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안쪽 - 속 깊은 자연과 불후의 예술, 그리고 다정한 삶을 만나는
노중훈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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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행을 좋아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신랑과 정말 많은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시작한 초반에는 대놓고 ‘난 여행객이다!’ 라는 아우라를 뽐냈다. 맛집도 검색해보고, 핫플레이스도 검색해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인드가 변해갔다. 여행객보다 현지인처럼, 핫플레이스를 찾기 보다 동네 산책을 하며, 여유를 즐기는 쪽으로.



그래서 그런가? 옛날엔 여행을 가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빠릿하게 움직였다면, 마인드가 바뀐 뒤로는 우선 주변을 돌아봤다. 내가 발을 딛은 그 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이 마을은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를. 이런 식 여행은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딱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오늘 리뷰하는 이 책을 읽기 전 까지는.



"풍경의 안쪽"



이 책은 《풍경의 안쪽》은 여행작가 노중훈 씨가 기록한 여행에세이다.

거창하게 늘여놓자면 이렇습니다. 눈에 확연히 보이는 풍경도 기쁘고 좋지만 풍경의 겉면에만 머무르지 말고 발품과 마음 품을 팔아 안쪽으로 조금 더 진입해보자. 진입해서, 풍경을 일별하고 돌아가는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풍경의 안쪽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p 004



정말 제목을 잘 지었다. 그어떤 표현보다 마음에 들고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저자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나도 자주 써먹어야겠다!!



▶ 중국 쓰촨 :: 매운 요리보다 더 얼얼한 풍경

중국 쓰촨. 대중적으로 보면 매운 요리로 유명한 지역이다. 약간 더쿠의 시선으로 보면 삼국지, 시선 두보로 유명한 지역이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푸공주, 푸바오가 돌아갈 ‘자이언트 판다 기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 안녕 푸바오T_T...

무후사는 촉나라 황제 유비와 불세출의 전략가 제갈량을 모신 사당이다. 6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나라 강희11년(672)에 중건되면서 지금의 골격을 갖췄다. 무후사가 흥미로운 것은 주군과 신하를 함께 모시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도 유일무이한 경우라고 한다. 제갈공명을 대하는 중국인들의 지극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하긴 무후사라는 이름도 공명의 시호인 무향후에서 따온 것이다. p 050

육중한 체구에 귀여운 외모를 지닌 판다. 널리 알려졌듯이 중국인들의 판다 ‘집착’은 유별나다. 언젠가 판다 배설물을 비료로 사용해 수확한 녹차의 가격이 50g에 우리 돈 390만 원으로 책정됐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청두 교외에 판다의 모든 것을 연구하는 자이언트 판다 기지가 있다. 하루에 100m도 이동하지 않을 만큼 게을러터진 나머지 종족 보존의 의무마저 저버린 판다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p 053


사흘 밤, 나흘 낮 동안 쓰촨을 활보했지만 하늘은 회색의 엄숙한 낯빛을 좀처럼 풀지 않았다. 유일하게 청명한 날씨를 만난 곳은 어메이산이었다. 중국 불교의 4대 명산은 여러모로 남달랐다. (…) 얼른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순식간에 이런 댓글들이 달렸다. “사진도 이렇게 멋진데 실제로 보면 인생이 바뀔것 같아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이백은 “어떤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도 어메이산에 비할 수 없다”고 칭찬했다는데, ‘형식주의자’ 두보라면 어떤 논평을 내놓았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p 058

개인적으로 쓰촨은 가보고 싶은 여행지 중 하나다. 위에서 말한 더쿠적 시선으로(!) 가고 싶은 여행지랄까? 특히 저자가 갔었던 무후사. 유비를 모시는 사당은 중국 여러 지역에 있지만, 쓰촨의 무후사는 그 많은 유비 사당 중 두 번째로 큰 곳이라 한다. 기본 대륙 스케일 중에서도 두 번째로 크다하니, 감히 상상이 안간다.


당나라 시인, 시인중에서도 시선이라 일컫는 두보가 기거했던 초당도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근데 꽤 고단한 삶을 살았던 두보가 기거했다고 하기엔, 지금의 두보초당은 큰 규모의 정원을 거느린, 너무 잘 꾸며진 장소가 되었다. 이건 흡사 ‘초당’이라 이름하고, 초가는 없는 다산 초당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예능 〈신서유기〉에서도 나왔던 러산 대불이다. 러산대불의 규모는 뭐 말해 뭐해. 대륙 스케일은 바로 그 자체다.





▶ 몰타 몰타, 고조, 코미노 :: 지중해의 섬나라에서 보낸 아흐레

몰타는 어디..? 솔직히 말하면 처음 듣는 나라이름이라 약간 동공지진.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라는 수식어가 따라온다. 확실

한건 일반적으로 유명한 여행지는 아니라는 것. 적어도 한국에서는. 바로 이 점이 저자를 몰타로 이끌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 내가 모르는 곳. 무지의 장소. 그렇기에 푹 쉴수 있는 곳.


나를 몰타로 이끈 것은 무지였다. 몰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어쩌면 오랜 세월 직업 여행가로 살아오며 남루해진 마음을 환기시키기에는 ‘익명’의 공간이 제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하룻밤 숙박료는 3만원이 조금 넘었다. 슬리에마의 호텔은 형편없었지만 그 형편없는 숙소를 몇 발짝만 벗어나면 탁 트인 지중해가 반겼다. ‘걸인의 숙소 왕후의 바다’ 였다. p 104

일요일 아침, 고민한 것도 없이 몰타 섬 동남쪽의 어촌 마사슬록으로 향했다. 일요일마다 어시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문패는 어시장이지만 해산물을 비롯해 갖가지 농산물과 공산품이 집결했다. 한가지 서운한 점은 누가나 견과류 같은 간식거리 이외에 끼니를 때울 만한 음식을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안으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노천시장과 마주한 식당들 중 한 곳을 골라 아침 겸 점심을 해결했다. 굴, 홍합, 오징어, 조개 등을 한 그릇에 담아낸 해산물 믹스는 익숙한 맛이었다. 익숙해서 편안했고, 편안해서 일요일 오전이 한결 나른해졌다. p 110


