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5
강제윤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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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섬, 신안. 각종 다큐와 뉴스로만 본 지역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신안은 전라남도 지역에 있는 하나의 도시라는 생각이 강했다. 근데 왠걸! 신안은 하나의 도시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신안은 1,025개의 섬을 하나로 모아, ‘신안’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었다. 손암 정약전의 유배지이자 『자산어보』의 산실인 흑산도를 비롯하여, 보물섬 증도,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하의도, 암태도 소작쟁의로 알려진 암태도 등. 정말 각각 개성있는 많은 섬들을 한데모아서 ‘신안’이라 통칭하는 거였다. 즉, 우리나라 대부분의 섬은 진도군의 진도, 완도군의 완도, 거제시의 거제도 같은 지자체의 메인인 모섬이 있는데, 신안은 아니다. 그냥 서로 다른 섬을 한데 모아서 ‘신안’이라고 통칭한다는 것! 와, 나는 정말 신안에 대해 1도 모르고 있었다.




신안의 모태인 압해도는 그 이름처럼 바다를 재패한 섬이었다. 압해도 해상 세력의 수장은 후삼국시대에 고려 왕건과 끝까지 맞섰던 능창 장군이다. 후삼국시대 서남해 해상을 재패했던 능창은 수전에 능해 수달장군으로 불렸다. 신라시대 말 동아시아의 해상황 장보고의 암살 후 해상세력은 소멸된 듯 보였다. 하지만 50여 년 뒤 능창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장보고 암살 후에도 해상 세력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P 026



조선시대에는 동서남대 배부분의 섬에서 거주를 금하는 공도정책을 시행했다. 섬에 들어가 사는 이들은 반역의 죄로 다스렸으니, 섬에 사는 사람이 죄인인 시대였다. 이 무렵 신안의 섬들도 사람의 거주가 금지됐다. 신안 섬에 거주가 다시 허락된 것은 임진왜란 무렵이다. (중략) 공도정책이 섬의 역사마저 단절시켰다. P 030



나에게 섬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그저 남해안을 재패한 해상왕 장보고가 유일했다. 근데 왠걸? 장보고 이후로도 해상 세력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거기다 조선시대 공도정책으로 인해, 섬에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반역죄였다는 사실도. 그 공도정책 때문에 섬의 역사가 단절되었다는 것 조차도. 



그럼에도 신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신안의 여러 섬에서 신석기 시대 유적인 패총이 나왔다거나, 삼국시대의 유적지가 나왔다거나 이런 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내가 놀란 점은 이런 유적지들이 아니었다. 신안에 속한 여러 섬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왔다는 점이다. 대표적인건 역시 암태도 소작쟁의가 아닐까? 암태도 소작쟁의는 대표적인 항일 농민항쟁이다. 소작쟁의에 참가했던 소작농들은 이후에도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신안의 또다른 섬인 장산도에서도 독립운동가 집안인 장씨 일가가 살았다. 장병준, 장병상, 장흥재, 장홍염 4형제는 항일독립운동, 광주학생운동, 제헌국회의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옥도는 또 어떤가. 옥도는 일본 해군에게 점령당했던 섬이었기에, 일본 해군의 군사기지가 설치되었다. 이런 옥도에서 구한말 항일의병들이 들고 일어났다. 지금의 옥도에는 당시 일본인의 군사시설이 일부 남아있다.



나는 왜 신안의 이러한 역사를 알지 못했을까? 내가 신안을 하루 빨리 가봐야할 이유가 이렇게 늘어났다.





