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산문.시편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주영숙 엮음 / 북치는마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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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란 황홀한 제목에 홀려서였다.

한동안 좋다고 설레발을 치고 다니던 사람 중에 '김탁환'이라는 사람이 있다.

난 한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의 전작을 두루 섭렵하는 경향이 있는데,

김탁환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탁환의 그것들은 과거,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들을 적절히 이용하였고...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인물들이 마치 그 시대에서 걸어나온 것처럼 유연할 뿐만 아니라,

정황 묘사가 마치 그려낸듯 상세하고 성격묘사가 섬세하고 적나라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유명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작품들이 개연성 있게 읽혔었고, 그래서 재밌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이옥의 작품집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분명 처음 접하는 사람이 맞는데, 그 글들이 낯설지가 않은 거다.

알고보니 김탁환이 젊은 실학자들을 대상으로 설정하여 쓴 소설에서,

젊은 실학자들 뿐만 아니라 이옥의 글들도 인용하였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좋아서 숨이 넘어가게 설레발을 쳤던 김탁환의 필력은,

젊은 실학자들과 이옥의 것이었던 셈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김탁환이 시들해졌다.

 

또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를 통하여 연암 박지원의 작품들을 다시 접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오랫만에 김탁환 소설들을 떠올리고 비교하게 되었다.

 

요번에 느끼게 된건...

젊은 실학자를 비롯한 연암의 글들을 김탁환이 입맛에 맞게 재해석하고 인용했다고 하여서,

우리가 그 진부함을 놓고는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의 한문해석능력과 필력을 놓고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거다.

그동안은 비교대상이 없어서 느끼지 못하던 것이었고,

이제 주영숙이라는 비교대상이 나타나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김탁환은 탁월하다는 거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쯤되면 연암의 글들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싶을텐데,

주영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은 모두 한문이어서, 오류도 많고 문학적인 해석도 아니다.

솔직히 제대로 된 해석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고 얘기되어지고 있다.

 

암튼, 이쯤되면 번역자나 해석자라기보다는 편저자라고 봐야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원작의 느낌과는 많이 달라진다.

이건 바꾸어 얘기하면,

내가 김탁환의 소설들 속에서 연암을 비롯한 젊은 실학자의 그것을 만났다고 하여 시들해질 필요가 하등없다는 것이다.

연암은 연암이로되, 편저자가 김탁환이냐 주영숙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진 작품으로 얼마든지 거듭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주영숙은 한글전용세대인 우리들을 위하여,

친절하게 전부 한글로 해석해 놓으려는 수고를 하였나 본데...

그래도 한문을 곁들어 의미가 간단명료해지는 경우에는 한문을 같이 적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의미가 모호할 뿐더러 자칫 가볍기까지 하다.

 

편저자 주영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장애인 문학상인 '곰두리문학상'을 받은 경력이 있어서 확인해 보니,

어렸을때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이다.

구태여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내가 일부러 찾아본 이유는 그니의 폭넓은 오지랖 때문이다.

다시말해, 다방면에 재주가 두루두루 출중하기 때문이다.

한 국문학 박사이면서 외래교수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다가,

한국화 화가이며,

전통공예가이며,

시조, 평론 등으로도 수준을 인정받은 문인이며,

시와 소설도 쓰는,

그야말로 다방면에 걸쳐 화려한 이력과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 들머리에서,

'연암처럼 소설도 시도 그림도 시늉이나마 해봤으며ㆍㆍㆍㆍㆍㆍ'나자신'이 적임자' 라고 해서,

웬 자만(?)인가...했었는데,

후학으로써 막중한 임무라고 생각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력과 경력이 화려한 그니라면 가능도 하겠다.

 

암튼, 연암의 글들을 갖고 쓴 글이니...그의 글들 얘기를 좀 해야 겠다.

  그래서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다. 위험하고 안 하고의 상황 판단은 오로지 귀로만 쏠려 있다. 귀가 벌벌 떨면서 마음을 두려움에 가두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지는 자는 귀나 눈에 얽매이지 않고, 귀나 눈을 믿는 자는 보고 들음이 자세하면 할수록 병이 된다는 이치를 알아차린 것이다.

  ㆍㆍㆍㆍㆍㆍ말에서 떨어졌다 하면 바로 강물 속이다. 그리 되면 나는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으며,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으리라. 이처럼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나자, 비로소 내 귀에서는 강물소리가 사라졌다. 무려 아홉 번이나 강물을 건너는 동안 조금도 걱정이 되질 않앗다. 마치 자연스레 앉았거나 누워 아무 거리낌도 없이 활동하는 것같이 여겨졌다.

