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편의점 : 문학, 인간의 생애 편 - 지적인 현대인을 위한 지식 편의점
이시한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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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이나, 회사 내 자리에는 읽어야할 책이 한 움큼있다. 내가 책을 사는 속도와 내가 책을 읽는 속도가 너무 다르다보니, 자꾸 읽을 책만 쌓이는 현실! 이 책 『지식편의점: 문학, 인간의 생애편』도 그렇다. 앞서 1권을 읽었을 때 넘 맘에 들었었는데, 2권이 나온다는 소식에 내적댄스를 춘 지가 언 몇달 전. 그렇게 2권이 발간되었으나, 바로 읽지 못하고... 이제서야 읽어내린 내 슬픔이란 흑흑흑.



앞서 지식편의점 1권에서는 내가 읽었던 책들이 꽤나 있었는데, 이번 지식편의점 2권에서는 아주 소오름돋게도 내가 읽었던 책이 단 한권도 없다. 어쩜 이럴 수 있나. 나 쫌 분발해야하는거 아닌가^_T 하지만 또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책들도 아닌지라, 심지어 어떤 책들은 대략적인 내용도 알고있도 『파리대왕』은 영화로 본적이 있었으니 ㅋㅋㅋㅋㅋ. 한마디로 지식편의점 2권을 읽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는 이야기!



이 책은 인간의 생애를 총 8파트로 나누어, 각각 파트에 맞는 고전에 대한 해설이 담겨있는데, 그 8파트 중에서 유독 내 마음에 와닿았던, 조금 깊이 생각하게끔 했던 구절들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화가 고갱, 그 고갱을 모티브로한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 그들은 금융업에 종사했고, 자의든 타의든간에 화가로 변신했다. 화가로 변신한 뒤에는 원주민이 사는 섬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작. 소설 속 스트릭랜드의 유작은 그의 유지에 따라 없애버렸지만, 고갱의 유작이라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현재 남아있는 작품이다. 물론 실제로 고갱이 죽기전 그린 작품은 아니지만, 그가 자신이 딸이 죽자 인간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며 그린 작품다. 이 그림속에는 사람이 갓 태어난 아기부터 청년, 늘어가는 노인이 한 폭에 남겨있다.


우리 각자에게 각자의 여정이 있습니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점을 어떤 식으로 이어갈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그러니만치 어떤 것이 옳은 길이고 어떤 길은 옳지 않은 길이라는 식의 단정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고갱의 삶을 되새기며 생각해볼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p 047 / 『달과 6펜스』



과연 여기서 자기가 원해서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우리의 탄생에 있어서 자의는 없다. 우리를 낳아준 부모의 의사에 따라 태어나게 된 것 뿐이다. 하지만 태어난 후부터는 다르다. 물론 유년기에는 아직 자아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기에,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도움일 뿐이다. 태어난 이후의 삶은 오롯이 내 몫이며, 내가 ‘스스로’ 갈 길을 선택해야한다. 



물론 내가 선택한 그 길 위에는 항상 행복만 있는 건 아니다. 분명 고난이나, 실패가 나타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선택한 그 길에 실패가 반복된다고 했을때, 과연 내가 선택한 그 길이 옳지 않은 길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애초에 ‘옳은 길’이 무엇인지, 어떤 길인지 정답은 없다. 사람마다 걷는 길이 다르고, 사람마다 그 길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다르다. 고로 내가 선택한 그 길이 옳은지 아닌지 결정하는 사람은 오롯이 ‘나’ 일뿐이다. 



항상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옳은 길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되돌아보며 걷다보면, 나중에 그 길을 돌아보았을때 ‘아, 나는 내 자신에게 부끄럼없이 옳은 길을 걸어왔구나’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누구나 어른이 되면서 어린 시절에 가졌던 순수한 감정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혹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 그런 감정을 소유했던 기억조차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어린이는 젊은이가 되고, 젊은이는 늙어가는 것은 당연한 순리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는 피터팬이 활약하는 네버랜드에나 박제돼 있는 것이고, 현실에서는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교육과 압박이 순수의 기억과 지향을 지워버리죠. p 075 / 『호밀밭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주인공은 ‘완벽한 순수함’에 집착한다. 완벽한 순수함이란 대체 무엇일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겐 찾을 수 없는 감정이다. 유년기엔 분명 가지고 있었던 감정 같은데, 조그만 사회인 학교를 다니며 순수함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학교를 졸업하고나서는 나에게 순수함이란...........아, 내 순수함 어디갔니? 내 인생에서 순수함 자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꽤나 슬퍼진다.



근데 또 이렇게 생각하게된다. 다 커서도 순수함을 지킨다는게 과연 좋은 일일까? 좋게 말하면 머리를 빠르게 굴리고, 나쁘게 말하면 얍삽하게 살아야 살아남는 잔혹한 사회에서 말이다. 애초에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작금의 사회는 순수함을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일반화를 하려는건 아니지만 보통 순수함을 지키는 사람들은 바보같다는 소리를 듣거나, 대부분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는 순수함을 지킬래야 지킬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순수함이 사라진 사회라 생각하니 조금은 서글퍼진다. 암만 잔혹한 사회라지만, 순수함이 사라진 사회면 얼마나 삭막한 사회일까. 정말 사회에 나오게 되면 내 속의 순수함들이 전부 사라질 수 밖에 없는걸까? 내 속에는 정말 순수함이 남아있지 않는걸까?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된 사실 하나, 내 속에도 순수함은 남아있었다. 무언가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것, 쉽게 말해서 덕질! 그니까 덕질을 할때 만큼은 아무것도 재지않고 순수하게(!!) 덕질에만 몰두하니, 이 얼마나 순백한 순수함인가!! 정녕 수..순수함이 맞는건가 싶기도 하지만, 하하하. 그래도 속세의 때란 때가 이미 덕지덕지 묻은, 회사에서도 이미 고인물이 된 나에게도 무언가에 아무것도 재지않고 몰두할 수 있는 순수함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그저 안도할 뿐이다^_T...



