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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스 레인코트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전행선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ㆍㆍㆍㆍㆍㆍ터진 입술을 꿰매려고 기다리는 한 어린 녀석이 어쩌다 이렇게 두들겨 맞았냐고 내게 묻기에 나는 간호사의 귀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스파이와 싸우다 그랬다고 대답했다. 이제 내가 런던 포그 코트를 어깨에 자연스럽게 걸치고 담배 한 대만 입에 물면 간호사는 나를 덮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356쪽)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도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저 담배와 런던포그코트를 보고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거트'를 떠올렸고,
주인공 엘비스 콜이 카사블랑카에 감정이입하여 만들어낸 제목이 아닌가 상상해 보았다.
난 로버트 크레이스를 편애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 책은 그렇게 회자되는 것만큼 '강력한 중독성을 자랑하는 진짜 스릴러' 는 아니라는게 개인적인 견해다.
사람을 그렇게 여럿 파리 목숨보다 가볍게 죽이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개연성이라고 하는 것이 부족하다.
다만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한다면,
TV드라마 대본을 썼던 전적에 걸맞게 인물의 캐릭터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전에 내가 애정하는 마이클 코넬리와 로버트 크레이스가 친구라는 얘기를 하면서,
로버트 크레이스가 마이클 코넬리보다 좋은 것은,
둘 다 외롭고 쓸쓸함을 마구 발산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데,
외로움과 쓸쓸함이란 바꾸어말하면,
남을 해칠 수 없어 제 스스로를 해치고 갉아먹어야 하는 상황의 동의어 정도가 될 수 있을거고,
마이클 코넬리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외롭고 쓸쓸함이 자기 자신을 잡아먹고 잠식당하도록 놔두는 사람들이라면,
로버트 크레이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시켜 자체치유에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의 우정 조합도 한몫하고 말이다.)
다시말해,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망과 긍정을 얘기하는데,
그게 다소 대책없고 엉뚱하지만, 퍼뜨리는 해피바이러스는 강력하고 힘이 세다.
그의 대책없고 엉뚱함을 보며 우리는 은근 위로를 받고, 강력한 중독성이 아니라 은근 중독성을 느끼는게 아닐까?
기실 언젠가 이 책을 읽다 집어던졌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습관이군. 누군가와 일대일로 대화하는 일을 감당해내기에는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 같았다.(70쪽)
등장 인물 중 의뢰인 여자의 캐릭터가 너무 답답해서였다.
여자는 결혼한 이후로 당당한 자아이기를 거부하고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인물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그녀는 남편에게 보살핌을 받아왔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런 남편이 행방불명이 되니 찾아줄 것을 의뢰하게 된다.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건 팟캐스트로 고전 읽기 '오즈의 마법사'를 듣다보니,
회오리바람에 집이 날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쿨쿨 잠을 자던 무한긍정 아가씨인 도로시의 고향이 '캔자스'였었는데,
이 의뢰인의 고향 또한 캔자스였기 때문이다.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어린 시절, 그래요, 인간의 선한 덕목은 모두 어린 시절에만 존재해요. 순수함, 고결함, 진실, 지금 당신이 열여덟 살인데 논바닥에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봐요. 대부분은 그걸 포기해버리고 말죠. 나는 열여덟 살이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시절에 머물러 있기로 결심했죠."(108쪽)
어린 시절의 순수함, 고결함, 진실은,
자아라는 것이 형성되기 전이어서 다른 사람이 내 삶에 개입하는 것이 문제될게 없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시절이다.
