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 스물넷에 장애인이 된 한 남자와 그가 사랑한 노들야학의 뜨거운 희망 메시지
박경석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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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때 제일 이해하기 힘든 말이 '잡은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라'는 말이었다.

잡은 고기를 깔끔하게 손질까지 해서 주면 그보다 더 좋을게 없을것 같은데,

왜 구태여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느라 자신의 고기잡는 비법을 전수한답시고,

자기 자신과 상대방, 이중으로 시간과 노동력을 낭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우리동네에는 새벽이면 신문을 배달하는 나이든 형아가 한명 있었다.

다들 날라 다니는 시간에,

이 형아만은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다는 듯이 자기만의 느긋한 걸음걸이를 고수하였는데,

그게 깔끔한 외모, 단정한 옷차림과 더불어 이 형아를 새벽 골목에서 두드러지게 하였었다.

 

그런데 어느날 가만히 보니,

이 형아를 꼭 닮은 아저씨가 먼발치에서 시선으로 쫓고 있었는데,

그게 마치 오라(aura)를 형성한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걸 발견하고는 난 가족들한테,

저건 아동학대가 아니라 청소년 학대라고...

저 오빠는 공부하라고 놔두고,

그 뒤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저 아저씨가 감독도 하고 배달도 하면 되겠다고 열을 올렸더니,

그때 가족들이 내게 했던 대답이,

잡은 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였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말의 뜻을 이제는 알겠는데,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이 형아를 작년쯤 내가 사는 동네의 지하철역 입구에서 발견하였다.

아저씨가 된 형아는 여전히 외모도 깔끔했고 옷차림도 단정했는데,

하는 일만 신문배달에서 지하철역 입구에 철퍼덕 주저앉은 구걸로 바뀌어 있었다.

 

이 형아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아저씨는 아버지였는데 돌아가시고,

지적장애가 있는 이 형아 혼자 남게 된 것까지는 이 형 아버지의 예측대로였는데,

문제는 동네가 재개발되고 똑같이 성냥갑 모양으로 생긴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간단한 글자나 숫자를 보고 구별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까지는 예측을 못하셨나 보다.

설상가상으로 인터넷이 발달되어 종이 신문을 보는 수요가 줄어들면서,

스피드와 정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배달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걸어다녀 스피드도 떨어지는 데다가,

아파트의 동ㆍ호수도 읽을 줄 모르는 신문배달원은 경쟁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장애, 장애인이라고 하면 가장 쉽게 피부에 와닿는 말이 통신장애가 아닐까 싶다.

남녀노소 거의 모두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요즘,

자신의 핸드폰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핸드폰이 잠시만 먹통이어서 연락이 안되게 되면,

불편을 느끼고 불안해 하는 이른바 스마트폰 중독자들이 많다.

 

장애(障碍, disability)라는 말을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찾아 보니,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 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 라고 나오고,

네이버 지식백과사전의 특수교육학 용어사전에서 다시 한번 찾아봤더니,

'질병이나 사고 등에 의해 지적, 정신적, 청각, 시각, 내장, 골격, 기형적인 면에 결함(impairment)이 생겨, 이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곤란하거나 불가능한 상태이다.
결함은 신체의 특정 부위나 기관의 기능이 손실되었거나 감소한 것을 의미하므로 의료적 지원이 필요하며, 장애는 손상으로 인해 특정 영역(읽기, 보기, 걷기, 듣기 등)에 능력 저하가 생기는 경우 교육ㆍ훈련적 지원이 필요하다'
라고 되어 있었다.

 

어쩜,

장애나 장애인들을 이런 통신장애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장애인들에게는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사람이란 몸소 경험하고 체험해 본 것에 대해서만 친밀감을 느끼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거리감을 좁히려다 보니, 비교가 다소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다.

 

정작 장애인들은 이런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지 못할 정도의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장애인들의 현실을 무시한 비교인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나의 이런 노력을 어여삐 여겨주지 않고,

나는 스마트폰 등 '통신장비 의존도가 낮다'고 하면서 심드렁해져 버리면 할 말이 없는 것이고,

 

'뭐라는 거냐, 우리가 보는 장애인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느냐?'라는 정도로라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 심한 장애인, 소위 중증 장애인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우리의 눈에 띄게 출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로 설명을 시작하고 싶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문제점이기도 한데, '장애인의 이동권'과 직결되어 있다.

이들의 대다수가 이른바 '방구석' 밖으로 자의로 나올 수 없는 이들이다.

자의적으로 나올 수 없으니,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없고,

교육을 받을 수 없으니 직업을 갖기 위해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난 그동안 저상버스를 가끔 편하게 이용하면서도, 장애인의 이동권이라는 측면에서 접근을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지하철역에 리프트가 아닌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야 하는 타당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리프트가 되었을 경우, 한번에 한대의 휠체어밖에 못 움직이고,

여러명이 같이 움직여야 할 경우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추가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휠체어는 타지 않았지만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노약자가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이 책의 말미에 나와있는,

'밥 먹었니?'또는 '식사하셨어요?'라는 인사말과 관련해서였다. 

