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6월 25일 첫역사그림책 25
김미혜 지음, 최정인 그림, 하일식 감수 / 천개의바람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는 나이로 4세가 된 우리 상전. 그림책 읽기를 정말 좋아한다. 상전이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할 때마다, 매번 그림책 살 때 마다 고르고 또 고른 보람이 있다. 막 말이 트이기 시작했을 땐 사물이나 생태관련 짧막한 책을 읽어줬다면, 지금은 이야기가 있는 그림책을 읽고 있다. 20페이지 내외, 페이지당 5~6줄의 글이 있는 그림책을. 예전엔 전래동화 같은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요즘은 인성교육 관련 그림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엄마의 욕심은 끝이 없고!


엄마는 자타공인 역사더쿠. 그래서 우리 상전도 역사더쿠의 길을 따라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그리하야 유아가 읽을 만한 역사 그림책이 무엇이 있을까 검색 시작! 몇 개의 후보군 중에서 일단 ‘천개의바람’ 출판사에서 나오는 어린이첫역사책 시리즈 중 4권, 우선 구매해봤다. 물론! 이 네 권도 랜덤으로 고르지 않았다. 집필자의 역사관에 따라 왜곡이 심해질 수도 있는 ‘임진왜란, 개화기, 독립운동, 한국전쟁’ 에 대한 책을 골랐다. 우리 상전이 읽어야 할 역사책이니만큼, 정말 꼼꼼히 확인했다. 



​1. 한 쪽으로 편향된 내용 또는 왜곡이 없는지

2. 꼭 알아야 될 사실들이 정확하게 반영되어있는지

3. 아이들이 읽기 쉬운 글인지

4.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삽화인지




완전 성공이다. 네 권 모두 위 조건에 부합했다. 그에 더해 ‘이런 것 까지 알려주다니!!’ 라고 놀라웠던 지점마저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사 전공 교수님이 감수했다는 사실에 완전 감동(고대사 전공 교수님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우리 상전 첫 역사 그림책으로 합격이니만큼, 일단 내가 중요하게 생각되는 역사적 사건 기준으로 차례차례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거기에 더해 왠만하면 상전 그림책은 리뷰를 잘 안하지만, 이 그림책들은 아주 만족했으니 천천히 리뷰해보려고 한다.




큰 강줄기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아기 수달 달이. 달이는 강가에서 해순 할머니를 만났다. 달이는 해순 할머니가 길이 막혀 북쪽으로 갈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물길이 자유로운데 길이 막혀있다니! 해순 할머니는 달이에게 1950년 6월 25일, 그날에 겪었던 일들을 설명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책에서 처음 놀랐던 지점이 바로 여기다. 보통 아이들에게 6.25 전쟁을 이야기 할 때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해~’ 라는 전개과정을 이야기한다. 이 책도 그러려니 했는데, 세상에! 놀랍게도 이 책은 배경부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가 끝났지만, 미군정으로 인해 일제강점기때 혼란이 수습되지 못했던 그 배경을! 물론 디테일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내용이었다. 아주 박수가 절로 나왔다.



결국 부산까지 빼앗길 위기에 놓였지.

그때 맥아더 장군이 국제 연합군을 이끌고

국군과 함께 인천으로 들어와 북한군을 공격했어.

바로 인천 상륙 작전이란다.



“그렇게 전쟁이 끝난 거예요?”​

“아니, 그렇지 않았어. 북한을 도우려고 중국이 어마어마한 군대를 보냈거든.”


“전쟁은 큰 상처를 남겼단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학교와 집은 불에 타고,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어.

엄마, 아빠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도 많았지.”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갔어요?”


“아버지는 만나셨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더구나”

“왜요? 전쟁에서 돌아가셨어요?“​

“글쎄다, 북에 살아 계시려나…….“

할머니가 먼 하늘을 바라봅니다.



해순 할머니는 그 기간동안 주인을 잃은 아버지의 구두를 소중하게 보관했다. 다시 만날 아버지에게 돌려주기 위해.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은 어느새 70여년이 흘렀다. 그 기간동안 남과 북은 갈라졌고, 가족들도 헤어져 만나지 못했다. 그저 말못하는 짐승들만 남과 북을 자유로이 오갈 뿐.



어린이 그림책임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분단이 주는 고통과 아픔이, 성인에게까지 이렇게 잘 전달되다니. 우리 상전 첫 역사 그림책으로 손색이 없다.


그림책 뒷장에는 한국전쟁의 과정이 비교적 간략하지만 설명되어있다. 근데 간략하다고 무시하면 안된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중공군 참전, 휴전, 피난민 생활, 비무장 지대 등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들을 전부 다루고 있다. 거기다 한국전쟁 관련 유적지 몇 군데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 



거제포로수용소 유적은 연합군이 만든, 북한+중공군 포로를 수용했던 수용소다. 한국에선 오랫동안 언급하지 않았던 곳인데, 이렇게 어린이 그림책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여기서 또 한번 감동했다. 이 그림책은 한국전쟁에 대해 최대한 중립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자 했구나, 하고.



가짜뉴스와 역사왜곡이 판 치는 세상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건 올바른 역사책이다. 우리 상전 첫 역사책으로 이 그림책은 최고의 선택이 아닐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딸은 세상의 중심으로 키워라 - 상처 주지 않고 자존감을 높이는 훈육 기술
마츠나가 노부후미 지음, 이수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를 낳기 전까지 거들떠도 보지 않던 육아책. 아이 낳은 후로 스스로 찾게 되었다. 나도 엄마는 처음인지라, 엄마가 되기 위해서 육아책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한 권, 두 권 손 잡히는 데로 읽다보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어떤 육아책은 ‘엄마’로서 내 정체성을 흔들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육아책을 읽다보며, 나름 육아책을 읽는 데 있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하는지 깨달았다. 모든 육아책이 다 정답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부 오답도 아니다. 내 상황에 맞춰서 취할 건 취하고, 버릴건 버리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육아책 『딸은 세상의 중심으로 키워라』는 나같은 딸맘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취할 게 생각보다 많은 책이다. 