ㆍㆍㆍㆍㆍㆍ

  소리와 빛은 바깥에 있는 사물이다. 그런데 이것이 항상 눈과 귀에 누를 끼쳐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방해한다. 하물며 인생이 세상을 살아나가려면 저 강물보다 더 험하고 위태로운 곳이 많지 않던가. 보고 듣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질 않던가?

  나는 곧 나의 산속으로 돌아가서 또다시 집 앞 시냇물 소리를 들어보면서 시험해보리라. 그래서 자기 몸가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스스로 자기의 총명함을 믿는 자들에게 경고하리라.「일야구도하기」(20~21쪽)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일야구도하기'가 처음이었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지는 자는 귀나 눈에 얽매이지 않고, 귀나 눈을 믿는 자는 보고 들음이 자세하면 할수록 병이 된다는 이치를 알아차린 것이다.' 하는 연암의 이러한 경계를 김탁환과 주영숙을 비교하면서 깨닫게 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일야구도하기'를 읽으면서 의아하였던 것은,

'조선의 후기 실학자'로 분류되는 그에게서 '서경덕'의 그것과 같은 '성리학'적 사상의 근간이 느껴져서였었는데...

혹 내가 잘못 헤아린 것이 아닌가 했었는데, 주영숙도 책 끄뜨머리에 언급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미녀가 머리를 숙이면 부끄럽다는 것이고, 턱을 고이면 한(恨)을 나타내는 것이다. 혼자 있으면 생각에 잠긴 것, 눈썹을 찡그리면 수심에 빠진 것, 난간 아래 있으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이며, 파초 밑에 앉았으면 꿈이 있다는 뜻이다. 만일 그녀가 서있기를 반듯이, 앉아 있기를 조각처럼 하지 않는다고 나무란다면 양귀비가 치통을 앓고 번희가 머리칼을 만진다고 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미인을 관찰해 보면 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고개를 나직이 숙이고 있으면 부끄러워한다는 표현이고, 턱을 고이고 있으면 뭔가 한스러워한다는 표현이고, 홀로 서 있으면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표현이고, 눈썹을 찌푸리고 있으면 시름에 잠겨 있다는 표현이다. 뭔가를 기다린다면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뭔가를 바란다면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그녀더러 서 있는 자세가 재계하듯 깔끔하지 않다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소상같은 부동자세가 아니라고 나무란다면, 이는 양귀비더러 이를 앓는다고 꾸짖거나 번희더러 쪽을 감싸 쥐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사뿐대는 걸음걸이'를 요염하다고 희롱하거나 손바닥춤을 경쾌하다고 꾸짖는 것과 같은 격이다.(157~158쪽)

위의 것은 김탁환의 소설 중에 등장하였던 글이고, 밑의 것은 주영숙의 것이다.

한편의 한문으로 된 시를 갖고 번역한 것일텐데,

글쓴이의 필체와 개성에 따라 이렇게 다른 글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서 옮겨보았다.

 

연암 박지원이 형제들과 함께 밀랍으로 된 꽃을 만들어 판다는 건 어디선가 보았었다.

다른 형제는 부지런하고 재주가 좋아 그럭저럭이었는데,

연암은 재주가 다른 형제들만 못하여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고 했었는데, 근간이 되는 이런 글을 보니 반가웠다.

  촛농은 꽃잎이 되고 고라니 털은 꽃술이 되고 부들 꽃가루는 꽃술의 구슬이 되는데, '윤회화輪回花'라 부르지요. 왜 '윤회화'라 일컫느냐고요? 원래 나무에 붙어나게 마련인 꽃이 자기가 밀랍이 될 걸 어찌 알았겠으며, 밀랍은 벌집이 있기 마련인데 자기가 꽃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꽃잎 다섯장이 말려 있으면서 꽃술이 나와 있지 않은 '노전'과 꽃잎 석 장은 떨어지고 남은 두 장도 떨어지려 하나 꽃술만은 싱싱한 '원이'도 영락없이 진짜 매화입니다. 꽃잎 다섯 장이 벌어진 모습 또한 아주 자연스럽지요. 오직 땅에 박히지만 않았을 뿐 바로 자연의 정취를 볼 수 있지요. 황혼의 달 아래, 비록 그윽한 향기가 풍기는 것은 없지만, 가득히 눈 쌓인 산중에 옛 선비가 누워 있는 모습을 충분히 상상하고말고요.

