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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사람이 나고 성장하고 살아가는 데는 온 우주가 필요하다.
어느 한사람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머니나 아버지, 배우자의 영향력 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흔히 사람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치는 사람을 두고, 부모나 배우자를 얘기한다.
난 부모는 차치해 두고라도,
마주보고 누우면 그만큼 가까운 사이도 없지만,
돌아누우면 온우주를 한바퀴 돌아야 만나질 수 있는 '배우자'가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여겼었는데,
근데, 부모나 배우자 말고도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의 자기자신에게 정직하고,
그 목소리에 귀를 귀울일 줄 안다는 건 참 중요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간혹 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pain point에 한참 못 미쳤는데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이들의 경우 눈을 가리고 치료를 하게 되면, 똑같은 조건에서 훨씬 나은 결과를 보인다.
설명을 해주면서, 왜냐고 물어보면 아플까봐 그렇다고 겸연쩍게 대답한다.
사람은 간혹 어떤 사안에 대해서,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
결과를 예측하고,
상상하여 자신에게 이롭게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흔히 잘하는 말로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결과는 바뀔 수 있는데,
선택의 기로에서 '신포도이론'을 내세우며 자기합리화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의 자기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을 사는게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봐줄까, 에 연연하며 인생을 산다.
그러니 사랑받고 싶고,
그러니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러워야 한다.
"정말 징그럽게 도덕가 같은 말만 하는군." 그는 톡 쏘는 이 말을 무마하려는 듯 크게 웃었다.(95쪽)
아주 예쁘고 착한 아기였다. 예의바르고 얌전한 아이였다.ㆍㆍㆍㆍㆍㆍ상대방이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하는 눈빛 같았다. 자식이 엄마를 그런 식으로 쳐다봐서는 안 되는 눈빛이었다. 결코 사랑스럽지 않았다.ㆍㆍㆍㆍㆍㆍ그래도 아이들은 대체로 아주 매력적이고 바르게 행동했다. 교육을 잘 받은 아이들처럼.(105쪽)
반면 자기 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의 자기자신에게 정직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을 살지는 못해도,
적어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갑자기 로드니의 목소리가 격렬한 감정이 담겼다.
"내 말을 믿어. 에이버릴. 인간은 하고 싶은 일- 타고난 일-을 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분명히 말하마. 네가 루퍼트 카길을 돌려세워 그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사랑하는 남자가 불행하고 성취감도 없이 사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거다. 그는 나이보다 늙고 지치고 낙담한 모습으로 인생을 대충 살아가게 될 거야. 그럴 때 네 사랑이, 아니면 또 다른 여인의 사랑이 그에게 보상이 그에게 보상이 될 거라고 믿는다면, 분명히 말하지만 넌 감상에 빠진 바보 멍청이야."
ㆍㆍㆍㆍㆍㆍ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 난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말했고, 그건 내가 직접적으로 아는 이야기다. 지금 난 아빠로서뿐만 아니라 한 남자로서 말하는 거야."(156쪽)
로드니는 아들이 행복하지 않을 위험에 대한 부담이라고 대답했다.
조앤은 그가 행복 운운하는 것이 가끔씩 못 견디겟다고 말했다. 다른 생각은 안 하느냐고. 삶에 행복만 있느냐고, 그보다 훨씬 중요한 다른 것들도 있다고 말했다.
로드니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이를테면 의무감이 있죠." 조앤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로드니는 의무감 때문에 변호사가 될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174쪽)
암튼, 조앤은 사막에 갇혀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만,
자기 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의 자기자신에게 정직한 사람,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을 살지도 못할 뿐더러, 적어도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아닌가 보다.
기껏 사막에선 남편 로드니와 레슬리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조망하는가 싶었는데,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다 잊어버리고 그동안의 조앤으로 되돌아간다.
고통과 가슴 타는 갈망.
두 사람은 1미터 남짓 떨어져 앉았다.
1미터 남짓이었던 건
그보다 가까우면 안전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슬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는 게 분명했다.
혼란스러웠던 로드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사이에는 전기장처럼 갈망이 흐르고 있구나.
그때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어.
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슬리가 이렇게 한 번 중얼거렸을 뿐.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으리.
쿠션은 색이 바랬다. 레슬리의 얼굴도 그랬다.(255쪽)
그녀의 내면에서는 남편 로드니와 레슬리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시간에 관한 문제도 아니고,
나이에 관한 문제도 아니고,
거리에 관한 문제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의 자기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의에서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사랑하는 사람마저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서,
자식이나 배우자의 삶에 간여하려하지말고,
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연구하자, ㅋ~.
어찌보면 조앤과 나는 외톨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하지만, 조앤은 외톨이라는걸 모르고,
난 종종 삶이 번거롭다며 스스로를 따시키는 '스.따.'라는 점이 다르다.
당신은 외톨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르길 바래.
자기 자신의 삶에 자기 자신이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다는 사실,
당연한 얘기지만 인식하고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유치환'의 시, '너에게'가 유독 쓸쓸하지만 아름답게 들리는 아침이다.
물 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