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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태실 ㅣ 경기그레이트북스 29
김희태 지음 / 맑은샘(김양수) / 2021년 7월
평점 :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터전은 오롯이 ‘경기도’다. 유년기엔 경기도 부천에서 살다가, 청소년기에 경기도 시흥으로 넘어와서 지금까지 쭉.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시흥살이. 고로 지금까지 내 생애 터전은 경기도였고, 왠지 앞으로도 경기도일 것만 같은 그런 너낌적인 너낌이다. 고로 경기도는 나에게 특별할 수 밖에 없.........다는 잡소리는 여기까지ㅋㅋㅋㅋㅋ.
경기도는 조선왕실에서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한 장소였다. 조선왕릉의 대다수가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왕실의 꽤 많은 왕자, 왕녀의 태실도 경기도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 책의 주제는, 책의 제목에도 유추할 수 있듯 경기도에 위치한 조선왕실의 태실이 되시겠다. 여기서 살짝 우리 동네 이야기를 끼얹자면, 내가 사는 시흥에도 태봉이 하나 있는데,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조선왕실의 태실로 ...ㅎ...
책의 시작은 태실이 무엇이며, 태실을 어떻게 조성하는지 등 우리나라에 전해내려온 장태문화를 설명한다.
태실은 아기의 태를 길지에 묻는 장태 풍습으로, 이는 태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인식과 풍수지리 사상이 결합해 만들어졌다. (……) 이처럼 태를 소중히 여기는 풍습은 왕실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소중히 다루었는데,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민간에서의 태를 처리하는 방법은 크게 ▶불에 태우는 소태 ▶태를 말리는 건태 ▶땅에 묻는 방식의 매태 ▶강이나 바다에 던지는 수중기태 등이 있었다. p 018
조선왕실의 태실은 안태등록과 의궤 등의 기록이 남아 있어 태실의 조성 과정과 장태에 이르는 과정 등이 상세히 남아 있다. 조선왕실의 태실은 왕과 세자의 자녀로 태어날 경우 조성되는데, 당시 태실의 조성은 풍수지리와 결합해 입지 조건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때문에 관상감에서 길지에 대한 삼망단자를 올릴 정도로 신경을 썼다. 현재 남아 있는 태실지의 형태를 보면 정앙이 육안태에 기록된 내용을 언급하며, “땅이 반듯하고 웃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 하여야만 길지가 된다.” 라고 했는데, 이 내용처럼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 형태의 태봉을 선호했다. p 025
아기의 태를 중요하다고 생각한 우리 선조들은, 태를 처리함에 있어서 신중을 기했다. 특히 민가에서도 태를 중시했기에 풍수가 좋은 곳에 태를 묻거나, 혹은 불에 태우는 등 태를 정성스레 처리했다. 다만 왕실은 태를 묻는 데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태실을 만들었다는 것! 그 태실은 얼핏보면 죽었을 때 묻히는 봉분처럼 생기거나, 왕은 왕릉의 미니어처 처럼 보이기도 한다.
처음 태실을 접하게 되면 다 같은 태실로 인식하기 쉽지만 태실의 형태는 신분에 따라 다르다. 쉽게 왕의 태실과 왕자, 왕녀의 태실이 차이가 있는데, 학술용어로는 태실은 아기씨 태실과 가봉 태실로 구분한다. 여기서 아기씨 태실은 왕이나 세자의 자녀로 태어날 경우 조성되는데, 길지인 태봉의 정상에 땅을 판 뒤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을 넣은 태함을 묻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조성했다. p 026
가봉 태실은 태주가 왕위에 오를 경우 해당되는 기존의 아기씨 태실 자리에 추가로 석물을 가설하는 형태로…. 태실의 가봉이 결정되면 기존의 아기씨 태실 위에 장태석물을 추가로 가설하고 가봉비를 세웠다. 이때 태함이 있던 자리에 상석을 깔고, 그 위에 중앙태석을 올렸다. 흡사 외형만 보면 왕릉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p 028
왕실에서 태어난 모든 왕자녀들은 애기씨 태실이 만들어진다. 이 왕자녀 중 태주가 왕위에 오르면 애기씨 태실은 가봉태실로 한단계 변화를 거친다. 왕의 위엄에 맞게 격식있는 태실로 바꾼다는 이야기다. 각종 석물을 추가설치하고, 기존에 있던 흙 봉분도 돌로만든 석실로 바뀐다. 사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영락없는 왕릉의 축소판이다.
태실의 모양처럼 신분에 따라 태실의 규모도 달라진다.
