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일본은 섬나라인데다가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해서 지진이나 해일 등 자연 재해가 많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수많은 전쟁에 개입했던 나라인데다가,

과학과 공업이 발달하면서 선진국의 폐혜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재해도 만만치 않다.

이 얘긴 곧, 그만큼 많은 개인이나 집단적 내상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되겠는데,

개인적 상처가 됐든 집단적 상처가 됐든, 그 상처를 치유하는데 남다른 힘과 단결력을 보여주는 일본이,

같은 아시아권, 바로 옆에 위치한 우리로서는 여간 부럽고 본받을 점이 아니다.

 

전후 독일에서 정신의학과 온갖 대체의학이 발달한 것,

일본 문학을 접하다 보면 등장하는 미신이나 주술 영매 따위의 것,

들은 어쩜 그들을 독특하게 구분짓는 상처치유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들을 '남다르게 응집시키고 단결시키는 힘'을 그냥 국민성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아쉽다.

 

부모를 사고로 잃고, 이리저리 친척집을 떠돌던 도토리 자매는,

괴팍하기로 소문난 친할아버지지의 말년을 병간호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그곳에서 도토리 자매와 할아버지는 서로서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실의에 빠진 도토리 자매의 동생을 위하여 처음 고안된 일이었지만, 언니가 동생에게 얘기하는 품은 거창하다.

"사람은, 뭐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어떤 일이든 괜찮은데, 뭐랄까, 그런 일을 하는 편이 건전할 것 같아.ㆍㆍㆍㆍㆍㆍ돈이나 집 그런 거 말고 말이야. 그러니까 사랑을. 그걸 큰 부담없이 하느님에게 돌려줄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생각해 봤어. 우리 둘의 재능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43쪽)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말만 거창하게 했지,

실행하는 과정은 두서없으며, 내용은 별볼일 없다고 오해하였다.

다시말해, 세상은 홀로 사는 곳이고,

아무도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쓰는것만큼...

아니, 그 반의 반만큼, 1/10만큼도 신경써주지 않는데 괜한 일을 벌이고 있군...하고 생각하였다.

ㆍㆍㆍㆍㆍㆍ이렇게 두서없는 답장을 보내다 보면 상대 쪽의 답장도 점차 두서없어진다. 외면하는 것도 아니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그 사람들의 생활에 부족한 두서없는 대화를 메울 뿐인 역할.

 다들 두서없이 부담없는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혼자 살기에 그럴 수 없거나, 가족의 생활시간대가 저마다 다르거나, 의미 있는 얘기만 하려다 지쳤거나 그런 거다. 사람들은 두서없는 대화가 사람의 삶을 얼마나 지지해 주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49~50쪽)

책 뒷표지를 보면,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은 날

이라는 문장이 돌출되어 다가온다.

처음, 이 문장을 보고 위와 같은 맥락에서 오해를 했었다.

 

친한 사이라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라면,

어떤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그런데, 생각의 방향을 살짝 비틀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상대방에 걸맞는 격식(예를 들면, 호칭이나 존대, 속한 집단에 따른 축약어나 은어의 사용 등)은 필요하게 마련인데,

때로는 무장해제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의식화 되지 않아서 나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런 무의식속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누구라고 정해지는 순간, 그에 맞게 격식이라는게 정해지게 된다.

이건 내가 그를 얼마큼 가까운 관계로 생각하느냐, 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과 나의 사회적 관계가 주는 일종의 자리매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위 말하는 계급장 떼고 아무 얘기도 아닌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날엔,

그건 가상에서의 그것이 되는 것이고,

사회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순간, 또다시 관계가 정립되어야 하고,

그게 현실이고 삶일테니까 말이다.

 

그럴바엔 상대에 걸맞게 나를 무장해제하고 재규정할 필요가 없는,

그런 누군지 모르는 타인이 홀가분 할 수도 있겠다...는 설정은 그럴 듯 하고 설득력 있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익명성은 무장해제를 위한 것이지,

위장이나 가식이나 상상에 의한 재배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맞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마음 안의 것을 깎아 내다 보면 사람은 병이 드는 거로구나. 그렇게 깨닫고 나서는 인간의 강함과 약함에 놀랐다.

