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임진왜란 관련 역사서가 아닌, ‘역사기행’책이다. 즉,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라 기행문이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책은 기행문이 아니라 역사서로 보인다. 중간중간에 대마도 반쇼인, 하치만구신사, 세이잔지 등 분명 대마도에 있는 중요 유적지도 나오긴 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나오는 느낌이랄까?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차라리 책의 제목을 장르를 임진왜란 관련 역사서 쪽으로 바꿨으면 어땠을까?

이 책은 조선 중기 한일 관계와 임진왜란을 비롯한 조선의 상황, 그 영향이 미친 근대사 등을 공부하기에는 정말 딱 좋은 책이라는 건 확실하다.

만약 역사가 발전한다면, 어떻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참혹한 전란을 겪고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며, 4.3제주의 그 가슴 아픈 사건을 겪고도 5.18광주의 비극이 발생하고, 당파싸움으로 망헀던 나라에서 아직도 양 극단의 진영논리가 판을 치며, 400년간 신분제로 고통받았던 나라에서 어떻게 인종차별이 일어나고, 숭명으로 자주권을 상실했던 나라에서 숭미하는 세력들이 생겨나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발전을 믿기로 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가능성이 열려있고, 또한 우리 내부에 사랑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오랫동안 일본과 왕래를 끊어 외교사절이 없으므로, 히데요시가 분하고 부끄러움을 품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다. 조선이 이 뜻을 명나라에 알려 일본으로 하여금 사절의 길을 통하게 하면 무사할 것이요, 일본 백성 또한 전쟁의 노역을 면할 겁니다"

"일본은 다음 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하는 것이 좋다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조선은 비로소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중략… 병비시설을 점검게 했다. … 중략 … 그러나 조선이 개곡된 지 200년 간 너무 오랜 기간 평화에 길들여져 있어, 노역에 동원된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태평시대에 당치도 않게 성을 쌓느냐는 상소가 빗발쳤고, 홍문관고 공사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우리가 명나라를 섬긴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로는 군신사이요, 은혜로는 부자사이다. 임진년의 재조지은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선조께서 42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명나라를 섬겨 한 번도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 그런대 광해는 명의 은덕을 저버리고 오랑캐와 화친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출전했던 모리 테루모토의 조슈번 세력은 …중략… 정한론을 주장했던 요시다 쇼인이나 소위 ‘유신 3걸’ 중 한명인 기도 다카요시,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불린 노기 마레스케,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자 초대 통감으로 조선 병탄의 기초공작을 다진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주도한 가쓰라 다로,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태평양 전쟁 전범 도조 히데키등을 배출하였으며, 이들 세력은 제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에도 일본 정계에 주류 세력으로 남아, 자민당 체제를 확립시키고 1960년대 일본 총리를 지낸 현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그의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 외무장관과 자민당 간사장을 지낸 아베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와 현 아베 신조 총리로 이어지게 된다.

1974년 ‘오키나와 반환’협상을 조인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는 방문 당시 자신이 임진왜란 이후에 야마구치 현에 종착한 조선인의 후예란 사실을 고백했다고 한다. 그의 둘째 형이 기시 노부스케이고, 기시의 외손자가 아베 신조이니, 아베 역시 조선과 무관한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은 무능하고도 무능한 조선 정부와 사대부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조선 왕실은 이애숙이라는 여인을 내세워 본인의 안위를 지켜놓고, 나중에는 본인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내쳤다. 비단 이애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당시에 청나라로 끌려간 여인들은 수십에서 수만명. 정말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물론 남자들도 많이 끌려갔다. 돈이 많은 양반가에서는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기 위해 몸값을 지불해서 빼내오는 경우도 빈번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너무나 차별적이었다. 간혹 자기의 여식을 빼내기 위해 몸값을 지불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게가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 스스로가 목숨을 걸고 도망쳐 고국으로 돌아오면, 조선사람들은 그녀들을 ‘환향녀‘ 라고 부르며 배척했다. 조선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환향녀‘는 오랑캐에게 정조를 빼앗긴 수치스러운 여자였다.