왕의 태실에는 태실을 관리하는 수직을 두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태실수호사찰이다. 조선 왕릉마다 수호사찰이 있듯, 왕의 태실에도 수호사찰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왕과 왕자녀 태실에는 사방으로 금표를 세웠는데, 직위에 따라 금표가 미치는 거리가 달랐다. 금표가 쳐있는 땅은 출입 또는 벌목이나 경작을 금지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곤 했다. 경작과 벌목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백성들이, 느닷없는 금표 설정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태실 조성에 있어서 많이 고뇌한 왕들도 있다.
당시 태실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각이 결코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중종실록』을 보면 장령 권벌이 원자(인종)의 태실을 조성할 안태지를 찾기 위해 경산으로 내려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안태지 주변, 집과 밭을 가진 백성들이 울부짖었다고 한다. 왜 이런표현이 나왔냐 하면 태실이 조성될 경우 집이나 밭 모두 철거를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 태실의 조성과 수개 과정에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었고, 석재를 옮기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논과 밭이 손상되는 사례도 있었는데…. p 048
이후 정조 때 숙선옹주의 태실을 창덕중 주합루 뒤 돌계단에 묻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또한 고종 때는 ▶영친왕 ▶덕혜옹주 ▶고종 제8남 ▶고종 제9남 태실 등이 후원에 조성되었다. 『태봉등록』을 보면 영조는 자신의 가봉 태실을 조성할 떄 전례에 얽매이지 않고, 태실의 규격을 간소하게 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p 053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백성들의 고충을 경감시키기 위해 태실 조성을 축소하거나, 또는 태실을 창덕궁 내에 조성하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생각이라면, 왕실에서도 민간에서 처럼 태 수습방식에 있어서 소규모로 했다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았겠지만. 뭐, 왕정시대였던 조선이었으니. 그 시대의 권력자들 치고, 태실 축소 및 궁궐 내 태실조성이란 카드를 내밀었다는 건, 정말 백성들을 위한 최선의 배려였으리라 생각한다.
태실축소나 궁궐에 태실조성에 이어 조금 더 특이한 태실의 사례도 발견되는데, 무려 무덤(...)과 태실을 함께 쓰는 경우다.
드물기는 하지만 묘와 태실을 함께 조성하는 분묘병장의 사례가 확인되는데, 정소공주와 고종 제 4남의 태실이다. 정소공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소생으로, 최초 묘는 대자동 산67-1번지에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인 1936년 5월 17일에 현재의 위치인 서삼릉 왕자, 왕녀 묘역으로 옮겨진 상태다. p 066
태실 조성이 왕자녀가 태어나자마자 진행된다기 보다는, 길지를 선정하고 뭐 이런일로 길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책에 따르면 정소공주와 고종 제4남의 태실이 무덤과 태실을 함께 쓴 분묘병장의 사례라 하니, 아마도 이들은 태실을 조성하기 전에 사망했거나 아니면 태어난 직후 사망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또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았다. 허허허.
세종의 딸인 정소공주는 태어날 당시에는 충녕대군의 딸이었기에(그저 종친) 태실조성이 있었을리가 없다. 허나 태어난지 6년이 지나 세자이자 숙부인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부친인 충녕대군이 왕위에 등극하면서 그때서야 공주가 되었다. 정소공주는 종친에서 공주로 격상! 아마도 이후 태실 조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법한데, 하필 정소공주가 오래 살지 못하고 13세가 되던 해에 사망했다. 아마도 태실 조성과정에서 사망했거나, 혹은 태실 조성에 대한 논의가 있을 즈음에 사망했거나 둘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 느낌이다. 고종의 4남은 태어난 직후에 사망. 이는 태실 조성논의도 전에 태주가 사망하였으므로, 이 역시 무덤과 함께 태실을 조성한게 아니었을까? 하는 뭐 그런 생각이다.
비석의 뒤로 분묘로 추정되는 장소가 남아 있을 뿐, 해당 비석을 제외하면 태실 관련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 첫 방문때는 역광이라 태실비의 전면은 확인하지 못한 채 하산해야 했다. 이후 두 번째 방문에서 비신의 전면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은 ‘왕자ㅇㅇ아기씨태실’이다. 전면의 명문을 확인한 뒤 해당 장소가 태실인 것이 확실해졌고, 태주의 신분이 왕자인 것도 확인되었다. 앞서 태실이 홍치 6년, 즉 1493년(성종24)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기에 안성 배태리 태실을 성종의 왕자 태실로 고증했던 순간이다. 이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성종 왕자 태실의 출현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이자 성과였다. p 089
이 책에는 저자의 놀라운 성과도 담겨있다. 우리나라에서 태실연구는 볼모지나 다름없다. 분명 태실지로 전승되는 장소들은 있는데, 간혹 잘못 전승되는 곳들도 있거나, 혹은 분명 태실지가 맞기는 한데 훼손이 심해서 누구의 태실인지 알수가 없고, 훼손이 되다못하 태봉산 전체가 개발로 사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다보니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태실지라 전승되는 장소는 하나하나 답사를 해가며, 기존에 알려진 태주가 진짜 태실지의 태주가 맞는지 고증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주인을 알수 없던 태실지의 주인까지 찾아내는 성과를 더했다.