다만 언뜻언뜻 저자의 가치관이 나와 약간 다른 부분들이 나와서, 조금은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다. 예컨데 저자가 말하는 딸 육아가 중요한 이유가, 딸이 다음 세대를 낳는 ‘국가의 보물’이기 때문이라던가, 혹은 일도 잘하면서 육아도 잘 해내는 어른 여성이 되길 위함이라던가 하는 내용들 말이다. 하지만 이건 저자가 일본인 남성이기에 어쩔수 없는 부분인것 같긴 하다. 일본이 아무리 발전한 선진국이라 한들 여성을 보는 시각과 양성평등에 있어선 아직까지 후진국에 속하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고로 언뜻 비치는 저자의 가치관만 배제하면, 이 육아책 『딸은 세상의 중심으로 키워라』는 전체적으로 딸맘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육아에 바빠서, 이 책 한 권을 전부 읽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목차를 보고, 본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먼저 읽어봐도 좋다. 이 책을 추천하는 제일 큰 이유 중 하나가, 원하는 부분을 골라서 읽을 수 있게 정리된 ‘목차’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출간된 후 17년간 40만부나 판매된, 일본 아마존 초장기 베스트셀러다. 한마디로 자녀교육 육아책으로써 이미 정평난 책이라는 것.



내 딸이 이렇게 컸으면 하는 딸맘의 모든 바람이 이 목차에 담겨있다. 내 딸은 현명하게 컸으면 좋겠고, 말을 조리있게 잘 했으면 좋겠고, 기본 예절습관이 몸에 베어있었으면 좋겠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으면 좋겠고, 뭐든 엄마인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게 모든 엄마들의 바람이니까. 어쩌면 내 엄마도 나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 모든게 다 어려운 바람이란 걸 안다. 나 역시 딸이었으니까. 엄마도 내게 욕심이 있었을테다. 다만 엄마의 욕심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더 많이 배워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한 사람 몫을 하고 사는 것. 보통의 엄마들이 바라는 욕심이었다. 내가 엄마의 욕심을 전부 이뤄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름 좋은 직장에 다니며 한 사람 몫을 하고 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거다. 내 삶은 엄마의 욕심을 이뤄주기 위한게 아니라는 것. 엄마가 아닌, 나를 위해서 살다보니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데, 의도치않게 엄마의 욕심을 이뤄주는 결과가 되었을 뿐이다. 엄마의 욕심이 과하지 않았다는 것도 한 몫했고.



내 딸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이거다. 엄마인 내 욕심이 아닌, 본인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았으면 하는 것. 그 과정에서 보다 현명했으면 좋겠고, 판단력이 좋았으면 좋겠고, 예의가 무엇인지 알았으면 좋겠고, 상처를 이겨내는 회복탄력성이 좋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키우기 위한 힌트를 이 책에서 찾아보았다.







첫번째: 딸로 태어났어도 몰랐던 딸의 특성



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있잖아요, 엄마’에서 시작되는 ‘수다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대화기술을 갈고 닦았다.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대화기술을 닦은 아이는 국어 실력이 금방 향상된다. ‘국어 실력’이 향상된다는 것은 언어로 이해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자아이의 수다 능력은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데도 가끔 딸의 수다 능력을 무시하는 부모가 있다. (…) 설령 자신은 잘 떠들지 못하더라도 “응응, 그래서?” 라고 맞장구를 쳐서 딸이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게 ‘잘 들어주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p 027, ‘국어실력을 늘리는 수다법은 따로 있다.’



가정에서 존댓말을 쓰라고 강요하라는 뜻은 아니다. ‘재수 없다, 짜증 난다’ 같은 말만 쓰는 친구들과 사귀지 말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집에서는 점잖고 바르게 행동하지만 밖에 나가서는 나름대로 아이들과 어울릴 줄 알고, 학교에서는 친구들끼리 유행어로 말을 해도 집에 돌아오면 ‘다녀왔습니다’ 에서부터 ‘안녕히 주무세요’ 까지 올바른 말을 쓸 줄 아는 등 때와 장소에 맞게 말과 행동을 가려서 할 줄 알면 된다. p 048, 예절바른 아이가 머리도 좋다.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상황에서 아이의 의견을 잘 들어주는 것이다. 휴가를 갈 곳에서부터 커튼 색, 저녁 메뉴, 다음 날 입을 옷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아이에게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라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아이의 의견을 무조건 들어주면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하는 폭군이 될 수 있다. 이때 아이의 의견을 들으면서 “엄마는 이렇게 생각해. 왜냐하면…” 하고 설명한 다음, 다시 한번 “너는 어떠니?”하고 묻는 것이 좋다. p 054, ‘여자답게’보다 ‘현명하게’ 키워라






두번째: 즐기는 법을 아는 딸이 결국 성공한다



‘지식만 있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사람’은 주위에서 고립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바로잡을 기회도 얻지 못한다. 어느새 아는 척만 하는 구제불능 인간이 되어버린다. 이는 정말 무서운 일이다. 이럴 위험은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있다. 부모가 고학력일수록 아이가 다양한 지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체험없이 얻은 지식을 떠벌리다가는 친구들에게 바보 취급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p 094, 지식만 쌓는다고 교양이 생기지는 않는다.