청나라에 잡혀 갔다면 응당 자결을 했어야 했는데, 자결하지 않고 살아 돌아왔으니 너희야 말로 짐슴이고 오랑캐다. 당대 환향녀를 향한 인식이다. 조선 유학자들이, 유학을 본인들에게 이로운 부분만 받아들이고 지멋대로 해석하여 널리 퍼트린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끝자락에는 초라한 묘가 하나 있다. 일명 ‘족두리 묘‘라고 불리는 의순공주의 무덤이다. 그 왼쪽 위편 저만큼에는 마치 ‘족두리 묘‘를 지키고 있는 듯한 또 하나의 산소가 자리하고 있다. 다름 아닌 의순공주의 친부 금림군 이개윤의 무덤이다. 어느 날 목격하게 된 초라한 ‘족두리 묘‘와, 딸 자식의 무덤을 수백년 동안 묵묵히 지키는 아비 산소의 아픈 잔영이 이 이야기를 쓰게 만들었다.



이 소설은 350여 년 전 왕가 종친의 여식으로 태어나, 임금의 진짜 딸을 대신해 청나라 장수의 첩으로 끌려간 의순공주의 한 맺힌 일기장이다. 아니, 청나라 군대에 무참히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수만 여인들에게 환향녀 딱지를 붙여 비정하게 내치고 죽음으로 몰아간 ‘사대부‘ 라는 이름의 냉혈한들에게 내미는 아주 오래된 고발장이다.

<작가의 말 中>

먼길에 고생이 많겠구나.

나의 양녀가 되었으니, 너도 분명 나의 자식이다.

의순은 청국에 가서도 조선국 왕손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말라.

애숙은 차마, 한양에서 들었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도망쳐서 돌아간 포로 중 적지 않은 여인네들이 도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홍제천변에서 움막을 치고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오랑캐에게 몸을 버렸으니 집안에 들일 수 없다는 완고한 사대부들의 반대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쏟아지는 이혼 청원에 나랏님마저 골머리를 앓는다는 말까지 들은 적이 있다. -P158

병자호란과 정축하성으로 인해 울분에 차 있는 뭇 백성들 사이에

‘왕실에서 공주까지 오랑캐에게 바쳤다‘ 라는 원성이 들끓었지.

조정에서는 몇 달 동안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임금께서 자신의 딸을 빼돌리고 종친의 자녀인 너를 대신 보낸 일 까지 소문이 나서

민심이 더욱 흉흉해질까 봐 전전긍긍하시는 형편이 됐단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바로 이 족두리 묘였어.

네가 연경에서 오라비들을 통해 돌려보낸 족두리를 갖고 이야기를 지어낸거야.

의순공주는 끝내 국경을 넘지 않았다.

국경으로 가던 중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가 없었다면서 평안도 정주 강에 몸을 던졌고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족두리만 물에 떠 올랐다는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이지. - P174 ~ 175

"춘옥은 한양 본가로 들어가긴 했는데, 가족들이 별당에다 가둬 놓고 가축 취급을 하는 바람에 그만

정신병증을 일으켜서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내침을 당했사옵니다.

그 후 우리와 함께 지내왔는데, 평소에 멀쩡하다가도 간간이 정신이 헝클어져서

홍제천에 나가 도래를 부르며 온종일 몸에다가 물을 끼엊는 발작 증세를 보이곤 하옵니다."

가슴이 아팠다.

오랑캐에게 몸을 더렵혔다는 이유로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내침을 당한 여인네들의 피맺히 삶들이

송두리째 자신의 것인 양 다가와 애숙은 가슴속으로 흐르는 피눈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 P224

정축하성(삼전도의굴욕)의 국치로 전쟁이 끝난 뒤 청국으로 끌려간

포로들에 대한 석방 교섭이 있었던 기묘년 이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여인들만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혀 실절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내쳐지고 시집에서 문전박대를 받았다.

