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각의 번역 - 요리가 주는 영감에 관하여
도리스 되리 지음, 함미라 옮김 / 샘터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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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는 음식과 관련한 책들이 꽤 있다. 음식 책 하면 단연 떠오르는 레시피 북도 있고, 음식의 역사에 대한 책도 있고. 한마디로 ‘음식’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에서 세분화된 여러 장르의 책들이 있다. 그 여러장르 중에서도 없는 장르가 바로 ‘철학’인데, 이 책으로 하여금 음식에 대한 철학 책까지 내 책장에 꽂히게 되었다. 음, 맞다. 이 책에 대한 정의를 내리자면 ‘음식의 사유와 철학’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음식과 철학’이라고 하니, 이 책이 뭔가 무겁게 느껴지는데? 하지만 전혀 그렇지않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거운 철학이 아니라, 한번쯤 생각해보았을 법한 그런 생각이 담겨있는 것 뿐이다. 예컨데 이 음식은 어떻게 내 밥상 위에 올라왔을까? 이 음식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뭐 이런 생각들이라고나 할까. 



일상에서 변화를 실천하고 연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바로 부엌이다. 얼마나 기적적인 일이 거듭되는가. 볼품없는 감자 한 알이 감자퓌레가 되고, 뇨키가 되고, 감자수프, 포테이토 수플레로 변신하는가 하면, 밀알은 빵과 파스타가 되고, 크로와상과 피자가 되며, 돼지고기는 베이컨과 돼지고기 구이, 테부어스트가 된다. 우리 아이는 특히 동물이 살코기가 되어 접시에 오르는 변화에 엄청나게 몰두했었다. 


“이건 전에 뭐였어?”


아마도 우리가 보다 더 자주 물었어야 할 질문이 아닌가 싶다. 너무도 많은 고통이 그 변화 과정에 숨어있으니까. p 044



“이건 전에 뭐였어?”


밥상위에 올라온 음식을 아무생각없이 먹어재끼던 내 3n년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 아이의 질문이다.



내가 먹는 육고기의 시작은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던 소, 돼지, 닭같은 동물들이다. 태초에 이 동물들이 처음부터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난것은 아닐진데, 인간보다 약하다는 이유로 어느순간부터 인간에게 가축화되어,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나기 시작했다. 말이 쉽지, 이 동물들을 인간이 먹으려면, 동물들이 죽어야 한다. 칼로 목을 치든, 약으로 죽이든, 죽이는 방법은 다양할거니 패스하고. 문제는 이 동물들이 죽어가며 겪는 그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생각해보았을까 하는 점이다.



난 인간들에게 먹히기 위한 동물들의 죽음에 대해, 단연코 생각해본적이 없다. 심지어 어렸을 때 시골 한 읍내 시장에서 살아있는 닭이 한 기계에 들어가 순식간에 털이 다 뽑히고, 죽어서 나온 것까지 보았음에도 말이다. 그 모든 일을 당하는 닭에겐 엄청난 고통이 있었을 것이며, 엄청 잔혹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는 그 상황을 개의치않게 보았다. 그저 ‘저 닭은 누군가가 먹기 위한 치킨이되겠구나!’ 싶었을뿐.



적어도 내가 요리를 하는 재료들이, 내 밥상위에 올라오는 음식들이 그냥 쉽게 생겨나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내 밥상에 올리온 모든 음식들이 내 피가 되고 살이 됨에 감사하며 먹어야지.



우리 모두에게 뇌 요리는 색다르면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음식으로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 어렵다. 정말로 네 명의 아이를 위해 송아지의 뇌가 네 개나 있었나고? (……) 우리가 송아지의 뇌를 앞에 두고 역겨워했다면, 송아지 뇌 요리의 광팬들은 스파게티를 보면서 역겨워하지 않았을까? p 059



나라마다 소비하는 음식들 중에서 유독(!!!) 살고 있는 문화나 종교에 따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음식들이 있다. 내 기준에서 보면, 중국에서 먹는 박쥐나, 동물의 뇌 뭐 이런 것들. 반대로 외국인들이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들을 보면 역겹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이 모든 걸 문화의 차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래도 역겨운건 어쩔 수 없지않나. 하지만 그렇다고 “왜 이런걸 먹어? 역겨워! 이런건 먹으면 안돼!” 라고 말하면, 그건 오지랖중에서도 대형 오지랖이랄까. 그냥 ‘아, 저 나라는 저런것도 먹는구나’ 하고 넘어가면 될일이다. 그저 서로 취향존중을 해줘야 하는 부분이라는 것.



개인적으로 이해안되는 부분중 하나가 ‘식용 개고기’에 대한 논쟁이다. 개를 아낀다는 사람들은 식용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야만인 취급하며, 좁은 사육장에 있는 개가 불쌍하다며 반대한다. 근데 그들이 반대하는 사유가 오롯이 ‘개’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이 참 그렇다. 닭이나 돼지들도 대부분 좁고 더러운 사육장에서 살며, 때에 맞춰 도축되고, 사람들의 밥상에 오르는데 왜 이에대해선 반대하지 않는걸까? 개, 돼지, 닭 모두 다 같은 동물인데, 개는 반려동물로 키우는 사람이 많으니 먹으면 안되고, 상대적으로 식용가축에 속하는 소, 돼지, 닭은 어떤 환경에서 키우든 먹으면 그만이라는 걸까? 참 이중적인 마인드다. 



다 바꾸지 못할거면, 그냥 서로 취향존중하는게 어떠한지-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우유는 지구촌 전체에 걸친 문제이다. 유럽은 지나치게 많은 우유를 생산하면서도 아무런 책임도 지려하지 않는다. 소규모 낙농 농가는 대규모 낙농업자 때문에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는 터무니없이 많은 우유를 생산하려고 젖소의 건강을 해친다. 더는 소를 목초지로 내보내지 않는다. 우리의 전원도 덩달아 황량해지고 있다. 우리가 생산한 우유를 분유로 만들어 수출하는 바람에 다른 나라에서는 낙농법이 파탄 일로를 걷고 있다. p 077



초콜릿이 주는 위로 덕분에 우리는 때때로 실패와 좌절, 근심을 잊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삶의 모든 좌절과 고통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미리 초콜릿을 먹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너무 많은 칼로리를 섭취하는 것은 곤란할테지만. 그리고 아동을 노동에 투입하거나, 거대한 코코넛 농장으로 환경을 파괴하는 등 정치적인 이유에서 피해야 하는 특정 제품도 제외해야 할 것이다. 이젠 아무것도 간단하지가 않다. 하다못해 초콜릿 하나 먹는 것도 말이다. p 089



나는 독일에 있는 모든 닭이 한목소리로 깊은 한숨을 내쉬는 걸 듣는다. 닭의 삶은 소름끼치도록 끔찍해졌다. 우리가 닭의 생육 환경에 무관심해지기 시작한 이후부터. ‘유기농 닭’이라고 해서 크게 나을 것도 없다. 왜 우리는 몇십 년이 흐르도록 칸칸이 쌓아 올린 닭장과 병아리 분쇄기를 두고만 보고 있을까? 뭐가 잘못된걸까? 제정신이긴 한 걸까? p 104



독일로 돌아온 나는 내 손에 들린 아보카도를 바라본다. 녹색의 황금. 아보카도에 얽힌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웅웅거린다. (……) 아보카도 토스트, 과카몰레에 대한 나의 열정, 아보카도 전쟁, 물 부족, 누구도 이 모든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보카도에 ‘혐오 식품’이라는 뜻으로 ‘Hass’라는 작은 스티커를 붙이는 건 어떨까? p 196



환경 다큐도 꽤 즐겨보는 나로써, 이런 부분들은 꽤 마음이 아프다. 



과카몰레를 즐겨먹던 나인지라, 마트가면 아보카도 한 두개씩 꼭 집어왔었는데, 이 아보카도가 물 부족에 엄청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난 후 섣불리 아보카도를 사먹지 못하게 되었다. 조금더 들어가자면, 아보카도는 물 사용량도 많지만 ‘탄소발자국’도 큰 식품중 하나다. 