ㆍㆍㆍㆍㆍㆍ사람은 그렇게 알기 쉽게 생겼고, 밥이 아닌 것도 날마다 먹고 산다. 분위기나 사고방식이나, 그런 것까지도.(33~34쪽)

'사람은 그렇게 알기 쉽게 (병이)생겼고, 밥이 아닌 (마음 안의) 것도 날마다 (깎아)먹고 산다.'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일본어에 까막눈인 나로서는, 의미가 모호해서 한참을 생각했던 문장이다.

지금 내가 무슨 그럴듯한 말을 한다면, 조개가 입을 꽉 다물어 버리듯, 자귀나무가 잎사귀를 딱 접어 버리듯 할아버지가 언짢아할 것이라 직감한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방에서 나왔다. 웃는 얼굴조차 덧붙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시간을 두고 조금씩 살갑게 다가오는 야생동물과 살아가는 듯한 감동이 있었다.(36쪽)

길들일 수 없는 그것을 '야생동물'에 비유했다.

야생동물이 살갑게 다가온다는 것은 야성을 버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때문에 길들었다는 뜻이 될 수 있지만,

이건 반대로 길들여졌다는 상호의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관계란 일방적인것일 수 없다, 절대적으로 상호적이다.

물론 과정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듯 보일 수는 있지만,

치우침이 지나치면 힘이 다시 지배하게 되고, 힘이 지배하는 곳은 절대적이지 결코 상호적일 수가 없다.

다시말해 힘이 지배하는 곳엔 폭력과 복종이 있을 따름이지, '살가움'이라고 지칭되는 따뜻함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그런 의미에서 야생동물이 야성을 버렸다는 것은 목숨을 걸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야성을 버리고 용기내어 다가갈때는 쑥쓰럽더라도 손내밀어 맞아주어야지,

뒷걸음질치며 뒤로 물러나버리는게 한번, 두번이면 모르지만,

반복되면 거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야성을 버린 야생동물은 그동안 살던 야생에선 살 수 없으므로,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릴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책을 가지고 툴툴거린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이다.

어떻게 중딩때 잠깐 좋아하던 친구가 죽은걸, 꿈으로 알게 되고,

그리고 꿈에서 극적인 해후를 한다는 것인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그것이 만약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그런 것이라면,

이 정도 절절하여 꿈에 나타난다는 건, 미화하여 표현되는 것이고,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건 엄밀하게 따지면,

밤잠 못이루게 하는, 감정적인 범죄이다.

사랑고백보다 훨씬 간절하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 "다음에 가자." 딱 그 한 마디뿐인데.

 공간이 확 넓어지는 그 느낌을, ㆍㆍㆍㆍㆍㆍ

내일도 학교에 가면 무기를 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빠와 엄마의 보살핌 속에 있고, 주말에는 바다에 가서 한껏 운동을 하는 무기를 보면 자신이 부모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건강한 삶을 살면서 발랄한 여자애들이 주위에 잔뜩 있는데도, 이렇게 약한 나의 좋은 점을 알아봐 주었어, 그것만으로도 자신감이 돌아오는 듯했다.

그때 무기는 내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천사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생각한다.(62~6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좋았던 것은...

'다음에 가자'는 말 한마디의 위력을 '공간이 확 넓어지는 느낌'이라고 표현하며,

사랑고백보다 훨씬 간절하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고 표현하는 부분이었다.

언제인지를 기약할 수 없는 모호한 말 한마디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넘나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걸 몸으로 체험한 사람만이 써낼 수 있는 그런 문장이다.

 

그런데, 도토리 자매의 이 동생을 어찌해야 하나~--;

 

여자도 남자도 아닌, 천사 같은 존재였단다.

적어도 사람은 아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고,

이렇게 메일을 쓰는 작업을 통하여,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멍석을 까는 제공자일 뿐이고,

서로 서로가 보듬고 감싸는 무명의 치유자들이라는 걸 알 날이 있겠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별다른게 없다.

누구나 다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잠을 자는,

특별할게 없는 매 순간 순간 들이 모여서 일상이 된다.

그 일상들이 모여서 삶이 된다.

 

정성들여 꾸민 러브레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은 노력을 기울이면 가능한 일이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얘기를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에 이르게 되는 것은,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다시말해 정성들여 꾸민러브레터와 그럴싸한 얘기들만 있어야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관계는, 그 경계가 허물어졌을때,

그 경계 따위가 정말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여겨질때, 다다를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는 천당에 살고, 여신은 신전에 살겠고,

사람은 사람과 보대끼며 땅에 발 붙이고 하늘을 우러르며 지지고 볶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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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1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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