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나 - 한없이 다정한 야생에 관하여
캐서린 레이븐 지음, 노승영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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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사는 이웃들

 


오두막으로 이사한 첫해 겨울, 눈이 내리는 새벽이었다. 어디선가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밤중에 누가 저렇게 큰 소리로 싸우지?’ 산 쪽으로 난 창문을 여니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대나무숲에서 나는 소리였다. ‘저쪽에도 집이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다시 큰 소리로 악을 쓰는 소리가 났다. 내 귀에는 그 소리가 죽여, 죽여라고 들렸다.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부부싸움을 하는 모양인데, 좀 심각한가보다 싶었다. ‘나가봐야 하나, 어쩌지?’ 걱정하다가 부부싸움에 내가 도울 일이 뭐가 있겠어. 그나저나 동네 시끄럽게 너무 큰 소리로 싸우네하고 그냥 잤다. 아침에 만난 친절한 이웃에게 대나무숲 쪽 집인 것 같은데, 새벽에 엄청 싸워서 놀라서 깼어요.” 하고 말하자, “그쪽에는 집이 없는데?” 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라니 소리라고 하신다. (내 얘기 듣고 동네 어르신들 많이 웃으셨다.)

 

봄이 와서 나른하고 따듯한 햇살을 따라 마을 길을 걷고 있는데, 저만치 어린 벼를 막 심어놓은 논에서 몸이 날씬하고 다리가 긴 개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노는 것이 보였다. ‘저 개는 품종이 뭔데 저렇게 다리가 길지?’ 궁금해서 밭일하고 계신 어르신께 여쭈어보니, 폭소를 터트리며 말씀하셨다. “고라니 새끼여, 고라니 새끼.”

 

읍내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동네까지 1km가량 이어지는 산길에 들어서니, 차 앞으로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오다가 내 쪽을 바라보고 잠시 멈추었다가 지나갔다. 눈망울이 크고 또렷했다. 한번은 인근 도시에 다녀오는데, 저물 무렵 산길에서 고라니 가족을 만났다. 큰 고라니 두 마리와 어린 고라니 세 마리였다. 애들이 놀라면 어쩌나, 경적을 울리지 못하고 비상등을 켜고 기다렸다. 큰 고라니 한 마리가 나를 한참 쳐다봤다. 왠지 너 때문에 우리가 불편해.’라는 표정이었다. , 가족 소풍 중인데 방해가 되었나 보군. 미안해.

 

그 후 작은 정원에서 꿩을 만나거나 언덕으로 달려가는 족제비를 보기도 했다. 먹을 것이 없는 이른 봄에 고라니는 사철나무로 심어진 내 울타리를 뜯어 먹고 갔다.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고라니 소리는 이제 익숙해졌다. 다만 서툰 농부인 내가 어렵게 기른 쌈채소를 한 잎도 남기지 않고 먹고 간 날은 화가 났다. , 좀 나누어 먹고 살자!

 

내 작은 언덕을 예쁘게 치장하기 위해 구절초 씨앗을 뿌리고 제법 비용을 들여 꽃모종을 여기저기 심었다. 결과는 환삼덩굴과 개망초의 완벽한 승리였다. 잡초에 강하다는 구절초는 몇 포기 나오다 죽고 꽃모종들은 환삼덩굴과 찔레나무가 다 잡아먹었다. 사실 잡초가 어릴 때 제거해주었으면 사고를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결국은 내 게으름이 꽃모종을 다 죽인 것이다. 데이지와 수국에게 정말 미안하다.

 

여우와 나는 동물학과 식물학을 공부하고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캐서린 레이븐이 황무지에 오두막을 짓고 살며 여우를 만나 나눈 교감에 대해 쓴 글이다. 작가는 레인저(국립공원 산림감시인)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작가 소개를 그냥 생물학자로 쓸 수도 있지만, 굳이 그녀의 이력에 대해 늘어놓은 이유는 끝없이 촘촘하고 한없이 다정한 그녀의 식물과 동물에 대한 애정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작가 캐서린 레이븐은 오두막 근처에 사는 나무와 풀들, 동물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정하게 불러준다. 책을 읽다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물의 이름을 알고 불러주는 그녀의 관심에 압도된다. 그녀가 생물을 대하는 자세는, 공부해서 쌓은 지식이 아니라 마음이 낳은 자식에게 품은 사랑으로 여겨진다. 자연의 어머니가 되어 품고 돌보는 그녀의 태도에 감탄하면서, 내 오두막에 찾아오는 동물을 불편해하고 이름있는 식물을 잡초라고 부르며, 꽃을 죽인 범인으로 몰아간 내가 부끄럽다. (그래도 환삼덩굴은 반드시 어릴 때 뽑아야 하고 찔레나무와의 전쟁은 계속된다.)