딱히 갈 곳이 있지는 않았지만 숙소로 복귀하기에는 시간이 일렀다. 대충 지도를 본 다음 222번 버스를 타고 ‘옆길’로 새기로 했다. ‘우연히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격언이 진하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p 112


인접한 코스피쿠아, 센글리아와 함께 쓰리시티의 일원으로 묶이는 비토리오사는 도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덩치가 작았다. 두 번에 걸쳐 산책했는데 역시 골목 탐방 시간이 제일 말랑말랑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느다란 길에서 아이들은 천진하게 뛰어다녔고, 베란다의 빨래는 조속조속 졸았으며, 이름 모를 예술가는 밤늦도록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다. p 114



생각해보니 나도 비슷한 이유로 선택한 여행지가 있었다. 다름 아닌 롬복. 롬복은 당시만해도 딱히 알려지지 않았던 여행지였다. 당연히 롬복에 가서도 한국말을 듣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완벽한 익명의 공간이었다. 그게 너무 좋았다. 바닷가에 누워서, 바다 위 어선을 보곤 했다. 근처 시장을 걸어보고, 현지인들의 삶을 보았다. 분명히 낯선 곳인데, 그곳에서 난 편안함을 즐겼다. 나에겐 정말 큰 모험이자 도박이었던 롬복여행. 그 여행은 대 성공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저자의 몰타 여행기는 다른 챕터보다 유독 공감이 간다.


  

화려한 여행지를 쫓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번지르르한 여행지 겉면에 머무르지 않고 풍경의 안쪽으로 들어가보자.
지금껏 생각치 못한 여행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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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노동자 위령비를 찾아서 1 일제침탈사 바로알기 8
안해룡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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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 하지만 꼭 알아야 하는 역사가 있다. 바로 내 나라가 사라지고 언어가 사라졌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로 살아야 했던 시기다.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조선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빼앗아갔다. 크게는 나라를 빼앗아갔고, 세부적으로는 인적자원, 물적자원, 천연자원 그리고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자리잡은 역사 문화를 빼앗아갔다. 일제가 빼앗아간 것들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날이 새도 모자를 정도로 많다. 





이 역사책 『조선인 노동자 위령비를 찾아서1』은 그런 일제 침탈사 중에서도 인적 자원 침탈, 그 중에서도 일제 산업현장에 ‘강제동원’된 노동자를 이야기한다. 





강제동원. 지난 정권 때도, 현 정권 때도 강제동원은 한일 외교에서 단연 중요한 문제다. 지난 정권 때 우리나라 재판부는 일본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했고, 일본은 이에 반발하여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한국에선 반일운동이 거셌다. 당연히 한일관계도 최악으로 치달았다. 현 정권은 정반대다. 재판부가 아닌, 정권에서 나서서 제3자 변제를 이야기하며,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기업이 돈을 모아서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라며, 일본의 사죄는 커녕 일본을 감싸주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덕분에 현 정부와 일본 관계는 좋다못해 그야말로 최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바라는건 배상도 배상이지만,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생존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이제 몇 분 안남았다. 지금까지 일본은 사죄 및 배상은 커녕, 외려 자신들이 왜 사죄를 해야하느냐고 반발한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려 자기들은 잘못이 없다고 으시대고 있다. 놀랍게도 현 정권은 이런 일본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현 정권이 보호해야할 사람은 일본이 아닌, 자국민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임에도 말이다. 뭐, 여기서 각설하고.





그렇다면 일본은 왜 자신들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사죄 및 배상의 의무가 없다고 나오는 것일까? 그 근거가 있는건가? 슬프게도 그 근거가 있다. 심지어 그 근거는 우리가 일본에게 사죄와 배상을 강제할 수 없는 강력한 족쇄가 되었다. 다름아닌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과 맺었던 ‘한일기본조약’ 및 ‘한일청구권협정’이다.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을 살펴보면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조약, 협정은 이미 무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일간의 재산, 권리 등에 대한 청구권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라는 등의 조항이 있다. 이 조항 덕택에 일본은 일제강점기 때 자행한 수많은 죄악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무효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강제동원 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한인, 원폭 피해자, B·C급 전범, 독도문제, 문화재 환수등 등 모든 문제를 지금까지도 해결할 수 없는 이유다. 



일본 기업은 1910년 한일병합 이전부터 조선인을 고용해왔다. 위험한 업무에 낮은 임금으로 사람을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호황을 맞은 일본은 점점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유럽의 전쟁 확대로 주문이 폭주하면서 노동자 확보는 일본 산업계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탄광과 철도뿐만이 아니었다. 댐과 발전소 건설 현장의 노동력 부족도 심각했다. 특히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1920~1930년 대 집중적으로 지어진 여러 발전소와 댐에는 현장마다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p 016




조선 땅에 이른바 ‘모집인’이 나타난 시기가 이때다. 그들은 감언이설로 조선인을 속여 대한해협을 건너게했다. 일제 산업현장에 투입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값 싼 불쏘시개였다.



일본 내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보호장구도 없었다. 고노마이 광산에서 발생했던 사고를 보자. 일본인 갱내 근무자가 19.2%가 상해를 입은데 반해, 조선인 갱내 근무자는 53.5%나 되었다. 심지어 고노마이 광산에서 사망한 근로자는 대체로 조선인이었다. 갱내 사고사가 제일 많았고, 근무 환경으로 인한 폐결핵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병사가 뒤를 이었다. 광산 측에선 조선인 근무자가 병에 걸렸을 때, 치료 불능이라 판단되면 바로 귀국시켰다. 명백한 책임 회피였다.



하나오카 광산에서는 함몰사고로 일본인 11명과 조선인 12명이 갱내에 갇혔다. 광업소 측은 갱도 피해를 우선시 해 ‘조난자들을 순직한 것으로 보고’하고 구출작업을 중지했다.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은 그렇게 광산에 생매장 되었다. ‘재해 보고서’에 따르면 순직한 조선인 노동자중 3명은 광산에 도착한지 겨우 20일 된 이들도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들 시신은 차디찬 광산 갱도에 묻혀있다.



일본 내 발전소나 수로 건설 공사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동원되었다. 발파 작업 등 위험한 작업 최전선에는 언제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센다쓰 발전소 건설된 조선인 306명은 대부분 전라남도 출신이었다. 그들 중에는 13~15세의 소년들도 있었다. 이 306명 가운데 259명이 일본 패전 후 고국으로 귀국하였지만, 그들은 정당한 수당을 받지 못했다.