‘탄소발자국’이란, 개인이나 국가 또는 아보카도 같은 이런 과일같은 모든 것들이 직, 간접적으로 발생기키는 이산화탄소같은 온실기체의 총량이다. 한마디로 탄소발자국이 클 수록 온실기체 발생량이 많다는 이야기이며, 지구의 기후변화에 엄청나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아보카도는 물 사용량도 어마무시하지만, 탄소발자국도 엄청시리 커서 지구를 점점 망가트리는 대표 과일중 하나라고나 할까. 뭐, 아보카도가 이런 결과를 원하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이렇게 된 것일뿐. 아보카도를 사례로 들긴했지만, 대게 먼 외국에서 날라오는 열대과일류는 탄소발자국이 큰 것들이라 할 수 있다(열대과일 농장을 만들기 위한 산림 파괴, 저임금 노동착취도 부수적으로 따라온다).



즉, 우리가 열대과일을 즐겨먹음으로써, 나도 모르게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아니 뭐 그렇다고 먹지말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모르고 먹는 것보단 알고 먹는게 낫다고 생각하는지라. 뭐, 그렇다.



우리에게는 동물의 예술 작업에 대한 심미안이 전혀 없다. 그런 이유로 복어는 알아서 미리 대비했을 것이다. 복어는 독성이 매우 강하다. 일본에선 매년 복어 독에 사망하는 사람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식당에선 복어 살로 만든 요리, 특히 복어 간 요리가 별미로 손꼽힌다. (……) 복어는 비교적 자기 자신을 잘 보소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인간을 셈에 넣지 못했다. 그사이 품종 개량이 돼서 독성이 없는 복어가 나온 것이다. p 141



복어 독! 복어요리를 꽤나 좋아는 나인지라, 신랑이랑도 이런 동식물의 심미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다. 예컨데 복어는 분명 살아남기 위해 체내에 독을 만들었을거고, 매운 고추도 살아남기 위해 캡사이신을 만들어냈을거다.하!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동식물들의 지혜는 인간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복어에 독이 있어도 인간은 어떻게든 그 독을 제거하고 복어를 먹고, 고추가 아무리 매워도 인간은 땀을 뻘뻘흘리며 먹는 등 인간은 음식앞에선 목숨조차 내걸 정도로 진심이니 말이다.





지금까지 음식을 먹으면서 이토록 식재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책 덕분에 내 생각의 폭이 매우 넒어진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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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 - 시인이 보고 기록한 일상의 단편들
최갑수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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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을 때 전문서적이나 지식습득을 위한 책의 저자 이력은 중요사항(!)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에세이나 수필은 저자의 이력에 크게 개의치 않아해서, 이력부분은 잘 안보는 편이다. 그래서 이 에세이도 으레 그렇듯 표지를 펼치고, 책을 읽으려고 하다보니 문득 저자의 이력이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이 여행에세이다보나 당연히 저자는 여행작가라는 내용의 이력만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자의 이력 중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이력이 있었다. 바로 <EBS 세계테마기행-필리핀> 출연이라는 문구. 어쩜세상에나, <EBS 세계테마기행>은 내가 즐겨보는 방송이고, 심지어 코로나시국인 이때 매주 재방송해주는 것까지 챙겨보는 나인데, 어쩌면 내가 보았던 편에서 저자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괜시리 저자가 내가 즐겨보는 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에 출연했다고 하니, 이 책이 달리보인다. 왜인지 몰라도 그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장소들을 또 한번 보게 될 것 같아 기대가 되고, 괜히 더 정감가고 막 그러기 시작했다는 건 안비밀!



책 표지와 작가의 이력만으로 당연히 여행에세이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 이 책 『오래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읽고보니 이 책은 단순한 여행에세이가 아니었다. 하긴 책 제목만 보아도 여행에세이와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던건데!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다 읽고나서 느낀 건, 이 책은 여행에세이이자 힐링에세이, 거기에 감성을 두스푼 곁드린 책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멋진 감성 여행사진이 실려있는 여행에세이는 시중에도 많다. 고로 널리고 널린 여행에세이 가운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언가 그 책만의 특징이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그 특징으로 ‘감성사진’과 저자 특유의 ‘위로’를 담은 것이었다.





맥주를 마시며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여행을 떠나온 그들(혹은 우리들) 모두가 얼마나 개성 있고, 멋있고, 다재다능한 친구들인지 알게된다. 그러니 당신.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특별하고 비범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평범해지지 못해 안달인거죠? p 027



난 살면서 평범한게 제일이라 생각했다. 평범해야 사람들 속에서도 눈의 띄지않고, 평범해야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있었을 재능이나 기술도 없는 것마냥 치부하며 숨죽이고 조용히 살았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그렇다. 왜 우린 굳이 .. 아득바득 평범해지려고 노력하는 걸까? 사람마다 다 다른 재능이 있고, 다 다른 능력치가 있기에, 같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느샌가 우리는 ‘평범’이라는 단어아래 모여서, 모두가 같은 모습을 하길 바라고 있었다.




대체 왜 우리는 ‘평범’이라는 단어 아래 모이려고 하는걸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는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해서 배척하는 우리 사회의 영향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저 어떠한 재능이 특출나거나, 남들과 다른 것을 좋아하거나, 남들과는 다른 특징을 가졌을 뿐인데 말이다. 그저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면 되는 것 뿐인데, 우리가 사는 사회는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각자 다른 재능을 품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언제쯤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가 찾아올까? 그날이 오긴 올까?




 



옛날엔 ‘청춘’ 이라하면, 다들 십대후반에서 이십대를 말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삼십대인 나만봐도 그렇다. 내 십대후반부터 이십대중반까지는 크게 빛나던 삶을 살진 못했다. 그냥 계속 학업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제대로 하지 못했달까. 그래서 딱히 기억에 남는 시간도, 경험도 크게 없다. 하지만 이십대 후반에 들어서, 결혼이라는 터닝포인트를 기점으로 그때부터 오롯이 나만의 ‘삶’이 시작되었다. 



누군가 내게 당신의 청춘은 언제였는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테다. 열정, 불안, 무모함, 호기심이 청춘을 정의하는 단어라면 내게 청춘은 이십 대 시절이 아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그때가 내게 청춘이다. p 051



저자는 말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그 때’가 바로 청춘이라고. 고로 내가 하고 싶은 일, 즐기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끼는 바로 그 때가 청춘이니, 내 청춘은 지금이다. 아마 이후로도 내 청춘은 계속 이어질것이다.



어른이 되기위해 가장 먼지 배워야 할 게 뭔지 알아?



세련되게 거절하는 방법을 알 고 있을 것.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이 안면으로 일을 들이밀 때는 일단 생각해 본 다음 메일로 답을 드리겠다거나, 상사가 당직을 바꾸자고 할 때를 대비한 적당한 핑곗거리 정도는 만들어 둬야지. 곁들여 말한다면,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일은 경험에 비춰보건데, 시작하지 않는게 좋아. 일도 그르치고 인간관계도 불편해질 뿐이지. 기억해둬. 거절을 잘하면 인생이 두 배는 편해진다는 것을. p 070



아, 급 인생의 쓴맛이 나타난다. 난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에 뛰어들면, 그때부터 어른이라 생각했다. 근데 어른이라 생각한 나와, 학생이었던 나와의 차이점은... 크게 없었다. 뭐지? 난 분명 회사에 다니고, 월급을 받고있는데 말이다. 그러다 문득 회사에 오래 다니던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아, 진정한 어른은 상대방이 무언가를 떠넘겼을때, 기분나쁜 티를 내지 않고 잘 거절하는 구나!! 상대방이 무언가를 떠넘겼을때,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서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어른은 커녕 풋내기에 불과했구나^_T. 이걸 깨닫는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오랜시간동안 나는 떠넘겨진 많은 일을들 수행했고, 나는 회사에서 어느새 스마일맨.


 



 



하지만! 지금은 조금 어른이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이젠 절절한 타이밍에 ‘거절’이라는 스킬을 발휘할 수 있게되었으니까. 거절만 잘해도 내 회사 생활의 1/3이 편하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거절’은 내 주요 무기가 되었다.



회사생활의 나머자 2/3은...?? 사람이다. 어쩔수 없다. 그냥 버티는 것^_T......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좋은 여행이란?