아이에게 무엇이든 흑백 논리에 맞추어 ‘좋다’ 아니면 ‘싫다’로 나누지 말고 다양한 것을 받아들이는 힘을 길러주자. 그 것은 내 딸을 ‘패배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교육이다. p 103, 딸 인생의 행복을 높여주는 포용력 훈련



아이 스스로 “ㅇㅇ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가능한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생각만큼 재미있지 않다고 느끼는 아이의 변화를 받아주는 것이다. “네가 하고 싶다고 한 일이니까 끝까지 해!” 라고 강요한 것은 하기 싫은 일만 하나 더 늘려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이들은 끈기와 집중력이 약하다. 변덕은 당연한 일 중 하나다. (…) 언제까지 아이의 응석을 받아줘야 하는지 고민이 깊은 것도 안다. 하지만 이도 다 한때다. 일단 아이에게 시켜보라. p 140, 좋아하는 일을 찾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세번째: 모두에게 사랑받는 딸로 키우는 비법


‘우리 아빠는 언제나 팬티 차림으로 맥주를 마시지만 책도 많이 읽고, 어떤 책이 재미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든지, ‘집에서 고장 난 물건은 언제나 아빠가 고친다’등 딸이 아빠가 멋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일을 하라고 남편에게 귀띔하는 것도 좋다. 그렇게 하면 아이의 머리가 좋아질 뿐만 아니라 아버지 자신의 인생도 틀림없이 윤택해질 것이다. p 164, 존경받는 아빠는 딸의 ‘남자 보는 눈’을 기른다



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은 건 반드시 가져야 한다’, ‘돈은 언제든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자란 아이는 갖고 싶은 건 금방 손에 넣는 버릇이 몸에 밴다. 이 버릇이 몸에 배면 갖고 싶은 걸 가질 수 없을 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소중한 딸을 어리석은 아이로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쉽게 물건을 사주지 말고 용돈도 너무 많이 주지 않으면 된다.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으면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 사준다. 조금 까다로운 조건을 달아서 아이의 의욕을 끌어올리는 것도 좋다. p 177, ‘금전감각’을 낳는 ‘갖고 싶은 걸 참는 습관’



아들은 이렇게 키워라, 딸은 이렇게 키워라 어쩌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육아 전문가들이 쌓아온 데이터에 따르면 아들과 딸을 키울 때 그 방법을 달리해야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간혹 딸 같은 아들, 아들 같은 딸이라는 변수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가정에서는 아들과 딸 육아법을 구분해야 엄마도 편하고 자녀도 편한법이다. 



딸을 키우고 있는 부모라면, 한 번쯤은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25-02-12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도 사람이고 딸도 사람이지만, 둘은 굳이 딸과 아들이라는 다른 몸을 입고서 어버이한테 찾아옵니다. 곰곰이 보면, 딸을 낳든 아들을 낳든, 두 어버이(어머니·아버지)가 ‘다르기에 하나인 같은 눈빛’으로 사랑을 속삭일 적에 비로소 아이를 낳습니다. 이미 태어난 아이는 혼자 돌볼 수 있지만, 아이를 낳으려면 혼자가 아닌 둘이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길이란, 다른 둘을 하나인 사랑으로 새롭게 배우는 삶이지 싶습니다. 그래서 두 어버이는 저마다 다른 눈이자 나란한 손길로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는 살림살이를 새로 배운다면, 아이들은 두 어버이를 저마다 다른 사람으로 바라보고 곁에 두면서 새삼스레 삶·살림·사랑을 배우면서 자라지 싶어요.

기쁘게 하루를 짓는 오늘을 아이랑 곁님하고 나란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안의, 별사
정길연 지음 / 파람북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자학의 나라 조선. 그런 조선을 개혁하고자 뜻있는 유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제시한다. 경세치용, 실사구시, 이용후생을 기본으로 한 조선후기 ‘실학’이다. 실학파도 세부적으로는 경세치용학파, 이용후생학파로 나뉜다. 경세치용학파는 농업 중심의 개혁론이라면, 이용후생학파는 중/상업 중심의 개혁론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론 ‘실학파’라고 하면, 중/상업 개혁을 말한 이용후생학파, 즉 ‘북학파’를 떠올리곤 한다. ‘북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는 박지원을 비롯하여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이 있다. 국사 시간에 한번 쯤은 들어봤을 이름들이다.


이렇게 북학파 이야기로 시작하는 건, 이 역사소설 『안의, 별사』 주인공이 바로 북학파의 영수였던 연암 박지원이기 때문이다. 연암은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을 연구하며 『열하일기』, 『허생전』 같은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실력도 매우 뛰어났던 그지만, 출세에는 뜻이 없었다. 



나라의 기강이 위에서부터 무너진 지 오래고, 지방관 역시 알량한 벼술자리나마 잃게 될까 제 몸부터 사린다. 아무도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도리어 모나지 않는 처세라 합리화한다. p 044


“공부가 과거를 보는 수단이 되는 걸 경계하라는 말이지. 사람 되기를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글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해서 다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더라마는.” p 176



“우리 반남 박씨 집안은 누대에 걸쳐 청빈과 검소를 실천하며 부귀와 안일을 멀리해왔다. 이는 타고난 데다 가풍을 따른 것이다. 너희가 또 나를 보고 배울 것이니 나 또한 너희 앞일지라도 조심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너희가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부르기를 바라지만 어디까지나 아비로서의 인정일 뿐이다. 인정은 자칫 의를 그르친다. 내 바람은 두 가지다. 삿됨을 분별하는 안목을 기르는 것. 사대부 집안으로서 글 읽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면 하는 것. 그 뿐이다.” p 176



연암이 살았던18세기 조선은, 위 소설속 내용으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할 만큼 양반네들은 부패했고 백성들의 삶이 궁핍했다. 백번 양보해 모두가 잘사는 나라는 아니더라도, 백성들이 배는 곯지않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었어야 할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욕심 채우기에 급급했다. 아무리 좋은 개혁안이 있다치더라도, 사농공상 및 유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모조리 차단되는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이다보니 연암은 더더욱 조정에 나갈 뜻이 없었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재야에 있기엔 연암의 학문이나 능력이 워낙 출중했기에,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늦게나마 출사길을 걷는다.