이게 바로 일본 제국주의 산업환경에 강제동원된 대다수 조선인들에 대한 처우다. 

다코베야란 훗카이도 개척을 위한 죄수노동이 폐지되면서 토목 공사등에 필요한 노동자를 ‘좋은 일이 있다’고 속여서 데리고 와서 감금 상태로 장시간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노동을 강제하는 노동 고용구조를 말한다. 이러한 노동자의 함바를 통칭 ‘다코베야’, ‘감옥베야’라고 불렀다. ‘다코’는 일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p 023



다코베야는 일본 정부와 대기업에는 채택하기 좋은 제도였다. 일본 정부는 값싼 노동력을 신소하게 동원하 공사를 수행할 수 있는 청부제도를 묵인해왔다. 정치헌금이나 담합금은 원청에서 중청, 다시 하청으로 이어지는 자금의 먹이사슬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청회사는 원청회사가 청부받은 공사 예정 가격의 3할 정도에서 공사를 진행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공사 현장에서는 하청 회사의 ‘다코베야’ 노동자에게 저임금과 장시간의 가혹한 노동을 강제해야만 했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도망간 다코베야 노동자는 사기죄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p 025



 
가혹한 노동 현장에서는 공사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빈번했지만,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기된 위령비나 추모비는 많지 않았다. 건설 당시만해도 아시아에서 가장 긴 터널이었던 시미즈 터널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관동과 관서를 나누는 조에쓰선 시미즈터널 부근 순직비에는 조선인 이름이 없다. 1920년대 조에쓰선 건설에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됐고, 사고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비석의 ‘기억’에는 남기지 않았다. (…) 일본에 세워진 위령비와 추모비에는 한반도 식민의 역사와 분단의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애방 이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일본에 있는 민족단체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과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으로 분리되었다. 해방 전 조선에서 일본으로 간 노동자들의 죽음 역시 설립 주체에 따라 총련에서 세운 위령비는 ‘조선인’으로, 민단에서 세운 위령비는 ‘한국인’으로 표기되었다. 위령비에서마저 분단의 경계선이 만들어졌다. p 018



기본적으로 일본 내 세워진 위령비는 일본 정부가 아닌 해당 일본 기업이나 민간에서 세운게 대다수다. 그들이 위령비를 세운 목적은 하나다. 이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근무자들을 혼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뭐 그 속에는 일본 특유의 사후관이 반영되어 있을테지만, 그건 각설하고라도 이런식으로나마 위령비를 세운건 후세대로써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 조금 씁쓸한 지점이 있다. 일본 기업이 위로하는 혼은 일본인 근무자 한정이다. 자기네들이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던 사실을 지우고자 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아니 대놓고 깔려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 씁쓸했다.







그나마 일본 기업이 아닌, 일본 민간단체에서 세운 일부 위령비(또는 추모비)는 공사현장에서 죽어간 조선인 근무자들 이름이나, 관련된 내용을 비문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나 역시 조금은 위로받았다. 아래 비문은 다자와후 주변 덴카쿠지에 건립된, 착한마음모임이라는 일본 민간단체에서 세운 ‘조선인 무연불 위령비’ 비문이다.

센다쓰발전소, 나쓰세발전소 댐 공사에는 1944년 이후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이들 공사 중에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이 땅에는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국의 흙이 된 조선인 무연고자가 묻혀있다. 가장 불항핸 시대에 발생한 통한의 역사를 가슴에 새겨 정화하고자 모금을 통해 이 비를 세운다. p 066





이 책 저자가 찾은 위령비 중 하나인 ‘도쿄도 위령당’은 나도 방문했던 장소다. 도쿄 료고쿠 요코야미초 공원에 자리한 위령당이다.



조그만 동네에 있는 공원으로 관광객 발길은 당연히 없다. 현지인들은 이곳이 관동대지진 당시 죽어간 일본인을 위한 추모하기 위한 공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곳을 굳이 찾아갔다. 관동대지진 당시 죽어간 일본인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아니. 그렇지 않다. 공원 한켠에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공원 중앙에 관동대지진 당시 사망한 일본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당이 기세 높게 세워져있고,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는 공원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곳을 찾았던 당시 나는 거대한 위령당을 보고 당황했었다. 지들이 학살한 조선인을 추모하는 비석은 공원 한 켠에 조그맣게 만든 반면(그나마도 일본 민간단체에서 겨우겨우 만든), 관동대지진때 죽어간 일본인을 위해선 이렇게 거대한 위령당을 지어놨구나! 하며 분노를 했었다. 관동대지진 때 죽어간 자기 동포들의 죽음은 그렇게 슬퍼하면서, 관동대지진 때 유언비어를 퍼트려 자기들이 학살한 조선인 희생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슬픔은 저 커다란 위령당에 없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일제 침탈사는 언제 봐도 분노스러운 역사다. 잊고 싶지만 절대 잊으면 안되는 ‘우리’ 역사다. 우리마저 잊으면, 이 역사는 가해자 일본이 원하는 데로 없던 사실이 되버리기 때문이다. 문득 독일 사례가 떠올랐다. 



1970년 12월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방문 당시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이후 2013년 1월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폴란드 방문 당시 유대인 게토 묘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독일은 끊임없이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향해 사죄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사과를 그만둘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할 것입니다. 나치의 범죄는 무한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배 및 침탈한 가해자이며, 현재 일본은 한국과 함께 할 외교 파트너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오랜시간 독일이 몸소 보여주었다. 하지만 일본은 지금까지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현 정부는 그런 일본을 감싸주는 상황에서 나를 비롯한 국민들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일본이 식민지배와 침탈 역사에 사과를 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그 날이 왔으면 좋겠지만, 그건 내 바람으로 끝날 것 같아서 괜시리 마음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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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두콩달 - 365일 질리지 않는 두부, 콩나물, 달걀 요리 레시피
이미경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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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요리책을 들고왔다. 이 책 제목은 『맛있는 두콩달』. 



