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학교 - 이정록 시집
이정록 지음 / 열림원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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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물을 먹어도 소는 우유를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

 

같은 칼날일지라도 누군가는 상처받고 피흘리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벼리고 모두어 앞으로 나가는 가지치기의 용도로 삼을 수도 있다.

 

한동안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내가 근무하는 곳의 접수를 맡은 직원이 급성 요통으로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디스크 파열이라고는 하지만,

나도 치료하는 상병명을,

나의 조언도 없이,

아니 나의 조언과는 아무 상관없이 꿋꿋하게 수술을 했다는 상황이 그리 깔끔한 기분일 수만은 없었다.

하긴 얼마전 올케의 급성요통 일때도 남동생 내외는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택하였었다.

가족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직원의 신뢰를 기대한다는 건 무리이겠지 싶어...

그냥 겉으로 내색하지 못하고 속으로 서운해하고만 있는 상황이었다.

 

엊그제 올케와 전화통화 할 일이 있어 안부를 묻다가 그때의 서운함을 슬쩍 흘렸더니,

올케는

"형님, 오해세요~."

하면서 펄쩍 뛴다.

언젠가 남동생이 아파서 잠깐 봐준 적이 있었는데,

작고 조그만 체구에 땀흘리며 애쓰고 고생하는 걸 보고 무척 안쓰러워 하였단다.

 

직원 또한 알고 보니,

보험을 여러 개 들어놓은 터였고,

보험 처리 과정과 보험 혜택 문제 때문에,

그런 쪽으로 일처리가 잘되고 수월한 병원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털어놓는다.

 

지난번 어느 책의 리뷰에선가,

내가 그동안 누군가의 실력을 잘못 알았는지도 모르겠다...하면서 상찬하였더니,

글쎄~, 소급 적용하여 서운한 내색을 한다.

 

ㅎ, 어쩔 것이여...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이미 내뱉은 말과 지난 일은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아버지학교>가 나오면 1빠로 사읽겠다고 다짐에, 결심을 하였지만...

1빠로 사기는 한것 같지만, ㅋ~.

말뿐인, 공허한 다짐 같고...~--;

암튼, 이렇게 뒤늦게라도 감상을 몇 자 남긴다.

 

 

내게 아버지는 풍요인 동시에, 결핍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난 <아버지학교>에서 <어머니학교>와는 다른 무언가를 기대했었나 보다.

'어머니 학교'에서의 작중 화자인 어머니는 다소 수다스러울 정도로 조곤조곤 설명을 하는데, 그 설명이 재치있고 현명한 분이었다.

'아버지학교'의 작중 화자인 아버지 또한 어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내가슴

아버지학교1

 

  아들아, 저 백만 평 예당저수지 얼음판 좀 봐라. 참 판판하지? 근데 말이다. 저 용갈이* 얼음장을 쩍 갈라서 뒤집어보면, 술지게미에 취한 황소가 삐뚤삐뚤 갈어엎은 비탈밭처럼 우둘투둘하니 곡절이 많다. 그게 사내 가슴이란 거다. 울뚝불뚝한 게 나쁜 것이 아녀. 물고기 입장에서 보면, 그 틈새로 시원한 공기가 출렁대니까 숨 쉬기 수월하고 물결가락 좋고, 겨우내 얼마나 든든하겄냐? 아비가 부르르 성질부리는거, 그게 다 엄니나 니들 숨 쉬라고 그러는 겨. 장작불도 불길 한번 솟구칠때마다 몸이 터지지. 쩌렁쩌렁 소리 한번 질러봐라. 너도 백만평 사내 아니냐?

 

 * 용갈이 : 용이 밭을 간 것과 같다는 뜻으로 두꺼운 얼음판이 갈라져 생긴 금.

 

이 시에서의 캐릭터대로라면,

아버지는 말을 많이 아끼는 분이어야 할 것 같은데...

용갈이처럼 부르르 한번 성질이야 부릴지 몰라도 말이다, ㅋ~.

 

어차피 인생이란 것은 살얼음판일때도 있고, 두꺼운 얼음판일때도 있는 법이다.

두꺼운 얼음판일때 호기롭게 부르르 용갈이 성질이라도 부려본다지만 말이다.