어쩌다가 도성으로 들어간 여인들도 다른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고

별당이나 뒷방에서 유폐되다시피 홀로 쓸쓸히 지내야 했다.

대들보에 명주실을 내려 목을 걸거나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찌른 여인들이 부지기수 였다.

집 안에 있는 샘에 거꾸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예 집안에 들어갈 수 조차 없는 여인들은 깊은 강을 찾아 몸을 던졌다.

대게는 오랑캐에게 끌려갈 때 자결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했고

조선의 남정네들을 원망하면서 눈을 뜬 채 이승을 떠났다.

속환한 며느리가 칠거지악을 저질렀으니

이혼을 하도록 해달라는 상소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환향한 지 한 해 만에 그렇게 한이 맺힌 채 죽어간 여성이

대략 일만 명은 넘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돈다고 했다. - P227

"제게…나라는…조선은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나라였기에 차마 버릴 수 없었을 따름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592년, 이백년간 평화에 젖어있던 조선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왜놈이라고 부르며 비하하던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온 것이다. 그 유명한 임진왜란이다. 이때 조선왕조실록과 어진을 보관하던 세곳의 사고(춘추관, 충주사고, 상주사고) 가 잿더미가 되었다. 그 안에 있던 실록과 어진 역시 잿더미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조선왕조실록과 조선 왕들의 어진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이유인 즉 이러하다.



임진왜란 때 불타서 사라진 세 곳의 사고 말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고가 있었으니 전주사고 이다. 전주사고가 튼튼하거나 방비가 잘 되어있어서 실록과 어진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실록와 어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조선의 역사를 지키고자 했던 민초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책의 제목은 왜 하필 몽진 일까? 몽진 이란 ‘먼지를 뒤집어쓰다; 급박한 상황에서 먼지를 쓰고 떠난다‘ 라는 의미이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길을 나선 선조를 두고 ‘왕이 몽진하였다‘ 라고 한다. 해서 나에게는 부정적인 의미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는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 책의 주인공 유생 안씨와 손씨를 비롯한 여러 민초들은 실록과 어진을 들쳐매고 왜적의 눈을 피해가며, 온갖 위협과 고난을 넘기며 피난길에 올랐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을 뿐더러 민초를 지켜야할 나랏님조차 도망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 민초들은 자기가 살고있는 조선을 위하여 천여권이 넘는 국가의 서적과 어진을 지키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가며 피난길에 올랐다. 이런 것이 작가님이 말하려 한 진짜 몽진이 아닐까?

『몽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가 병화로 소실된 후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의 실록과 어진의 이안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처음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의 이안 과정을 접했을 때 나는 참담함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당시 조선은 왜적의 침입에 맞서 백성을 보호하고 실록을 지켜낼 능력이 없었다. (…중략…)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초야에 묻혀 살던 이름 없는 어떤 사람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달려갔고, 또 어떤 이름 없는 사람들은 실록과 어진을 지키기 위해 전주사고로 달려갔으며 수백일 동안 산중에서 그것을 지켜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했떤 그분들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작가의 말 中

"나랏일? 나라가 있기는 하더냐? 온 나라가 왜적에게 짓밟혀 죽고 약탈을 당해도 나라가 한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차라리 내 힘으로 나를 지키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느니라" - P 081

"저희들도 비록 산적질을 하며 살고 있지만, 나랏일을 한다는 마음에 잠시 사람처럼 사는 것 같아 신명이 났었습니다" - P 144

"우리 스님들도 나랏일에 보탬이 되어야지요. 용굴암까지는 우리 스님들이 옮길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P 1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새 들어서 사무치게 후회하는 것이 있다. 황금 같았던 나의 어린 시절, 그저 하라는 대로 공부만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나의 꿈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 나의 삶은 1%라도 조금 더 보람 있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혹은 늦게나마 알게 된 나의 꿈,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삶이 아닌 그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시간만 축내는 것이니, 후회할 시간에 나의 꿈을 위해 조금이나마 공부를 하는 쪽이 더 낫다.