두콩달이 뭔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간단했다. 두부, 콩나물, 달걀. 우리집, 넘의집 냉장고에 하나 이상은 꼭 있는 바로 그 식재료인 것이다. 특히나 뿡뿡이가 유아식을 먹는 지금, 우리집 냉장고에는 두부 및 달걀은 상시 구비해야하는 식재료이기도 하고!


보통 요리책은 성인 대상(?)인 요리책이 있고, 영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이유/유아식 요리책이 있다. 헌데 두콩달은 뭐랄까, 성인대상이면서도 약 반절 정도는 유아식 대체도 가능한 요리책이다. 무엇보다 당장 내가 이 책을 보고 뿡뿡이 유아식을 만들었으니까! 흠흠. 


확실한 건 이 요리책 메인 식재료가 두부, 콩나물, 달걀이다보니 어떤 메뉴로 만들던 자극적이지 않고, 몸에 건강하고, 근데 또 맛도 있다. 거기다 서브 재료나 양념조차도 집에 늘상 있는 있는 것들이라 접근하는데 어려움도 없다. 제일 좋은건 같은 식재료인데 메뉴들이 다 달라서, 오늘 저녁은 두부요리1, 내일 저녁은 달걀요리1, 모레 저녁은 두부요리2, 글피 저녁은 달걀요리2 로 돌려쓸 수 있다는 거!!!!!!!!!! 진챠 최고야!!!!!





요리책 『맛있는 두콩달』에 실린 요리과정은 기본 4컷, 많아야 6컷이다. 요리 하나 당 필요 식재료도 그닥 많지 않다. 이 요리책에서 메인으로 하는 두부, 콩나물, 달걀은 기본이고, 거기에 기본 양념이나 서브 식재료 몇개가 끝이다(예컨데 부추계란국이면 서브 식재료는 부추!). 다시 말하지만 접근하기 쉬운 식재료에다, 요리 과정도 간단해서 어마어마한 요리 똥손도 쉽게 따라할 수 있다.



두부 요리 레시피 54개, 콩나물 요리 레시피 40개, 달걀 요리 레시피 55개. 도합 149개다.

나는 두부랑 달걀은 상시구비하니 요 두가지 식재료만으로도 무려 109개의 새로운 요리(!)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콩나물까지 상시구비하면 좋겠지만, 손질하기 넘 귀찮아서 콩나물은...일단 제외하고...ㅋㅋㅋ



본격 요리에 앞서, 이 책에서 말하는 계량법, 기본 양념 및 단골 식재료를 먼저 확인하자. 

계량법은 누구나 따라하기 쉽도록 되어있다. 계량도구는 다름아닌 어른 숟가락과 종이컵! 필요한 기본 양념도 냉장고나 싱크대 하부장에 꼭 있는 것들로 이루어져있다. 설마 집에 간장, 고추장, 된장, 소금, 설탕, 고춧가루, 참기름도 없으면.... 애초에 요리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니, 그런 사람들은 그냥 외식하면 되고.



뿐만 아니라 두부, 콩나물, 달걀과 함께하면 좋은 제철 식재료 종류와 냉장, 냉동 식재료 보존기간도 알려준다. 특히 보존기간!!! 냉장, 냉동 보존기간은 정말 중요하다. 왜? 자칫 잘못하면 냉장고에서 오랫동안 썩다가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니까^_T.



▶ 슈퍼푸드 두부 이야기

두부에는 단백질과 몸에 좋은 필수지방산이 풍부해 예부터 채식을 하는 승려나 인도의 채식주의자들이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즐겨 먹었다. 두부를 먹으면 원료가 되는 콩의 기능성 성분 덕분에 골다공증, 고혈압 예방, 콜레스테롤 감소, 항암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게다가 만드는 과정을 통해 65%인 콩의 낮은 소화율이 95% 가량으로 상승하고 칼슘 함유량이 늘어나는 등 건강식품으로 손색이 없다. p 016


두부는 수분이 많아 쉽게 상하기 때문에 사온 즉시 냉장보관하는 것이 좋다. 두부의 고소한 맛을 그대로 유지하려면 수분이 있어야 하므로 두부를 밀폐용기에 담고 찬물을 부어 보관한다. 매일 깨끗한 물로 바꿔주면 최소한 이틀 정도는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 p 017



▶ 건강한 식재료 콩나물 이야기

콩나물은 콩을 원료로 만든 것이 아니라 콩과 영양 성분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콩이 발아되어 생장하는 과정에서 체내 대사가 이루어짐으로써 영양 성분이 상당히 달라진다. 즉 생장 과정에서 지방은 현저히 감소되고 섬유소와 비타민은 증가하는데 특히 비타민 C는 콩에는 전혀 없는데 콩나물에는 다량 생산되는 점이 이채롭다. p 020


콩나물은 빛에 노출되면 녹색으로 변하기 쉬우니 밀폐용기에 담거나 일반 봉지에 담아 냉장 보관한다. 봉지 안에서도 위쪽에는 수분이 없어 상하지 않은 듯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봉지 아래쪽의 수분으로 인해 상하기 쉬우니 오래 보관하지 않는다. p 021



▶ 365일 친근한 식재료 달걀 이야기

달걀은 모든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는 완전식품이다. 성장기 어린이들에게 양질의 단백질을 공급하는 좋은 식품으로 단일 식품으로는 영양가가 가장 뛰어나다고 할 정도로 필수아미노산인 라이신과 메타오닌, 트립토판 등이 골고루 들어 있다. 달걀 노른자에 들어있는 레시틴 성분은 콜레스테롤의 흡수를 방해하여 콜레스테롤의 수치가 올라가는 것을 막아주고 간에 쌓이기 쉬운 지방을 막아주는 효과도 있다. (…) 달걀은 기실이 있는 둥근 부분을 위로 해서 보관해야 노른자가 정중앙에 안정된 형상을 유지하고 호흡할 수 있다. 달걀 껍질에는 기유라고 불리는 작은 구멍이 있어 냄새를 쉽게 흡수하므로 냄새가 강한 식품과 함께 보관하지 않는다. 상온에서는 3주간 보존이 가능한데 냉장고에 넣어두면 보존 기간이 훨씬 길어진다. p 022