교육학 분야의 중요한 저서로 칭송받는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은 인간이 선하다는 가정하에 인간의 본성을 끄집어내는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상의 아이인 에밀을 통해 보여주는 책이라고 전작 『지식편의점: 생각하는 인간』편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장 자크 루소는 자신의 다섯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고아원에 보내버린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했었죠. 이론적으로 사람은 선하다고 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선한 아버지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본성이 자리하고 있을까요? 인간은 동물에 불과하므로 그냥 놔두면 본능만 남은 야생의 상태가 되는 걸까요? p 086 / 『파리대왕』


성선설과 성악설, 인류 최대의 논제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물론 내 생각은 성악설!!! ‘범죄’의 의미로 악하다라고 보기 보다는, 순수한 의미의 악이라고 해야할까? 뭐 그렇다. 어린아이들이 하는 행동들을 유심히 보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들이 꽤나 많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들을 나무라기엔, 이 아이들은 그 행위가 ‘나쁘다’는 개념이 없이 행한 행동이기에 나무라기도 어렵다.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그 행위를 했을뿐이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난 이런걸 순수한 악이라고 본다.



고로!!! 사람은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배워야한다. 그렇게 배워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별할줄 알아야하며, 내 속에 있는 악을 절제하고 자제해야한다. 절제하지 못하고 자제하지 못한다면?  옳고 그름을 배웠음에도 악을 절제하지 못하고, 자제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의 결말은 단 하나다. 뉴스에서 나올 법한 범죄자. 혹은 아직까지 공권력에 의해 체포되지 않은 범죄자. 그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범죄자 단 하나밖에 없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좋든 싫든 간에 하나의, 또는 여러개의 사회속에서 살아간다. 그 사회의 범주에는 가족, 학교, 직장, 커뮤니티등 아주 다양하다. 그리고 이 다양한 사회는 보이지않는 각각의 시스템으로 굴러간다. 개인들은 이 시스템에 맞춰서 살아가야하고, 시스템에서 벗어나게 되면 순식간에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거나, 혹은 그 사회에서 배제되고만다.


젊은이들이 꿈꾸는 이상은 사회라는 다리를 건너면서 현실이 됩니다. 지금의 꼰대들도 예전에는 ‘이해 안 되는 요즘 젊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꼰대가 되는 그 변화의 간격에는 시간과 그에 따른 사회생활이 놓여 있습니다. 사회적인 시스템에 적응하는 시간이었지요. ‘라떼는 말이야’는 단지 과거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동안 작용해온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해라는 베이스가 놓여 있는 말입니다. p 145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사회 제도나 규율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제적인 법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우리를 바리바리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이 시스템은 법이나 규칙 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출 수도 있지만 관습, 기대, 편견 같은 무형의형태일 수도 있어요. 이 모든 것들이 시스템을 만듭니다. p 145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특히 이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제일 강하게 작용되는 장소는 회사다. 회사라는 조직에는 분명 ‘사규’라는 눈에 보이는 시스템이 있지만, 실상은 ‘사규’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의해 강하게 굴러가기 때문이다. 예컨데 조직장을 대할 때는 어떠한 행위를 하면 안되거나, 어떠한 말대꾸도 하면 안된다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작용한다. 특히 일반적인 팀, 부서의 조직장이 아닌, 그를 넘어서는 회사 대표라면 더더욱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강하게 작용한다.



나라에서는 육아휴직을 사용하는건 개인의 권리라고 하지만, 일반적인 기업에서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건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돌아왔을 때 내 자리가 남아있을지 여전히 확실하지않고, 행여 육아휴직 후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지 않는 자리로 발령이 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부정적인 인사평가는 말할 것도 없다. 분명 우리 사회의 법이라는 시스템이 ‘육아휴직’을 사용하는게 맞다고 이야기하지만, 회사에서 작동되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은 개인이 마음 편하게 ‘육아휴직’을 사용할수 없게 만들고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미치광이가 아니고 오히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고 판명한 정신과 의사들의 소견을 소개합니다. 아이히만은 군인으로서 주어진 명령에 충실하고, 승진을 위해 자신의 행정능력을 극대화시키려고 노력한 사람이지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 살인마가 아니란 거죠. 여기서 악의 평범성이 나옵니다. 악은 악마적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물들이 체제 속에서 무비판적으로,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 명령에 순응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진단입니다. p 150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분명 불합리한 시스템이지만 우리는 순응할 수 밖에 없다. 아이히만이 그런것처럼 말이다. 아이히만을 둘러싼 환경이 나치였고, 그런 나치에 충성하고, 그저 주어진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유대인을 죽였을 뿐이다. 만약 아이히만이 나치의 시스템을 거부했다면, 아마 그는 나치에서 배제되거나 나치 손에 죽는 길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이유로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에 죄가 1도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을 하게 만든건, 나치 속에 있는 그 ‘시스템’이 원인이었다.



이렇게 읽고 보니, 사람이 일생을 사는게 참 어렵구나 싶다. 삶을 산다는 말보다는, 삶을 살아낸다가 더 어울린다고나 할까? 하. 이렇게 보니 나는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하나 걱정이 된다. 그저 앞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올바른 길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갈뿐이려나.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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