오늘 거울 속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1%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본다.

내가 생각해도 난 그냥 적당히 잘 자랐다.

엄마는 "작은 딸은 거저 키웠지"라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큰 문제 일으키지 않고 자랐다는 뜻이다.

어른들 말에 무조건 순종했던 건 아니었지만, 나쁜 아이 경계선을 밟아본 적은 없다.

나에겐 착한 아이 프레임이 씌워져 있었다.

P. 102

어릴 때 좀 더 다양한 어른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한다.

자라면서 봤던 어른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을 주축으로 친척 어른들과 부모님의 지인 정도가 전부였다.

그들은 모두 나를 비슷한 인생으로 안내했다.

P. 112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존과는 다른 어른으로 나이 먹는 거다.

P. 115

사회생활 슬럼프는 3, 6, 9년 차에 온다던 선배들의 말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오늘 하는 일과 내일 해야 할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이걸 계속 반복한다고 더 나은 사람 또는 더 잘하는 마케터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P. 137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요?‘라고 소리 없이 외쳤던 것들이

모두들 한 번씩 겪는 일이었다는 게,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게,

이런 게 그냥 삶이구나, 삶은 이런 거구나,

인간이란 필연적으로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는 거구나 하고 받아들여졌다.

P. 237

다들 그 정도는 아프면서, 견디면서 살아가

P.237

나만의 동굴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가끔 그 안에 들어가 숨습니다.

그곳에서 머리를 비우고, 생각이 가득 차오르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P. 97 (유병욱 ‘생각의 기쁨‘ 中 )

평범하고 단조로운 인생에서 하나둘씩 변화가 시작된 건 28살이 되고부터다. 지옥철을 견디기 힘들어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기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소울메이트와도 이별하게 되었다.

의지하고 사랑했던 것들로부터 완벽하게 독립을 하게 되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었고, 기댈 곳이 없던 힘든 하루 끝엔 우주에 혼자 남겨진 기분을 느꼈다. 이건 나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은 사건 앞에선 자주 나의 나이를 읊조렸다. 이십…팔…세…

-프롤로그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읽으면 읽을 수록 마음이 답답하고 저 밑바닥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던 그런 책들이 있었다. 류성룡의 『징비록』이 그랬고, 박상식의 『동도일사』가 그랬다. 그러니까 임진왜란 전후나, 조선 말기 때 집필된 책이나,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책을 읽으면 그랬다. 그 책들의 저자는 그저 담담하게, 본인들이 보고 겪었던 상황을 기록한 것 뿐인데, 그 내용을 읽고 있는 나는 계속 분노했다.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간 당시 사회에 분노했고, 그런 사회를 만든 위정자들에게 분노했으며, 큰 일을 겪은 뒤에도 변함없는 사회에 분노했었다. 이 분노의 주체는 과거였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 이국종 교수님이 집필하신 이 책, 『골든아워 1』를 읽고, 앞선 책들을 읽으며 느꼈던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이 분노와 답답함은 앞선 책들에서 느꼈던 것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이국종 교수님이 겪은 이 참담한 현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지금 이 시간에도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자인 이국종 교수님은 그저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중증외상외과’에 대한 시스템을 세우고 싶어했던 사람이었고, 그저 살릴 수 있는 환자들을 교과서에서 배운 그대로, 원칙대로 치료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본인의 삶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환자를 살리는 사람에게 이런 참담한 현실만 놓여있는 것일까. 분명 사람 목숨 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배웠는데, ‘돈(비용)’, ‘관행’이 사람의 목숨보다 우위에 있는 것일까. 이국종 교수님이 맞닥드린 참담한 현실이, 지금 내가 사는 현실이라는 사실이 너무 답답했고, 안타까웠고, 그렇기에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

