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꽃

 

 

나는 물망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요. 이름만 알고 있답니다. 궁금하면 식물도감을 열고 찾아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사진이나 그림으로 물망초를 만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어디에 가면 물망초가 피어 있을까? 물망초는 무리를 지어 필까? 아니면 한 송이 한 송이 외따로 떨어져서 필까? 꽃이 피는 계절은 언제일까? 요즘은 컴퓨터 검색창에 낱말을 치기만 해도 상세한 정보가 뜬다고 하는데, 나는 계속 생각으로만 물망초를 만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으로 그려낸 물망초는, 키가 작고 여린 잎이 좁다랗게 여러 겹 뻗어 오르고 도톰한 꽃대가 나오다가 은은한 하늘빛의 꽃이 필 것 같아요. 한꺼번에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한 송이가 피었다가 시들려고 하면 다시 꽃대가 올라올 것 같아요. 그래서 천천히 꽃이 피지만 한 송이, 혹은 두 송이쯤의 꽃이 오래오래 피어 있는 거죠.

 

실제로 물망초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만 나는 아직도 검색창을 열지 않습니다. 때로 어떤 사실은 상상한 모습과 너무 다를 때가 있잖아요? 나는 내가 꿈꾸는 물망초를 사랑하기 때문에 현실의 물망초를 만나기가 두렵습니다. 상상 속에 핀 꽃은 오직 나만을 위해 피고 내가 원하는 모습을 하고 있잖아요?

 

나는 내가 만든 물망초를 한 송이 한 송이 꺾어서 꽃다발을 만들어 당신에게 가고 싶습니다. 오래전, 당신은 내게 분홍색 장미 한 다발을 배달로 보낸 적이 있어요. 나는 그 장미를 감쌌던 포장지와 포장 상자, 장식 리본을 아직도 가지고 있답니다. 시간이 정말 많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 장미의 향기를 기억합니다. 아끼는 책갈피에 꽃잎 몇 장을 남겨 두기도 했지요. 물론 그 꽃잎은 이제 누렇게 바래고 곧 부스러질 것 같은 모습이지만요.

 

내가 꽃집으로 달려가 꽃다발을 주문하는 대신, 나만의 물망초 꽃다발을 만들고 싶은 이유는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요? 당신은 내가 꽃을 전해 드리기에 너무 먼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꽃집 주인은 당신의 주소를 듣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겠지요. 그래도 나는 내가 만든 물망초 꽃다발을 당신에게 드리고 싶어요. 오늘도 구름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하늘빛을 닮은 꽃을 말입니다.

 

어쩌면 물망초는 하늘색 날개를 가진 나비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바람을 타고 당신이 계신 곳으로 찾아갈지도 모르지요. 나는 천천히 걸어서 그 나비를 따라가고 싶습니다. 나비야, 너무 빨리 날아가지 마. 너를 따라서 가고 있는 내가 지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날다 지쳐서 그 사람에게 도착하지 못할까 두렵구나. 저기요, 물망초 꽃잎이 나비처럼 날아서 당신에게 가고 있네요.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허공을 끝없이 날아가는 푸른 꽃들의 행렬이 거기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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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한때 신춘문예에 목을 맨 적이 있다. 결과는 지방신문 신춘문예에서 최종심에 세 번 오르고 포기했다. 그 당시 몇 년 동안 11일 신문에 당선자 누구누구와 최종적으로 겨룬 것이 내 작품이라고 이름이 언급되었다. 운동경기에 출전했다면 은메달을 받은 셈인데, 신춘문예에서 2등은 빈속에 깡소주를 마시라는 상을 주었다.

 

20년이 넘도록 를 쓰지 않은 이유가 신춘문예 때문은 아니다. 전혀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처음에는 가족이, 나중에는 내가 많이 아팠다. 지금도 여전히 아프다. 다만 달라졌다면 어느 정도 아픈 것에 내가 익숙해진것 같다.

 

먹고사니즘이 위안이 되던 시절이 있다. 매일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과 매달 지정일에 입금되는 돈이 있다는 것이 마음을 붙들기도 했다. 하지만 내 촉수는 늘 허공을 향해 있었다. 허공에 길을 내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창작자에게 익숙한 고민이다.

 

그 길 끝에 지금의 집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작은 오두막에서 나는 발을 멈추었다. 우선 이 작은 집안에 어떤 가 숨어 있나 찾아볼 예정이다. 20년 전처럼 내 창작물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나이가 먹어 철들어서인지, 아니면 기력이 딸려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기에는 후자 쪽이 유력하다.

 

나에게 다시 가 찾아올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오래전처럼 초조하거나 불안하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나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은 내가 나를 인정하면 그만이다. 혹시 내가 부족하다면 안쓰럽게 생각하며 쓰다듬어 주려고 한다. 돌아보면 어느 순간에도 나 자신을 안아준 적이 없다.

 

나는 사는 일에 매우 서툴다. 특히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유지하는 것에 피로를 느낀다. 아주 드물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불안하다. ‘왜 굳이 나에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합창단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원 한 분이 사적인 만남을 원했다. 카페에 모시고 가서 차 대접을 하면서 나는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라고 공손히 말씀드렸다. 그분이 나를 미친년으로 생각하거나 내가 표현한 대로 자발적 고립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거나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건 그분의 몫이다.

 

외로움이 반드시 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를 빚는 여러 가지 재료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 질량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보여주는지는 를 짓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부디 외로움이 나의 를 단단하게 제련하는 도구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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