이 책을 스윽 읽고, 그날 바로 뿡뿡이 유아식에 적용해봤다. 냉동실에 있는 식재료 큐브 써치 후 선택한게 바로 부추계란국과 두부 돼지고기 완자전. 어쩜 타이밍 알맞게 재료들이 냉동실에 다 있네? 거기다 주말에 야채육수까지 만들어놨었고 ㅋㅋㅋㅋ



다만... 유아식이다보니 어른 처럼 간을 하면 안되기에, 위 레시피에서 조금 변형을 가하긴했다. 변형이라고 해봤자 매운 식재료 빼고(고추ㅋ), 소금간 조금 덜하고, 청주는 안넣고...뭐 그런거? 육수도 멸치 육수 대신, 주말에 만들어둔 야채 육수도 교체...ㅋ


부추달걀국 끓일 때는 딱 좋았는데, 두부 돼지고기 완자전을 만드는 타이밍에서 우리 뿡뿡님....하... 그러다보니 정신 혼란하여(?!) 계란물을 입히지 못하고 완자를 후라이팬에 올려버리는 사태가 발생. 문제는 완자를 다 지질때까지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게 함정이다. 어쩐지 모양이 안잡히더라니 ㅋㅋㅋㅋㅋ

완자 만들 때랑, 맘마 먹을 때도 부침이 좀 있었지만 흐... 극뽁! 하고 결과적으로 우리 뿡뿡님은 완밥하셨다는 행복한 이야기^^!



오늘 저녁은 우리 상전에게 어떤 반찬과 국을 해드릴까, 다시 한번 두콩달을 뒤적뒤적거리며. 꽤 오랜기간 두콩달은 우리 뿡뿡이 유아식 바이블이자, 엄마빠 주말밥상을 책임지는 요리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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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셀프 트래블 - 2024-2025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박정은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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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보는 #여행책, #셀프트래블 시리즈 신간이 나왔다. 이번 편은 프랑스 여행, 정확히는 프랑스 수도 #파리여행책 이다. 아무래도 프랑스 여행하면 베르사유궁이나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성당 같은 랜드마크가 수두룩한 파리로 떠나는게 기본중의 기본일테니. 나만해도 프랑스, 파리 여행에 대해선 1도 모르지만, 적어도 역사를 품고있는 건축물이나 랜드마크 등은 거의 다 알고있는 편이기도 하고.





자 이쯤에서 『파리 셀프트래블』 을 펼쳐보자!


목차만봐도 알 수 있듯, 『파리 셀프트래블』은 파리 여행에 대한 모든것을 꽉꽉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목차 별 세부내용을 읽다보면, 노련한 여행가도 놓치기 쉬운, 파리여행 사소한 팁들까지도 꽉꽉 담겨있다.

그야말로 초보 파리여행러에게 『파리 셀프트래블』은 파리여행의 바이블이라고나 할까?

 



 




파리 여행 시 주의사항 ( 『파리 셀프트래블』 p 024~ )


1. 파리 여행을 피해야할 시기는? 파업시기다. 프랑스 파업은 한국과 달리 공항, 철도, 지하철이 완전히 멈춘다. 특히 11월과 12월은 파업이 자주 있으니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파리 파업 소식에 귀를 기울일 것! 숙소를 예약할 때는 도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중심가로 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2. 파리는 안전한가? 파리는 익히 알려진 대로 소매치기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특히 주의해야할 장소는 샹젤리제, 오페라역, 동역, 북역, 생우앙 벼룩시장, 루브르 박물관, 몽마르트다. 길에서 조직적으로 소매치기를 벌이기도 하니 주의해야 한다. 가방은 대각선으로 앞쪽을 향해 메는 습관을 들이자. 휴대폰도 필요할 때만 꺼내서 보고, 꺼낼 때는 스프링고리나 릴 홀더를 이용할 것!

3. 파리 물가는? 일회용 교통권은 한국의 2배, 커피는 한국과 비슷, 물/바게트/과일/채소는 한국보다 저렴하다. 하지만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땐 한국의 2배 정도를 생각해야 한다.


책을 읽다보면 파리 여행 시 주의사항에 대한 내용이 꽤나 알차게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었던게, 파리 여행을 ‘피해야하는’ 시기다. 보통 여행책은 여행하기 좋은 시기를 알려주는데, 이 책은 여행하기 좋은 시기 뿐만 아니라 피해야하는 시기까지 알려준다. 더 놀라운건 피해야하는 사유가 ‘파업’이라는 거. 이야! 파리 교통 파업은 말 그대로 파업이구나. 모든 교통이 멈춘다니.

여기서 놀라면 섭섭하다. 보통 여행책에는 여행일자별 추천일정이 있다. 『파리 셀프트래블』에도 당연히 추천일정이 있는데, 어머나 세상에? 놀랍게도 ‘당일치기’ 및 ‘1박 2일’ 일정이 있다. 보통 유럽권 여행은 일주일이 기본인데, 당일치기 및 1박 여행일정이라니. 이런 일정이 있다는 건, 저자가 업무 출장 차 짧게 파리를 방문한 회사원들까지 고려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어쩜 이렇게 섬세할 수가!!! 




파리 중요 관광지(『파리 셀프트래블』 p 038~)


파리가 프랑스 대표 여행지인 이유! 바로 수많은 문화유산과 랜드마크에 있지 않을까? 유명한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노트르담 성당과 오페라도 그렇고, 왕실과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베르사유 궁전이나 루브르 박물관도 그렇고. 파리에 있는 모든 관광지를 열거라하면 입아프기에, 아래에 내가 가보고 싶은 관광지 몇 곳만 적어봤다. 이 외에도 책에서 더 많은 파리 관광지, 여행지를 소개하고 있다는 건 안비밀!



1. 센 강변: 센 강변 주변으로 파리 역사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건축물이 산재해있다.
2. 베르사유 궁전: 루이 14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부터 루이 16세까지 프랑스 왕족이 살았던 궁전이다.
3. 에펠탑: 1889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철탑이다. 관광객이 가장 많은 곳으로, 여행 1~2개월 전에 미리 예약하는게 좋다.
4. 개선문: 나폴레옹 1세가 오스트렐리츠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5. 노트르담 대성당: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의 배경 성당으로 중세시대에 건축된 성당이다.
6. 오르세 미술관: 폐기차역을 활용한 미술관이다.
7. 루브르 박물관: 과거 왕의 궁전이었으나, 지금은 세계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8. 오페라: 『오페라의 유령』 배경지이자, 1875년에 만들어진 극장. 오페라 앞 계단은 만남의 장소로 쓰인다고.