예전에는 민간사학자나 재야사학자들의 연구를 잘 믿지않았고, 그렇기에 그들의 책을 읽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사이에 숨어들어 분탕치는 유사사학자들이 있었기에, 그들을 걸러내는 눈이 나에게는 없었으므로 더더욱 그랬다(실제로 뭣모르고 샀던 책이, 유사사학자의 책이어서 책값을 날렸던 슬픈 일도...). 하지만 민간사학자 중에는 이 책의 저자이신 희태님 같은 분들도 분명히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희태님만해도 우리나라 곳곳을 답사하며, 수많은 역사자료와 교차검증을 하는 등 치열하게 연구를 하고 계시니 말이다. 적어도 민간에서, 뭍밑에서 치열하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발로 뛰어 답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의 피땀으로 일구어진 연구결과과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는 역사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시흥 무지내동 태봉은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 산16번지에 있는 태봉의 정상에 있다. 태실지의 외형은 그릇을 엎어둔 형태인 태봉을 중심으로 좌, 우측면과 후면에 봉재산이 감사고 있는 돌혈의 형태다. (……) 다만 태실비를 비롯해 태지석 등이 남아 있지 않아 시흥 무지내동 태봉의 태주가 누구인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해당 태함의 발굴조사를 통해 태함의 형태와 추가 유물의 수습 등이 이루어진다면 어느 시기의 태실인지 규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입지조건이나 태함 등을 볼때 조선왕실의 태실은 확실해보인다. 이와 함께 시흥 무지내동 태봉은 현재 군 부대 안에 있어 접근성의 측면에서 제약이 있는 편이다. p 162~163
책을 넘기다 깜놀! 시흥 무지내 태봉이라니!! 여긴 내가 사는 고장에 있는... 그 태봉이 아닌가! 가보고 싶었지만 군 부대안에 있어서 가보지 못했던 그 태..ㅌ...세상에나. 더 놀라운 사실은 조선왕실의 태실로 추정된다는 저자의 이야기다. 하긴, 왕실이니 요로코럼 태실을 조성했을거고.....!
여러모로 궁금했던 곳인데,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보게 되어서 반가웠던 우리동네......까지는 아니고, 이웃동네 태봉!
1928년에 전국의 태봉 39개소를 옮겼다. 당시 임시로 경성 수창동 이왕직 봉상시에 봉안실을 신축해 태실을 이봉을 한 뒤 최종적으로 서삼릉 역내에 봉안했다. 『태봉』에 기록된 태실매안시배진차제를 보면 소화 5년인 1930년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왕과 왕자, 왕녀 49기를 서삼릉으로 옮겨 매안했는데, 매안순서는 다음 표와 같다. p 179
자, 이제 경기도내에 많은 태실을 보유하고(?) 있는 경기 고양시 서삼릉. 왜 서삼릉에 태실이 밀집해있는고 하면, 일제가 왕릉, 원, 묘, 태실 관리정책을 시행하며 약 50여개의 태실을 서삼릉 부지로 강제 이봉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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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대왕, 세조대왕, 예종대왕, 성종대왕, 중종대왕 |
| 인종대왕, 명종대왕, 선조대왕, 숙종대왕, 경종대왕, 영조대왕 |
| | 장조의황제, 정조선황제, 순조숙황제, 헌종성황제, 순종효황제 |
| 왕전하(영친왕), 덕혜옹주, 인성대군, 연산군모윤씨(폐비윤씨), 안양군 |
| 완원군, 왕자수장, 건성군, 연산군자금돌이, 연산군자인수, 왕녀영수 |
| | 연산군녀복억, 연산군녀복합, 덕흥대원군, 인성군, 인흥군, 숙명공주 |
| 숙정공주, 숙경공주, 명선공주, 연령군, 영조왕녀(화유옹주), 영조왕녀(화령옹주) |
| 영조왕녀(화길옹주), 의소세손, 문효세자, 철종왕녀, 고종제8남, 고종제9남 |
※표에는 없으나 이구, 이진, 영산군, 의혜공주, 경평군 태실 추가 이봉: 서삼릉 내에는 총 54위의 태실이 자리함.