 

작가는 오두막을 방문(?)한 여우에게 셍텍쥐베리어린 왕자를 읽어 준다. 가까운 도시에 강의를 가는 동안에도 여우가 보고 싶어 매일 저녁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어떤 이들은 사람과 야생동물 사이에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고 믿으며 동물과 인간을 가르는 협곡을 건너는 일은 무모하다고 주장한다. 작가도 처음에는 그 규칙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협곡을 건너기를 주저한다. 시간이 흐르고 여우와 작가는, 야생동물과 인간의 미묘한 간격을 무너트린다. 작가는 달빛과 어린 여우 네 마리가 함께 춤추는 것을 본 날, 자신이 최종 선택해야 하는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심장에 꽂히는 떨림을 얻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 , 명예, 권력, 그리고 이상을 가치로 두는 경우, 제각기 삶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자신과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을 낯설게 보기도 하고 가엽게 생각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재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 같다. 돈이 많은 사람이 힘을 가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심지어 명예나 권력도 자본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가족에게 내 자발적 퇴직에 대해 얘기했을 때, 가족들은 입을 모아 나에게 잘못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내가 오랜 시간 노력하여 경력자가 되었으며 그 덕분에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 있는데, 퇴직은 아깝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경제력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나는 이대로 계속 달리면 죽을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살고 싶어내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오두막에서 산다. 캐서린 레이븐처럼 넓고 황량한 황무지는 아니지만, 외진 산자락에서 산에 사는 이웃들을 만나고 온갖 풀들과 싸우고 있다. 내가 길들이거나 나를 길들인 동물은 없다. 매일 오후 415분에 찾아오는 여우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가끔 길고양이들이 찾아와 작은 정원에서 뒹굴다 간다. 어느 날, 너무 어려 겁을 상실한 새끼고양이가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내 무릎에 올라오려고 작업복 바지에 매달렸다.

 

진과 토닉, 테니스공과 찢긴 꼬리, 작가가 불러주는 수많은 식물과 동물의 이름들, 그녀의 오두막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구름과 노을, 달빛과 바위, 뜨거운 햇볕과 소나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 여우가 산길을 내려와 대나무숲을 지나 내 정원의 자주달개비 옆에서 기지개를 켜고 앉아 나를 기다리기를 소망한다. 나는 여우에게 어떤 책을 읽어 줄까, 고민한다. ‘권정생작가의 강아지 똥을 읽어 줄까? 그러면 우리 여우는 꽈아~’하고 소리를 내며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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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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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날아가는 풀씨

 


내 첫사랑은 작은 덧니를 갖고 있었다. 빠지지 않은 유치가 오른쪽 송곳니 옆에서 그가 웃을 때면 귀엽게 반짝였다. 그는 때로 덧니가 불편하다고 했지만 나는 자꾸 보고 싶어 실없는 농담으로 그를 웃게 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가끔 서로에게 손편지를 썼는데, 요즘도 그의 편지 문장이 생각날 때가 있다. 어린 소년의 마음이 시간을 거슬러 다가와 가만히 내 어깨를 감싸는 것이다.

 

대학 첫 축제 파트너로 나를 초대하기 위해 그는 먼 길을 찾아왔다. 가고 싶은 마음은 절실했으나 엄마의 완강한 반대로 끝내 가지 못했다. ‘젊은것들이 같이 밤을 보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엄마는 염려하셨고 그가 축제 파트너와 연애를 시작하며 내 첫사랑은 끝났다. 그해 가을에 내가 치명적인 짝사랑을 시작했으니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헤어질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뤼시를 따라서 여행을 했다. 가는 곳마다 가 흐르고 있었다. 뚱보 바흐가 연주하는 3시간짜리 음악극을 본 것도 같다. 뤼시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가볍게 사랑한다. 사랑에 목매지 않는 부분만 딱 닮고 싶다. 뤼시가 정말 사랑스럽지만 내 친구라면 힘들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반해서 영혼까지 증발했는데, 그녀는 어느 날 풀풀 풀씨가 되어 날아갈 것 같기 때문이다. 한때 나도 민들레 꽃씨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떠다니는 것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나는 땅에 심어져야 하는 사람이다. 가끔 여행지에서 들뜬 마음으로 날아다니기도 하지만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산자락에 있는 오두막이다.

