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나에게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가끔 나도 놀란다. 어려서부터 거의 은둔자 수준으로 살아서 그렇다. 생각해보니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면 정말 친구가 없었을 것 같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친구들은 거의 학교에 다닐 때 만났다. 어려서는 친구에 대한 기준이 없었나 보다. 그냥 나이가 비슷하니까, 같은 학년 같은 반이니까 친구가 되기도 했다. 내 친구들은 일찍부터 내 까칠함에 대해 면역이 생겨서 그런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거나 시비를 걸지 않는다. 아마 도 닦는다는 기분으로 나를 봐주는 것 같다. (친구들 정신수양을 시키니 나도 조금은 쓸모가 있군)

 

회사에 다니는 긴 시간 동안 마지못해 참여한 회식 외에 동료들과 친목 행위를 한 적이 없다. 입사 초기, 여직원들이 이리저리 같이 몰려다니고 같이 점심을 먹고 퇴근 후에 같이 쇼핑 다니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혼자 밥 먹고 혼자 다니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상사들이 그런 나를 안타까워했다. 지나치게 정 많은 과장님 한 분이 나에게 님은 왜 다른 여직원들에게 왕따를 당하지?”하고 물으셨다.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말씀드렸다. 누구와 어울리는 것이 불편해 내가 혼자 있기를 선택한 거니까, 왕따를 당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라고. 내 말을 들은 과장님의 놀란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사람에게서 위안을 찾은 적이 있다. 젊은 날의 달콤쌉싸름한 기억도 있다. 마주 안고 있을 때 사람의 체온은 따듯하지만 뒤돌아선 모습에서는 눈보라가 치더라. 나는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두렵고 불편하다. 언제 태풍이 불까 염려하는 것도 싫다. 오두막에 살면서 느낀 것은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자는 사람에 대해 집착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다정한 이웃이 있고 나를 걱정하는 가족과 친구가 있지만 결국 나를 돌보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 자신과 친구가 되는 길은 가파르다.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내 마음의 언덕에 오르는 날이 오겠지.

 

언덕 위에는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무가 허락하면 새집처럼 작은 집을 짓고 싶다. (내 오두막이 작다거나 불편해서가 아니라 트리하우스에 대한 로망이 있다) 해가 뜨면 일어나서 책을 읽고 어두워지면 조그만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가곡들을 하나씩 부르다 보면 달빛이 찾아와 같이 노래하지 않을까? 나와 친구가 되면 세상이 덜 무서울 것 같다. 사람에게 기대하고 살 때는, 혼자일 때보다 둘이 있을 때가 더 외로웠다. 외로움이 나를 끝없는 어둠으로 끌고 갔다. 어차피 외로울 거라면 혼자 있는 외로움이 가볍다.

 

알라딘서재에 조그만 둥지를 만들기 위해 마른 풀잎과 잔가지들을 물어 나르고 있다. 외지고 캄캄한 구석에서 한발 세상으로 걸어 나온 것 같다. 오래된 책 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 가다가 동행을 만나면 좋고 끝내 혼자여도 좋다.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는 것 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다만 너무 빨리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내자, 나여. 이 세상 소풍이 조금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니? 아직은 친하기 힘든 나에게 말을 건다. 너는 이미 좋은 친구이고 나는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테니 우리 같이 사이좋게 잘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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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어디에 있는 걸까?

 

감독 : 클로이 자오, 출연 : 프란시스 맥도맨드, 데이빗 스트라탄, 린다 메이

 


한때 나는 내가 민달팽이라고 생각했다. 오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죽을 힘을 다해 살던 어느 날, 등뼈가 단단해지더니 작은 집이 생겨났다. 덜 춥고 덜 더웠지만 집을 지고 다니다 보니 늘 고단했다. 주택담보대출이라는 무게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너무 힘들어 집을 던져 버리고 개조한 픽업트럭을 사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꿈을 꾸다 깨기도 했다. 그때 꾸었던 꿈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이었는지 영화를 보며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이고 지고 다니던 집을 조그맣게 만들어 산비탈 밭에 내려놓고 사는 것이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겠구나.