파리 식당에서 음식 주문하기 (『파리 셀프트래블』 p 058~)


미식의 나라 프랑스. 고로 프랑스에서 무언가를 먹는다는 건 먹방러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전에 알아야 할 것! 프랑스 식문화는 한국과 다르다는 점이다. 

파리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음식이다. 파리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길거리 제과제빵의 수준 높은 맛에 파리가 사랑스러워진다. 빵집과는 달리 오랜 시간 머물게 되는 식당은 좀 더 나아간다. 프랑스의 점심이나 저녁 식당은 보통 전식, 본식, 후식으로 구성되는데 전식 또는 본식만 선택해 먹을 수도 있고 세 가지 코스로 즐길 수 있다. p 058



- 전식요리: 달팽이 요리, 푸아그라, 타타르 데 뵈프, 양파 수프, 샐러드
- 본식요리: 뵈프 부르기뇽, 꼬꼬뱅, 키쉬, 오리 콩피, 오리 가슴살 구이 등
-  후식: 디저트



자세한 음식 이름, 사진 및 설명은 책에 실려있으니, 생략!

근데 뭐 음식 이름, 사진을 백날 본들 메뉴판을 읽지 못해서 주문하지 못하면 말짱 꽝! 이 책은 그런 먹방러들을 위해 프랑스 식당 및 카페 이용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거기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바로 메뉴판 읽기! 일부 식당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식당은 오로지 프랑스어로 된 메뉴판만 비치한다고 하니, 이 책에서 알려주는 메뉴판 읽기를 꼭 확인해보자.



파리 여행 도보 추천 경로(『파리 셀프트래블』 p 083 ~ p166 )


나는 여행을 가면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 보다는 도보 여행을 즐겨했다(국내외 모두). 그런 나에게 도보로 여행할 수 있는 파리는 정말 최고의 여행지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저자가 친절하게, 파리 권역별로 도보 루트를 추천해주니, 구글지도를 보며 어렵게 루트를 짜낼 필요도 없고.


▶ 파리 랜드마크 구경! 에펠탑에서 개선문까지
1. 사요 궁에서 출발해 몽테뉴 길과 샹젤리제를 거쳐 개선문까지 거리는 총 3.2km
2. 에펠탑을 가까이에서 보고 인도교인 드빌리교를 건너 몽테뉴길로 가는 거리 4km. 근처에 바토 무슈와 바토 파리지앵 선착장이 있으니 센 강을 유람해보는 것도 좋다.
3.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다면 에펠탑에서 마르스 광장을 지나 앵발리드로 간 후 그곳에서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건너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를 지나 샹젤리제를 걷는 방법도 있다. 이때 도보 거리는 6km.
4. 시간이 없다면 사요 궁의 Trocadero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곧바로 개선문으로 갈 수 있다.



▶ 파리의 탄생과 프랑스의 지성! 시테 섬과 라탱 지구
1. 시테 섬과 생 루이 섬을 돌아보고 생 제르맹의 활기찬 분위기를 느껴보는 루트로 총 거리는 4.2km다. 조금 많이 걷긴 하지만 아기자기한 예쁜 골목과 먹을거리, 볼거리가 많아서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20세기 프랑스 문학과 예술의 생산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카페를 지나 예술의 다리가 그 종착지다.


▶ 프랑스 고대부터 현대까지, 루브르 박물관 주변 (루브르 박물관 구경 후 오페라까지 가는 길)
1. 체력이 바닥이라면 가장 빠른 1.3km
2. 루브르에서 튈르리 정원을 돌아보고 초콜릿과 전통 있는 식료품점이 모여 있는 마들렌 사원을 거쳐 오페라로 향하는 2km.
3. 오르세 미술관에서 튈르리 정원을 거쳐 마들렌 사원, 오페라로 가는 2.5km
4. 튈르리 정원에서 방돔 광장을 거쳐 오페라로 가는 2km

그리고 핸드북! 짐을 최소한으로 들고다니는 여행러들을 위한 핸드북은, 그야말로 세심함의 끝판왕이 아닐런지?!

프랑스 파리여행을 계획하는 여행러들에게 여행책 『파리 셀프트래블』을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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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의정부에 올라간다 - 의정부시에 대한 인문학적이고 여행학적인 보고서
박종인 외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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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기자님 신간이 나왔다. 인터넷 서점에서 기자님 신간 알람이 떴길래, 냉큼 봤더니 왠걸? 상상출판에서 출간 중인 시리즈물 역사 순한맛 『땅의 역사』 시리즈도 아니고, 와이즈맵 출판사에서 종종 나오는 매운맛 역사책도 아니었다. 뭐랄까, 책 제목만 봤을 때는 지자체에서 기념도서로 출간되거나, 해당 지자체에 있는 관공서 책장에 꽂혀있을 법한 제목이었다. 그게 그말인것같기는 한데. 하하하. 거기다 저자도 박종인 기자님 단독이 아닌 공동집필이었다. 뭐랄까, 약간 동공지진.....이 왔지만! 기자님 신간이니까 바로바로 겟겟!!



책 제목은 『그래서 우리는 의정부에 올라간다』.



제목만 봤을 땐, 단순히 ‘의정부’라는 도시를 기념하기 위한 책인것 같기는 한데. 대체 왜 ‘의정부’? 다른 도시도 많은데? 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면서 책을 딱 피고! 서문을 딱 읽었는데! 어머 세상에. 올해가 의정부 도시 승격 60년이 된 해란다. 그를 기념하여 책이 출간된거긴 한데, 이게 약간 다른 지자체들 기념 도서와 느낌이 조금 다르다. 쉽게 말하자면 이 책은 의정부를 인문학적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여행책이자, 인문학책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



‘의정부 60년 시사’ 같은 기록물을 만들 수도 있었다. 시사 편찬은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의미있는 작업이다. 그런데 대게 시사는 어마어마한 작업이 필요한 몇 권자리 대작인데다 의정부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만 보면 어떡하나 싶은 알량한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 모두에게 줄 책을 만들기로 했다. 이 책은 의정부 60년 생일잔치에 독자 여러분을 부를 초대장이다. p 007



현직 의정부 시장은 의정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의정부는 옛것을 부여잡고 있는 쇠락한 종같집 같다”고. 의정부를 떠올리면 함흥차사나 군사도시, 또는 주말산행의 핫플레이스, 그리고 부대찌개 정도밖에 없다는 거다. 근데 내가 생각한 의정부도 이와 동일하다. 거기에 조금 더하면 의정부 천보산에 있는 족두리묘 정도? 그나마 족두리묘는 내가 실제 답사를 갔던 곳이기에 알고 있는거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조차도 모른다는게 함정이다.