연암은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그 중 1792년 안의 현감을 지냈을 때가 이 소설의 배경이다.




무릇 역사소설은 사실과 허구가 혼재하여,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설은 왜곡 논란에서 사뭇 자유롭다. 왜? 저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연암 덕후였다. 연암에 대한 모든 것을 공부하며 그의 자취를 쫓았다. 그렇기에 저자는 소설을 쓰면서, 알려진 연암의 자취를 소설 속으로 무리없이 옮겨올 수 있었다. 다만 연암의 생애 중 비어있는 구간을 허구로 채웠는데, 그 허구가 바로 연암이 안의 현감을 지냈을 시기다.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적 허용을 빌어 무책임한 왜곡을 저지르고 싶지 않다고. 하여 소설적 허구를 반영함에 있어서도, 밝혀진 연암의 생애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반영했다. 따라서 허구적 장치는 안의면에서 만났던, 가상의 여인 ‘은용’과 그녀의 서사 정도다. 하지만 이 조차도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게. 역시나 연암의 생애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만 활용되었다. 


특히 은용의 서사는 오히려 알려진 조선 후기 첩의 여식의 삶, 과부의 삶과 비교하면 비교적 담담하고 담백하게 서술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홀아비 였던 연암의 삶과 더욱 비교가 되어, 은용의 삶이 더 처절하고 기구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나는 홀아비다. 아무도 내게 수절을 권면하지 않는다. 벗들도 집안사람들도 궁색히 여겨 볼 때마다 오히려 재혼을 권한다. 아내보다 내가 먼저 죽었다면 누구도 아내더러 개가를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가한 여인의 자손과 첩실의 자손이 받을 부당한 대우는 차지하고서라도, 세상은 온통 여인에게만 부부간의 신의와 절개를 강요한다. 불공평하다 못해 해괴하다. 


유금과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성대중, 백동수, 이희경…. 나는 내 벗들이,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따돌림과 핍박을 당하며 살아온 삶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은 그들이 저지르지 않는 죄목으로 대가를 치르며 살았고, 살아간다. 그들을 이 세상에 내보낸 그들의 아버지들조차 자식이 받는 불이익에 침묵한다. (…)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된다. 나의 적은 나의 마음이고, 욕망을 비우고자 하는 마음의 나의 것이다. 하므로 신독,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갈것, 이를 내 여생의 수행의 화두로 삼는다. p 330



그래서 은용이 ‘인연 없음’을 방패삼는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또한 은용과는 다르면서도 같은 연암의 도리가 마음을 울렸다. 그렇다. 이 소설은 연암과 은용의 ‘단심(丹心)’을 고스란히 담아낸 소설이다. 



국어사전은 ‘단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런 마음이라고. 연암과 은용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 ‘단심’만큼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대게 생각은 다 망상이요, 인연은 다 악연이다. 생각하는 데서 인연이 맺어지고, 인연이 맺어지면 사귀게 되고, 사귀면 친해지고, 친하면 정이 붙고, 정이 붙으면 마침내 이것이 원업이 되는 것이다. 죽음이 참혹하고 공교로우면 평생 서로 즐거워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데 마침내 재앙과 사망으로 인해 혹독한 고통이 뼈를 찔러댄다. 이것이 어찌 망상과 악연이 합쳐져서 원업이 된 게 아니겠는가. p 395, 애사


뜰을 이리저리 어정어정 걷다가 뛰기도 하고, 점잖게 걷기도 하고, 달그림자와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한다. 명륜당 뒤뜰의 오래된 나무는 우거져 하늘을 덮었고, 서늘한 이슬이 동글동글 맺혀 잎사귀마다 구슬을 머금었으며, 진주 같은 이슬은 달빛에 반짝인다. 애석하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밤, 이렇게 좋은 달빛에 함께 놀 사람이 없다니. p 444, 미혹


▶『안의 별사』에서 인용한 연암집 일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2 : 일본 백제계 지명과 신사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2
홍성화 지음 / 시여비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 하반기에 읽은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1권에 이어 이번엔 2권이다. 1권을 읽은 독자들은 필히 2권도 읽어야 한다. 1권과 2권은 내용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1권은 한일 고대사 이론(또는 개념), 주요 인식 및 쟁점등에 대한 에 대한 역사책이다. 반면에 2권은 일본 곳곳에 ‘현재’ 남아있는 도래인(도왜인)의 흔적을 찾는 일종의 답사기다. 고로 나처럼 한일 고대 유적지 답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2권을 필히 읽어야만 한다. 



지금이야 답사여행을 못하고 있지만, 아이를 낳기전만해도 주기적으로 국/내외 유적 답사를 다녔었다. 특히 한일관계사 부분은 내가 제일 관심있어하는 부분이다보니, 해마다 일본을 찾아 많은 유적지 답사를 했다. 다만 실제로 답사를 다닌 지역은 관동/관서/규슈지역에 한정되있다보니 그 외의 지역은 책으로 공부하는게 끝이긴 했다. 그래도 이런 경험들로 인해 나름대로 도래인 신사나 현존하는 지명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알고 있는 건 정말로 한정적이었달까. 거기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중 일부는 과거의 내용으로, 현재 학계에선 새로운 내용들이 대두된 것들도 있었다. 