그런 의미에서 '쓸쓸한 존재다'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그게 정신적인 것이 됐든 실제적인 것이 됐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것에서 비껴갔다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바꾸어 말하면 '나는 독립적 존재다'내지는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쯤이 될 수 있겠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여자의 캐릭터에 답답함을 느꼈던건,
서른여덟 살씩이나 먹은 여자가 무엇 하나 자기 주도적이지 못하고,
남편에게, 또 친구에게 의존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비춰졌기 때문이었는데,
요번에 다시 읽다 보니까 그녀는 의존적인 삶을 산게 아니라 사회성이 결여되었던 것이고,
그렇게 된건 주변과의 상호적인 문제이지, 그녀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여 14년이 된 부부가 상대방에 대해 잘 모르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부담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긴,
나이랑은 별개로 미성숙한 아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어제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에 강신주가 나와서 이런 말을 했나보다.
성유리의 고민은 쿨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고 그래서 밤잠을 못잘 정도라고 하자,
'애인이 없냐'고 물음으로 이어졌고 대답으로 이어졌고,
그것에 대한 강신주의 처방은,
"내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써도 괜찮다. 하지만 혼자 있다 보면 가면 썼던 기억이 생각나서 힘든 거다. 그리고 맨 얼굴을 보여주는 사람만 있으면 된다. 사랑을 해야 한다. 친구라도 상관없다. 우리가 친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맨 얼굴을 보여줘도 되기 때문이다. 친구, 우정, 사랑의 소중한 가치는 내가 가면을 벗게 만드는 거다."
였다.
다시말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여자의 잘못은 자기 혼자의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의존적인 삶을 산 것도,
오랜 세월을 같이 산 사람에 대해서 아는게 아무것도 없는 것도,
엘비스콜의 말처럼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을 신뢰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녀가 남편에게 애정의 대상이 아니라 애물단지였기 때문이다.
어른이란 성숙한 사람을 일컫는 것일테고,
그 성숙한 사람이란 자기자신에 대한 애정, 자긍심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일게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새를 새장 속에 가두어 내 곁에 두는게 아니라, 멍석을 넓게펴서 지친 날개를 쉬고 날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일게다.
친구란 모름지기 모든 걸 나누는 법이라지만(108쪽),
"ㆍㆍㆍㆍㆍㆍ너무 가까워서 불필요하게 자주 상처를 줘서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이미 다 예상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엘런이 반드시 당신처럼 반응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엘런은 아니잖아요."(107쪽)
이건 필요충분 조건이 아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을 때야 말로,
누군가에게 의존적인 삶을 살더라도 기꺼이 시중드는 삶과 동격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땐 외로움과 쓸씀함과 고독함에 몸부림을 치더라도,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시켜 해피 바이러스를 마구 마구 퍼뜨릴 수 있게 될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중성, 아니 다중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중성이나 다중성을 가지고 살아가는게 나쁜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은 친구라고 하여 그 본모습을 반드시 봐야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제자가 물구나무서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냐고 묻자 성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물구나무서기는 오래 지속할 수 없다고.
어차피 변하는게 인간이 속성이지만,
불편해서는 오래지속시킬 수 없을뿐더러,
좋은 방향으로 나아지기도 힘들지 않을까?
정정해야겠다.
로버트 크레이스가 마이클 코넬리보다 좋은 것은,
둘 다 외롭고 쓸쓸함을 마구 발산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내지만,
로버트 크레이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시켜 해피 바이러스를 마구 마구 퍼뜨려서가 아니라,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탐정놀음 같이 보이지만,
우리 삶의 자화상 같이 느껴져서 감정이입이 쉽고,
그러다보니 인간적으로 느껴져 한뼘은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실은 명절에 시댁에 갔다가 맘이 제대로 상했었다.
새로 들어오신 아줌이 둘째동서와 딸딸 두 중딩 조카를 붙잡고,
여자팔자는 뒤웅박 팔자이니 공부 열쉬미 해서 좋은 대학 가서 부잣집에 시집가라는 마리 앙토와네트 같은 말을 했다.
난 이말을 이렇게 정정하고 싶다.
여자뿐만 아니고, 사람 팔자는 때때로 가면을 벗고 무장해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가졌는가 그렇지 못했는가, 에 관한 문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