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임 - 자책과 후회 없이 나를 사랑하는 법
타라 브랙 지음, 김선주.김정호 옮김 / 불광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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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바로 전에 읽은 '화담집'의  연장선 상에서 읽게 되었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모든 집착을 버리라는 의미의 '공(空)'도,

자연과 하나됨을 강조하는 무위자연의 '도'도 집착을 버리고 비워내라고만 하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얘기해 주지 않았었다.

 

우연히 읽게된 화담집에서,

'공(空)'도 기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라고 보는 '태허'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고,

그러던 차에 만나게 된 책이 마음챙김(mindfulness)에 관한 이 책 '받아들임'이다.

 

원제 'Radical Acceptance'는 '받아들임'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책 표지의 '자책과 후회 없이 나를 사랑하는 법''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소제목이 더 나를 사로잡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 용어를 명확하게 짚고 갈게 하나 있다.

ㆍㆍㆍㆍㆍㆍ,고통(pain)이 반드시 괴로움(suffering)을 가져올 필요는 없다. 붓다는 우리가 경험에 연연해하거나 저항할 때,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원할 때 괴롭다고 가르쳤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159쪽)

이 부분은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모호하다.

'마음챙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

pain과 suffering에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통이나 괴로움 등 뜻이 모호한 단어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pain과 suffering이 확연하게 구분될 수 있게,

pain이 육체적 내지, 정신적 고통이라면 suffering은 마음의 고통 정도로 해석되는게 낫지 않을까 말이다.

 

한동안 이 서재의 제목을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나서다'라고 했을만큼 'mindfulness=마음챙김'이 내겐 화두 같은 것이었다.

우연히 '화담집'의 '태허'를 만났고,

'태허'의 '멈출 지(止)'의 연장선 상에서 이 책 '받아들임'을 읽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마음을 어쩌지 못해 힘들어 할때면,

어떻게 해주지 못해서 안쓰럽다고 하시면서...그냥 바라보라고 하셨던 분이 계셨다.

그땐 그말 뜻을 이 책의 그것들과 연관시키지 못하고 그냥 서운해 하기만 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 말뜻을 어렴풋이 깨닫겠고,

그러고 나니까,

그동안의 서운함이 다 소급되어, 위안이 되는 것이다.

 

암튼 서화담의 멈출 지(止)에서 받아들임의 멈춤으로까지,

'받아들임'의 그 고통과 괴로움을 넘나드는 선문답과 깨달음이 아슴아슴 눈물겹다.

 

이 책에서처럼 '받아들임'의 전제 조건으로 일단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걸 이렇게 적고 있다.

진실에 의해 불타는 것보다 도망가는 것이 더 나았다. 자신이 나쁘고 사랑 받을 수 없다고 느끼는 것보다 도망가는 것이 더 나았다. ㆍㆍㆍㆍㆍㆍ우리도 로라처럼 대체로 그것을 피하는 방법을 안다. 반면 멈추는 일은 두려울 수 있다. ㆍㆍㆍㆍㆍㆍ

  다음 치료회기 때 나는 로라에게 멈춤의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내면적 힘의 자리에서 용과 대면하는 걸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두려움과 분노가 북받칠 때, 그녀는 밖으로 향하는 모든 활동을 멈추고 내면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고통을 만났을 때 소리치거나 뛰쳐나가는 대신에 멈출 수 있다면, 현명하게 대응하도록 이끌어줄 내적 힘을 발견할 것이라고 그녀에게 일러줬다. (101쪽)

 

멈추는 게 힘든 것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니...내가 간과한 것은,

단지 멈추는데는 '좋고 나쁘고'의 판단이 개입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판단이 개입될 필요가 없으니, 감정 또한 개입될 필요가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멈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투우에는 피신과 회복의 장소로서 멈춤과 아주 유사한 것이 있다. 사람들과 황소가 싸움 중에 경기장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안전구역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황소는 거기서 기운과 힘을 되찾을 수 있다. 이 장소와 내면의 상태는 케렌시아(querencia)라고 불린다. 황소가 흥분하여 대응하는 한, 칼자루는 투우사가 쥐고 있다. 그러나 황소가 케렌시아를 발견하면 기운을 되찾고 두려움을 잊는다. 왜냐하면 황소가 자신의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멈추어 받아들인 다음, 마주하게 되는 것이 '조건없는 친절'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까지만 받아들이고 '예스'라고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노'를 날려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닌 것이다.