서삼릉 태실에 있는 태실비의 튓부분을 보면 예외 없이 연호 부분에 대한 인위적 훼손이 가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태봉』의 기록을 통해 훼손된 연호 부분이 바로 소화 5년(1930)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제가점기에 행해진 이 같은 태시르이 이봉은 명목상으로는 관리와 보호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풍수지리를 기반으로 길지에 조성한 태실 특성을 고려하면 사실상 훼손에 가까운 만행이었던 것이다. p 180
가봉비의 명문은 태주가 자신의 생전에 태실을 가봉할 경우 주상전하태실을 새겼고, 태주가 승하한 이후 가봉이 될 경우 묘호를 썼다. (……) 이와 함께 태실비에서 조성 시기를 알 수 있는 연호를 주목해야 하는데, 조선시대의 연호는 병자호란 직전까지는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명나라가 망한 뒤에는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의 연호가 사용된다. 하지만 명나라가 망했음에도 여전히 조선 사회에서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명나라의 연호가 사용되었는데, 이때 연호는 숭정기원후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를 뜻한다. p 042
일제의 태실 강제이봉은 풍수지리상 인위적인 훼손을 가했고, 조선왕실의 상징성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태실 훼손이며,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태실지의 상황을 보자면, 차라리 이렇게 서삼릉으로 옮겨진 태실들은 그나마 분실되지 않은 채 보호될수 있었기에 다행인가 싶기도 하는 모순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일제가 서삼릉으로 태실을 이봉하는 과정에서 기존 태실지에 있던 석물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심지어 수많은 태실지를 민간에 판매한 것을 생각하면, 결국 작금의 태실 훼손 시발점은 역시나 일제가 원인 제공을 한거고. 근데 또 원인을 제공했다 한들, 해방 후 바로잡을 노력을 하고자 했으면 언제든 바로잡을 수 있었을텐데, 그걸 방치한 대한민국 정부도 잘한게 뭐가 있나 싶기도 하고. 어렵다 어려워. 누굴 욕하겠는가. 시발점을 만든 일제야 원래 나쁜놈이고, 그걸 개선하려 하지 않은 대한민국도 나쁜건 마찬가지니.
이렇게 쌓이고 쌓인 태실훼손의 결과가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양주 황방리 정혜옹주 태실을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동안 태봉산은 사라졌고, 태실과 관련한 석물의 상당수도 유실되었다. 불과 21년 전에는 있었던 석물을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점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해당 태실의 사례는 방치된 태실 유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현장이다. p 107
신성군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도굴을 피하지 못했고, 이후 마을에 우환이 생긴다는 이유로 태실비가 뽑혀 굴러진 채 현재까지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 태실지 주변으로 군 참호가 만들어지는 등 태봉산의 훼손이 일부 진행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신성군의 태실은 태실비와 태함이 온전하게 남아 있고, 석물의 상태 역시 다른 경기도의 태실과 비교했을 때 좋은 편에 속한다. 따라서 더 훼손이 진행되기 전에 문화재 지정과 함께 보존 및 관리 대책이 필요한 태실 중 하나다. p 131
경기도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 산재되어있는 수 많은 태실지가 아주 소수를 제외하면, 대게 훼손되었거나 그대로 방치되어있다. 석물들이 흙에 반쯤 묻힌채 나뒹구는 경우도 있고, 비석이 훼손되어 누구의 태실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태반이고, 태실지에 이미 분묘가 조성되어 태실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는 도시개발로 인해 태봉산 전체가 사라진 경우도 있다. 태실은 분명 왕릉급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유적지라는 사실은 틀림이없다.
조선왕릉이나 원, 대군묘 등은 나라에서 또는 가문에서 그렇게 각별하게 관리하면서, 같은 조선왕실의 왕, 왕자녀의 태실이 이렇게까지 방치되는건 모순된 상황이라 생각한다. 출가한 왕자녀의 태실은 가문에서 신경써야한다고 치더라도, 왕의 태실이나 그에 준하는 위치에 있던 태실은 나라에서 직접 나서서 하나의 유적지로써 관리하는게 맞다고 본다. 지금까지 태실지의 정확한 위치를 몰라 손 놓고 있었다면, 이렇게 민간 연구자가 태실 하나하나를 발품팔아 찾아다니고 연구까지 하면서 밥상차리고 숟가락까지 올려두었으니, 지금이라도 각 지자체에선 이 숟가락을 떠먹는 노력이라도 해야하지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