 

영화가 시작하면 미국의 경제공황으로 공장지대로 이루어진 한 마을이 사라지고 아예 우편번호와 주소가 없어졌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 마을의 이름은 엠파이어. 거대기업을 따라 형성된 마을은 기업이 망하면서 폐허가 되었다. ‘US석고라는 회사의 공원인 남편과 인사과 직원이던 펀은 직장을 잃고 심지어 남편은 병으로 사망한다. 사람들이 떠나고 비어 있는 마을을 끝내 떠나지 못하다가 결국 노매드가 되는 주인공 펀, 낡은 밴에 최소한의 살림만 싣고 남은 짐은 창고에 맡기고 떠난다. 그리고 여기저기 방랑하며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한다.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일하거나 캠핑장지기,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한때 시간제 교사를 하다 만난 아이가 펀에게 집이 없다면서요?’ 라고 묻자, HOUSE는 없지만, HOME은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녀가 아이에게 내가 알려준 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니?’ 하고 묻자, ‘라고 대답하며 아이가 말하는 것은 멕베스의 대사이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젊은 노매드에게 펀이 자신의 결혼식에서 읽은 시라며 들려주는 것은 세익스피어의 소네트이다. 시를 사랑하고 시를 노래하며 어쩌면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들려주는 것 같은 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듯하다. 그녀는 말랑말랑한 마음을 안고 노매드의 삶을 살고 있구나.

 

집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굳이 산기슭에 작은 오두막을 내려놓았나?

노매드에서 만난 데이브는 아들의 부탁으로  아들부부와 함께 살게 된다. 나름 그와 친밀하게 지내던 펀은 그의 초대를 받고 먼길을 찾아간다.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낸 펀에게 데이브는 이곳에서 같이 살자고 말한다. 하지만 넓은 손님방 침대에서 잠들지 못하고 낡은 차의 좁은 잠자리에 누워야 잠을 자는 펀, 차의 수리비 때문에 오랫동안 만나지 않은 언니에게 돈을 빌리면서도 그녀는 노매드를 포기하지 못한다. '뱅가드' 라고 이름을 붙인 밴을 타고 달리다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차를 멈추고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그녀, 다시 집이란 무엇이며 나는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라는 의문이 오래오래 남는 영화이다.

 

여담으로 낡은 밴 안에 있는 펀의 물건들은 펀을 연기한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아끼는 물건들로 하나하나 채워서 만들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주신 접시에 대한 사연도 실화라고 한다. 밴의 작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여기저기 서랍을 만들고 작은 찬장에 아끼는 도자기 컵들을 수납한 모습을 보며 집의 크기는 행복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작은 오두막도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 공간이 아닐까?

 

영화의 원작은 제시카 브루더의 동명의 책인데,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관심을 두고 영화로 만들고 싶어 하다가 클로이 자오 감독을 만나 영화화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실제 노매드인 린다 메이를 주인공으로 하려다가 클로이 감독이 프란시스에게 주인공 역할을 권했다고 한다. 그렇게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연기를 한다기보다 펀의 삶을 그대로 살아간다. 함께 출연한 노매드들도 그녀가 영화배우인 줄 몰랐다고 한다. 촬영 중에 만난 어떤 자영업자는 그녀에게 자신의 매장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겠냐고 권하기도 하고 영화 속 서사(남편이 죽은 이야기)를 실화로 알고 촬영이 끝나고 그녀를 위로해 준 한 노매드는 그녀가 영화배우이며 그녀의 남편이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얘기를 듣고 정말 놀랐다고 한다. 클로이 감독의 연출은 아무런 간섭없이 카메라가 한 여자의 삶을 천천히 따라가는 것 같아서 보는 시선에 따라 다큐처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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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욕망의 이중주


감독 : 토드 필드, 출연 : 케이트 블란쳇, 노에미 메를랑, 니나 호스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언제나 옳다. 물론 나에게만 그렇다. 키가 작은 나는 그녀의 미루나무처럼 기다란 키와 오만하게 솟아오른 광대뼈를 좋아한다. 짝사랑학을 오래 이수한 학생답게 나는 그녀에게 반해있다. 그래서 그녀의 연기에 공간이 있어도 그 비어있음까지 사랑한다. 물론 리디아 타르를 연기한 그녀에게 공간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 음악전공 학생들에게 강의하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독일어로 연주곡에 대한 생각을 설명하는 모습 등은 그녀가 얼마나 캐릭터를 연구하고 노력했는지를 보여 준다.

 

주인공 타르(케이트 블란쳇 분)는 최초로 비엔나오케스트라의 여성지휘자가 된 입지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가진 그녀는 음악을 지휘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과 주변 인물들도 지휘(?)하려는 욕망이 있다. 모든 것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그녀가 권력으로 취한 달콤한 과거 때문이다.