저자는 이 역사책이 일본 백제계 지명과 신사 답사기인 만큼, 일본 지역별로 묶어서 집필하였다. 제일 땅 덩어리가 큰 혼슈는 긴키, 간토, 주부, 주코쿠 등 세부적으로 나뉘었고, 그외 시코쿠랑 규슈는 각 하나씩 구성했다. 훗카이도는 없다. 훗카이도가 없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 긴키 지방: 오사카부, 교토부, 나라현, 시가현, 와카야마현, 효고현, 미에현

2. 규슈 지방: 후쿠오카현, 사가현, 구마모토현, 오이타현, 미야자키현

3. 주고쿠 지방: 야마구치현, 오카야마현, 시마네현

4. 시고쿠 지방: 도쿠시마현, 에히메현

5. 주부 지방: 후쿠이현, 기후현, 아이치현, 나가노현,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

6. 간토 지방: 군마현,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 이바라키현


고대 한반도 도래인은 바닷길을 이용해 일본열도로 넘어갔다. 지금도 위험한 바닷길, 고대라고 다를까? 그래서 도래인들은 일본 열도로 가기 위해 최대한 짧은 바닷길을 이용했다. 고대인이 주로 이용했을 대표적인 바닷길 경로가 몇개 있는데, 어떤 경로든 종착지는 규슈와 혼슈 일대다. 혼슈는 동해와 인접한 주로 긴키(간사이), 주코쿠 일대다. 최초 규슈, 혼슈 일대에 도착한 도래인들은 터전을 점점 넓혀가며 관동지역까지 올라간 것이다.


반면에 일본 열도 북동부에 자리한 훗카이도는 지리적으로도 멀다. 그리고 춥다. 대체로 일본으로 넘어간 도래인들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살던 사람들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추운지역인 고구려계 도래인도 있었지만, 고구려와 훗카이도를 비교해도 훗카이도는 한참 더 북쪽에 위치해있다. 아무리 북쪽에 있는 고구려라고 해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곳이 훗카이도다. 대충 현재 북한과 러시아 기후를 비교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여튼 그러한 이유로 도래인들이 훗카이도까지 갈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훗카이도는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일본이 아닌, 아이누족의 땅이었다. 일본조차도 같은 국가라 생각하지 않았던 곳이다. 



메이지 유신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일본 국수주의가 최고조였던 일본 근대화 시기(메이지 유신)에 수많은 도래인 신사의 주신이 일본 신으로 강제 변경되었다. 한반도계 지명도 일본식으로 거의 바뀌었다. 해서 메이지 시대 이전과 비교하면 실제로 남아있는 도래인의 흔적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신이 일본 신으로 강제 변경되었던 도래인 신사 중 어떤 곳은 현재 원래의 주신인 지역신(도래인이 모시던 신)으로 바꾼 곳도 있다. 없앴던 한반도계 지명이 다시 부활한 곳도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부르던 동네이름을 갑자기 바꾼다고 해서, 쉽게 바뀔까? 지도상의 공식 지명은 바뀔지언정, 옛 이름들은 학교 이름으로, 거리이름으로, 간판으로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일본이 아무리 한반도계 도래인(도왜인)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도 절대 지울 수 없다. 우가우가 석기시대를 살던 일본 열도에, 청동기+철기를 비롯하여 각종 주요 기술을 전수하며 고대 일본을 발전시킨 도래인에 대한 고마움은 일본인 DNA에 박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오사카는 지금도 재일한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며,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처럼 우리와 여러가지로 인연이 많은 오사카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백제’라는 명칭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실제 오사카 시내의 이쿠노구, 히가시스미요시구 일대를 둘러보면 백제라는 명칭을 다수 목격할 수 있다. 거리의 이름도 백제(구다라) 이며 부근 화물열차의 역도 JR백제역이다. 뿐만 아니라 오사카시립남백제소학교, 백제대교, 흐르고 있는 개울의 이름도 백제천이다. p 016




백촌강 전투 후 한반도에서 ‘백제’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반대로 일본에서 ‘백제’ 라는 이름이 부활했다. 백제 유민들은 대거 일본 열도로 넘어온 것도 있었고, 백제 멸망 전에도 이미 백제와 왜는 왕실끼리 혼인도 하는 등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무령왕이 백제에서 탄생한 사례로 보듯, 백제 왕자들은 수시로 왜에서 체류하기도 했다. 연장선상에서 백제 멸망 시점에 일본엔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이 나니와(현 오사카)에서 체류중이었다. 백제가 멸망하며, 선광은 그대로 왜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선광 후예들은 ‘백제왕’이라는 성을 받았고,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은 정식적으로 ‘백제군’이라는 행정구역이 되었다. 그 역사가 이어져 지금도 오사카에서 ‘백제’라는 지명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오사카에는 의자왕의 아들 선광 후손인 백제왕씨 뿐만아니라, 근구수왕의 후손인 후이지씨/후나씨/쓰씨 일족, 근초고왕의 후손인 니시고리씨 일족,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후손, 왕인박사의 후손인 다카시씨/가와치노후미씨 일족 등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다. 



- 다카아이정의 주군총: 전지왕의 왕비인 팔수부인(왜왕의 왕녀)의 또 다른 아들로 추정


왕인 성당: 왕인 박사가 학문을 전파했던 성당. 현재는 재물의 신인 벤자이텐을 제사지내고 있다. 


