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와 죽을 때 창비시선 372
황학주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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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바람결에라도 황학주라는 이름을 접한 적이 없었던 나는,

이 시집 제목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보고 레마르크를 떠올렸다.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읽다보면,

'죽음의 현장은 도시에서 가장 생기있는 장소였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때는 전쟁통이었으니 그럴듯 하다 싶었지만,

왠지 이 시집의 제목을 접하고 시인과 일면식도 없는 난,

'극과 극은 통한다'는 엉뚱한 말이 하고 싶었으며,

그러고 보니, 시에서 언뜻 이영광 풍의 그것도 비친다.

아무래도 황학주가 시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이영광보다는 연장일테고,

그런 그를 향하여 '이영광이 비친다'는 말을 하는게 조심스럽지만,

난 이영광을 먼저 알게 됐을 뿐이고,

여지껏 이영광보다 삶과 죽음에 관해 치열하게 시를 쓴 사람을 보지못한 터라,

이말은 곧 삶과 죽음을 가열차게, 제대로 그려냈다는 얘기이기도 한데,

'가열찬'이란 말이 '한껏 힘을 뺀'이란 말로도 대치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이영광의 그것이 죽음쪽으로 약간 치우쳤다면,

황학주의 그것은 오히려 삶쪽으로 치우친 것이,

인생은 살만한 것이다...라고 읊조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나는 겨울을 춥게 배우지 못하고

겨울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했지만

 

누가 있다 방금 자리를 뜨자마자

누가 있다 깍지 속에서 풀려나와 눈보라 들판 속으로 들어가는

 

사랑이란

매번 고드름이 달리려는 순간이나 녹으려는 순간을 훔치던 마음이었다

또한 당신의 눈부처와 마주 보고 달려 있었다

 

이제 들음들음 나도 갈 테고

언젠가 빈집에선

일생 녹은 자국이 남긴 빛들만

열리고 닫힐 것이다

 

그때에도 겨울은 더 있어서

누가 또 팽팽하게 매달려 올 것이다

자유를 춥게 배우며

그 몸 얼음 난간이 되어

 

이 시를 참 아프게 읽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상대를 특별하게 여기는 감정이지만,

상대의 눈 속에서 나를 바라보게 되길 바라는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 무게로 얹히거나,

눈물로 매달리기는 원치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그 상대를,

상대방도 같이 나를 귀히 여겨주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만,

그건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껴가거나 번지수를 잘못찾은 어긋나거나 엇갈린 감정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을 갈구하거나 구속하는 순간,

상대의 감정이 나와 같지 않을때,

그건 상대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내 안에서 충만하여 넘치거나,

결핍으로 눈물을 흘릴지라도 나에 관한 문제이며,

감정의 주체는 나여야 한다.

 

고드름은 녹아 없어지지 않는 이상,

제 스스로의 무게를 견딜 수 없으면 떨어져 나간다.

그게 고드름의 죽음이다.

 

고드름처럼 매달려오는 사랑이 있다면,

받아들일 것인가, 내칠 것인가?

그로 인하여 아름다운 구속을 경험할 것인가, 허허로운 자유를 누릴 것인가?

매번 고민하게 만드는 우리네 인생사를 닮았다.

 

 

어둑해져 도착한 마음은 붓끝을 꿈결에 두었다

감은사지의 뼈를 묻었는지

낮의 문장과 밤의 문장 사이 오래된 초승달이 떴다

 

가끔은 서로의 문장들 팍삭 깨지기도 하는

동탑과 서탑

심장을 싸맨 채 우는 날도 있겠으나

견딜 의사가 있는 자세로

돌 안에 타인의 악기를 둔 마음으로

 

저마다 감은사를 가진

세상에 나간 적 없는 바깥을 아득한 거리로 펼친

동탑과 서탑을 실로 묶으며 나는 돌았다

 

두개의 탑 사이엔 여전히

한번도 가진적 없는 문장이 놓여 있었다

행간, 이라는 말의 팽팽한 적요

문장 이전의 문밖으로

맨발을 조금 보여줄 뿐인

아~,

'행간, 이라는 말의 팽팽한 적요'라는 시구절은,

채워가질 수 없는 충만한 결여를 느끼게 한다.

 

이 아련함과 아스라함 속에서,

극과 극은 통한다는 자명한 이치를 깨우쳐갈 무렵,

'시인의 말'을 통하여, 이번 시집의 마침표를 찍는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고, 몹시 쓰고 싶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이다. 얼마나 왔으며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아무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데, 눈밭을 걷는 당신들이 보인다.

 

비어있다는 것은 채워가질 수 있다는 거다.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림을 그려낼지,

그가 눈밭을 걷는 당신들의 자취를 좇듯,

나보다 한참 연상인 사람에게 이런 말은 안 어울릴지 모르지만,

암튼...그가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지켜보겠다.

부디,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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