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기
읽기에 있어 나는 철저하게 ‘약자’이다. 특히 번역 서적을 읽을 때 그러하다. 읽고 싶은 책의 언어를 내가 알지 못하니 ‘번역가’라는 ‘징검다리’를 딛고 독서의 강물을 건너야 한다. 어떤 징검다리는 오랜 세월과 거센 강물에도 굳세게 버티고 있어 안전하고 고마운 디딤돌이 된다. 반면 허술한 돌이 놓여 있으면 헛발을 딛고 강물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어디로 떠내려가는지도 모르고 휩쓸려 가다 보면 몸도 마음도 아프다. 때로는 우리 말로 쓴 책을 읽다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문장에 어지러울 때가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를 외치며 꾸역꾸역 읽고 있는데, 뇌가 폭발할 것 같은 순간이 온다. 아, 그때는 책장을 덮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용기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 있다. 나는 ‘미련함의 게이지’가 높은 사람이라 상대가 나를 내치기 전에는 먼저 도망가는 경우가 정말 드물다. 그 ‘내침’을 어떻게 아느냐고? 굳이 헤어지자 말하지 않아도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존중감’ 없는 말투에서 이별의 순간이 온 것을 알 수 있더라. 책도 읽다 보면 ‘도대체 이 작가(혹은 번역가)는 나무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하고 머리를 흔들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잘못의 첫 번째는 부실한 징검다리를 통해 독서의 강물을 건너려고 선택한 내가 죄인이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건네줄 만치 튼튼하지 못한 돌이 징검다리가 되겠다고 우겨서 생긴 비극이다. 세 번째는 굳이 엉성한 돌로 징검다리를 놓은 출판업계 사람들의 무관심이다.
번역이 좋은 책을 만나면 고마워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가능하면 그 번역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가 번역한 책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한다. 세상의 모든 책을 만나게 해주는 ‘훌륭한’ 번역가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나는 내 나라 언어 하나도 제대로 말하거나 쓰지 못해 노상 비틀거리는데, 다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고 그 언어로 된 책을 번역하여 책에 중독된 사람들을 안전하게 미지의 세계로 안내해 주다니, 진심 멋있다.
쓰기의 공백만큼은 아니지만, 읽기의 공백 기간도 길고 길었다. 이제야 알라딘 서재에서 자주 언급되는 책들을 눈여겨보고 한 권, 한 권 읽고 있는 발걸음이 더디다. 멍하게 보낸 4년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아깝지는 않다. 그 덕분에 좁은 머릿속이 비어서 새로운 경험을 담아둘 공간이 생겼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생에서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동안 몇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내 몸이 읽기를 허용하는 기한은 언제까지일까? 나는 영생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그 이유가 책을 읽고 노래하고 영화를 보고 시를 쓰고 싶어서 그런다. 그렇지만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하게 된다면 산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먹을 음식을 내가 만들고 내 몸을 내가 씻어주고 가고 싶은 곳을 내 발로 걸어서 가고 싶지만, 늙은 내 몸이 힘들어하면 오래 아프지 않고 잠이 드는 것처럼 떠났으면 좋겠다.
오늘은 책 읽기에 대해 말하다가 ‘잘 죽는 법’에 집착하는구나. 요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정말 감사하다. 하루하루 즐거운 독서를 하자, 나여. 불과 몇 년 전에 회사 책상에 머리를 찧고 울부짖으며 ‘갖고 싶다.’ 외친 그 시간이 지금 너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