도토와 다카이시 신사: 도토라는 지명은 왕인의 후손인 일본의 최초 대승정 교키가 건립한 토탑에서 유래했다. 부근에 있는 에바라사는 교키가 태어난 사찰이다. 교키 사후 480년이 지나서 발굴된 사리함에는 ‘그의 속성은 다카시씨로서 백제 왕자 왕이의 후손이다’라는 글귀가 발견되었다. 『신찬성씨록』에는 다카시노무라지를 왕인의 후손으로 기록한다.


하야시와 도모하야시노우신사: 전지왕의 왕비인 팔수부인의 후손인 하야시 일족은 부근에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지카쓰아스카의 아스카베신사: 아스카베신사는 백제계 아스카베노미야쓰코 일족의 조상신으로 아스카대신 즉, 곤지를 제신으로 하고 있는 신사다. 곤지는 『일본서기』에서 개로왕이 왜국으로 파견했던 동생 곤지를 말한다. 과거에는 곤지왕 신사로도 불렸다. 『일본서기』에서 곤지가 왜국에서 생활하며 5명의 아들을 갖고, 그중 둘째인 동성이 백제로 돌아가 왕이 된 상황을 기록한다. 이를 보아 곤지의 직계자손들은 실제 일본에 남아 자손을 번성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지금까지 일본에 남아있는 곤지 전승이 곤지의 후손들이 일본에서 위상을 떨쳤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백제왕신사와 백제사 유적: ‘의자왕-선광-창성-낭우-경복’으로 이어지는 백제왕 계보는 백제왕 신사 족보에 기록되어있으며, 특히 백제왕 경복은 종3위에 오르는 등 가장 화려한 경력을 가졌다. 백제왕 경복때 백제왕씨 본거지를 나나외에서 가타노로 옮겼으며, 씨신을 모시는 백제왕 신사와, 씨사로 백제사를 건설하여 백제왕 일족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하타, 우즈마사: 지명의 유래는 고대 호족인 하타씨와 관련이 있다. 하타씨는 한반도계 대표 도왜씨족이다.



교토는 도쿄가 수도가 될 때까지 약 1,000년간 일본의 수도였던 곳이다. 하지만, 정치의 중심지로서는 헤이안 천도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까지 약 400년 간만 일본 열도를 호령했을 뿐, 막부에 의해 형식적으로만 수도의 역할을 한 기간이 많았따. 그렇기에 교토는 실권을 잃은 천황만을 위해 조성된 상징적인 동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토에 남아있는 백제계 지명과 신사는 대체적으로 하타씨에 의해 남겨진 것이 많다. p 067



교토에서 만나는 도래인(도왜인)의 흔적은 99.9%는 하타씨라고 봐도 무방하다. 백제에서 하타씨가 일본 열도로 도왜한 내용은 수많은 포스팅에서 언급했기에 생략한다. 



보통 도래인 계열 씨족들은 ‘누구누구의 후손’으로 통칭할 수 있는데, 하타씨는 거기서 약간 예외적인 존재라 볼 수 있다. 물론 하타씨도 궁월군이라는 조상을 두고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궁월군 후손을 포함하여, 당시에 궁월군이 일본으로 대려온 백제 유민들을 모두 포함하여 하타씨로 본다. 이때 들어온 궁월군과 함께 일본으로 온 도왜인, 즉 하타씨들은 토목(제방공사), 광산, 농업, 염전, 양잠, 양조 등 도시개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술을 지닌 집단이었다. 하타씨는 이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 곳곳에 터를 잡고 크게 번성하였다. 실제로 하타씨는 540년 경에 이미 일본 내에서 거대한 집단이 되어있었고, 700년 경에는 일본 전국 어디에나 살 정도로 번성하였다. 



하타씨가 터전을 잡은 곳은 주로 큰 강줄기가 있는 곳, 하타씨의 제방공사로 인해 큰 도시로 번성한 곳들이다. 교토도 그 중 하나다. 교토 아라시야마 도게츠교 맞은편에 있는 대언천 제방이 바로 하타씨 작품이며, 이를 시작으로 아라시야마 일대를 개발하여 고대 도시 교토를 만들어냈다. 특히 교토는 천황이 거주한 지역이다. 전문적인 기술로 부와 명성을 쌓은 하타씨 중 일부는 고위직에 종사하기도 하고, 천황에게 성씨를 하사받기도 했다.



TMI이긴 한데 교토 북부(가모강변)에 자리잡은 도래인 일족인 가모씨는 제철(대장장이) 기술 보유자로, 하타씨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9세기 전후로 두 일족은 혼인으로 맺어졌고, 일족 간에 양자 입양도 하는 등 꾸준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유지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로부터 교토의 유명 축제인 ‘아오이마츠리(가모마츠리)’는 가모씨 신사인 가미가모 신사, 시모가모 신사와 하타씨 신사인 마츠오 대사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두 일족의 공동 축제다.



- 우즈마사의 고류사와 오사케신사: 야마토 정권 당시 쇼토쿠 태자의 후견인 하타노 가와카쓰는 그들의 씨사인 고류사를 건립했다. 기록에 따르면 하치오카사, 하타노기미사, 가도노하타사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국보 금동반가사유상과 흡사한 목조반가사유상이 보관된 곳이기도 하다. 오사케신사의 제신은 진시황제, 궁월군, 하나토사케공이 봉안되어있다. 궁월군은 『일본서기』 오우진조에서 백제로부터 120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왔다는 인물이다. 오사케신사 도리이 옆에 있는 돌기둥에는 ‘누에 치고 베를 짜는 일, 관현학과 춤의 신’이라고 쓰여있다. 


가이코노야시로의 고가이신사: 고류사 건너편에 가이코노야시로라는 전차역이 있고, 부근에 고노시마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노시마 신사 경내에는 고가이 신사가 조그맣게 자리한다. 과거에는 고가이신사가 이 동네를 대표했을정도로 거대한 신사였다. 가이코노야시로라는 명칭은 하타씨가 전수한 가이코 신앙, 즉 양잠 신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고가이신사는 하타씨가 직물의 조상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설립했다.