그러면 이렇게 답한다. 자신의 내면을 넓히는 일,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 일, 이런 것 다 좋다. 훌륭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것 다 떠나서 좋은 여행은 현지인들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는 것,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다른 여행자들과 자연을 배려하는 것, 자아를 찾아 떠나는 나의 여행보다 길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당신의 여행이 수백 배 더 아름답다. p 136



완전 공감에 공감을 덮은 말이다. 코로나19 전까지만해도 난 해외(..라고 하고, 일본이라고 읽음ㅋ)를 자주 나갔었는데, 그때마다 느낀게 있다. 왜 남의 나라까지 와서 고성방가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는지!! 왜 남의 나라까지 와서, 개도 못 줄 버릇을 꺼내며 현지인들에게 민폐를 끼치는지!!! 왜 남의 나라에서 자국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지!!!!!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이렇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난 해외에 가면 우리나라 국민을 만나는게 제일 싫었다. 이제와 말하지만, 일본에 갔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선 일본인인 척 했다. 꽤 척을 잘했는지, 일본인조차도 나에게 길을 물어보았던 신기한 상황ㅋ



뭐 그렇다. 그렇게 현지인에게 민폐를 끼치던 일부 사람들의  행태를 잘 보면 SNS 등에선 무언가를 배운 척, 깨달은 척 한다. 하, 정말 그들은 그 여행에서 무언가를 배운게 맞나? 그런 여행에서 무언가를 배웠다고 한다면, 그들은 정말 여행을 떠나면 안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 여행에서 배운 건 현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밖에 없었을 테니.



그러니까, 좋은 여행이란 그저 한가지다. 그 나라의 혹은 그 동네 사람들과 동화되는 것. 그들이게 민폐끼치는 행동을 하지 않고, 그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좋은 여행이다.




아유. 해외를 못나간지도 벌써 2년인데. 언제까지 <EBS 세계테마기행>을 보며 랜선 해외여행을 해야하나. 비행기 타고 해외로 날라가고 싶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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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9-16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테마기행 팬 여기도 있어요 ! ㅎㅎ청춘에 대한 정의가 멋있어요 *^^*
 
지식 편의점 : 문학, 인간의 생애 편 - 지적인 현대인을 위한 지식 편의점
이시한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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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이나, 회사 내 자리에는 읽어야할 책이 한 움큼있다. 내가 책을 사는 속도와 내가 책을 읽는 속도가 너무 다르다보니, 자꾸 읽을 책만 쌓이는 현실! 이 책 『지식편의점: 문학, 인간의 생애편』도 그렇다. 앞서 1권을 읽었을 때 넘 맘에 들었었는데, 2권이 나온다는 소식에 내적댄스를 춘 지가 언 몇달 전. 그렇게 2권이 발간되었으나, 바로 읽지 못하고... 이제서야 읽어내린 내 슬픔이란 흑흑흑.



앞서 지식편의점 1권에서는 내가 읽었던 책들이 꽤나 있었는데, 이번 지식편의점 2권에서는 아주 소오름돋게도 내가 읽었던 책이 단 한권도 없다. 어쩜 이럴 수 있나. 나 쫌 분발해야하는거 아닌가^_T 하지만 또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책들도 아닌지라, 심지어 어떤 책들은 대략적인 내용도 알고있도 『파리대왕』은 영화로 본적이 있었으니 ㅋㅋㅋㅋㅋ. 한마디로 지식편의점 2권을 읽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는 이야기!



이 책은 인간의 생애를 총 8파트로 나누어, 각각 파트에 맞는 고전에 대한 해설이 담겨있는데, 그 8파트 중에서 유독 내 마음에 와닿았던, 조금 깊이 생각하게끔 했던 구절들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화가 고갱, 그 고갱을 모티브로한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 그들은 금융업에 종사했고, 자의든 타의든간에 화가로 변신했다. 화가로 변신한 뒤에는 원주민이 사는 섬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작. 소설 속 스트릭랜드의 유작은 그의 유지에 따라 없애버렸지만, 고갱의 유작이라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현재 남아있는 작품이다. 물론 실제로 고갱이 죽기전 그린 작품은 아니지만, 그가 자신이 딸이 죽자 인간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며 그린 작품다. 이 그림속에는 사람이 갓 태어난 아기부터 청년, 늘어가는 노인이 한 폭에 남겨있다.


우리 각자에게 각자의 여정이 있습니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점을 어떤 식으로 이어갈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그러니만치 어떤 것이 옳은 길이고 어떤 길은 옳지 않은 길이라는 식의 단정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고갱의 삶을 되새기며 생각해볼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p 047 / 『달과 6펜스』



과연 여기서 자기가 원해서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우리의 탄생에 있어서 자의는 없다. 우리를 낳아준 부모의 의사에 따라 태어나게 된 것 뿐이다. 하지만 태어난 후부터는 다르다. 물론 유년기에는 아직 자아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기에,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도움일 뿐이다. 태어난 이후의 삶은 오롯이 내 몫이며, 내가 ‘스스로’ 갈 길을 선택해야한다. 



물론 내가 선택한 그 길 위에는 항상 행복만 있는 건 아니다. 분명 고난이나, 실패가 나타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선택한 그 길에 실패가 반복된다고 했을때, 과연 내가 선택한 그 길이 옳지 않은 길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애초에 ‘옳은 길’이 무엇인지, 어떤 길인지 정답은 없다. 사람마다 걷는 길이 다르고, 사람마다 그 길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다르다. 고로 내가 선택한 그 길이 옳은지 아닌지 결정하는 사람은 오롯이 ‘나’ 일뿐이다. 



항상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옳은 길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되돌아보며 걷다보면, 나중에 그 길을 돌아보았을때 ‘아, 나는 내 자신에게 부끄럼없이 옳은 길을 걸어왔구나’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누구나 어른이 되면서 어린 시절에 가졌던 순수한 감정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혹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 그런 감정을 소유했던 기억조차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어린이는 젊은이가 되고, 젊은이는 늙어가는 것은 당연한 순리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는 피터팬이 활약하는 네버랜드에나 박제돼 있는 것이고, 현실에서는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교육과 압박이 순수의 기억과 지향을 지워버리죠. p 075 / 『호밀밭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주인공은 ‘완벽한 순수함’에 집착한다. 완벽한 순수함이란 대체 무엇일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겐 찾을 수 없는 감정이다. 유년기엔 분명 가지고 있었던 감정 같은데, 조그만 사회인 학교를 다니며 순수함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학교를 졸업하고나서는 나에게 순수함이란...........아, 내 순수함 어디갔니? 내 인생에서 순수함 자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꽤나 슬퍼진다.



근데 또 이렇게 생각하게된다. 다 커서도 순수함을 지킨다는게 과연 좋은 일일까? 좋게 말하면 머리를 빠르게 굴리고, 나쁘게 말하면 얍삽하게 살아야 살아남는 잔혹한 사회에서 말이다. 애초에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작금의 사회는 순수함을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일반화를 하려는건 아니지만 보통 순수함을 지키는 사람들은 바보같다는 소리를 듣거나, 대부분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는 순수함을 지킬래야 지킬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순수함이 사라진 사회라 생각하니 조금은 서글퍼진다. 암만 잔혹한 사회라지만, 순수함이 사라진 사회면 얼마나 삭막한 사회일까. 정말 사회에 나오게 되면 내 속의 순수함들이 전부 사라질 수 밖에 없는걸까? 내 속에는 정말 순수함이 남아있지 않는걸까?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된 사실 하나, 내 속에도 순수함은 남아있었다. 무언가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것, 쉽게 말해서 덕질! 그니까 덕질을 할때 만큼은 아무것도 재지않고 순수하게(!!) 덕질에만 몰두하니, 이 얼마나 순백한 순수함인가!! 정녕 수..순수함이 맞는건가 싶기도 하지만, 하하하. 그래도 속세의 때란 때가 이미 덕지덕지 묻은, 회사에서도 이미 고인물이 된 나에게도 무언가에 아무것도 재지않고 몰두할 수 있는 순수함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그저 안도할 뿐이다^_T...



교육학 분야의 중요한 저서로 칭송받는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은 인간이 선하다는 가정하에 인간의 본성을 끄집어내는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상의 아이인 에밀을 통해 보여주는 책이라고 전작 『지식편의점: 생각하는 인간』편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장 자크 루소는 자신의 다섯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고아원에 보내버린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했었죠. 이론적으로 사람은 선하다고 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선한 아버지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본성이 자리하고 있을까요? 인간은 동물에 불과하므로 그냥 놔두면 본능만 남은 야생의 상태가 되는 걸까요? p 086 / 『파리대왕』


성선설과 성악설, 인류 최대의 논제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물론 내 생각은 성악설!!! ‘범죄’의 의미로 악하다라고 보기 보다는, 순수한 의미의 악이라고 해야할까? 뭐 그렇다. 어린아이들이 하는 행동들을 유심히 보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들이 꽤나 많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들을 나무라기엔, 이 아이들은 그 행위가 ‘나쁘다’는 개념이 없이 행한 행동이기에 나무라기도 어렵다.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그 행위를 했을뿐이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난 이런걸 순수한 악이라고 본다.