 

  나는 그대에게 먼저 매화 한 가지를 팔아서 그 값을 정하고 싶소. 만약 가지가 가지답지 못하거나, 꽃이 꽃답지 못하거나, 꽃술이 꽃술답지 못하거나, 꽃술의 구슬이 구슬답지 못하거나, 상 위에 놓아도 빛이 나지 않거나, 촛불 아래서도 성긴 그림자가 생기지 않거나, 거문고와 짝지어도 기이한 흥취를 자아내지 않거나, 시에 넣어도 운치가 나지 않거나, 하나라도 이런 점이 있다면 영원히 마다하셔도 끝내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을 거요. 이만 줄이오.  .「매화를 파는 편지」

 

또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묘비명을 잘쓴 묘비명의 달인이었다는 것은,

'문도'라고 불리울 정도로 글재주가 비상하니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정작 연암 자신의 묘비명은 부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슬퍼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가 아니라 '사람이 너무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고 그저 멍청해진다'처럼,

이렇게 슬픔 속에 마냥 침잠해 버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를 잠시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 '문도'라고 찬사가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슬픔 속에서도 즐거움을 길어올리고,

눈물을 유머와 해학으로 승화시킬 줄 안다.

 

  대체로 생각은 다 망상이요, 인연은 다 악연이다.

  생각하는 데서 인연이 맺어지고, 인연이 맺어지면 사귀게 되고, 사귀면 친해지고, 친하면 정이 붙고, 정이 붙으면 마침내는 이것이 원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죽음이 '사춘'처럼 참혹하고 몽직처럼 공교로운 경우에는, 평생 서로 즐거워한 기억은 얼마 되지 않는데 마침내 재앙과 사망으로 고통이 혹독하여 뼈를 찔러대니, 이 어찌 망상과 악연이 합친 원업이 된 게 아니겠는가. 만약에 몽직과 애당초 모르는 사이였다면, 아무리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도 이렇지는 않았겠다. 이토록 마음이 아프고 참담한 지경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으리라.

  몽직이 나를 따라다니며 더불어 노닐었어도 사춘의 경우처럼 정이 깊거나 교분이 두텁지는 못했다. 그러나 달 밝은 저녁이나 함박눈 내린 밤이면 그는 문득 술을 많이 가지고 와서 거문고를 퉁기고 그림을 평론하며 흠뻑 취하곤 했었다. 나는 고요히 지내면서 이런 생활에 익숙해 있었는데, 가끔 달빛 아래를 거닐며 서글픈 생각에 빠지다 보면 어느새 몽직이 와 있곤 하였다. 어쩌다 눈 내리는 날엔 문득 몽직이 생각났고,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면 정말로 몽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만이다.(61쪽)

 

 

  그런데 어찌 구태여 비슷하게 하려는가?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 것은 그 자체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하늘아래 존재하는 서로 같은 것을 말할 때 '꼭 닮았다'라 일컫고, 분별하기 어려운 것을 말할 때 '진짜에 아주 가깝다'라고 일컫는다. 대개 '(참)진'이라 말하거나 '(닮을)초'라고 말할 때에는 그 속에 '(거짓)가'와 '(다를)이'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늘 아래 이해하긴 어려워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전혀 다르면서도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언어가 달라도 통역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고, 한자의 글자체가 달라도 모두 문장을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외형은 서로 다르지만 내용은 서로 같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음이 비슷한 것'은 내면의 의도요, '외형이 비슷한 것'은 피상적인 겉모습이라 하겠다.(188쪽)

 

그러니 '창신(새롭게 창조함)'한답시고 재주 부릴 바엔 차라리 '법고(옛글을 본받음)'를 하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낫다.

                                                                                        - 박제가(1750~1805)의 초기 문집 「초정집」서문

 

'창신'과 '법고'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학문이 아니어도...글을 읽고 쓰는사람이면,

아니면 하루 하루 새롭게 나아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두고 두고 되새길 만하다.

창조라는 것은 모름지기,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방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연암 박지원과 편저자 주영숙이 가장 잘 어울린다 싶었던 장르는 '시편'이었다.

다른 장르의 경우에는,

연암 박지원은 남성 화자인데 반해 주영숙은 여성의 필치를 그대로 살려내고 있어서 살짝 겉도는 느낌이라면,

시편의 경우는,

사설시조의 형식을 따르느라 그랬는지 어법이나 필치 등 그니 특유의 어조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데,

그게 오히려 돋보인다.