그런데....놀랍게도 과거 의정부는 경기 북부에서 으뜸가는 형님도시였단다. 경기 북부 지역 사람들은 의정부에 갈때마다, ‘의정부에 올라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말이다. 그랬던 의정부였다. 하지만 지금 의정부 위세는 바로 옆, 일산신도시가 있는 고양시에도 못미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다. 그래서 이 책이 나왔다.


아래는 박종인 기자님이 쓴 첫번째 챕터 「의정부에 대한 인문학적이고 여행학적인 보고서」 내용 일부다.



함흥차사: 이성계와 이방원

‘의정부’ 하면 제일 유명한 이야기가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부자간 갈등을 담은 ‘함흥차사’ 이야기다. 의정부와 함흥차사를 연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대체로 함흥차사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고 심지어 역사적 사실로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함흥차사는 완전한 사실도, 그렇다고 완전한 거짓도 아니다. 



실제로 ‘함흥차사 전설’이 처음 등장한 건 1615년에 죽은 ‘차천로’가 쓴 저서 《오산설림초고》’다. 조선이 건국되고도 160년이나 지났고, 심지어 임진왜란까지 겪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허구의 산물이다. 이후 1806년 이긍익이 쓴 저서 《연려실기술》에서 차천로의 글이 재인용된다. 이후 ‘의정부’라는 지명에 대한 상상과, 실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갈등을 해소하는 흔적들로 인해 함흥차사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조사의의 난이 평정되고, 이성계는 수도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성계는 한성을 도읍지로 정했지만 1402년 당시 수도는 아들 정동에 의해 개경으로 재천도된 상태였다. ‘조운이 통하고 백성도 편리할 땅’이라며 이성계가 고심 끝에 선택한 땅이었지만 아들은 개경 복귀를 선택했다. (…) 정종을 내쫓고 왕이 된 이방원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한성 재천도만이 아버지에게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새 왕조 국왕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었다. p 057



1406년 11월 5일 마침대 황해도에서 마음을 다스린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왔다. 아들 태종이 옛 앙주 남교에 미리 가서 대기하는 사이 이성계는 양주 객사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양주 객사는 지금 경기도 양주시 고읍동에 있었다. 아들과 아비는 양주 한가운데 너른 녹양들판을 바라보며 위대한 화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윽고 태종이 무리를 이끌고 녹양들판을 북상해 객사에 당도했다. 아들이 올린 술을 아비가 즐겁게 받아 마셨다. 아들은 해가 저문 다음에야 들판에 설치한 장막으로 돌아왔다. p 058



여기가 역사 현실 속에서 벌어진 길고 긴 함흥차가 서사시의 종점이다. 건국 과정에 벌어졌던 피비린내나는 갈등이 녹양벌에서 해소됐다. 그 해소된 갈등을 딛고 태종 이방원이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전 과정을 놓여 놓은 이야기가 의정부에 전해오는 함흥차사 전설이 가진 의미다. p 061




족두리 묘: 의순공주

의정부 천보산에 금림군 가족 묘소가 있다. 그 안에 비석 없는 묘소가 1기 있는데, 옛부터 ‘족두리 묘’라고 불렸다. 족두리 묘 주인은 다름아닌 의순공주다. 이 곳은 2021년 내가 의정부를 찾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의순공주가 누구인가? 병자호란 이후 제 딸들 지키기기 급급했던 효종이나, 권세가들은 힘없는 집안의 여자를 골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는데, 그 희생양이 바로 의순공주였다. 그녀는 조금 한미한 전주 이씨 가문에 태어났을 뿐인데, 나랏님의 결정으로 갑자기 공주가 되고,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런데 못난 조선 남자들, 막상 의순공주를 오랑캐인 청나라에 보내려니, 조선의 여인을 오랑캐와 결혼시킨다는게 끝내 용납이 안됐나보다. 그들은 의순공주가 청나라 가는 길에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어’ 바다에 몸을 던저 자결하고, 족두리만 물 위에 떠올랐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 족두리로 묘소를 만드니, 그게 바로 의정부 천보산에 있는 족두리묘다.



의순공주의 삶은 정묘/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살아돌아온 조선의 여성들과 맞닿아있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지켜주지 못했고, 힘 없는 나라로 인해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던 그녀들 말이다. 조선에 돌아온 그녀들이 마주했던건 ‘환향녀’라는 삿대질과 돌팔매질, 왜 그자리에서 죽지 않았냐는 폭언과 가족들에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뿐만 아니라 의순공주처럼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있는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실제로 가족의 손에 죽어나간 여자들도 있었다.



의정부 천보산에 있는 족두리묘는, 못난 조선 남자들로 인해 희생된 조선의 여성들의 한이 담겨있다.