특혜커녕 오히려 하의도 사람들 중에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대통령 재직 시절 하의도를 위해 해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하의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새삼 김대중 대통령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어난 고향이라고 특혜를 주지도 않고 또 고향이 아니라 해서 차별하지도 않은 공명정대함. 대통령은 결코 어느 특정 지역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모두의 대통령이기에 당연한 이야기다. P 104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하의도. 솔직히 몰랐다. 이전 정권의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살았던 지역에 특혜를 주었기에,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었달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대중 대통령 고향은 들은바가 없었다. 근데 왠걸, 다 이유가 있었네? 새삼 김대중 대통령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아니, 오히려 대통령이라면 이랬어야 하는게 맞다. 그동안 비정상적인 대통령을 보았기에, 이런 정상적인 모습조차도 대단하게 보이는건가보다. 지금 하의도에 남아있는 김대중 대통령 생가는 오롯이 김씨 문중이 복원하였고, 되려 이를 신안군에 기증했다고 하니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비정상적인 대통령들은 본인들을 포함해서, 그 가족들까지도 서로 못해먹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는 데 말이다.






유명세를 가장 크게 탄 곳은 드라마 ‘봄의 왈츠’촬영지였던 하누넘 해변이다. 하트 모양을 하고 있어 하트해변으로도 불리는데 연인이나 부부가 하누넘에 가면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심장에 남는 사람이 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P 147



가끔 TV에서 보았던 하트해변. ‘와! 저긴 한번 가서 보고 싶다’ 했는데, 그 해변이 신안 비금도에 있는 해변이었다. 예전이라면 신안의 섬은 교통편 때문에 여행하기 어려웠겠지만, 천사대교가 개통된 지금은 신안이 섬이 아니라 육지가 되었다. 물론 비금도까지 도로가 이어진 건 아니나, 아주 잠깐동안만 배를 타면 되는 것 같으니, 그 정도면 꽤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연인이 가면 헤어지지 않는다니, 꽤 로맨틱한 전설이 아닌가?



아, 또 하나. 비금도는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의 고향이라는 것!



흑산도는 홍어의 섬으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삭힌 홍어는 흑산도 고유의 음식이 아니다. 그래서 손님들에게는 삭힌 홍어를 팔지만 흑산도 사람들은 정작 삭힌 홍어를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싱싱하고 찰진 생홍어를 주로 먹는다. 『자산어보』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나주 영산포가 삭힌홍어의 원류다. P 190



하지만 역시 신안! 하면 흑산도가 아닐까! 내가 참말로 좋아하는 홍어의 본고장★ 근데 조금 놀랐던 것은 흑산도가 홍어의 본 고장이 맞기는 하지만, 삭힌 홍어의 고향은 흑산도가 아니라 나주였다는 사실이랄까. 하하하. 그러니까 삭힌 홍어의 시작은 이렇다.



어부들이 흑산도 인근 바다에서 잡힌 홍어와 생선을 배에 싣고 영산강을 따라 올라가, 나주의 영산포까지 도착한다. 그 사이 다른 생선들은 썩어서 못먹게 되었지만, 홍어만큼은 썩지않고 자연발효가 되었다고!



지금 흑산도에서 삭힌 홍어 요리가 번성한 것은 오롯이 관광객들의 요구로 내륙 문화가 역수입 되었다는 것! 이야, 신안 섬을 따라 여행하다가 삭힌 홍어의 유래까지 알게 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흑산도는 잠깐 들렀다 가기는 아까운 섬이다. 적어도 『자산어보』의 산실인 사리마을 사촌성당에서 하루쯤 소요하거나 걸어서 여행해야 흑산도의 깊은 맛을 알 수 있다. 사촌성당은 흑산도 유배살이 중이던 손암 정약전이 아이들을 훈육하기 위해 설립한 성당이자 조선시대 최고의 어류 도감인 『자산어보』의 산실이다. P 192



나는 어보를 만들려는 생각으로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러나 사람마다 말이 다르므로 어느 말을 믿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창대라는 소년을 만났다. 차대는 즐 집안에 틀어박혀 손님들을 거절하면서 고서를 탐독했다. 나는 마침내 이 소년을 맞아들여 함꼐 묵으며 물고기 연구를 시작했다. - 정약전 『자산어보』 서문에서, P 245



신안 대둔도에는 창대의 묘지도 남아있고 그의 후손들도 살고 있다. P 247



흑산도는 홍어 말고도 유명한 것이 있으니, 바로 손암 정약전의 『자산어보』다. 자산어보는 조선 최고의 어류 백과사전이다. 자산어보가 저술된 장소가 바로 ‘흑산도’라는 사실! 자 여기서 정약전이 누구인가? 그는 바로 다산 정약용의 형이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정조 사후,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를 믿은 죄로 유배형을 받았다.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동생인 정약용은 강진으로. 동생인 정약용은 나중에 해배되었지만, 형인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눈을 감았다.