마쓰오대사: 하타씨가 씨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신사다. 중세 이후에는 양조신을 모시는 신사로 알려졌고, 현재는 일본에 있는 11만개의 신사 중 4번째로 격식을 갖춘 신사이며, 제신은 스사노오의 두 아들로 바뀌었다.

 

후시미이나리대사: 전국 3만 5천개가 있는 이나리 시사의 총 본산이다. 제신은 이나리대신으로 풍요를 관장하는 농경신이다. 역시나 하타씨가 창건한 신사로, 후시미지역은 하타씨 근거지 중 한 곳이다.


히라노신사: 8세기 간무천황의 명으로 만들어진 신사다. 제신은 이마키신, 구도신, 후루아키신, 히메신이다. 히메신은 간무천황의 모친인 나카노 니이가사인데, 그녀는 백제계 도래인 후손이다. 이마키신 역시 백제계 도왜인들이 모시던 고향신이다.


오카노야: 교오부 우지시 우지천 동편 고카쇼의 옛 지명은 오카노야 이다. 현재 오카노야소학교로 지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오카노야의 유래는 백제계 오카노야공에서 유래한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오카노야공은 백제 비류왕의 후손이라 한다. 『일본삼대실록』 및 『고사기』 에 따라 오카노야공의 조상을 더 쫒아올라가면, 비유왕의 후손이 후에 황별 계통인 하타노아손으로 개성된 것으로 본다.




대충 여기까지! 3권은... 안나오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읽었던 식물 세계사 책 중에 제일 흥미로웠던 책이 있었다. 지금은 절판되었으나, 내 책장에서 항상 날 부르고 있는 책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그 책을 읽고서, 저자의 다른 책을 또 읽어보고 싶어서 구매했던 책이 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하는 식물 세계사책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이다. 물론 구매했을 당시에는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뒀다가, 이번 구정 연휴에 읽었다. 왜? 공부하기 싫어서..ㅋㅋㅋㅋㅋ




늘 회사, 집을 오가는 워킹맘이지만 아이가 자는 시간에는 식물보호기사 필기 공부를 하고 있다. 이번 연휴에도 어김없었는데, 공부하기가 왜이리 싫은지! 책이라도 읽자 싶어서 책장에서 서성이다가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공부는 하기 싫지만, 이왕 책 읽는다면 시험과 연관된 책을 읽자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 책이 식물보호기사 시험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 라고 한다면 대충 재배학원론에 나오는 내용 일부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특히 재배학원론에서 중요하게 보는 작물들이 대거 포진해있다. 



이 세계사책에서 말하는 13가지 식물이 ‘감자, 토마토, 후추, 고추, 양파, 차(tea), 사탕수수, 목화, 밀, 벼, 콩, 옥수수, 튤립’ 이다. 이 중 ‘감자, 토마토, 벼, 콩, 옥수수’ 는 정말.... 재배학원론에서 빼놓으면 섭섭한 작물들이랄까. 특히 식물들 기원지라던가, 세계사적으로 유명했던 식물병도 이 책 읽으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 개이득!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에서 ‘감자’ 이야기만 살짝 가져와본다. 재배학원론에서 식량작물로써 감자, 식물병리학에서 단골문제인 감자역병의 감자. 그리고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많이 가지고 감자!!! 정말 재미있는 감자이야기 시작해본다.


남미 안데스산맥 주변이 원산지인 감자가 유럽에 처음 전해진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한 이후였다. 그렇기는 해도 유럽에 감자를 처음 소개한 이가 콜럼버스는 아니었다. 사실 그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곳을 탐험했으나 산지에서 재배한 감자를 직접 접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이 속속 남미로 찾아들었고 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감자가 발견되고 유럽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초, 중반의 일이었다. p 028



감자의 원산지인 안데스산맥 주변 지역은 해발고도고 높고 기후가 서늘한 편이며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된다. 감자의 사촌 작물이자 또 다른 덩이뿌리 식물인 고구마도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데 아열대성 기후인 중앙아메리카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땅속에서 열매를 맺는 뿌리채소는 열대나 아열대 기후의 중, 남미나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경우가 적지 않다. p 029



이때까지 유럽인들은 땅속에서 열매를 맺는 무, 순무 같은 뿌리채소는 키워봤으나 덩이뿌리 식물은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 감자를 접했을 때, 유럽인들은 감자를 먹는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보니 유럽인들이 먹는 다른 녹황채소류 처럼 덩이줄기가 아닌 감자 싹이나 잎을 먹거나, 초록색으로 변한 덩이줄기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인은 안다. 감자 싹, 초록색으로 변한 덩이줄기는 절대 먹으면 안된다는걸. 왜? 감자싹과 잎, 초록색으로 변한 덩이줄기에는 솔라닌 이라는 독성물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솔라닌은 조금만 먹어도 중독되거나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물질이다.



하지만 당대유럽인들은 이를 몰랐다. 그래서 감자를 먹고 중독되거나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설상가상으로 감자는 성서에 기록되지 않는 식물이기도 했다. 결국 감자는 마녀재판의 피고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감자는 악마의 열매라는 별칭을 얻게되었고, 화형을 선고받았다. 화형된 감자라.... 감자를 구우면 참 맛있는 냄새가 났을텐데, 당대 유럽인들은 그 냄새를 어떻게 참았으려나? 이유야 어쨌든 악마의 열매가 된 감자는 유럽인들이 기피하는 식물이 되었다.



