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감독 : 압델라티프 케시시, 출연 : 레아 세두, 아델 에그자르코폴로스

 

 

짝사랑을 한 적이 있다. 스무 살 때 일이다. 생각해보면 그는 그리 특별한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그 당시 그를 향한 내 감정이 유난했던 것 같다. 지금 시선으로 보면 내 행동은 거의 스토킹에 가까웠다. 그가 자주 가는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다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모습을 한숨 쉬며 지켜보고는 수첩에 울음이 넘치는 글을 쓰곤 했다. 그렇게 채운 수첩이 5권이 넘으니 꽤 오래 집착했던 것 같다. (그 수첩, 아직도 남아 있다)

 

20여 년이 흐른 후,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는 네 사랑이 무서웠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네 환상 속의 남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 네가 조금만 나를 덜 사랑했다면 우리는 어쩌면 지금쯤 같은 집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라며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며 돌아서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그대야말로 나를 환상 속의 여자로 생각한 것은 아니신지?

 

영화를 보며 스무 살의 나를 보았다. 사람에게 매혹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 어느 순간 들어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람을 헤집어 놓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된다. 심지어 가로등이나 울퉁불퉁해진 인도를 보지 못해 부딪히거나 헛발을 딛고 넘어지게 만든다. 그렇게 온몸에 멍이 들고 마음이 뭉개지고도 그를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어떤 색깔일까? 엠마의 머리칼일까? 아니면 전시회장을 나와서 걸어가는 아델의 원피스일까? 영화는 문학소녀 아델이 미술전공 엠마를 만나 사랑의 폭풍속을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갈등의 낭떠러지에서 아프게 추락하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두 사람이 아낌없이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엠마가 전시회 준비에 몰두해 있는 동안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아델이 여리고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한순간 일탈하게 된 것이 두 사람의 이별의 원인이 되었다고 느껴진다. 특히 아델의 외도상대가 남자였다는 것에 엠마가 더 상처받지 않았나 어림짐작한다. 그리고 쐐기를 박는 아델의 한 마디, ‘너와의 사랑을 사방에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내 사랑이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같고 나를 숨기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 나는 그 장면에서 엠마에 빙의하여 아델에게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다. 상대를 치열하게 사랑하는 마음도 귀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픈 사랑이 주제일 텐데, 나는 두 사람의 가족이 보이는 태도에 관심이 갔다. 특히 엠마의 엄마와 새아버지가 아델을 엠마의 파트너로 인정하며 환대하는 모습과 달리 아델 부모님의 어딘가 불안한 듯 보이며 두 사람을 살피는 모습에 이어 아버지가 엠마에게 다짜고짜 남자친구 직업이 뭐냐?’고 묻고 조금 머뭇거리던 엠마가 사업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예술을 하려면 돈 많은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쓴웃음이 나왔다.

 

예술(그림)을 하는 사람을 몸과 마음을 바쳐 십 년 가까이 받들어 모시고 산 적이 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부자가 아니라서 인지, 그가 쓰는 돈을 감당하지 못하는 내 비루한 월급 때문인지 그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아델과 엠마가 같이 살 때, 식사준비나 파티준비는 아델이 담당한 것 같다. 아델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한 파티에서 엠마의 친구들인 (대부분) 예술가들이 하는 대화를 아델은 이해하지 못해 불편해한다. 그래서인지 파티 참석자들에게 부지런히 서비스하려고 한다. 보다 못한 한 친구가 아델에게 좀 앉아봐, 너도 좀 쉬어야지라고 말할 때, 가슴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내가 모시고 산 예술가가 전시회를 할 때마다 새벽부터 개막식을 위한 접대용 음식을 준비한 나는 늘 테이블을 살피고 부족한 음식을 채우느라 바빴다. 그가 문화면 기자와 인터뷰를 하거나 이름이 좀 알려진 선배들에게 자신의 그림에 대해 오랜 시간 말하고 있을 때,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나는 가림막 뒤에서 빈 접시를 채우고 다시 날랐다. 한동안은 그 상황이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 감당할 수 없이 화가 났다. 그에게 불편함을 얘기하자, 그는 그럼 음식준비 하지 말고 케터링을 부르고 네가 돈을 내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그동안 전시회 비용을 조금이라도 절약하려고 노력한 나는 그 말에 무너졌다.

 

사랑 영화에 인생의 쓴맛을 끼얹으니 초라하구나. 여러 사람이 영화의 섹스 장면에 대해 말을 하던데, 과연 화면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역대급 장면이었다. 두 배우의 열연이 거의 전투적으로 느껴졌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는 이제 순하고 순한 맛으로 남게 되었다. 영화가 개봉되고 엠마를 연기한 레아 세두가 섹스 장면을 촬영할 때 느낀 불편감에 대해 인터뷰에서 언급했다는 말도 있다.

 

삼 년이 지나 재회한 자리에서 아델은 엠마의 마음을 다시 갖고 싶어 몸부림친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들이댄다. 엠마도 그 사랑표현을 거부하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말한다. ‘나에게 다른 가족이 있어.’

 

그 후 전시회에 찾아간 아델을 엠마는 반갑게 맞아 주지만, 이내 예술가 친구들과 얘기하거나 혹은 새로운 연인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델은 전시회장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오래전 파티에서 아델을 걱정하던 친구가 관심을 보이고 염려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아델은 조용히 전시회장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천천히 골목길을 걸어간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뒷모습이 슬프도록 아름답다.