 

지난해 늦가을 보뱅 작가의 부음을 듣고 나는 가슴을 쳤다. ‘너무 아깝다.’ ‘이제 그의 작품을 더는 만나지 못하는 건가?’ 작은 정원의 단풍나무 아래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슬퍼했다. 책의 리뷰를 쓰면서 때로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벼운 마음은 한 편의 긴 시라고 느껴졌고 이야기는 그저 시의 여행을 위한 장치라고 여겨졌다.

 

내가 좋아한 문장은, ‘우울증이 뭔지 아니? 월식 본 적 있어? 우울증은 월식 같은 거야. 달이 마음 앞에 슬며시 끼어드는 거야. 그러면 마음은 자신의 빛을 더는 내지 못해. 낮이 밤이 되는 거란다. 우울증은 부드러우면서 캄캄해. 남편은 반쯤 회복했어. 어둠은 떠났고 부드러움은 남았지.’ 우울증에 대한 아픈 문장이 이렇게 거미줄로 짠 베일처럼 우아하다니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당신이 사랑받을수록 사람들은 당신을 더 사랑한다. 사랑받기 위한 비법은 관계가 시작될 때에 있다. 무엇보다 사랑받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도, 갈구하지도, 원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 또한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나는 글을 쓸 때 잉크로 쓰지 않는다. 가벼움으로 쓴다. 설명을 잘했는지 모르겠다. 잉크는 구매할 수 있으나 가벼움을 파는 상점은 없다. 가벼움이 오거나 안 오는 건 때에 따라 다르다. 설령 오지 않을 때라도, 가벼움은 그곳에 있다. 이해가 가는가?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데 소나기를 맞아도 먼 산을 감싸는 비구름을 보아도 비에 젖은 메리골드의 눈물을 닦아 주어도 나에게는 가벼움이 보이지 않는다.

 

티타티티타티, 타타티타타티.’ 바흐의 음악이 이 한 문장에 들어 있다. 꽃으로 만든 망치에 맞은 기분이다. 언젠가는 나도 나만 아는 방식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뤼시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티타티티타티, 타타티타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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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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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골 마을 미용실은 동네 소식지 역할을 한다. 이런저런 사연들이 미용실을 돌아 나오면 소문이 된다. 일 년에 서너 번 들르는 미용실 의자에 앉아서 듣는 소식은 때로 애잔하다. 한 어르신이 눈매가 야무진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와 하늘하늘한 몸매인 다섯 살 정도로 짐작되는 여자아이 손을 잡고 들어와 아이들 머리를 다듬고 나가자, 남아 있던 어르신들이 일제히 한숨을 쉰다. ‘저 노인네, 이번에는 둘째 아들네 애들 맡았나 보네.’ ‘큰아들네 쌍둥이 십 년이 넘게 길렀잖아.’ ‘그것들 고등학교 간다고 떠난 게 작년이지, 아마?’ ‘큰아들은 여태 소식도 없다며?’ ‘둘째네는 늦장가 가서 그럭저럭 산다고 안 했어?’ ‘애들 엄마가 베트남으로 도망갔다잖아.’

 

듬성듬성 들리는 이야기 중에 열두 가구가 사는 동네에 조손가정이 세 가구인 곳도 있단다. 대개 아이들을 맡겨놓고 부모는 떠난다. 늙은 조부모는 여기저기 아프고, 남겨진 아이들은 외롭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맞아 멍든 곳이 시간이 흐르며 아물고 지금은 때리는 사람이 없다는 정도랄까?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에게 가하는 폭력은 다양하다. 몸을 상하게 하기도 하고 언어로 정신을 학대한다. 때로 아이들은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른 채 묵묵히 견뎌낸다. 가난해도 자식을 귀하게 여기는 부모가 있다. 그렇지만 많은 부모가 아이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딘가 아이들을 맡기고 떠난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아이들의 존재를 잊었는지 끝내 찾아오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인 소녀는 부모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이다. 소녀에게는 두 언니가 있고 아직 아기인 남동생과 곧 태어날 동생 때문에 엄마는 지쳐 있다. 아버지는 도박을 좋아하고 거칠다. 엄마는 많은 아이를 돌보고 집안을 챙기느라 힘들다. 소녀는 아버지의 손에 끌려 여름방학 동안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다. 무심한 아버지는 아이에게 필요한 옷가지조차 챙겨주지 않고 차에 도로 싣고 가버려 소녀는 킨셀라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낡은 옷을 입게 된다. 아이는 낯선 친척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몰라 불안하고 두려워서인지 자면서 오줌을 싼다.

