약시킬 수 있는 논쟁거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적용시키면, 모나 울, 동물의 털로 된 옷들도 자유롭지 못한 게 아니냐,

가죽 신발, 가죽 가방, 심지어 가죽 벨트, 지갑 등등 가죽을 안 사용하는게 몇 개나 되겠냐,

같은 말들도 했던 것 같다.

 

그의 얘긴즉슨, 털은 살아있는 동물에서 깎는 것이고,

가죽은 동물을 죽여서 취하는 것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느냐,

뭐 그런 취지였다.

 

정작 동물은 털을 깎이는 과정에서 죽을때보다 더한 고통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고,

털이 깎이는 걸로 인해 죽음과 맞바꿔야할 환경의 역습을 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만으로 낫다고 생각하는 건, 어쩜 선을 위한 독선일지도 모른다.

 

나와 그 또한 완전 상반된 견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재동 님은 아티스트니까 '무엇이 아름다운가'가 가치 판단의 기준이시겠고,

난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인간 되기를 추구 하는 사람이니까 '무엇이 내마음이 천국인가' 즉, '무엇이 편안한가'가 가치판단의 기준되시겠다.

 

하지만, 이 모두가 백날 말로 떠들어봐야 사상누각이다.

모든 가치는 행동으로 옮겨졌을때 견고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독서일기가 됐든 그림 일기가 됐든,

깜박깜박하는 기억력을 붙들어두기 위해서 그날 그날을 기록하는 것을 결심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겠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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