 

그녀는 당당하게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오케스트라의 첼로연주자인 샤론과 결혼해서 입양한 딸 페트라를 기르고 있다. 그 가정을 만드는 동안의 노력이 나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끝없는 욕망은 음악의 완성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탐닉한다. 새롭고 자극적인 사랑은 마약과 닮았다. 다만 중독자인 타르, 그녀만이 그 중독의 위험과 후유증을 모를 뿐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하는 실수는 오랜 시간 묵인되거나 방치되다가 한순간 터져 버린다. 그 결과는 실수한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거나 추종한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남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노력한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가진 것에 대한 감사함을 모르는 관계는 위험하다. 그렇다. 나의 사랑은 내 존재를 감사하지 않았다. 습관이 되어 버린 행위와 일상은 슬프다. 슬픔은 나를 그가 없는 세상으로 달려가도록 만들었다. 눈물이 나를 떠밀어 버렸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떠내려가다가 마침내 산기슭에 도착한 건가?

 

타르가 가진 권력으로 소유한 혹은 소유했다고 믿은 것들이 균열을 일으키고 그녀는 침몰한다. 권력을 가졌을 때, 그녀가 욕망하던 것들은 독성을 가졌으며 그녀를 병들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믿은 권한을 빼앗겼을 때 자신과 주변을 파괴하고야 만다. 게다가 스스로 파괴한 삶을 억울해하고 다시 행복했던 시절을 찾으려고 하는 그녀가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힘을 가진 사람이 겸손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일까? 아니면 겸손한 사람은 힘을 가질 필요가 없는 걸까? 내가 가진 힘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 걸까?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에 오르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위험한 자극을 가지고 싶은 욕망은 왜 생기는 걸까?

 

영화를 보며 불편했던 부분은 그렇게 파괴된 그녀가 아시아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음악적으로 한없이 낮은 자리로 내려가 다시 시작하려는 그녀를 보여 주는 걸까? 그녀는 정말 초심으로 돌아간 걸까? 아니면 다시 욕망하기 시작한 걸까? 여성이든, 남성이든, 권력의 힘을 믿고 그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책임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는 걸까? 그런데 왜 하필 아시아인가? 그리고 왜 하필 아이들인가? 그녀의 욕망은 순화된 걸까? 그녀는 용서받을 수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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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나를 향해 달려간다

 

감독 : 스티븐 크보스키, 출연 : 로건 레먼, 엠마 왓슨, 에즈라 밀러

 


유리잔에 맑은 물이 담겨 있다. 누군가 그 물에 핏물을 떨어트린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 핏물은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그 물에서 비린내를 맡을 수도 있다. 시간이 흘러 컵 바닥에 가라앉은 핏물은 마침내 썩게 된다. 그때야 사람들은 알게 된다. 아픈 기억이 마음에 가라앉으면 언젠가는 곪은 상처가 된다는 것을.

 

이기적인 어른이 아이에게 남긴 행동은 상처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상처는 아물지 않고 오히려 아이의 일상을 갉아 먹는다. 아이는 외톨이로 자란다.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다. 월플라워는 파티에 파트너 없이 혼자 온 사람, 인기 없는 사람, 파티에서 아무도 없이(춤 출 상대가 없어) 벽에 기대어 있는 외톨이, 집단에서 따돌림당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가끔 삶의 가장자리에 서 있으면 특별한 것들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주인공 소년이 선생님에게 묻는다.

왜 좋은 사람이 잘못된 사람을 선택하죠? 왜 좋은 사람들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선택하죠? 넌 더 큰 사람이라고 알려줄 수는 없나요?”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만큼 대접받거든. 우린 자신의 크기에 맞는 사랑을 선택한단다.”

 

소년들의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나는 너에게 치열했는데 너는 사랑 앞에서 비겁했구나!”라는 생각은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한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사랑을 향해 모든 것을 던지거나, 사랑 앞에서 도망가거나, 모든 것이 아프기만 하다. 어린 시절,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회복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은 확장되기도 한다.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어른들이 뒤늦은 사과를 하지만 지나간 그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달린다, 그들을 구속하는 모든 규율, 기대, 가치, 사랑 혹은 죽음으로부터도. 그렇게 달려가다가 조금은 덜 아픈 친구, 조금은 덜 망가진 자신과 만나길 바란다. 인생, 참 쓸쓸한 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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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파괴하는 선택

 