병원은 분명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장소이지만, 그 전에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장소이다. 병원은 아픈 환자는 치료하되, 그 치료로 수입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슬픈사실이지만,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하는 중증 환자들도 우리 주변에 분명히 있다. 이런 자본, 돈의 압박은 환자뿐 만이 아니라 의사들도 받는다. 의사들은 진료에 사용하는 약품의 수나, 약품의 용량, 장비 사용 등의 비용이 심평원에서 지급해주는 진료비를 초과하는 순간 손실이 된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헌데 이 진료비 기준이 일반환자 기준에 맞춰 있다보니, 중증환자를 진료하게 되면 너무 당연하게도 병원은 손실을 안게 된다.



아주대학병원에서 뼈와 살을 갈아가며 중증외상환자들을 진료하는 이국종 교수님은, 다른 의사들의 적이었으며 병원의 적이었다. 근데 이게 또.. 다른 의사들을 비난하기도 어려운 것이, 이국종 교수님이나 다른 의사들이나 환자를 살리는 건 똑같은데, 이국종 교수님이 환자를 진료할 수록 병원은 엄청난 적자가 되고, 그 적자를 메꾸는건 그 외 환자를 진료하는 다른 의사들이 몫이기 때문이다.



환자가 치료받기 위해선 돈을 생각하고, 의사도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선 돈을 생각하는 사회, 정말 안타깝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 모습이다. 이국종 교수님이 바라는 선진국의 중증외상외과 시스템 도입도, 이러한 우리 사회 제도가 바뀌는게 선결되어야만 가능한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제도가 바뀌길 기다리기엔, 우리 사회는 관료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기에, 솔직히 힘들다. 간혹 뉴스에서 나오는 이국종 교수님의 기사를 보면, 그것도 본인이 적을 둔 아주대학병원에서 핍박받던 그 기사를 보면, 우리 사회 제도가 과연 변화할 가능성이 있기는 할까 싶다. 이국종 교수님 같은 분을 담기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아주 작은, 간장 종지만한 그릇인것이다.

책에 기록된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모두 사실이다. 기록의 대부분은 2002년에서 2018년 상반기까지의 각종 진료기록과 수술기록 등에서 가려 뽑았고, 내 기억 속의 남겨진 파편선에서 고군분투하는 환자와 내 동료들의 치열한 서사다. 외상으로 고통 받다 끝내 세상을 등진 환자들의 안타까운 상황과, 환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싸우다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냉혹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업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 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여기가 미국인 줄 알아?

한국에 돌아온 후 주위 반응은 막막했다. 한국에는 한국만의 ‘질서’가 존재했다. 기껏 찾은 답은 쓸 수 없었고 현실적인 난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외상외과 의사로서 교과서적으로 치료하면 환자가 살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원칠대로 하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증외상환자 치료 원칙은 환자의 생환에는 도움이 되어도 병원의 이익은 되지 못했다. 일할수록 폭증하는 적자규모는 내가 평생 구경도 못할 액수였다. 그 같은 손실이 나와는 무관한 타인의 불행을 치료하다 발생한다는 사실은 허무하고 허망했다. 나는 일해서 돈을 벌었고 일을 해서 돈을 잃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외상외과’라는 말도 안되는 부서를 지키고 선 스스로가 무력했다.

-이 선생, 여기는 영국이 아니잖아? 나도 미국에서 연수받았지만 거기에서 하던 걸 한국에서 다 할 수는 없어.