고로!!! 사람은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배워야한다. 그렇게 배워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별할줄 알아야하며, 내 속에 있는 악을 절제하고 자제해야한다. 절제하지 못하고 자제하지 못한다면?  옳고 그름을 배웠음에도 악을 절제하지 못하고, 자제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의 결말은 단 하나다. 뉴스에서 나올 법한 범죄자. 혹은 아직까지 공권력에 의해 체포되지 않은 범죄자. 그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범죄자 단 하나밖에 없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좋든 싫든 간에 하나의, 또는 여러개의 사회속에서 살아간다. 그 사회의 범주에는 가족, 학교, 직장, 커뮤니티등 아주 다양하다. 그리고 이 다양한 사회는 보이지않는 각각의 시스템으로 굴러간다. 개인들은 이 시스템에 맞춰서 살아가야하고, 시스템에서 벗어나게 되면 순식간에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거나, 혹은 그 사회에서 배제되고만다.


젊은이들이 꿈꾸는 이상은 사회라는 다리를 건너면서 현실이 됩니다. 지금의 꼰대들도 예전에는 ‘이해 안 되는 요즘 젊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꼰대가 되는 그 변화의 간격에는 시간과 그에 따른 사회생활이 놓여 있습니다. 사회적인 시스템에 적응하는 시간이었지요. ‘라떼는 말이야’는 단지 과거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동안 작용해온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해라는 베이스가 놓여 있는 말입니다. p 145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사회 제도나 규율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제적인 법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우리를 바리바리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이 시스템은 법이나 규칙 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출 수도 있지만 관습, 기대, 편견 같은 무형의형태일 수도 있어요. 이 모든 것들이 시스템을 만듭니다. p 145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특히 이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제일 강하게 작용되는 장소는 회사다. 회사라는 조직에는 분명 ‘사규’라는 눈에 보이는 시스템이 있지만, 실상은 ‘사규’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의해 강하게 굴러가기 때문이다. 예컨데 조직장을 대할 때는 어떠한 행위를 하면 안되거나, 어떠한 말대꾸도 하면 안된다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작용한다. 특히 일반적인 팀, 부서의 조직장이 아닌, 그를 넘어서는 회사 대표라면 더더욱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강하게 작용한다.



나라에서는 육아휴직을 사용하는건 개인의 권리라고 하지만, 일반적인 기업에서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건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돌아왔을 때 내 자리가 남아있을지 여전히 확실하지않고, 행여 육아휴직 후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지 않는 자리로 발령이 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부정적인 인사평가는 말할 것도 없다. 분명 우리 사회의 법이라는 시스템이 ‘육아휴직’을 사용하는게 맞다고 이야기하지만, 회사에서 작동되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은 개인이 마음 편하게 ‘육아휴직’을 사용할수 없게 만들고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미치광이가 아니고 오히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고 판명한 정신과 의사들의 소견을 소개합니다. 아이히만은 군인으로서 주어진 명령에 충실하고, 승진을 위해 자신의 행정능력을 극대화시키려고 노력한 사람이지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 살인마가 아니란 거죠. 여기서 악의 평범성이 나옵니다. 악은 악마적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물들이 체제 속에서 무비판적으로,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 명령에 순응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진단입니다. p 150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분명 불합리한 시스템이지만 우리는 순응할 수 밖에 없다. 아이히만이 그런것처럼 말이다. 아이히만을 둘러싼 환경이 나치였고, 그런 나치에 충성하고, 그저 주어진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유대인을 죽였을 뿐이다. 만약 아이히만이 나치의 시스템을 거부했다면, 아마 그는 나치에서 배제되거나 나치 손에 죽는 길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이유로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에 죄가 1도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을 하게 만든건, 나치 속에 있는 그 ‘시스템’이 원인이었다.



이렇게 읽고 보니, 사람이 일생을 사는게 참 어렵구나 싶다. 삶을 산다는 말보다는, 삶을 살아낸다가 더 어울린다고나 할까? 하. 이렇게 보니 나는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하나 걱정이 된다. 그저 앞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올바른 길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갈뿐이려나.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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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태실 경기그레이트북스 29
김희태 지음 / 맑은샘(김양수)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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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터전은 오롯이 ‘경기도’다. 유년기엔 경기도 부천에서 살다가, 청소년기에 경기도 시흥으로 넘어와서 지금까지 쭉.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시흥살이. 고로 지금까지 내 생애 터전은 경기도였고, 왠지 앞으로도 경기도일 것만 같은 그런 너낌적인 너낌이다. 고로 경기도는 나에게 특별할 수 밖에 없.........다는 잡소리는 여기까지ㅋㅋㅋㅋㅋ.




경기도는 조선왕실에서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한 장소였다. 조선왕릉의 대다수가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왕실의 꽤 많은 왕자, 왕녀의 태실도 경기도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 책의 주제는, 책의 제목에도 유추할 수 있듯 경기도에 위치한 조선왕실의 태실이 되시겠다. 여기서 살짝 우리 동네 이야기를 끼얹자면, 내가 사는 시흥에도 태봉이 하나 있는데,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조선왕실의 태실로 ...ㅎ...




책의 시작은 태실이 무엇이며, 태실을 어떻게 조성하는지 등 우리나라에 전해내려온 장태문화를 설명한다.


태실은 아기의 태를 길지에 묻는 장태 풍습으로, 이는 태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인식과 풍수지리 사상이 결합해 만들어졌다. (……) 이처럼 태를 소중히 여기는 풍습은 왕실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소중히 다루었는데,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민간에서의 태를 처리하는 방법은 크게 ▶불에 태우는 소태 ▶태를 말리는 건태 ▶땅에 묻는 방식의 매태 ▶강이나 바다에 던지는 수중기태 등이 있었다. p 018



조선왕실의 태실은 안태등록과 의궤 등의 기록이 남아 있어 태실의 조성 과정과 장태에 이르는 과정 등이 상세히 남아 있다. 조선왕실의 태실은 왕과 세자의 자녀로 태어날 경우 조성되는데, 당시 태실의 조성은 풍수지리와 결합해 입지 조건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때문에 관상감에서 길지에 대한 삼망단자를 올릴 정도로 신경을 썼다. 현재 남아 있는 태실지의 형태를 보면 정앙이 육안태에 기록된 내용을 언급하며, “땅이 반듯하고 웃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 하여야만 길지가 된다.” 라고 했는데, 이 내용처럼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 형태의 태봉을 선호했다. p 025



아기의 태를 중요하다고 생각한 우리 선조들은, 태를 처리함에 있어서 신중을 기했다. 특히 민가에서도 태를 중시했기에 풍수가 좋은 곳에 태를 묻거나, 혹은 불에 태우는 등 태를 정성스레 처리했다. 다만 왕실은 태를 묻는 데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태실을 만들었다는 것! 그 태실은 얼핏보면 죽었을 때 묻히는 봉분처럼 생기거나, 왕은 왕릉의 미니어처 처럼 보이기도 한다.



처음 태실을 접하게 되면 다 같은 태실로 인식하기 쉽지만 태실의 형태는 신분에 따라 다르다. 쉽게 왕의 태실과 왕자, 왕녀의 태실이 차이가 있는데, 학술용어로는 태실은 아기씨 태실과 가봉 태실로 구분한다. 여기서 아기씨 태실은 왕이나 세자의 자녀로 태어날 경우 조성되는데, 길지인 태봉의 정상에 땅을 판 뒤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을 넣은 태함을 묻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조성했다. p 026



가봉 태실은 태주가 왕위에 오를 경우 해당되는 기존의 아기씨 태실 자리에 추가로 석물을 가설하는 형태로…. 태실의 가봉이 결정되면 기존의 아기씨 태실 위에 장태석물을 추가로 가설하고 가봉비를 세웠다. 이때 태함이 있던 자리에 상석을 깔고, 그 위에 중앙태석을 올렸다. 흡사 외형만 보면 왕릉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p 028



왕실에서 태어난 모든 왕자녀들은 애기씨 태실이 만들어진다. 이 왕자녀 중 태주가 왕위에 오르면 애기씨 태실은 가봉태실로 한단계 변화를 거친다. 왕의 위엄에 맞게 격식있는 태실로 바꾼다는 이야기다. 각종 석물을 추가설치하고, 기존에 있던 흙 봉분도 돌로만든 석실로 바뀐다. 사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영락없는 왕릉의 축소판이다.