 

여담으로 문학소녀 아델과 미술전공 엠마가 사르트르에 대해 대화하는 부분이 좋았다. 이별 후, 두 사람이 대화하던 벤치에서 울다가 잠드는 아델을 보니 눈시울이 시큰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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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갔어, 버나뎃


감독 : 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 : 케이트 블란쳇, 크리스틴 위그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를 좋아한다. 특히 블루 재스민캐롤에서의 연기가 좋았다. 두 영화는 오래전에 (1년 이상 지나면 먼 옛날) 보아서 감상평을 쓸지 모르겠다. 쓰고 싶은 마음은 강렬하지만 그러려면 영화를 다시 봐야 한다. 2023712일에 알라딘에 가입했다. 그동안 도서 구매는 가족의 아이디로 했다. 서재 활동을 하고 싶어 가입했지만 이제 알에서 깨어난 알린이로 걸음마를 하고 있으니 쓰고 싶은 글을 언제 다 쓸지 모르겠다.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버나뎃은 천재적인 건축가였다가 일련의 사고(?)를 겪고 엄마로서 삶에 집중한다. 네 번의 유산 끝에 태어난 딸, 비와는 친구처럼 다정한 관계이다. 남편 엘진은 마이크로소프트사에 근무하는 유능하고 일을 좋아하는사람으로 등장한다. 건축을 전공한 버나뎃이 사는 집은 낡고 빗물이 새고 있으며 정원관리를 하지 않아 이웃과 마찰이 생긴다.

 

영화가 시작하고 앞부분에서 나는 버나뎃의 집 상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건축가라며? 집 꼴이 왜 그래? 나중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여기저기 빗물받이 양동이가 놓여 있다든가, 강아지가 갇힌 2층 방문이 열리지 않으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유리창을 깨어 구출한다든가, 하는 장면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장면은 버나뎃이 오랫동안 누르고 산 스트레스로 인해 자신과 주변을 돌보지 못해 생긴 일로 여겨진다.

 

다른 이웃들에게는 다정하지만 버나뎃과는 앙숙인 이웃 오드리와의 일화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내가 사는 시골에서 나는 동네 미친년이다. ‘두레를 중요시하는 마을 어르신들이 보기에 나는 완전 유아독존인 때문이다. 처음 이사하며 인사(음식 대접)를 한 것 말고 마을 모임에 가지 않는다. 물론 마을에서 진행하는 최소한의 공동체 활동은 한다. 다만 마을회관에서 같이 밥을 먹는다거나 정자에 모여 채소를 다듬거나 하지 않는다. 어르신들은 함께를 기대하시지만 나는 내 마음이 가는삶에 집중한다. 그래서 불편한 시선을 감수한다. 코로나에 순기능이 있다면 혼자 있고 싶은 사람혼자 있어도 되게한 것이다.

 

남편 엘진의 표현에 따르면 버나뎃은, 뉴욕을 떠나 살게 된 시애틀을 욕하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그녀는 이웃의 참견이 몹시 불편하다. 그래서 언덕에 있는 블루베리 나무를 없애면 폭우에 토사가 흘러 작은 산사태 같은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설명 없이 이웃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라며 블루베리 나무를 없애 버린다. 이웃과 대화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버겁기 때문이다. 사실 버나뎃이 가장 버거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인 것 같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 내가 왜 이러지?’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최연소 맥아더상을 수상한 천재적인 건축가지만 아내로 사는 것이, 엄마로 사는 것이 너무 벅차 보인다.

 

남편이 버나뎃을 정신과 집중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확신하며 정신과 의사와 상의하고 거의 강제 입원시키려고 하는 대목에서 똑똑한 여자를 다락방에 가둔미친 여성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특히 아름답고 영리하며 약초를 잘 다루고 주변을 돕고 살아 마녀로 처형된 여자들의 이야기 말이다. 인류 역사상 잘난 여자는 죄인이었다. 심지어 버나뎃의 빛나는 지성과 당당한 태도에 매료되어 결혼한 남편이 가장 앞장서서 그녀를 몰아댄다.

 

영화를 보고 좋았던 장면은, 버나뎃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앙숙인 오드리에게 도움을 부탁한 것이다. 오드리는 도움이 절실한 버나뎃에게 다정한 이웃이 되어 준다. 그리고 일반인은 갈 수 없는 남극기지에 (예외적으로) 갈 수 있도록 버나뎃을 돕게 된 사람이 내가 괴짜와 천재를 좋아해서 다행인 줄 알라남극기지에서 5주를 보내려면 각오해야 한다. 반사회적인 성격이 필요하다, 외출을 할 수 없고 샤워도 하기 힘들고 특히 혼자 지내야 한다고 말하자, 버나뎃이 내가 지금까지 20년 동안 훈련해 온 것이라고 대답하는 부분이다.

 

나도 한 20년 훈련하면 버나뎃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을까? 공동체 생활을 중요시하는 시골에서 혼자지내는 것은 수월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금쪽같은 시간과 저질 체력으로 부족한 에너지와 먹고사니즘의 발목을 스스로 잘라 눈물 나게 부족한 돈을 나 외에 다른 곳에 쓰고 싶지 않다. 지금, 이 시간을 얻기 위해 그동안 나름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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