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를 써서 먹고 살았으니 내게 글은 쌀이고 카피는 밥이다. 그러나 글을 씻어 카피 짓기를 멈추고 말하기, 가르치기 같은 천렵과 낚시에 넋을 판 지 오래, 아궁이 느리게 치우고 옛 기억 더듬어 불 피우고 거친 글을 씻어 책을 지었다. 밑이 보이는 쌀독을 기울여서 무딘 손이나마 계속 먹거리를 지으라고 다그쳐주는 인생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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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마무리하는 지금, 깨닫는다. 밥의 맛은 씹어서 입안에 퍼지는 것만이 아니라 오래 지켜온 아궁이의 온기, 열망이 세월의 장작과 어우려져 타올라 뿜어내는 부엌의 훈내 그것이 모여 만든다고. 쟁여놓은 쌀독 다 털어 여한 없이 지었으니 열심히 살아 마음곳간 채워야겠다. 모른다는 말이 편안해지는 데 사십 년이 걸렸다.
- 윤수정의 '한 줄로 사랑했다'의 '나오는 말'중에서 -
'맹난자'의 '주역에게 길을 묻다'를 집어들었는데 그만,
주역에게 잠을 물었는지 침을 질질 흘리고 졸다가 안되겠다 싶어 집어든 책이,
카피라이터 윤수정의 '한 줄로 사랑했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유를 하면 어떤 책에게 미안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맹난자는 너무 어려웠고, 윤수정은 겉도는 느낌이었다.
맹난자는 서너 번째 읽기를 시도하는데,
번번히 길을 구하려다가 잠의 세계로 빠져들어 뭐라고 할 말이 없어주시고,
윤수정의 '한 줄로 사랑했다'는 글은 좋았다.
매 꼭지꼭지 글은 뛰어났고,
감성은 빛났으며,
명 카피라이터답게 제목으로 뽑은 한줄 한줄은 시처럼 반짝였다.
근데, 한데 어우러지지가 않았다.
물론 그간의 카피를 갈무리해놓은거니까 어울리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용만이 아니고, 본문의 그림들도 통일성이 없이 다 따로따로이다보니,
책이 산만하게 느껴지고, 그러다보니 글마저 산만하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표지 디자인, 본문 디자인, 그리고 본문에 들어간 그림이 다 다른 사람의 작품 같은데,
영화 한편 만큼의 짤막한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니까,
적어도 본문의 디자인과 거기 들어간 그림이라도 어떤 통일성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하나 하나 떼어놓고 봤을때는 다 훌륭해서 빼어날 것 같은데,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들쑥날쑥 어째 좀 이상해져 버렸다.
모두가 나같이 생각하지는 않겠지 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누군가가 삼겹살 굽는 법도 가지가지라며,
그걸로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며 한참 설명을 하였다.
손하나 까딱 안하는 공주형, 왕자형은 차치하고,
고기가 익든 말든 수수방관하는 타입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단다.
그리고 고기가 익을까 무섭게 뒤집는 사람은 다른사람을 배려해서 그런게 아니고 재 성질을 못 이겨서 그런거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기를 열맞춰 가지런히 올리고 자르고 뒤집고 하는 사람은 편집증이 있는 사람이고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첫번째와 세번째가 해당한단다.
그러고 보면, 같은 Fact를 놓구서도 사람마다 반응하는 방법, 해석하는 방식, 대처하는 행동 양식이 다 가지가지이다.
저 러브스토리의 명대사 "Love i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만 하더라도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것'이라고 해석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원 뜻은 미안하다고 말할 일을 만들지 않을 거라는 의미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교과서처럼 꼽는 영화<러브스토리>의 유명한 대사 "Love i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처럼 미안하다고 말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즉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지언정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흔히 말하는 사랑의 교본인데 <물고기자리>의 사랑은 미안함을 넘어서 잔인하기까지 한 사랑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넘어서는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이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을 가지기 위해 모든 파괴를 서슴지 않는다.
그런 감정이 있을까. 고민하다보니 문득 흔히 사랑이라 부르는 것들은 얼마나 시시한 것인가. '사랑해'라고 말해놓고 '아니야'라는 말을 들으면 '아 그래?'하고 털어낼 수 있는 사랑, '엄마 나 그 사람을 사랑해요' '안 된다'라는 말을 들으면 '예'하고 잘라낼 수 있는 사랑, 이런 것들은 사랑이 아닌 게 아닐까. 그렇게 카피가 출발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의 사랑이 특이한 게 아니라 너희들의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게야. 정말 사랑이라는 건 이 영화 같은 게야,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카피가 '멈출 수 있다면 사랑이 아니다'였다.(52~53쪽)
주역이란 책에게 길을 물으려 했으나, 뜻하지 않게 잠에 빠져들게 될 수도 있고,
좀 산만하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명문장이 적힌 책에 반응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가지각색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것보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사람에 따라 스스로 통제할 수 없어지기도 하는 그것,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그것이 어쩜 제대로 된 감정이 아닐지도 모르는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난 사랑에 서툴다.
그동안 사랑에 관하여 나의 오롯한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동안의 나는 '사랑해'라고 했다가 '아니야'라고 했으면 '그래, 아님 말구~(,.)'라고 했었을 것이고,
'아빠 나 그 사람을 사랑해요'라고 했다가 '안된다'했다면 '예'하고 며칠 들어앉아 울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남이 하라는 대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진실하고 진정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멈출 수 있다면 그건 마음으로부터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테고,
때문에 이젠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빈자의 미학'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은 '유명한 건축가'와 '좋은 건축가'의 차이를 말했었다. 좋은 건축이란 사람의 선함과 진실함,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어야 하며, 눈에 띄는 근사한 건물을 만드는 유명한 건축가는 대개 좋은 건축가가 되기 어렵다고.(69쪽)
저 건축가의 자리에 '사람'을 대입시켜도 용케 말이 성립된다.
난 좋은 사람이란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움과 더불어 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집이 편해야 하듯이, 좋은 사람도 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상자의 '물고기자리'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편집증적인, 누군가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잘못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불리워선 안된다.
난 아무래도 '주역에게 길을 묻다'를 그냥은 읽어내기가 힘들것 같고,
내가 편안해 하는 종류의 책에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책마실을 다니다보니, 이런 책이 나와주셨다.
딱 내 스타일이다, ㅋ~.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고진석 지음 / 웅진서가 /
2013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