 

 

(이 그림도 주영숙의 것이다.)

 

 

유춘동

 

꽃은 흡사 가려는 손 억지로 잡아두는 것 같아라

불지 말라고 비바람더러 당부했다가 되레 꾸짖음만 받았다오,

두어라,

꽃꽂이 익힌 이래로

이 골짝 삼백 예순 날이 모두 다 봄이거늘

  (시편, 219쪽)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는 되는 게 아니라, 감정이 극에 달해야만 우러나는 게 아닐지. 나는 모르겠네, 이른바 정이란 어떤 모양이건대 생각만 하면 내 코끝을 시리게 하는지. 그래도 모르겠네, 눈물이란 무슨 물이건대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지. 아아, 남이 가르쳐주어야만 울 수 있다면 나는 으레 부끄럼에 겨워 소리도 못 내겠지. 아하, 이제야 알았다.

 

  이른바 그렁그렁 이 눈물이란 배워서는 만들 수 없다는 걸.

         - 「사장士章 애사哀辭」중에서(220쪽)

난 눈물이 많다.

그냥 조금만 슬프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처음에는 그냥 놀리기만 하던 직원들이 언제부턴가 내가 울때마다 벌금을 받기에 이르렀고,

그 벌금이 액수로가 아니라, 횟수로 집을 팔아야 할 정도라고 하여 '집.파.녀'라는 별명을 하사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벌금을 감당하기 버겁다거나, 놀림을 받는게 창피하다고 하여서 눈물을 숨길 수도 없다.

다시말해 울고 웃는게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난 눈물이 그렁그렁에 한가지를 덧붙인다면,

콧물이 '뚝뚝~'을 들겠다.

코끝이 시리도록 콧물을 뚝뚝 떨구고 우는 건 정말로 억지로 되는게 아니다.

 

억지로 웃는 것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면 예쁘겠다고 하였더니,

일부러 이를 드러내고 웃으려 애쓰는 친구가 있다.

쉽지 않은 일일텐데, 나를 위해 노력해주는 그 친구가 마냥 고맙다.

 

친구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한마디 귀뜸을 한다면 말이다.

눈물이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거다.

어떤 눈물은 마음 한켠이 저릿 저릿 아프기도 하지만,

그럴때는 울면 나무들 나이테 생기는 것 마냥 마음에도 결이 생길 것 같았는데,

어떤 눈물은 단지 감동적이어서 흐르기도 한다는 거다.

그런 눈물은 마음의 찌든 때를 짝 쓸어가 버리는 것이 카타르시스라 할 수 있겠다.

아프게 울거나 웃으면 상처로 남지만,

때론 울거나 웃고나면 시원한 것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정 표현을 남발할 필요도 없지만, 감정 표현에 인색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타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 안에 들어와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감정을 드러내 말하거나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이상,

내 속을 알지 못한다.

입장 바꾸어,

타인의 속도 내가 미루어 짐작하는게 엉뚱한 오해이거나 착각인 경우가 있다.

엉뚱한 오해나 착각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는것인데, 어째 우리는 어색한 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리움

 

저물녘 용수산에 올라 그대를 기다렸는데 오시지 않더이다.

강물만 동편에서 흘러와 어디론가 흘러갔습니다.

밤이 깊어 달빛 비친 강물에 배를 띄워 돌아와 보니,

정자 아래 고목나무가 하얗게 사람처럼 서 있어서

나는 또 그대가 먼저 와 계시는 줄로 착각했다오.(220쪽)

그리움이란 시를 보게 되면,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리워도 그립다 말을 할 수 있기를 한가,

흐르는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강물에 비친 달 그림자만 좇아야 하니 말이다.

 

 

필운대의 꽃구경

 

나비가 꽃을 놀린다고 하필 극성이라 나무라는가,

도리어 나비 따라 꽃을 만나러 달려가는 사람들은 어쩌고

아지랑이 노는 저 너머에 한낮의 봄이 푸릇푸릇

자줏빛 언덕머리 우물가에선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에 먼지가 자욱하고

 

새 울음 서로 다른 거야 제멋대로라도

이곳저곳에 꽃이 피는 건 하늘의 뜻이라네.

이름난 뜰에 앉아 둘러보니 소년 머리 하나 없고

서글픈 백발노인들은 작년과 또 다르네.(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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