감자라는 식물은 대표적인 구황작물 중 하나다. 원산지가 안데스산맥인 만큼 척박한 환경에서도 아주 잘 자라는 효자식물이다보니, 식량난을 해결하기에 최적인 작물이기도 하다. 유럽인은 이런 신의 열매 감자를, 먹는 방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악마의 열매로 매도하여 기피하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은 빠르게 사라졌을 식량난을, 더 오랜시간 버텨야만 했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감자는 귀족만 먹을 수 있다! _ 프리드리히 2세



감자의 진면목을 알았던 19세기 프로이센(현 독일) 국왕 프리드리히 2세. 그는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7년간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 하지만 긴 전쟁은 나라를 황폐화시킨다. 프로이센의 식량부족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때 프리드리히 2세는 감자를 떠올렸다. 여러 방면으로 감자를 보급하고자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았다. 감자는 어디까지나 악마의 식물이었으므로. 



유럽 대륙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막대한 상금을 내걸고 주식인 밀을 대신할 구황작물을 모집했다. 이떄 파르망티에는 자신의 포로 시절 경험을 살려 감자 보급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루이 16세는 단춧구멍에 감자꽃을 꽂아 장식했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도 감자꽃 장식을 달게 함으로써 대대적인 감자 홍보에 나섰다. (…) 감자는 서민에게 보급해야 하는 작물인데 어째서 왕족과 귀족이 독점하겠다는 취지의 공지를 냈을까? 사실 여기에는 루이 16세의 교묘한 책략이 숨어 있었다. 국영농장은 낮에는 엄중하게 경비를 서지만 밤이 되면 경비가 느슨해진다. 그러다 보니 호기심을 누루지 못한 사람들이 야음을 틈타 감자밭에 침입해 감자를 서리해갔다. 그렇게 감자는 서서히 서민들 사이로 널리 퍼져 나갔다. p 041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프랑스 루이 16세, 마리앙투아네트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감자 보급에 성공했다. 어떤 묘안인가! 바로 ‘유행(트렌드)’다. 왕족이 하는 것은 귀족들이 따라하여 붐을 일으킨다. 그렇게 상류층에서 일어난 붐은 자연스레 하류층에 퍼진다. 프리드리히 3세와 루이 16세는 이를 파악하여 감자 보급에 접목한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감자보급에 힘썼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지면 참 좋은 내용이라, 조금 아쉽다.




이렇게 유럽 여러나라에서 감자 보급에 성공하며, 유럽은 매년 찾아오는 식량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감자로 인해 감자는 유럽인의 주식이 되었다. 자연스레 유럽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늘어난 인구는 노동력 향상으로 이어진다. 그 노동력은 산업혁명과 공업화로 이어진다. 감자 하나로 유럽의 역사가 크게 바뀐 것이다. 



그뿐만인가? 대항해 시대 선원들은 이름모를 병으로 힘들어했다. 헌데 감자가 주식이 되고, 감자를 배위에서 먹을 수 있게 되자 선원들은 이 병에서 벗어났다. 당시에는 이름모를 이 병의 이름은 괴혈병. 비타민C 결핍시 발병한다. 그때만해도 장기간 배를 탈 때, 배 위에서 먹을만한 식량이 없었다. 먹을게 없으니 자연스레 선원들은 비타민C가 결핍되어 줄줄이 괴혈병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감자가 등장하면서 이 괴혈병은 사라졌다. 감자는 비타민C가 풍부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감자는 온/습도만 맞다면 장기보관이 가능한 아주 착한 식물이다보니, 망망대해에서도 보관이 아주 쉬웠던 것이다.



1840년대에 들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일랜드 전역에 감자 역병이 창궐해 지독한 흉작이 이어졌다. 그 무렵 아일랜드에는 감자가 주식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상태였기에 감자가 없으면 꼼짝없이 굶는 수밖에 없었다. 대기근이 닥쳤고 100만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갔다. 감자 역병 원인 조사 결과 감자의 증식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p 048



인류의 구원투수 감자. 하지만 감자로 인해 100만명이 죽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그 유명한 감자역병! 



감자는 영양번식을 하는 식물이다. 즉 단일품종인 씨감자로 번식하는 것이다. 고로 하나의 씨감자가 특정 질병에 걸리면, 그 씨감자와 같은 덩이뿌리에 있던 모든 씨감자들도 그 질병에 걸릴 확율 100%다. 하여 감자의 원산지인 안데스에선 감자를 재배할 때 여러 품종을 섞어서 심는다고 한다. 감자의 전멸을 막기위해서다.



하지만 아앨린드 사람들은 품종을 고르고 골라서, 제일 우량하다고 생각된 하나의 품종만 재배했다. 그 결과가 바로 감자역병이다. 감자가 주식이 되어버린 아일랜드에서, 감자역병은 엄청난 문제였다. 100만 명이 굶어죽었고, 400만 명이 아일랜드를 탈출해서 미국으로 향했다. 여기서 약간 의아한 점 하나! 아일랜드인은 왜 바로 옆에 있는 영국이 아닌, 미국으로 향했는가. 알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원조 나쁜놈 영국은 이 때도 여지없이 나빴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굶어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일랜드를 속국이라 생각하며 무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400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미국 땅을 밟았다.



그렇게 미국땅을 밟은 아일랜드인의 후손들이 미국 역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존F케네디, 레이건, 클린턴, 오바마 등이 있다. 이뿐만 인가? 월트 디즈니를 창립한 월트 디즈니, 맥도날드를 창립한 맥도날드 형제 역시도 감자역병을 피해 미국으로 피난온 아일랜드인의 후예다. 



감자는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못해 미국의 역사까지 그 영역을 넓힌, 정말 대단한 식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감자전이나 먹어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