태실의 모양처럼 신분에 따라 태실의 규모도 달라진다.


태실의 규모

금표

수직

가봉

1등급지(왕)

300보

O

O

2등급지(대군)

200보

X

X

3등급지(공주, 군, 옹주)

100보

X

X


왕의 태실에는 태실을 관리하는 수직을 두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태실수호사찰이다. 조선 왕릉마다 수호사찰이 있듯, 왕의 태실에도 수호사찰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왕과 왕자녀 태실에는 사방으로 금표를 세웠는데, 직위에 따라 금표가 미치는 거리가 달랐다. 금표가 쳐있는 땅은 출입 또는 벌목이나 경작을 금지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곤 했다. 경작과 벌목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백성들이, 느닷없는 금표 설정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태실 조성에 있어서 많이 고뇌한 왕들도 있다.



당시 태실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각이 결코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중종실록』을 보면 장령 권벌이 원자(인종)의 태실을 조성할 안태지를 찾기 위해 경산으로 내려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안태지 주변, 집과 밭을 가진 백성들이 울부짖었다고 한다. 왜 이런표현이 나왔냐 하면 태실이 조성될 경우 집이나 밭 모두 철거를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 태실의 조성과 수개 과정에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었고, 석재를 옮기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논과 밭이 손상되는 사례도 있었는데…. p 048



이후 정조 때 숙선옹주의 태실을 창덕중 주합루 뒤 돌계단에 묻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또한 고종 때는 ▶영친왕 ▶덕혜옹주 ▶고종 제8남 ▶고종 제9남 태실 등이 후원에 조성되었다. 『태봉등록』을 보면 영조는 자신의 가봉 태실을 조성할 떄 전례에 얽매이지 않고, 태실의 규격을 간소하게 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p 053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백성들의 고충을 경감시키기 위해 태실 조성을 축소하거나, 또는 태실을 창덕궁 내에 조성하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생각이라면, 왕실에서도 민간에서 처럼 태 수습방식에 있어서 소규모로 했다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았겠지만. 뭐, 왕정시대였던 조선이었으니. 그 시대의 권력자들 치고, 태실 축소 및 궁궐 내 태실조성이란 카드를 내밀었다는 건, 정말 백성들을 위한 최선의 배려였으리라 생각한다.



태실축소나 궁궐에 태실조성에 이어 조금 더 특이한 태실의 사례도 발견되는데, 무려 무덤(...)과 태실을 함께 쓰는 경우다.



드물기는 하지만 묘와 태실을 함께 조성하는 분묘병장의 사례가 확인되는데, 정소공주와 고종 제 4남의 태실이다. 정소공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소생으로, 최초 묘는 대자동 산67-1번지에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인 1936년 5월 17일에 현재의 위치인 서삼릉 왕자, 왕녀 묘역으로 옮겨진 상태다. p 066




태실 조성이 왕자녀가 태어나자마자 진행된다기 보다는, 길지를 선정하고 뭐 이런일로 길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책에 따르면 정소공주와 고종 제4남의 태실이 무덤과 태실을 함께 쓴 분묘병장의 사례라 하니, 아마도 이들은 태실을 조성하기 전에 사망했거나 아니면 태어난 직후 사망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또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았다. 허허허. 


세종의 딸인 정소공주는 태어날 당시에는 충녕대군의 딸이었기에(그저 종친) 태실조성이 있었을리가 없다. 허나 태어난지 6년이 지나 세자이자 숙부인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부친인 충녕대군이 왕위에 등극하면서 그때서야 공주가 되었다. 정소공주는 종친에서 공주로 격상! 아마도 이후 태실 조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법한데, 하필 정소공주가 오래 살지 못하고 13세가 되던 해에 사망했다. 아마도 태실 조성과정에서 사망했거나, 혹은 태실 조성에 대한 논의가 있을 즈음에 사망했거나 둘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 느낌이다. 고종의 4남은 태어난 직후에 사망. 이는 태실 조성논의도 전에 태주가 사망하였으므로, 이 역시 무덤과 함께 태실을 조성한게 아니었을까? 하는 뭐 그런 생각이다.





비석의 뒤로 분묘로 추정되는 장소가 남아 있을 뿐, 해당 비석을 제외하면 태실 관련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 첫 방문때는 역광이라 태실비의 전면은 확인하지 못한 채 하산해야 했다. 이후 두 번째 방문에서 비신의 전면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은 ‘왕자ㅇㅇ아기씨태실’이다. 전면의 명문을 확인한 뒤 해당 장소가 태실인 것이 확실해졌고, 태주의 신분이 왕자인 것도 확인되었다. 앞서 태실이 홍치 6년, 즉 1493년(성종24)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기에 안성 배태리 태실을 성종의 왕자 태실로 고증했던 순간이다. 이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성종 왕자 태실의 출현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이자 성과였다. p 089




이 책에는 저자의 놀라운 성과도 담겨있다. 우리나라에서 태실연구는 볼모지나 다름없다. 분명 태실지로 전승되는 장소들은 있는데, 간혹 잘못 전승되는 곳들도 있거나, 혹은 분명 태실지가 맞기는 한데 훼손이 심해서 누구의 태실인지 알수가 없고, 훼손이 되다못하 태봉산 전체가 개발로 사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다보니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태실지라 전승되는 장소는 하나하나 답사를 해가며, 기존에 알려진 태주가 진짜 태실지의 태주가 맞는지 고증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주인을 알수 없던 태실지의 주인까지 찾아내는 성과를 더했다. 



예전에는 민간사학자나 재야사학자들의 연구를 잘 믿지않았고, 그렇기에 그들의 책을 읽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사이에 숨어들어 분탕치는 유사사학자들이 있었기에, 그들을 걸러내는 눈이 나에게는 없었으므로 더더욱 그랬다(실제로 뭣모르고 샀던 책이, 유사사학자의 책이어서 책값을 날렸던 슬픈 일도...). 하지만 민간사학자 중에는 이 책의 저자이신 희태님 같은 분들도 분명히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희태님만해도 우리나라 곳곳을 답사하며, 수많은 역사자료와 교차검증을 하는 등 치열하게 연구를 하고 계시니 말이다. 적어도 민간에서, 뭍밑에서 치열하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발로 뛰어 답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의 피땀으로 일구어진 연구결과과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는 역사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시흥 무지내동 태봉은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 산16번지에 있는 태봉의 정상에 있다. 태실지의 외형은 그릇을 엎어둔 형태인 태봉을 중심으로 좌, 우측면과 후면에 봉재산이 감사고 있는 돌혈의 형태다. (……) 다만 태실비를 비롯해 태지석 등이 남아 있지 않아 시흥 무지내동 태봉의 태주가 누구인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해당 태함의 발굴조사를 통해 태함의 형태와 추가 유물의 수습 등이 이루어진다면 어느 시기의 태실인지 규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입지조건이나 태함 등을 볼때 조선왕실의 태실은 확실해보인다. 이와 함께 시흥 무지내동 태봉은 현재 군 부대 안에 있어 접근성의 측면에서 제약이 있는 편이다. p 162~163





책을 넘기다 깜놀! 시흥 무지내 태봉이라니!! 여긴 내가 사는 고장에 있는... 그 태봉이 아닌가! 가보고 싶었지만 군 부대안에 있어서 가보지 못했던 그 태..ㅌ...세상에나. 더 놀라운 사실은 조선왕실의 태실로 추정된다는 저자의 이야기다. 하긴, 왕실이니 요로코럼 태실을 조성했을거고.....!


여러모로 궁금했던 곳인데,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보게 되어서 반가웠던 우리동네......까지는 아니고, 이웃동네 태봉!