무모하게 호기롭기보다는,

봄이 되어 저수지 물이 풀리는 때를 기다리는게 현명할 수도 있겠다.

요즘 난 무모하게 호기로운 사내보단 부드~러운 사내에게 끌린다.

 

왜가리

아버지학교 7

 

  저수지 비탈 둑에서 뛰어다니던 왜가리 때문에 엄청 웃은 적 있지? 메뚜기 잡아다 새끼 주랴 제 헛헛한 허구리 채우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술 취한 막춤을 보며 박장대소했지. 부리나케 일어나서는, 밀친 놈 없나? 비웃는 놈 없나? 두리번거리던 꼬락서니에, '술 좀 줄여요. 왜가리 꼴로 훅 가는 수가 있어요.' 내게 쏠리던 눈초리가 떠오르는구나.

 

 

  왜가리도 가을 지나 겨울 오면 차가운 물에 발 담그고 물고기를 기다리지. 사내란 저런 구석이 있어야 해. 시린 발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지느러미가 전해주는 미세한 떨림을 읽는거지. 눈은 시린 구름 너머에 던져놓고 의젓한 품새로 뒷짐 지고 말이여. 물고기가 가까이 다가오면 단 한 번 고개 숙이고는 다시 먼 하늘이나 바라보지. 물속 하늘은 가짜라서 진짜 하늘을 보며 살아야 한다는 거 아니겄어?

 

  사내란 탁한 세상에서 탁발을 하고는 구름 너머 시린 하늘로 마음을 씻지. 식구들 뱃속 채워주는 일이라면 시궁창에 발 담가도 되는 거여. 사내는 자고로 연지蓮池 수렁에 서 있는 왜가리 흰 연꽃이여.

 

오히려 '왜가리'가 설득력 있다. 하지만, 왜가리의 대화도 시인이 지어낸 것이지 실제 대화는 아닐 수 있다.

사내만 저런 구석이 있어야 할까?

완전 세월을 낚는 강태공의 품, 그대로인데 말이다.

강태공은 정계에 진출할 때를 기다렸었고,

왜가리란 새는 물고기를 기다리고,

시 속의 사내는 뒷짐지고 무엇을 기다리나?

 

물속 하늘은 가짜라서 진짜 하늘을 보며 살아야 한다는 거 아니겄어?

 

아흑, 멋지다.

난 햇살 한자락 바람 한줌 허락하여 주신다면...

같은 강물이 아니어도 노상 발 담그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ㅋ~.

 

사랑

아버지학교 27

 

운동장 한가운데다가 물동이를 엎으면

철봉대 옆 볼품없는 나무 쪽으로 물길이 나는 거여

폭우 때 진즉 바닥이 쓸려나갔던 거지.

 

생선장수도 한마리만 사는 사람한테는

값도 헐하게 받고 큰놈으로 챙겨주는 거여.

서너 마리 흥정하는 이한테는 잔챙이도 섞어 팔어.

오죽 복잡한 속사정이면 이십 리 자갈길에

고등어 한 마리만 들고 가겄나? 그렇다고

이 가게 저 가게 다니며 한 마리씩 사는 놈은

마음주머니까지 가난한 좀팽이인 거지.

 

가난하다는 건 비탈이 심하다는 거다.

마음 씀씀이 좋은 생선장수든

마른 땅 적시는 물길이든, 뿌리가 드러난 쪽으로

정이 쏠리는 게 순리고 이치여.

 

맨날 그날이 그날 같은,

평탄하기만한 일상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가난하고 비탈이 심하더라도,

삶의 굴곡을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하고,

나와 다른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미건조하고 순탄하게 살기보다는 치열하고 가열차게 살고 싶다.

 

산다는 건 어쩜 죽음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한살 더 먹으면서 그런 건지,

요즘 가까운 사람들이 아프고 하나씩 둘씩 떠나가고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흐릿해져 가고,

머리카락도 빠지고,

몸매도 허물어져 가고 하는...

죽음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일련의 과정들이,

단지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산화하여,

번지고 스며 물들어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자연이 되어가는 과정 같다.

 

자연이 되어가는 그것을,

거스르거나 거역할 필요가 있을까?

순리나 이치란 그런 것일게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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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7 1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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