여기서 조금 더 이야기 하자면,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흑산도에서 집필했기에 흑산도가 유명하긴 하지만, 실상 손암은 흑산도보다 신안의 또 다른 섬, 우이도에서 더 오랜기간 유배생활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생을 우이도에서 눈 감은 것도 포함해서.



두사춘으로도 불리는 두사충은 실존인물이다. 물론 자은도에 전해지는 이야기 속 두사충과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점에서는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중략) 우연히 박종인의 『땅의 역사』를 읽다가 그 실마리를 찾았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한음 이덕형의 묏자리를 두사충이 점지했다는 대목이었다. P 052



아니 그나저나, 책을 읽다가 발견한 한 문구.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체크했다ㅋㅋㅋㅋ 이 책의 저자도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를 읽는가보다. 역시 우리나라 어느 땅이든, 그 땅의 역사를 알고 가야 재밌는 법!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 앞으로 나올 지역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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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푸른 눈의 증인 -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폴 코트라이트 지음, 최용주 옮김, 로빈 모이어 사진 / 한림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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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정도 지나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그 날이 돌아온다.
바로 작년에 광주 민주화 운동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그 곳에서 독재타도를 외쳤을 그들을 생각했었다.
이 책을 쓴 푸른 눈의 이방인은, 당시 광주 민주화 운동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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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마스떼!

균형 잡힌 삶을 위해!"

"삶에서도 탄탄한 이 두 다리가 나를 든든하게 지탱해줄거에요!"

"정답 없는 게 인생이라도

나만의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스스로 꺠달을 때 까지

잠자코 기다려줘요.

늘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네요"

"엎질러진 물을 오래 바라보던 예전과 달리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속도가 빨라진 나를 발견했어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몸과 마음에 근육을 만들어주고 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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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 나는 것처럼 우리 몸이 아픈 것일 뿐이죠. 우리가 정신 질환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환자들은 좀 더 바르게 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자신의 병을 마주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겁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곧 알게 되실거에요. 정실질환 환자들에게도 귀여운 구석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 한국어판 서문 中

그 길고도 조용한 시간을 함께 한 끝에 드디어 환자가 입을 열었다는 군요."당신도 버섯인가요?"

환자의 물음에 의사는 대답을 했죠. "네, 저도 버섯이에요." 그러고는 일어서서 한마디 더 건넸답니다. "전 이만 가야겠습니다."

그러자 환자가 물었습니다. "당신도 버섯이라면서 어떻게 걸을 수가 있죠?"

"버섯도 걸을 수 있어요."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병실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의사가 약을 꺼내 들었답니다. "전 약을 먹어야겠습니다." "당신은 버섯이라면서 왜 약을 먹는거죠?"

"버섯도 약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자 환자는 의사를 따라 약을 먹었습니다. (중략)

몇 달 후, 병원 치료에 내내 응하지 않던 ‘버섯’은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고 퇴원할 수 있었답니다. _P 008 〈서문 中〉

"네 말이 맞아. 의사는 병을 치료해주는 사람이지. 근데 치료는 약으로만 하는 게 아니야, 마음을 써야지. 베푼 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법,

초조해지지 마. 익숙해질꺼니까." _P 018 <기억도둑 中>

"내 생각엔 네가 우울한 감정과 우울증을 헷갈렸던 것 같다. 사업으로 충격을 받았을 떄, 초창기에 나타났던 건 부정적인 감정이 맞았을 거야. 네 생각대로 ‘기분이 안 좋았던 것’뿐이었겠지. 사람은 누구나 매일 부정적인 감정을 겪는데, 그중 일부는 약해지기도 하고, 또 일부는 없어지기도 해. 그런데 만약 이 감정이 제때에 씻겨 내려가지 않고 조금씩 쌓이게 되면,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면서 우울한 감정이 병이 되어버리고 결국엔 우울증이 되는거거든" _P 167 <우울한 새집2>