-이 교수가 이제 마흔인가? 적어도 마흔이지? 이제는 좀 적당히 해. 일단 수술은 하지 않았으면 해. 그게 과의 입장이야. 어차피 전공의 배정도 없이 학생들이나 응급구조사들만 데리고 하는 것도 남 보기 좋지 않고

-아주대학교병원이 외상외과 운영을 포기하면 한국에는 더 이상 현황 파악을 할 곳조차 없습니다. 조금만 이 분야를 더 끌고 가주시면 국회 차원에서 병원 지원과 함께 중증외상 환자 치료에 대한 전국적인 체계를 잡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일행의 방문은 중증외상에 대한 국가의 지원 가능성으로 비쳤다. 보직교수는 그 자리에서 내게 수술 제개를 지시했다

새로 합류한 팀원들과 내가 열심히 일해서 살려낸 환자의 수가 늘어날 수록 적자는 정비례해 커졌다. 괴이한 일이었다. 우리는 ‘의료진’으로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살려야 했고, ‘조직원’으로서 병원의 이윤을 도모해야 했으나,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상 ‘외상외과’에 적을 두고서는 그 둘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나를 향한 뜨거운 눈초리와 뒷말은 여전히 무성했다.

누군가는 내게 시스템이 없는 곳에서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일이라서 더 힘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심각함이 지나쳤다. 기존의 체계와 인사, 재정, 지원과 운영 모든 면에서 부딪혔다.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이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주시했다. 비아냥과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고 내가 등을 돌리는 순간 숨기고 있던 칼을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그 저열함에 나는 치를 떨었다. 이제는 나 하나로 끝나지 않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덩달아 힘겨워졌다. 그것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응급실을 크게 열어놓은 수많은 대학병원들은 정작 환자가 수술 뒤 들어갈 중환자실이나 입원실이 없어 고생하면서도 중환자실 병상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는다. 중환자실 병상 없이 응급실만 크게 만들어놓는 것은, 고속도로 정체를 해결한답시고 톨게이틈나 크게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 병원이 이 본질적인 문제를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한는 것인지, 하지 않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급하고 절박한 것은 내 사정이었을 뿐이다. 나는 수술이 끝난 환자를 어쩔 수 없이 다시 응급실로 내려보내야 할 때마다 응급의학과 의료진에게 감사했다

2011년에야 처음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실제로 평가를 담당하는 의사, 간호사들과 대면했다. (중략)

-아니, 이렇게 확실한 문제가 있으면 저희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왜 이렇게 오래 놔두셨습니까?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속에서 치솟는 불길이 머리끝에 닿았다. 긴 바늘이 머리를 쑤셔대듯 두통이 밀려왔다. 지난 10년 가까이 내가 올린 수많은 자료들과 직접 작성한 ‘수혈 비용 삭감에 대한 이희신청서’는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혔단 말인가. 일개 의사의 불만이라도 10년 동안 지속되면 한 번은 귀 기울여줄 만했다. 나의 절박함이 그들에게는 하찮은 모양이었다. (중략)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지금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09년, 외상외과에 혼자 있을 때 1년간의 적자는 8억원을 넘는 수준이었다. 2010년 정경원이 합류해서 열심히 진료하고 수술하니 불과 8개월 만에 적자가 8억 원을 넘어섰다. 권춘식 등이 합류하고 헬리콥터를 이용해 중증외상 환자의 집중도가 증가하자 적자는 더 늘어났다. 2012년에 기획팀장이 나를 찾아와 20억 원이 넘는 적자를 보이는 외상외과의 ABC원가분석 보고서를 내밀었다. 병원은 심평원에서 이루어지는 진료비 청구 삭감분을 각 교수별로 지급되는 진료성과급에서 차감하겠다고 통보해왔다.

외상외과를 이야기 할 때마다 나는 길레 설명해야 했다. (중략) 실전에 투입되어 수많은 중증외상 환자를 치료해온 주한미군의 군의관들만이 외상외과 의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묻지 않았다. ‘외상’이 몸에 가해진 물리적 충격에 의해 손상된 모든 것을 의미할 때, ‘중증외상’은 생명이 위독할 수 있는 외상으로 반드시 ‘수술적 치료’ 및 집중치료가 필요한 상태를 뜻한다. 어딘가에 부딪히고 깔리거나 떨어져서 혹은 무엇인가에 관통당해서 사지와 뼈들이 으스러지고 장기가 터져나가는 경우들이다. 이떄 환자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핼리곱터를 이용해서라도 이송은 신속히 해야하고, 이송 중 적절한 처치가 이루어져야 하며, 최종 치료를 담당할 수 있는 의료기관에 도달해야한다. P 046

