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
감독 : 대런 애러노프스키, 출연 : 브렌든 프레이저, 세이디 싱크, 홍 차우
‘더 웨일’은 고도비만자를 지칭하는 속어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찰리’의 상태와 그가 좋아하는 소설 ‘모비 딕‘을 뜻하는 것 같다. 272kg의 고도비만자인 찰리는 온라인으로 작문지도를 하는 대학강사이다. 수강생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화상 카메라를 끄고 강의한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보조기구가 없이는 혼자 걷기도 힘든 상태이다. 8년 전, 그는 대학에서 만난 ’연인‘과 지내기 위해 아내와 8살 딸을 두고 떠났다. 그 뒤 연인을 잃고 연인의 동생인 간호사 ’리즈‘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 리즈는 찰리의 비만으로 인한 합병증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그가 원하는 고열량 음식을 사다 주기도 한다. 영화는 5일 동안 일어나는 일을 보여준다. 찰리가 딸에게 전화하고 8년 만의 연락에 못마땅해하며 찾아온 딸, ’엘리‘와 나누는 대화와 갈등, 엘리의 낙제위험과 찰리에게 에세이 대필을 요구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 와중에 새생명교회 선교사인 ’토마스‘가 방문해 찰리를 돕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난 딸은 아빠에게 불친절하고 까칠하다. 딸의 공격적인 말에도 아빠는 긍정적인 대답을 반복한다. 에세이 숙제를 대신 해 주겠다며 딸에게 몇 문장이라도 글을 써보라고 한다. 딸이 마지못해 쓴 짧은 문장을 읽고 시의 운율을 발견한 아빠는 딸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기뻐한다. 숨쉬기도 힘든 아빠가 몇 년 동안 생명줄처럼 붙들고 있던 것이 예전에 어린 딸이 ’모비 딕‘을 읽고 쓴 작문이었기 때문이다. 연극을 영화로 만든 ’더 웨일‘은 주인공 찰리가 사는 공간에서 대부분 진행된다. 우연한 방문객, 연인의 동생, 긴 시간이 흐르고 만나게 된 가족, 그리고 피자 배달부, 등장인물들은 찰리에게 나름 ’관심‘을 가지고 대하지만, 그 관심의 이유는 제각기 다르다. 신앙으로 찰리를 변화시키겠다는 선교사,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그의 연인을 돌보는 동생, 자신을 버린 아빠 혹은 남편에게 애증을 가진 딸과 아내, 그들 중 누가 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폭식으로 거대한 몸집이 된 찰리를 보며 ’사랑을 잃고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을 한 다른 인물이 생각났다. 아멜리 노통브가 쓴 ’살인자의 건강법‘의 주인공이다. ’살인자의 건강법‘에서 순결함이 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여겼던 주인공이 사랑을 지키려고 선택한 것과 ’더 웨일‘의 찰리가 사랑을 잃고 자신을 포기한 것이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때로 사랑은 서로에게 축복이지만, 어떤 사랑은 서로를 파괴하기도 한다. 사랑은 예측할 수도 없고 조절할 수도 없다. 소유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오래전 사랑을 잃고 나는 어떤 선택을 했던가?
사랑의 상실로 병들어 가면서 찰리는 자신이 ’고래‘라는 것을 알았을까? 바다를 만나야 비로소 고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혹시 그는 영혼이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바다를 꿈꾸며 날마다 출렁이는 마음의 파도를 견디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자신을 돌보기를 포기하면서 그가 도착하고 싶었던 곳은 어디일까? 그는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을까?
’더 웨일‘로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브렌든 프레이저‘는 오래 전, ’미이라‘라는 영화로 유명했던 배우이다. 나도 영화 ’미이라‘를 3편까지 모두 본 기억이 있다. 그렇게 유명했던 배우도 가족과 관련된 개인사로 우울증이 생기고 체중이 늘면서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며 겨우겨우 배우라는 명맥을 유지하던 중,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과 작업한 ’더 웨일‘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인생이 바닥을 치면 다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는 말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요즘 내 세상은 고요하다. 고인 물과 같다. 파도가 없으니 배가 흔들리지도 않는다. 위험하지 않은 대신 변화할 일도 없고 어딘가로 흘러갈 일도 없다. 고여 있다는 것은 안전한 것인가? 아니면 세상 자체가 정지한 상태라서 아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 나는 인생의 바닥에 있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가라앉고 있는 걸까? 내가 도착하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에세이는 진솔함으로 써야 한다.‘며 자신을 드러낸 찰리의 선택과 ’나도 무언가 옳은 일을 한가지라도 하고 싶었다.‘는 찰리의 외침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