"우을증은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병이다.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지면서 뇌의 화학 구조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에게 ‘좋게 생각하라’든가 ‘기분 풀어라’등의 말은 삼가야 한다. 그들은 즐거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를 이미 잃은 상태다." _P 170 <우울한 새집2>

우리는 신이 한 입 베어 문 사과처럼 누구나 결점을 갖고 있다.

만약 그 결점이 비교적 크다면, 그것은 신이 특히나 그 사람의 향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_P 217 <별에서 온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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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4
전석순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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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행을 좋아한다. 그냥 여행이 아닌, 그 땅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여행을 좋아한다. 해서 내 여행에는 언제나 그 땅의 역사를 알려주는 길라잡이가 있었다. 때로는 책이 길라잡이가 되었고, 때로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박종인 기자님이 그랬으며, TV에서 방영해주는 역사 다큐가 그랬다. 그런 나에게 또 하나의 길라잡이가 생겼다. 바로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다. 오늘 소개할 책은 이 시리즈의 네 번째 춘천편 이다.



나에게 춘천은 많은 추억이 있는 도시다. 내 할머니가 살고 있는 곳이며, 우리 아빠가 태어난 도시이고, 우리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도시다. 뿐만아니라 주민등록초본에서 떡하니 보이는, 내 본적, 그 본적이 바로 여기, ‘춘천’이다(하지만 서울 태생이라는게 함정). 그래서 춘천은 나에게 여러모로 마음이 많이 가는, 그런 애틋한 도시다. 


춘천에 가면 어느 겨울에는 논에다 조성한 얼음 썰매장에서 아빠랑 동생이랑 신나게 놀았고, 어느 봄에는 큰아빠와 아빠 손을 잡고 동생과 함께 육림랜드를 갔다. 어느 여름 날에는 아빠 친구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떠났었고, 어느 가을 날에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춘천인형극제를 보러 가기도 했다. 내 어린시절, 춘천은 이토록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했다(물론 아픈 추억들도 있지만).


내 어린날을 가득 채운 춘천이었으나, 커가면서 점점 멀어졌다. 의식적으로 가지 않게된 것도 있었다. 분명 그 곳에는 할머니가 계시지만, 말 못할 가족사도 있고 하다보니 점점 발길이 닿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춘천이었다. 그랬었는데, 이 책 덕분에 저 밑바닥에 있던 춘천이 뭍으로 나왔다. 온갖 추억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어린날 내 추억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자주 들었던 아빠의 추억도 같이 떠올랐다.


춘천이라는 도시는 나보다 우리 아빠에게 더욱 각인되어 있는 곳이다. 춘천은 여전히 아빠의 고향이면서, 아빠의 엄마가 살고 있다. 아빠를 힘들게 한 형제들도 그곳에 있으며, 아빠의 친구들도 춘천에 있다. 무엇보다 젊은 날 아빠가 모진 고생을 했던 그 곳 역시도 춘천이다.


오래전부터 닭갈비는 서민과 가까운 음식으로 싸고 푸짐했다. 1970년대 닭갈비는 1인분씩 팔지 않고 1대씩 팔았다. 닭갈비 1대 가격은 100원이었따. 1978년 삼양라면과 초코파이가 50원 이었고, 1979년 서울 지하철요금이 60원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닭갈비는 갈비라는 이름치곤 무척 저렴한 편이었다. P 075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200m 남짓한 춘천 명동 닭갈비 골목은 그대로 남아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한자리에 있던 닭갈비집이 수두룩하다. 어지간하면 50년 전통이고 2대째나 3대째 이어져 오고 있는 곳도 많다. P 079


아빠가 젊을 적 친구들과 자주 갔었다는 명동 닭갈비 골목. 수중에 돈이 별로 없어도, 닭갈비 만큼은 저렴하여 친구들과 함께 소주한잔을 하며 고된 하루를 달랬다고 했다. 물론 그 때와 조금은 달라진 모습인 명동 골목이지만,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명동 닭갈비 골목은 청춘들을 반겨준다. 