 

젖은 매트리스에 누워서 아이는 빨리 야단맞고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그 마음을 아주머니는 가만히 어루만진다. 자신이 잘못 했다고, 오래 사용하지 않는 방에 있던 매트리스가 너무 습기가 차서 젖었다고 말하며 소녀와 함께 매트리스를 마당으로 끌고 내려와 세탁하고 말린다. 햇볕에 매트리스를 말리고 있는데 왜 눅눅한 마음이 보송보송해지는 걸까?

 

소녀는 햇볕에 잘 마른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침을 먹고 집안일을 거들고 킨셀라 아저씨가 달릴 수 있어?’라고 묻자 우체통을 향해 달려간다. 날마다 달리며 하루하루 보통 아이처럼 사는 날들이 고여있던 소녀의 마음을 조금씩 흐르게 한다. 킨셀라 아저씨와 걸을 때, 아이의 마음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일렁이지만 애써 입을 다문다. 킨셀라 아저씨는 소녀의 손을 잡고 소녀의 보폭에 맞추어 걷는다. 소녀의 아빠는 한 번도 소녀의 손을 잡아 준 적이 없다. 소녀는 집에서의 생활과 킨셀라 부부와의 생활에서 느끼는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오랜 시간 젖은 마음으로 닫혀 있던 것은 소녀만이 아니다. 어느 날, 킨셀라 부부의 마음에 있는 묵은 상처를 소녀가 알게 된다. 때때로 침묵이 필요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모른다. 나도 모른다. 킨셀라 아저씨의 말을 빌리자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은것이다. 그래서 밀드러드 아주머니처럼 남의 집 일을 꼬치꼬치 캐묻고 그들의 상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첫째는 장남이라고 둘째는 살림 밑천이라고 환대를 받았다. 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셋을 둘 팔자라는 소리를 점쟁이에게 여러 번 들으셔서 셋째인 내가 당연히 아들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딸이 태어나자 매우 실망하시고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심지어 서너 살까지 내 머리카락을 아들처럼 보이게 자르고 남자아이 옷을 입혀 기르셨다. 그래서 언니는 공주 옷에 머리 장식을 하고 돌 사진을 찍고 나는 사내아이처럼 짧은 머리에 도련님 옷을 입은 돌사진을 갖게 되었다. 넷째가 아들로 태어나자 아버지는 내게 여자아이 옷을 입히는 것을 허락하셨다. 생각해보면 아주 가벼운폭력이었던 셈이다.

 

아버지께서 오래오래 사셨다면 내 어린 시절의 차별에 대해 항의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아버지는 내 나이 일곱 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께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은 오랜 시간 구르고 굴러 작은 돌멩이가 되었나 보다. 소녀를 만나는 동안 내 안의 돌멩이가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소녀가 우체통을 향해 달리는 동안 흘린 땀방울과 킨셀라 아주머니를 위해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다 푹 젖은 마음이 섞여 흐르기 시작했다.

 

맡겨진 시간이 지나고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게 되었을 때 소녀는 흐르다가 다시 갇히게 된 마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특히 사람이 주는 위안과 따듯함을 알게 된 소녀는 그 마음을 다시 흘러가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녀의 아버지가 킨셀라 부부에게 보이는 무례함은 소녀의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 온다. 그래서 달린다. 그렇게 달려간 곳에 킨셀라 아저씨가 서 있다.

 

나는 부디 소녀의 달리기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끝내 원하는 곳에 다다르기를 바란다. 늘 마음에 냇물을 흐르게 하여 나처럼 심장이 딱딱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녀가 어떤 삶을 만나든지 킨셀라 부부가 선물한 인간에 대한 예의가 힘이 되기를 바란다. 작은 등불이 하나 켜지면 온 세상이 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소녀가 쉬지 않고 달려간 곳에 따듯한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땔감이 되어 밥을 짓고 사람들 사이에 온기를 나누어 주는 작은 오두막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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