1928년에 전국의 태봉 39개소를 옮겼다. 당시 임시로 경성 수창동 이왕직 봉상시에 봉안실을 신축해 태실을 이봉을 한 뒤 최종적으로 서삼릉 역내에 봉안했다. 『태봉』에 기록된 태실매안시배진차제를 보면 소화 5년인 1930년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왕과 왕자, 왕녀 49기를 서삼릉으로 옮겨 매안했는데, 매안순서는 다음 표와 같다. p 179



자, 이제 경기도내에 많은 태실을 보유하고(?) 있는 경기 고양시 서삼릉. 왜 서삼릉에 태실이 밀집해있는고 하면, 일제가 왕릉, 원, 묘, 태실 관리정책을 시행하며 약 50여개의 태실을 서삼릉 부지로 강제 이봉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날짜/ 순서

서삼릉으로 이봉된 태실

1930.04.15

1회

태조고황제, 정종대왕, 태종대왕, 세종대왕

2회

문종대왕, 세조대왕, 예종대왕, 성종대왕, 중종대왕

3회

인종대왕, 명종대왕, 선조대왕, 숙종대왕, 경종대왕, 영조대왕

1930.04.16

1회

장조의황제, 정조선황제, 순조숙황제, 헌종성황제, 순종효황제

2회

왕전하(영친왕), 덕혜옹주, 인성대군, 연산군모윤씨(폐비윤씨), 안양군

3회

완원군, 왕자수장, 건성군, 연산군자금돌이, 연산군자인수, 왕녀영수

1940.04.17

1회

연산군녀복억, 연산군녀복합, 덕흥대원군, 인성군, 인흥군, 숙명공주

2회

숙정공주, 숙경공주, 명선공주, 연령군, 영조왕녀(화유옹주), 영조왕녀(화령옹주)

3회

영조왕녀(화길옹주), 의소세손, 문효세자, 철종왕녀, 고종제8남, 고종제9남

※표에는 없으나 이구, 이진, 영산군, 의혜공주, 경평군 태실 추가 이봉: 서삼릉 내에는 총 54위의 태실이 자리함.



서삼릉 태실에 있는 태실비의 튓부분을 보면 예외 없이 연호 부분에 대한 인위적 훼손이 가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태봉』의 기록을 통해 훼손된 연호 부분이 바로 소화 5년(1930)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제가점기에 행해진 이 같은 태시르이 이봉은 명목상으로는 관리와 보호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풍수지리를 기반으로 길지에 조성한 태실 특성을 고려하면 사실상 훼손에 가까운 만행이었던 것이다. p 180



가봉비의 명문은 태주가 자신의 생전에 태실을 가봉할 경우 주상전하태실을 새겼고, 태주가 승하한 이후 가봉이 될 경우 묘호를 썼다. (……) 이와 함께 태실비에서 조성 시기를 알 수 있는 연호를 주목해야 하는데, 조선시대의 연호는 병자호란 직전까지는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명나라가 망한 뒤에는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의 연호가 사용된다. 하지만 명나라가 망했음에도 여전히 조선 사회에서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명나라의 연호가 사용되었는데, 이때 연호는 숭정기원후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를 뜻한다. p 042



일제의 태실 강제이봉은 풍수지리상 인위적인 훼손을 가했고, 조선왕실의 상징성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태실 훼손이며,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태실지의 상황을 보자면, 차라리 이렇게 서삼릉으로 옮겨진 태실들은 그나마 분실되지 않은 채 보호될수 있었기에 다행인가 싶기도 하는 모순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일제가 서삼릉으로 태실을 이봉하는 과정에서 기존 태실지에 있던 석물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심지어 수많은 태실지를 민간에 판매한 것을 생각하면, 결국 작금의 태실 훼손 시발점은 역시나 일제가 원인 제공을 한거고. 근데 또 원인을 제공했다 한들, 해방 후 바로잡을 노력을 하고자 했으면 언제든 바로잡을 수 있었을텐데, 그걸 방치한 대한민국 정부도 잘한게 뭐가 있나 싶기도 하고. 어렵다 어려워. 누굴 욕하겠는가. 시발점을 만든 일제야 원래 나쁜놈이고, 그걸 개선하려 하지 않은 대한민국도 나쁜건 마찬가지니.



이렇게 쌓이고 쌓인 태실훼손의 결과가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양주 황방리 정혜옹주 태실을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동안 태봉산은 사라졌고, 태실과 관련한 석물의 상당수도 유실되었다. 불과 21년 전에는 있었던 석물을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점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해당 태실의 사례는 방치된 태실 유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현장이다. p 107



신성군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도굴을 피하지 못했고, 이후 마을에 우환이 생긴다는 이유로 태실비가 뽑혀 굴러진 채 현재까지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 태실지 주변으로 군 참호가 만들어지는 등 태봉산의 훼손이 일부 진행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신성군의 태실은 태실비와 태함이 온전하게 남아 있고, 석물의 상태 역시 다른 경기도의 태실과 비교했을 때 좋은 편에 속한다. 따라서 더 훼손이 진행되기 전에 문화재 지정과 함께 보존 및 관리 대책이 필요한 태실 중 하나다. p 131



경기도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 산재되어있는 수 많은 태실지가 아주 소수를 제외하면, 대게 훼손되었거나 그대로 방치되어있다. 석물들이 흙에 반쯤 묻힌채 나뒹구는 경우도 있고, 비석이 훼손되어 누구의 태실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태반이고, 태실지에 이미 분묘가 조성되어 태실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는 도시개발로 인해 태봉산 전체가 사라진 경우도 있다. 태실은 분명 왕릉급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유적지라는 사실은 틀림이없다. 



조선왕릉이나 원, 대군묘 등은 나라에서 또는 가문에서 그렇게 각별하게 관리하면서, 같은 조선왕실의 왕, 왕자녀의 태실이 이렇게까지 방치되는건 모순된 상황이라 생각한다. 출가한 왕자녀의 태실은 가문에서 신경써야한다고 치더라도, 왕의 태실이나 그에 준하는 위치에 있던 태실은 나라에서 직접 나서서 하나의 유적지로써 관리하는게 맞다고 본다. 지금까지 태실지의 정확한 위치를 몰라 손 놓고 있었다면, 이렇게 민간 연구자가 태실 하나하나를 발품팔아 찾아다니고 연구까지 하면서 밥상차리고 숟가락까지 올려두었으니, 지금이라도 각 지자체에선 이 숟가락을 떠먹는 노력이라도 해야하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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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4 - 진실과 비밀 땅의 역사 4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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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땅의역사 4권을 읽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박종인 기자님의 글은 책이든, 연재기사든 무엇이든 좋으니 제발 널리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 대게 빛나는 역사, 역경을 이겨내거나 힘든 시기를 목숨 받쳐서 지켜낸 영웅들의 이야기가 태반이다. 물론 이런 빛나는 역사는 우리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애국심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더 나아가서 누군가는 빛나는 역사와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내가 생각치 못한 많은 부분을 배우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빛나는 역사만 배우는 어떤 사람들은 자긍심과 애국심으로만 중무장한채 ‘내 나라가 이런 나라야’, ‘내 조상이 이런 사람이야’ 라며 으스대기도 한다. 대게 이런 경우는 빛나는 역사만을 배운채, 징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징비하지못한 제일 큰 이유는, 빛나는 역사를 불러오기 전 어두웠던 내 나라의 문제를 몰랐기 때문이고, 영웅들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힘든시기를 불러 일으킨 내 조상들의 이기심과 권력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두웠던 역사를 모르고, 혹은 무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징비하지 못하였고, 개선하지 못하였으며, 오로지 자긍심과 애국심으로만 똘똘뭉쳐, 과거 우리의 조상들은 아픈역사를 되풀이했다.



일본의 야욕을 수차례 인지했음에도 무시하여 임진/정유재란이라는 7년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반도, 임진왜란 이후 불과 백년도 안되서 잘못된 선택으로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며 또 다시 초토화된 한반도, 수차례 근대화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차버리고 우물안에 갇친 채 부정부패한 노론의 정치로 무력하게 일본의 식민지배를 불러드린 조선말기. 이 모든 일은 우리가 그렇게 자랑해 마지않던, 또 다른 우리의 조상들이 징비하지 못하여 아픈 역사를 되풀이한 결과이다.


‘역사는 나비가 만든다.’ 북경에서 펄럭인 나비 날개가 일본을 움직였다는 뜻이다. 말차에 대한 집착은 다완에 대한 집착을 불렀고 다완에 대한 욕심은 전쟁을 통해 다기 원천 기술자들을 조선에서 폭력적으로 데려가도록 만들었다. 조슈번으로 끌려간 도공 이직광은 훗날 조선으로 돌아와 동생 이경을 데리고 조슈로 돌아갔다.(서로 다른 시기에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가 일본에서 제회했다는 논의도 있다: 노성환, 「일본 하기의 조선도공에 관한 일고찰」, 『일어일분학』 47권, 대한일어일문학회, 2010) p 047



조선 중기, 우리의 역사를 바꾼 ‘나비’는 다름아닌 대륙(송나라)에서 제조한 말차였다. 