호반의 도시 춘천 답게 춘천에는 여러 댐이 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소양강변에 건립된 소양강 처녀상도 그렇고, 소양댐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댐 건설 이면에, 수 많은 마을들이 수몰되었다. 아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의암댐)수몰된 마을 중에는 우리 아빠가 나고 자란 곳도 있었다. 난 할머니 집이 있는 유포리가 아빠가 나고 자란 곳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댐의 크기만큼이나 수몰 규모도 컸다. 춘천시를 비롯한 양구군과 인제군에 걸쳐 수몰 지역이 생겼다. 6개 면, 38개리가 잠기는 바람에 이주한 주민만 해도 1만 8,000여 명에 이르렀고 수몰된 집과 건물도 4만 5,000여 채에 달했다. P 041


꽤 많은 곳을 놀러다니면서 의도치않게 댐공사로 인한 수몰지역도 갔었는데, 정작 아빠가 어릴적 살던 집이 수몰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그 마음이 참 미묘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저 강 바닥에 가라앉았을까? 하지만 가라앉은 추억만큼, 더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지금도 소양댐, 의암댐, 춘천댐 등 곳곳에서 새로운 추억이 피어나고 있다.


콧구멍다리 아래는 소양강댐의 차가운 물이 보여있어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래서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이, 겨울에는 빙어를 잡으려는 낚시꾼들이 콧구멍다리를 찾았다. P 220


콧구멍 다리는 철거를 앞두고 있다. 낡은 다리 대신 소양7교가 그 역할을 할 것으로 전해졌다. P 221


아빠의 어린날 추억이 저 강 아래에 있다면, 어린날 내 추억도 곧 사라질 듯 하다. 춘천 갈 때마다 아빠가 대려가줬던 콧구멍 다리, 겨울만 되면 빙어잡는 낚시꾼들이 즐비했던 그 다리가 철거된다고 한다. 이 곳에서 빙어를 처음 먹어봤었는데. 이렇게 어린 날의 내 추억이 어린 곳이 또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이 책의 목적은 춘천을 알리기 위함도 있겠지만, 나처럼 사라져가는 추억을 대신 붙잡아주기 위함이 아닐까 싶었다.


​시기를 잘 맞추면 청평사로 들어서난 내내 사방에서 쏟아지는 낙엽에 걸음마저 무뎌진다. P 245


1,000년이 넘는 시간을 품은 청평사는 명승 제70호로 춘천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절터는 강원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에 영현선사가 세운 백암선원으로 시작되었다. P 247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한 15분 정도면 도착하는 청평사. 내 기억 속에서 제일 어렸을 적 찾은 사찰이 바로 청평사다. 당시 청평사에 대한 기억이 너무 좋아서, 꽤 오랜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사찰을 찾아다닌다. 산속에 있는 사찰을 찾으면, 언제고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졌다. 하지만 이런 기억과 달리, 그 어릴적 청평사를 방문한 이유는 참으로 슬픈 이유였다. 청평사는 나의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낸 장소였다.


하지만 그땐 너무 어렸기에, 어린 내 눈으로 본 청평사는 그저 너무 멋졌고, 구송폭포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좋았고, 공주굴에 얽힌 상사뱀 전설이 놀라웠다. 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할머니댁으로 돌아온 뒤, 어른들 모두가 침울해 있는데 나 혼자만 멋진곳을 다녀왔다고 그림을 끄적거렸던 기억이 있다. 한참 지나서야, 그날 그곳 청평사에서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내드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나에게 그곳은 조금은 슬픈 장소가 되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청평사, 조만간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러 한번 찾아가야겠다.




이 책은 꽤 오랜시간 잊고 있었던 춘천, 그리고 어린 날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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