감독 : 대런 애러노프스키, 출연 : 브렌든 프레이저, 세이디 싱크, 홍 차우

 

 

더 웨일은 고도비만자를 지칭하는 속어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찰리의 상태와 그가 좋아하는 소설 모비 딕을 뜻하는 것 같다. 272kg의 고도비만자인 찰리는 온라인으로 작문지도를 하는 대학강사이다. 수강생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화상 카메라를 끄고 강의한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보조기구가 없이는 혼자 걷기도 힘든 상태이다. 8년 전, 그는 대학에서 만난 연인과 지내기 위해 아내와 8살 딸을 두고 떠났다. 그 뒤 연인을 잃고 연인의 동생인 간호사 리즈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 리즈는 찰리의 비만으로 인한 합병증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그가 원하는 고열량 음식을 사다 주기도 한다. 영화는 5일 동안 일어나는 일을 보여준다. 찰리가 딸에게 전화하고 8년 만의 연락에 못마땅해하며 찾아온 딸, ’엘리와 나누는 대화와 갈등, 엘리의 낙제위험과 찰리에게 에세이 대필을 요구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 와중에 새생명교회 선교사인 토마스가 방문해 찰리를 돕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난 딸은 아빠에게 불친절하고 까칠하다. 딸의 공격적인 말에도 아빠는 긍정적인 대답을 반복한다. 에세이 숙제를 대신 해 주겠다며 딸에게 몇 문장이라도 글을 써보라고 한다. 딸이 마지못해 쓴 짧은 문장을 읽고 시의 운율을 발견한 아빠는 딸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기뻐한다. 숨쉬기도 힘든 아빠가 몇 년 동안 생명줄처럼 붙들고 있던 것이 예전에 어린 딸이 모비 딕을 읽고 쓴 작문이었기 때문이다. 연극을 영화로 만든 더 웨일은 주인공 찰리가 사는 공간에서 대부분 진행된다. 우연한 방문객, 연인의 동생, 긴 시간이 흐르고 만나게 된 가족, 그리고 피자 배달부, 등장인물들은 찰리에게 나름 관심을 가지고 대하지만, 그 관심의 이유는 제각기 다르다. 신앙으로 찰리를 변화시키겠다는 선교사,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그의 연인을 돌보는 동생, 자신을 버린 아빠 혹은 남편에게 애증을 가진 딸과 아내, 그들 중 누가 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폭식으로 거대한 몸집이 된 찰리를 보며 사랑을 잃고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을 한 다른 인물이 생각났다. 아멜리 노통브가 쓴 살인자의 건강법의 주인공이다. ’살인자의 건강법에서 순결함이 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여겼던 주인공이 사랑을 지키려고 선택한 것과 더 웨일의 찰리가 사랑을 잃고 자신을 포기한 것이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때로 사랑은 서로에게 축복이지만, 어떤 사랑은 서로를 파괴하기도 한다. 사랑은 예측할 수도 없고 조절할 수도 없다. 소유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오래전 사랑을 잃고 나는 어떤 선택을 했던가?

 

사랑의 상실로 병들어 가면서 찰리는 자신이 고래라는 것을 알았을까? 바다를 만나야 비로소 고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혹시 그는 영혼이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바다를 꿈꾸며 날마다 출렁이는 마음의 파도를 견디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자신을 돌보기를 포기하면서 그가 도착하고 싶었던 곳은 어디일까? 그는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을까?

 

더 웨일로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브렌든 프레이저는 오래 전, ’미이라라는 영화로 유명했던 배우이다. 나도 영화 미이라3편까지 모두 본 기억이 있다. 그렇게 유명했던 배우도 가족과 관련된 개인사로 우울증이 생기고 체중이 늘면서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며 겨우겨우 배우라는 명맥을 유지하던 중,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과 작업한 더 웨일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인생이 바닥을 치면 다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는 말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요즘 내 세상은 고요하다. 고인 물과 같다. 파도가 없으니 배가 흔들리지도 않는다. 위험하지 않은 대신 변화할 일도 없고 어딘가로 흘러갈 일도 없다. 고여 있다는 것은 안전한 것인가? 아니면 세상 자체가 정지한 상태라서 아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 나는 인생의 바닥에 있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가라앉고 있는 걸까? 내가 도착하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에세이는 진솔함으로 써야 한다.‘며 자신을 드러낸 찰리의 선택과 나도 무언가 옳은 일을 한가지라도 하고 싶었다.‘는 찰리의 외침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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