송나라로 유학을 갔던 일본 승려 에이사이는 그 곳에서 말차를 맛보고, 말차에 매료되어 일본으로 가져간다.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섰다. 명나라는 말차를 금지하고 엽차를 장려했다. 그렇게 대륙의 말차문화는 사라졌으나, 일본에선 승려 에이사이를 시작으로 말차문화가 융성했다. 말차문화가 융성하자, 덩달아 차를 담을 찻잔, 즉 아름다운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아름다운 찻잔을 찾던 일본은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조선에선 막사발로 취급받던 도기가, 일본에선 매력적인 찻잔으로 변모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조선은, 아니 한반도는 오랜기간 도자기를 구워왔다. 조선은 백자로 유명했고, 그 이전 시대 고려는 청자로 유명했다. 조금 더 들어가면 고대 일본의 스에키 토기는 한반도 가야계 도래인에 의해 전래된 새로운 도자 기술로 만들어졌다. 그만큼 한반도의 도자기술은 월등했고, 일본은 그런 한반도의 도자기술이 탐날 수 밖에 없었다.



1592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우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선정벌을 외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에선 다성으로 추앙받는 센노리큐에게 다도를 배웠고, 다도를 즐겼다. 각설하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들은 조선의 도공들을 싸그리 잡아갔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포로송환을 시작했을 때, 대다수의 도공들은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왜일까?



1697년 어느 봄날, 그 광주에서 도공 39명이 한꺼번에 굶어 죽은 것이다. 도공은 그 직업이 천한 공업인지라 신분은 천민이거나,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천민 취급을 받는 ‘신량역천’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그릇을 굽는 업무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p 107



1542년에 편찬된 『대전후속록』은 사기장은 대대로 업을 세습한다고 규정했다. 숙종 때는 아예 관요 주변에 마을을 만들어 전속 장인들로 관요를 운영했다. 도공들에겐 직업 선택은 고사하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심지어 이들이 만드는 도자기는 오로지 국가를 위한 것이며, 개인 판매용 그릇을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한 도자기 제조만으로는 살길이 막막하므로, 몰래 개인 판매용 그릇을 굽기도 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범죄였지만, 도공들의 생존이 걸린일이었기에 암암리에 묵인, 진행되곤 했다. 직업선택과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던 도공들이 관요에서 도주할 경우 곤장 100대에 징역 3년을 받았다. 실제로 곤장 70대만 맞아도 장독으로 죽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조선의 도공들은 죽어서야 관요를 떠날 수 있었다. 조선에서 도공은 천하디 천한 소모품이었고 천민이었다.



그런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서 받은 대우는 어땠을까? 일본은 도공들에게 사무라이 신분을 주었으며, 장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며 도자기를 굽게 하였다. 그렇게 일본에서 도자기를 굽게된 조선 도공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대우를 받았고, 자기 이름을 남길 수 있었으며, 본인들이 만든 도자기가 하나의 작품을 인정되는 것을 보았다. 조선에선 아무개에 불가한 도공들이 일본에서는 도자기 장인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죽은 뒤 도자기 신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아니, 추앙받고 있다.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게 일본에서 도자기를 굽던 조선의 도공들은, 후손 대대로 지금까지도 도자기를 굽고 있으며, 그들이 만든 도자기는 전 세계로 수출되면서 중세 일본을 부유하게 해주었다.



일본 근대화 작업인 메이지유신을 이끈 주역은 대부분 이들 조슈, 사가, 사쓰마 세 번에서 나왔다. 조선에서 폭력적으로 수입한 ‘내열기술’은 용광로 건설에 기초가 됐고, 자기를 만들어 판 돈은 그 시설을 만드는 자금이 됐다. 1996년 사가번 도자기 마을 아리타에서는 이런 내용이 담긴 역사서를 펴냈다. ‘이 대포도 군함도 우리 아리타 자기가 가져다 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불꽃의 마을 아리타의 역사 이야기』. 1996) p 048



그들은 자신들을 인정해준 일본에서 끊임없이 도자기를 만들었고, 그 도자기는 중세일본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일본은 도자기를 굽던 ‘내열기술’을 발전시켜 용광로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일본은 조선 도공이 만든 도자기를 밑천삼아 메이지유신이라는 근대개혁의 밑천을 마련하고, 훗날의 동아시아 재패를 위한 군수물자의 밑천도 마련한다.



조선백자는 고려청자와 함께 대한민국이 세계만방에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아귀가 맞이 않는 기록들이 몇 있다. 우선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대한제국 황실 ‘백자꽃무늬병’은 영국제다. 대한제국 황실 문양이 금색으로 박혀 있는 ‘백자오얏꽃무늬탕기’ 제조사는 일본 ‘노리타케’이고 제조연도는 1907년이다. p 104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은 도공들을 천대했다. 영조는 영조는 기교와 사치 폐단을 막기 위해 사치스런 도자기 생산을 금지했고, 정조는 도공들에게 사적인 용도로 그릇을 제조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렇게 조선의 도공들은 굶어 죽어갔다.



조선에 남은 조선의 도공들은 그저 아무개였고, 천민이었고, 소모품이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장인으로써, 기술자로써, 전문가로써 인정받았다. 이것이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조선으로 돌아오려하지 않은 이유다. 이것이 같은 조선의 도공과,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보유했던 조선과 일본의 결말이 달라진 이유다.


서기 1771년 6월 2일, 양력 7월 13일 여름 아침이었다. 태양 볕 아래 경희궁 중간 문인 건명문 앞에는 남정네들이 우글거렸다. 사내들은 모조리 발가벗고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나란히 엎드려 있었다. 아침부터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거의 죽게 된 자들이 100명 가까이 되었다. 자빠져 있는 사내들은 ‘책쾌’와 ‘상역’이다. 책쾌는 서적 외판 상인이고 상역은 통역관이다. p 077



우리가 쓰는 한국어는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이라는 문자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세상에서 제일 단순하지만, 제일 효율적이고, 문자 탄생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무이한 문자 ‘훈민정음’ 말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백성들은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책을 읽고 쓸수 있었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조선이란 나라에서는 서점이 없었다. 서점이란 책을 사고 파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인데, 성리학적 이념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에서는 성리학에서 반하는 상업행위를 천대했다. 고로 성리학의 이치를 담고 있는 책을, 성리학에서 반하는 행위로 사고팔면 안되었다. 그래서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세종이 기껏 문자를 만들었으나, 백성들은 이 문자를 지식과 정보의 취득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식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책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니, 책을 판매하는 책쾌들이 나타났다. 백성들이 책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책쾌를 통하여 책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조 때에 이르러, 이런 책쾌들을 싸그리 잡아다가 죽여버린다. 



영조가 책쾌들을 싸그리 잡아다가 죽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청나라에서 발행된 『강감회찬』에 전주 이씨 왕실이 고려 역적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하필 이 거짓정보를 담은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는 것이다. 그냥 거짓정보도 아닌 조선 왕실을 능욕하는 거짓정보가 담긴 책을 말이다. 그래서 책을 유통하는 자, 책을 읽은자 모두를 잡아다가 죽였다. 책도 싸그리 불태웠다. 영조는 책쾌 금지령을 내렸다. 책쾌를 통해 책을 구할 수 있었던 백성들은, 더이상 책을 구할 수 없었다.



아주 완벽하게 문자와 책은 권력가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1481년 두보의 시를 번역한 『두시언해』가 출간됐다. 과거 시험에 필수적인 ‘표준 번역’교과서였다. 『맹자언해』를 비롯한 『사서언해』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경서들은 앞서 사진에서 보이듯,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 아니었다. 한문은 그대로 둔 채 한국어 어순으로 정렬한 책이었다. 다시 말해서 한자를 모르는 백성은 읽을 수 없는, 표준 해석을 위해 사대부 지식인이 찾아 읽는 전용 교과서였던 것이다.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순수 언문으로 돼 있는 반면, 이들 고급 지식은 백성들이 접근할 방법이 없는 닫힌 책들이었다. p 080



그렇다면 영조 이전엔 백성들이 책을 많이 접하고, 고급지식을 접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것도 아니었다. 훈민정음이라는 언어가 나왔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유교적인’  생활을 위한 단순한 지식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고려는 좀 달랐을까? 아쉽게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고려 역시, 문자는 권력층의 전유물이었다. 