내가 예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두렵기 전'까지인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조건없는 친절로 경험을 마주하는 특정 순간에 균형감각이나 회복 탄성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는데, 이때 예스를 시도하게 되면 두려움에 함몰될 수도 있다. 이때는 친구의 위안을 구하거나,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처방된 약을 복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두려움을 감소시키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당분간은 너무 과하다고 느껴지는 것에는 "노"라고 말하고, 우리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만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자비로운 대처법이다. (128쪽)

 

여기서 '예스와 노'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뭐가 어려울까 싶지만,

이를테면 너무 과하다고 느껴지는 것에 '노'라고 말 못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싶지만,

우리가 하려는 작업이, 그렇게 자학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것이라는 걸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욕구하는 자신에 대한 보상을 음식으로 하려고 탐식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위로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하는 자기를 벌주려고 자신의 몸이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사람, 도 있다.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애당초 우리를 중독으로 몰고 간 사랑에 대한 갈망과도 단절되고 만다.

 

그녀는 강한 열망을 느꼈을 때 냉장고로 직접 가는 대신 자신의 스폰서에게 전화를 했다. 이 방법은 내가 '보조 멈춤'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을 함께 살펴보고,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선택지들을 탐색할 수 있었다.(210쪽)

  갈망과 과식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사라는 자신을 중독으로 치닫게 했던 고통스러운 자동반응의 연쇄를 차단했다.OA에서처럼 그녀가 음식을 대체물로 삼아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틀을 깨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욕구하는 자기의 존재를 용서하고 수용하는 것이 사라의 변신을 이끈 위대한 발걸음이었다. 비록 갈망이 일어날 때 의식적으로 용서하고 내려놓기를 게속해야 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책망하기를 멈췄을 때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그녀의 능력은 더 이상 엄청난 수치심 앞에 무릎 꿇지 않게 되었다.(213쪽) 

'보조멈춤'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긍정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알라디너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쳐 갔을지도 모르는,

중증의 질환으로 나도 한동안 고민했었다.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이 쌓여 책을 이고 살게 생겼는데도,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사들였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소설 분야는 수명이 짧다는 구실이 있기는 했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일종의 병이었다.

그때 그 분은 자처해서 '보조멈춤'이 되어주마고 하셨다.

 

나의 책에 대한 탐닉 또한,

정서적 결핍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는지라...

지독한 중독행독, 적어도 신간을 보면 마음이 동하는 것까지는 여전히 지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과 이 과정이 의미가 있는 것은 ,

그런 욕구가 계속 일어난다고 해도,

그리하여 설사 책의 구매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 고통이 반드시 마음의 괴로움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욕구나 갈망을  제한할 때 우리는 괴로워 하게 되지,

그저, 멈춰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우리는 어떤 제약이나 제한을 느낄 것도 없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찌하면,

'보조멈춤'을 자처한 분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난 그걸 이 한 구절로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안는 자이며 안기는 자이다.

 

다시 말해, 어떤 욕구라는 것 자체가 선악의 판단 대상도 아니거니와,

지금 이 순간 보조멈춤을 자처했다고 하여,

내내 '보조멈춤'으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하라는 법도 없다.

우리의 욕구가 복잡다단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욕구나 갈망에 있어서는 내가 '보조멈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안는 자와 안기는 자 모두 사랑의 의식으로 녹아든다.(302쪽)

 

이 책 전체를 통하여, 내게 가장 큰 용기를 준 건 아무래도 이 구절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서양에서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 원죄를 타고나는 것과 달리, 불교에는 원죄를 타고난 인간이라거나 본래 사악한 인간이라는 관점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남에게 해를 끼칠 때 그것은 우리가 악해서가 아니라 무지해서다. 무지하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의 삶과 이어져 있고, 집착과 미움이 더 많이 소외와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진실을 모른다는 뜻이다. 무지하다는 것은 의식의 순수성과, 우리의 근본적 선을 표현하는 사랑의 능력을 모른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 안에 근본적 선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347~348쪽)

사악해서가 아니라, 무지해서다...이러면 아무래도 세상을 좀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물론, 무지하다고 해서 모두 다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배워고 깨쳐야 한다는 중압감이 뒤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으로 난 '학습'을 꼽고 싶다.

답습만 하게 된다면 그건 모방이지만,

학습을 통하여 분명히 좀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암튼, 나의 이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엘리엇(T.S. Eliot)의 극본『칵테일파티』를 인용하는 것으로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알고 있던 순간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후로 변했다ㆍㆍㆍㆍㆍㆍ.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매번 만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을.(370~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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