사지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져나간 환자에게 시간은 생명이다. 사고 직후 한 시간 이내에 환자는 전문 의료진과 장비가 있는 병원으로 와야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골든아워’다. 그러나 금쪽같은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가까운 거린느 엠블런스로 이송 가능하지만 먼 거리는 상황이 다르고, 가깝더라도 차가 막히는 러시아워가 되면 환자들은 길바닥에 묶였다. 고속도로나 일반도로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앰뷸런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앰뷸런스로 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가 헬리콥터로는 20분 안쪽이면 충분하며 이송 중 응급처치까지도 가능하다. 그렇게 실어 온 환자들의 생존 가능성은 당연히 높다. 내가 미국에서 보고 런던에서 보고 일본에서 봤던 ‘사실’이었다.

피랍된 배의 선장은 고의적으로 선박의 항로를 지연시켰다. 최영함이 선박을 따라잡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려 한 것인데,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해적들의 살기 어린 구타가 반복됐으나 선장은 버텼다. 전직 해군 부사관 출신이라는 선장은 도적들에 맞서 몸을 던져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 해군은 다음을 준비했다. 본국으로부터의 직접 지원이나 근해에 배치되어 있는 연햅하군으로부터의 전력지원은 없었다. 최영함을 이끄는 조영주 함장은 피땀을 흘리며 고독한 싸움을 이어갔다. 해군의 진압에 분노한 해적 하나가 석해균 선장을 향해 AK-48 총탄을 쏟아부었다. 미군 해군항공대의 도움을 받아 오만 살랄라의 왕립술탄가부스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했다. 석 선장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1차 응급수술을 받아 가까스로 숨을 유지했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그것을 아주 대학교병원에 요청할 수는 없었다. 석 선장 때문에 오만에 가야한다고 병원에 말했을 때 윗선의 화는 불같았고, 그들은 내가 어디에서 월급 받는 사람인지를 일깨워줬다. 나는 병원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기대할 수 없었으며, 기대해서는 안됐다. 결국 내가 지급보증을 하겠다고 답했다.

병원 측에서 언론을 상대로 브리핑을 했다. 나는 언론과접촉하지 않았다. 보직교수는 인터뷰 중에 ‘아주대학교병원이 지난 19년간 중증외상 분야를 집중 육성해왔다’라고 했다. ‘10년’과 ‘집중육성’사이에서 나는 씁쓸해졌다. 내가 겪어온 10년과 병원이 말하는 10년은 같지 않았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몇몇 중간관리자는 앞뒤가 달랐다. 윗선에는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고 병원에서는 이 프로젝트의 지속여부에 대해 이죽거렸다. 소방대원들의 열악한 처우 개선은 뒷전이고 보여주기식 헬리콥터 사업에 예산을 낭비한다고도 했다. 소방대원에 대한 처우가 열악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 비난은 이해되었다. 다만 저쪽과 이쪽에서 보이는 다른 낯빛에 나는 속이 뒤틀렸다. (중략) 잡음은 사방에서 끊임없이 들려왔고 석해균 프로젝트는 흔들리며 나아갔다. 불안한 시작이었다

소방방재청과 맺었던 양해각서의 이행은 7월로 중단됐다. 석해균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넉달만의 일이었다. 산 자들의 안위에 죽어가는 이들이 밀려났다. 석해균 프로젝트로 분명한 변화들이 보였으나 그 변화는 상부에까지 가닿지 않았다. 사고 현장으로 헬리콥터가 출동하고 전원이 요구되는 환자들로 인해 경기 소방창공대 내부의 업무 부담은 급증했다. 실무잗르이 힘겹게 버틸 때 필요한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달느 이들은 밖에서 입을 놀려 말을 만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