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비드
나는 살림한 세월을 생각하면 민망하게도 매우 요알못(요리를 알지 못함)이다. 오랜 직장생활로 인한 ‘살림 무기력증’이 핑계로 작용한다. 그런데 음식에 관한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한다. ‘카모메 식당’ 이나 ‘딜리셔스’를 보고 나서 시나몬 빵을 굽는다고 설쳐 대기도 한다. 음식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된 글도 좋아한다. 글을 읽는 동안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문장을 만나면 정말 사랑스럽다. 요리책은 안 본다. 내 요리의 핵심은 ‘쉽고 빠르게’ 이다. 대충 마음 가는 대로 해 먹는다는 말이다. 이런 나를 친구들은 ‘살림 깡패’라고 부른다. 사실 요리하는 것 보다 먹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살림 좀 한 주부들이 대체로 공감하듯이 남이 해 준 음식을 특히 좋아한다. 오늘처럼 옆집에서 해 준 부침개나 햇김치를 받아 들면 세상 행복하다.
그런 내가 요즘 수비드에 관심이 많다. 브런치 작가 중에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서 시댁에 살다가 시댁 근처로 분가한 한국인 며느리가 있다. 시부모님과 자주 식사를 한다며 남긴 글에서 제일 부러웠던 것이 식전주, 반주, 식후주 얘기이다. ‘기승전 술’과 함께 하는 식사라니, 이건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다. 심지어 그 술이 질 좋은 샴페인이나 와인이란다. 크 ~ 그러다 프랑스인들의 ‘잠봉’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가득한 글을 읽고 수비드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잠봉 말고도 수비드로 만든 다양한 음식들에 대해 언급한다. 프랑스 밥상이니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지’ 하고 부러워만 했는데, ‘수비드 요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네이버 카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 많이 가는 음식은 질색이라 무시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한 친구가 말하기를 ‘너 같은 살림 깡패가 좋아할 조리법’이란다. 뭣이라? 그럼 한번 구경해 볼까? 막상 수비드 카페에 가입하고 등록된 글을 읽으니 절대 만만한 조리법이 아님에도 내가 혹한 이유는 ‘일주일에 한 번만 부지런 떨면 일주일 식단이 행복할 거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조리법이 친환경적(맞나?)이고 조리 후 보관이 쉽고 다시 데워 먹기도 편하겠다는 느낌인 거다.
그래서 도전했다. 일단 수비드 기계와 수조를 사고 진공포장 기계를 샀다. 고민 끝에 초급 수준의 메뉴를 몇 가지 선정해 재료를 구매하고 염지를 한 다음에 진공포장을 하여 수비드 기계에 넣었다. 처음으로 도전한 메뉴는 돼지앞다리살 수육과 풀드포크, 소 아롱사태를 이용한 냉채였다. 비슷한 물 온도에 비슷한 유지시간이 필요한 재료를 묶는 것이 전기료를 절약하는 팁이라서 그랬다.
수비드를 하면서 느낀 것은 일단 조리법이 매우 간단하다는 것이다. 복잡한 요리가 아니라면 소금, 후추만으로 염지가 끝난다. 닭가슴살처럼 작은 재료를 여러 번 진공포장하는 과정이 조금 번거롭게 느껴졌을 뿐이다. 재료를 염지하고 진공포장하고 물 온도와 유지시간을 설정하고 설정 온도가 되어 알람이 울리면 진공포장한 재료를 수조에 넣는다. 시간이 흘러 종료 알람이 울리면 꺼내서 당장 먹을 것이 아니라면 찬물에 넣어 식히고 얼음에 담가서 조리된 결과물을 내부까지 차갑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잘 식힌 다음 먹고 싶은 순서를 생각하여 냉장보관 하거나 냉동보관을 한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데워 먹는다. 나에게는 살림 깡패가 만날 수 있는 최상의 조리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수비드도 중급, 고급 요리를 욕심내면 과정이 만만하지 않다. 나는 아직은 초급반에 머물고 있다. 앞서 말한 돼지앞다리살 수육, 풀드포크, 아롱사태 냉채 외에 닭가슴살을 이용한 샌드위치, 샐러드나 파스타, 척아이롤 스테이크 정도로도 만족한다. 다음에는 소꼬리찜과 소갈비찜을 할 예정이다. 유지시간이 긴 것이 흠이지만(18~24시간) 조리과정을 지켜볼 필요가 없으므로 자고 일어나면 음식이 완성되어 있고 꺼내서 먹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 나를 매우 기쁘게 한다.
사실 나를 수비드에 입문하게 만든 잠봉에 도전하고 싶지만, 염지에 쓸 다양한 향신료를 구매해야 하는 것과 돼지뒷다리살을 덩어리째 손질해서 그물처럼 실로 묶거나 전용망에 넣어야 하는 과정이 아직은 번거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완성된 잠봉을 썰려면 전용 슬라이스 기계가 필요하다. 하몽을 큰 덩어리째 사고 싶어도 슬라이스 기계 때문에 포기했는데, 이제 정녕 질러야 할 때가 온 건가?
혹시 ‘너는 한식은 안 먹니?’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까 염려되어 말씀드리면, 내 기본 식단은 밥, 김치, 나물류, 장아찌, 두부, 버섯으로 구성된다. 관리하기 힘들어 국은 안 끓인다. 대신 계란찜을 자주 한다. 수비드로 조리된 음식은 ‘수제 저장용 식품’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다. 내가 사는 곳은 식당 음식이 배달되지 않는다. 수비드 식품을 평소 밥상에도 곁들이지만 특식이 필요할 때나 고품격(?) 술안주가 절실할 때, 나에게는 매우 훌륭한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