삶을 산다는 것은 거칠게 말하면 밥을 먹는다는 것인데,

자기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없는 장애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도움 받을 누군가를 구하지 못하면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야학의 처지가 나은 선생님들이나 봉사 요원들은 한번 밥 먹이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장애인들의 식사수발을 들다보면 정작 자신의 밥때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야학의 선생님이나 봉사요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한번도 사람이 보이는 곳에서 밥을 먹지 못하고 건너뛰거나 숨어서 몰래 먹고하다가 생으로 병을 얻게 되기도 하고 그랬나 보다.

장애인이 사회에서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가 베풀어주는 시혜나 동정이 아니라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고 소외되지 않는 사회적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계획하고 사회자원의 분배와 집행을 구체적으로 행사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124쪽)

 

장애인도 사람이고, 의식주는 사람이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이다. 

기본권을 누려야 하는게 사람들의 권리라면,

기본권을 행사하는 주체는 국가이다.

 

기본권을 행사하는 주체가 '국가'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엄격하게 말하면,

배고픈 사람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어떤 조취를 취하지 않고 손 놓고 앉아 있는다는 것은,

살인까지는 아니어도 살인방조죄 정도는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얼마전에 읽은 '미 비포 유'도 그렇고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도 그렇고,

소설 속의 그것이라고 밖에 얘기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의 무대가 우리나라가 아닌 것이 완전 슬플 수밖에 없다.

 

좀 과한 비약이고 설정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장애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불의의 사고를 만날지 알 수가 없다.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제 기능을 못하면 '장애'라고 보아야 한다는 사전적 정의에 따른다면,

우리가 성인이라는 전제 하에(어린이의 시절을 건너왔으니 '장애아'는 아니지만),
어린이의 그것을 장애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제 기능을 스스로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제 기능을 하는 어른이나 부모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라면서 또래에 걸맞는 정신적 육체적 기능을 하나 하나 배우고 익혀가면서,

어른이나 부모의 보살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 장애인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이제 정신적ㆍ육체적으로 늙고 병들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 이를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세상에 태어난 이상, 한번은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잠재적인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나의 이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천년만년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복제양 돌리나 줄기세포 따위 첨단 의학의 힘을 빌리겠다는 사람들 일텐데,

복제양 돌리의 사망 이유는 '조로'였다는 걸 아시는지, ㅋ~.

 

심신이 손실되거나 감소하는 결함일때는 의료적 지원을 해주면 되지만,

장애는 손상으로 인한 능력저하가 생기는 것이므로 의료적 지원에 더하여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아직 노인들을 향하여 제대로된 의료적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의료민영화를 얘기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들보다 수적으로든 처우로든 헐씬 열세에 있는 장애인들의 당연한 권리인 의료, 교육, 훈련에 관한 지원에 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나?

 
앞에서 통신 장애를 예로 들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른 것이 장애가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과 공감이 단절되면 그것이 장애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달장애, 공황장애, 뇌병변 장애, 성기능 장애 등등...'장애'란 말이 접미사로 붙은 수많은 단어들을 보면,

적어도 소통과 공감을 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의 정의는 바뀌어야 할텐데,

다른 게 장애가 아니라,

공감과 의사 소통에 문제가 있으면 '장애'로 봐주어야 한다는게 나의 견해이다, ㅋ~.

 

그래서인지, 노들야학의 교장이시며, 이 책의 저자이신 박경석 님께서는...

다른 어떤 이론을 차치해두고, '함께하자'라는 실천적 구호를 함께 하고 계시다. 

그러면서, '함께한다는 것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며,

노들에 오는 교사들에게  멕시코 사파티스타 원주민 여성의 말을 들려 주고 싶아 하신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97쪽)

 

다시말해, 장애, 장애인, 이딴 것을 책으로만 읽고 앉아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이것들이 고착되어 있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난 다른걸 장애라고 하고 싶지 않고,

소통과 공감이 부재되었다면 모두 다 장애라고 하고 싶다.

자신의 삶만 쳐다보며 사는 세상의 속도는 너무 빠르지만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포개려는 그 속도는 점점 느려져 간다.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의 죽음 앞에서 제발 발길 멈춰주길 바란다.

그 발길 멈추고 내 삶만이 아닌 세상을 함께 바라볼 때, 함께 살 수 있는 그 방법의 첫 시작이 되지 않을까?

아직 보이지 않았던 당신, 살아남아 주길 ㆍㆍㆍ(276쪽)

 

같은 얘기의 반복이지만,

상처받기 두려워서라는 이유만으로 벽이나 담을 높게 쌓아 소통을 거부하고 틀 안에 머무리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잠재적 장애인이 아니라, 자의적 장애인이 되는 것이니 명심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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