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내가 김탁환의 '열녀문의 비밀'에 넋이 나갔었던 건 이 구절 때문이었다.  

취허(吹噓, 샘이 마를 때 물고기들이 서로 습기를 뿜어주는 일)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까요. 나리처럼 소설을 탐독하신 분을 일찍이 뵙지 못했답니다.
 
옛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멋진 말로 수작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에 침 묻혀 책장 넘기지 말라. 손톱으로 긁지 말라. 책장 접어 표시 말라. 땀 난 손우로 서책 들지 말라. 베고 눕지도 말고 팔꿈치로 괴지도 말고 술항아리 덮지도 말고 던지지도 말고 다리 사이 끼우지도 말라. 서책 휘둘러 창이나 벽에 묻은 먼지 털지도 말라.   

책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덕무의 사소절도 나와주신다. 

 

 

 

 

 

 

그래서 였을까?
영화화 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원작의 수사를 어떻게 버무려 낼까 참 궁금했었다.
(김탁환표 서사야 튼튼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것이고...)
 
주인공이 김명민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책 속에서는 백탑파라고 하여 연암 박지원을 위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서이수, 그리고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이명방이 등장하는데...
영화에선 개 도둑 '오달수'가 탐정의 조수 쯤으로 등장한다. 
내가 무리수를 뒀다 싶었던 건, '한지민'이었는데...
원작의 기생 계목향 역을 할지 열녀 김아영 역을 할지 궁금했었다. 
영화에선 전혀 새로운 캐릭터로 등장한다.

나는 책을 꼼꼼히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영화가 산만하고 겉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랑 같이 영화를 본 남편과 아들은 전혀 내용 파악 못하고 깔깔대고만 계시더라~
조선 명탐정이라고 하는 데 '추리소설적'요소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영화 곳곳에 웃음 코드를 버무려 넣어 뻥뻥 터져주시는게...이 감독, 웃음 폭탄 제조기쯤의 별명을 얻게 되진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려고 해도, 김명민이 연기해낸 탐정 캐릭터는 겉돌기만 했다.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김명민이 등장하는 것부터가 예사롭지는 않았지만,
그건 탐정의 자질을 십분 발휘하여서가 아니라 실학과 천주교를 익힌 그가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하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오달수가 연기한 개도둑의 캐릭터가 탐정의 그것에도, 실사구시에도 가깝다. 

풍부혈에 침을 꽂아 즉사시키는 건 시대물에 자주 등장하는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었는데, 이 영화의 부제 '각시 투구꽃'이랑 관련 꼬투리를 잡자면 얘기가 좀 복잡해 진다. 

이렇게 예쁜 이름으로 불리우는 '각시투구꽃'의 뿌리는 우리가 한방에서 흔히 쓰는 이름으로 바꾸면 '부자''초오'쯤 된다. 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루기가 까다로운 것은 맞지만 법제만 잘 하면 그리 염려할 맹독은 아니다.
근데 이것보다 이 '각시투구꽃'을 재배하는 곳으로 등장하는 '적성'에서 이 각시투구꽃이 대량 재배가 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적성이라는 곳에 감악산이 있기는 하나, 주산지는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 등지로 알려져 있다.  

책에서 적성은 농사만을 지어선 살기 힘들다며 소금 무역을 언급한다.

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건 사실이니까.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소중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네.(상,17쪽)   

 "...서책을 읽고 외우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라네. 더 중요한 배움은 서책을 덮은 후부터 시작되지."(상,43쪽) 

"허생 같은 방식으로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해..."
"과연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런 짓을 한다는 이유로 장사꾼들을 핍박할 게 아니라 상도를 가르쳐야 한다는 겁니다. 허생이 변산 도적떼를 이끌고 섬으로 건너가 올바른 삶을 가르친 것이 그 예이겠지요. 지금 조정에서는 이재에 밝은 신하가 드뭅이다. 장사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자신이 직접 뛰어들지는 않겠다는 것이지요. 시문만 소중히 여기고 삶은 가벼이 치는 습성에서 비롯된 겁니다. 허생이 글 아는 자를 배에 싣고 섬을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상,46쪽)

긴 손가락은 쉬위를 당기는 데 유리했고 두꺼운 허벅지는 비바람도 능히 이겨낼 만큼 단단했다. 기가 위로 뻗어 흔들리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는 것은 제법 무예를 연마했음을 뜻한다. (상,185쪽)  

영화는 산만하기 그지 없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진정한 해결사는 누구인지, 주인공은 누구인지 마냥 헷갈리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정조가 킹왕짱 멋지다는 것이다.  
정조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 우리가 상상하고 만들어낸 정조는 아닐까? 
 

 

 

 

 

 

 

정조에 관한 책을 찾아봐야겠다.

책과 영화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고 해야 겠지만,
김명민이 쫌 멋지지만, 난 책의 손을 들어 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댓글(51)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양철나무꾼 2011-02-20 03:19   좋아요 0 | URL
그쵸, 이 표현 참 그럴 듯 하네요~
힘 빼고 넣는 티가 많이 난다...

전 최근엔 '생텀'이랑 '언노운' 봤어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