서양에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로 인해 수천, 수만권의 성서가 발행되었고,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종전엔 값비쌌던 책이 인쇄술과 종이의 발전으로 책값이 저렴해지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아주 쉽게 정보를 취득할 수 있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서양 사람들은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고, 점점 발전해나갔고, 그렇게 산업혁명, 시민혁명이 우리보다 몇백년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서양이 빠르게 근대사회로 나아간 이면에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자’와 ‘책’이 있었다.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고려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효율적인 문자를 만든 조선, 그들이 만든 인쇄술과 문자발명은 오로지 빛나는 역사일뿐일까?


정묘호란 종전 때 후금은 조선 왕자 한 명을 볼모로 요구했다. 인조는 원창부령 이구에게 급히 왕제 원창군이라는 군호를 내리고 은수저, 은병, 은잔을 바리바리 싸주며 대신 볼모로 가라고 명했다. ‘부령’은 종5품으로 명목만 있는 종실이다. p 164



인조는 즉시 먼 왕실 친척인 능봉수 이칭에게 능봉군 군호를 내려 자기 동생으로 삼았다. 먼 친척에서 순식간에 왕제가 된 이칭은 다음 날 역시 고속 승진한 심집과 함께 산성을 내려갔다. 후금 진영에서 적장 마부대가 말했다. “그대 나라는 지난 정묘년에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다.” 정묘년 왕제 원창군이 가짜였음을 후금은 알고 있었다. p 166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능양군, 인조. 광해군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했으나, 그를 몰아낸 인조는 광해군과 달리 가야했다. 인조가 선택한건 사대, 즉 친명. 당시 명나라는 지는 해였고, 청나라는 뜨는 해였지만 인조에게 그런건 없었다. 자기가 몰아낸 광해와는 반대의 길을 걸어야했고, 무엇보다 인조과 함께 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은 친명을 외치는 사대주의를 중요시하는 서인이었다.



청나라가 조선을 처들어왔다. 정묘호란이다. 이때 인조는 청나라와 형제국의 협약을 맺었다. 뿐만 아니라 왕자를 청으로 보냈어야했는데, 가짜 왕자를 만들어 청으로 보냈다. 그렇게 가짜 왕자를 두번이나 만들어 청나라로 보냈고, 청과 맺은 협약을 두루 깨버리며 청나라의 뒷통수를 쌔게 내려친다. 청나라는 다시한번 조선으로 처들어왔다.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다.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귀결되는 과정이다.



최명길은 1681년 숙종 때 뒤늦게 문충공 시호를 받았다. 100년 뒤 정조가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가 아니었다면 누가 감히 강화를 감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1653년 효종 4년에 완성된 『인조실록』에는 그가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며 동시에 ‘소인’이라고 기록돼있다.(『인조실록』) 한 사람을 두고 극명하게 갈린 평가다. 또 많은 사람은 그를 간신으로 기억하고 척화파 김상헌을 절개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조선 사람들이 잠자리를 편히 자고 자손을 보존할 수 있음은 모두 공의 은택인데, 그에게 힘입은 자들이 그 사람을 헐뜯으니 너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박세당, 『서계집』) 누가 그를 간신으로 낙인찍었고, 왜 우리는 그를 간신으로 기억하는가. p 285



인조와 서인정권은 명나라를 숭상했다. 그런 명과 싸우는 청을 오랑캐라고 얕보았다. 그러다 청나라에게 두번이나 침략당했다. 병자호란 당시 조정에는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해하자는 주화파가 있었다. 주화파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실을 직시했다. 그렇기에 화해와 항복을 주장했다. 척화파는 죽는 한이 있어도 오랑캐와 화해는 있을수 없다며, 명나라의 원수인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고 외쳤다. 조선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던 말던 상관없었다. 그들에게 백성들의 목숨은 하등 의미가 없었다. 척화파와 주화파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대적하였고, 결국은 주화파의 뜻대로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한다. 가정이지만, 인조의 항복이 더 늦어졌다면 조선은 그 이름조차 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에서 우리는 척화파를 절개의 상징으로 배웠다. 주화파는 간신배와 다름없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이후로도 조선의 권력을 잡은건 척화파의 후손들이었으니 말이다. 당시 척화파의 구심점은 다름아닌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시열이었다. 언제나 대명의리를 외치며, 내 편에겐 한없이 온화했으나, 남의 편에겐 ‘사문난적’이라고 매도했던 송시열이다. 



왠만한 조선 후기 사대부 묘소 앞 비석에는 ‘숭정기원후 ㅇㅇ년’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다. ‘숭정’은 1644년 망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연호다. 명 멸망과 함께 ‘숭정’ 또한 사라졌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기원후’라는 꼬리를 달고 부활했다. 망한 나라 연호를 계속 쓰겠다는 것이다. 또 비석에 적힌 글은 ‘조선’이 아니라 ‘유명조선’으로 시작한다. ‘유명조선’은 ‘황제국 명나라 제후국 조선’이라는 뜻이다. 이를 주장한 사람은 노론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언제나 크고 짝은 글에 숭정 연호를 기록해 존주지의(천자국을 존숭한다는 뜻)을 나타냈는데, 사람들은 청나라 연호를 쓰는 사람을 더럽게 여겼다.(『숙종실록』)’ p 171~172



1644년 명이 멸망했다. 5년 뒤 인조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왕이 되었다. 북벌을 계획했던 효종이다. 북벌이 비현실적임이 드러나면서 새 논리가 탄생했다. 명나라는 사라지지 않았고 조선이 그 중화를 계승했다는 ‘조선 중화’ 이념이다. 명이 부활했으니 오랑캐와 싸울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조선은 명나라 연호 숭정을 쓰고, 비석에는 ‘명나라 제후국 조선(유명조선)’을 굳이 명시하게 되었다. p 176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국력을 실감했다. 오랑캐인 청나라를 이기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방식을 바꿨다. 바로 ‘정신승리’.


조선은 명나라를 계승한 제후국이니, 명나라와 다름없다. 고로 명나라가 다시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으니 청나라와 싸울 이유가 없다는 이론이다. 그렇게 조선의 왕과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신승리를 하며,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지내기 시작했다.



그해(1704년) 11월 숙종은 후원 깊숙한 곳에 제단을 만들고 이름을 대보단이라고 정했다. 이름대 3월 9일 숙종은 대보단에서 임진왜란을 구원한 만력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p 206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기 위한 제단은 창덕궁 후원 깊은 곳에 있다. 청나라에 들키면 안되기에, 그들끼리 모여서 몰래 제사를 지냈다.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은, 숙종이 이 제단을 만든 이유다. 숙종보다 먼저 송시열이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기 위한 제단을 만들었다. 현재 괴산에 있는 만동묘다. 이 사실을 안 숙종은 깜짝 놀랐다. 황제의 제사는 명의 제후국 왕인 조선의 왕만 지내야하는데, 일개 신하가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창덕궁에 명나라 황제를 위한 제단을 만든것이다. 다만 청나라에 걸리면 안되므로, 들키지 않게 아주 깊은 곳에 만들었을 뿐이다.



조선은 대외적으로 청나라에 조공을 하고, 청나라에서 왕 책봉을 받으면서,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명나라를 숭상하고, 명나라 황제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 모순적인 행동을,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지속해왔다.


정조는 “명나라 은총으로 명장이 된 이순신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정조실록』) 대보단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충신과 관리들을 모두 잡아다 처치하라고 명했다.(『정조실록』) 그리고 1796년 3월 3일 대보단 정례 춘계 제사 때 정약용과 주고 받은 시가 맨 앞에 나온 ‘우리 동방만 희생과 술의 제향을 드리는구나’였다. 세상은 그러하였다. 조선 정치 엘리트 집단을 집단 감염시켰던 시대는 정조를 넘어 실용주의자 정약용 그리고 그 이후까지 오래도록 퇴치되지 않았다. p 210



우리가 개혁군주라 칭하는 정조 역시 ‘대명숭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은, 명나라의 은총으로 명장이 된것이라 하였다. 실용적 학자였던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 역시 명나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게 바로 조선후기의 그림자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슴아프도록 쓰라린 경험이 ‘반복’되는 건, 처음 겪은 후에 징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을. 징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고, 잘못을 모르니 개선하지 못하고 방비하지 못해서, 쓰라린 경험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반복’되는 대다수의 원인은 징비하지 못한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이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위해선,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직시해야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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