떠나기 전 공주를 호종할 사신들에게 왕이 일렀다. “명심하라. 금림군은 내 5촌이고 의순공주는 내 6촌이며 양녀다. 금림의 자식이 아니다.” 효종과 10촌 형제인 금림군은 5촌 아저씨로 둔갑헀다. 11촌 조카딸은 6촌 누이며 동시에 양녀가 됐다. (…) 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이미 모든 게 결정됐는데 이런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효종은 그 자리에서 8~12세에 해당하는 사대부 자녀의 혼인금지령을 내렸다.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살 된 공주를 혼인시키겠으니 적령기 남녀 혼인을 금지하라는 것이었다. ‘두 살 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p 071



숱한 여자가 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매우 적은 수가 돌아왔다. 이들을 환향녀라고 한다. 이들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1638년 신풍부원군 장유의 며느리가 청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장유는 인조에게 “함께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이혼을 허가해달라” 하고 요청했다. 장유는 훗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 장인이다. 그러자 좌의정 최명길이 “몸을 더렵혔다는 증거가 없다”며 이혼 불가를 주장했다. 그 뒤로 사대부집 자제는 환향녀와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인조실록》 사관은 이혼 불가를 주장한 최명길을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라고 평했다. p 072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 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이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건져 모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의정부 사람들은 의순공주 넋을 위로하고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무덤은 최근까지 초라하게 방치됐다가 정비됐다. p 073




그 외 의정부에 흔적을 남기다: 흥선대원군, 박태보, 김구, 위안스카이

숙종은 환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이용된 도구가 장희빈과 인현왕후라는 두 여자다. 장희빈을 이용해 남인을 움직였고, 인현왕후를 이용해 서인을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박태보다. 하룻밤에 곤장을 맞고, 주리를 틀고, 불에 달군 인두에 짖어지고, 사금파리더미 위에 꿇어않힌 뒤 무릎을 바위로 짓이기는 고문을 받았다. 장희빈과 그녀가 낳은 아들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 고문을 하룻밤에 다 받고 죽었다. 서인은 물론 장희빈를 지지하던 남인까지도 박태보의 기개와 죽음을 기렸다. 그의 무덤이 의정부에 있다. 



고종 즉위 후 정권을 잡고 개혁을 해나가던 흥선대원군이 순식간에 몰락해버렸다.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것이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진행하던 개혁들을 전부 뒤엎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격노하여 경기도 양주에 있는 산장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산장이 현 의정부시 가능동 곧은골에 있었던 ‘직곡산장’이다. 아마 흥선대원군은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의 갈등과정을 생각했으리라. 이방원은 이성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고종은 이방원이 아니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복귀를 바라는 유생들을 참수하라며 강경대응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산장에서 나와 아들 고종에게 머리를 숙였다. 직곡산장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의정부는 흥선대원군 이름을 딴 지명들이 여럿 생겼다.



백범 김구 선생도 의정부를 스쳐갔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의회가 성립된 후 제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 따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됐다.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를 주장하던 김구는 당연히 배제되었다. 이후 김구는 사패산 석굴암을 찾았다. 석굴암에는 김구 친필 암각이 남아 있다. 



조선 말 외교고문으로 조선을 좌지우지했던 청나라 군인 위안 스카이도 의정부를 스쳐지나갔다. 그의 흔적은 도봉산 망월사에 남아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도 패악질을 하고, 본국인 청나라로 돌아가서도 황제노릇해보려 했던 권력만 쫓던 탐욕가였다.




근대도시 의정부

근대 의정부는 두 가지 큰 역사적 사건을 통해 만들어졌다. 한번은 일제강점기 당시 경원선 의정부역 개통이고, 다른 하나는 6.25전쟁 이후 미군 주둔이다. 



경원선 개통으로 외지 사람과 각종 문물이 의정부로 몰려들었다. 경원선 부설은 일제가 조선 물자 침탈을 위해 진행한 것이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로 인해 의정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외지인과 온갖 문물이 의정부로 몰려들었고, 결과적으로 의정부에 인구가 들면서 각종 공장이 들어서고, 학교가 들어서고, 영화산업까지 들어서며 실질적인 경기 북부 으뜸 도시로 거듭났다.


6.25 전쟁 이후 의정부는 쑥대밭이 되었다. 남한에 있던 다른 도시들고 그러했겠지만, 북한과 가까운 의정부는 전쟁기간 내 점령군이 여섯 차례나 바뀔 정도로 혼란의 정점에 있던 도시였다. 그랬던 도시이기에, 전쟁이 끝날 무렵 미8군사령부는 제1군단사령부를 의정부에 설치했다. 이어 미군과 작전을 함께하는 유엔군 소속 각국 부대도 의정부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주한 미군이 의정부에 자리를 잡으면서, 쑥대밭이 되었던 의정부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미군을 상대하며 의정부 경제가 살아났다. 경제가 살아나자 인구도 들어났다. 의정부가 시로 승격한 근본적인 원인은 주한미군이 가져온 나비효과였다.




산, 예술문화 그리고 음식: 여행지로서 의정부는 매력만점 도시다


‘왜 의정부에 가는가?’ 토박이 의정부 시장 김동근이 던진 질문에 대략 답이 나왔다. 의정부 시민에게 찰나에서 영원으로 전승돼온 함흥차사, 실제로는 그 유장하고 격정적인 역사를 즐기기 위해 우리는 의정부로 가야한다. 녹양벌 너른 들판을 에워싼 명산 품에 안기기 위해 우리는 의정부로 가야한다. 그 벌판과 산에 발자국을 찍어놓은 근대 거인들 흔적을 찾기 위해 의정부로 가야한다. p 104



‘놀러가기 위해’ 찾아가는 도서관 봤나? 그게 의정부에 두 군데나 있다. 2장에서 소개한 미술도서관과 함께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음악도서관이다. 음악도서관은 미술도서관과 함께 어쩌면 의정부가 미래로 나아갈 비상구이면서 맏형으로서 누렸던 영화를 회복할 수 있는 디딤돌이기도 하다. 의정부를 찾는 바깥사람에게는 자칫 지루한 역사 이야기를 벗어나 상큼하고 맑은 의정부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p 107


도봉산, 천보산, 용암산, 부용산, 수락산, 사패산., 흥복산. 전부 의정부를 둘러 싸고 있는 명산들이다. 지금까지도 의정부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산들이다. 특히 의정부 자존심인 도봉산에는, 산악인 대장 엄홍길이 살았더랬다. 지금은 생가터만 표지로 남아있다. 이 외에도 암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수락산, 의순공주가 잠들어 있는 천보산, 임도가 잘 돼 있어서 산악 자전거를 즐기는 이가 많이 찾는 흥복산, 이성계와 무학대사 그리고 김구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패산, 바위가 꿈틀대는 용처럼 늘어서 있어서 용암산까지. 의정부는 산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 산 뿐이던가? 의정부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미술도서관과 음악도서관이 있다. 문화 볼모지 의정부로 전근한, 한 공무원이 끈질기게 매달려 만들어낸 성과다. 삶의 질을 높이는 건 다름아닌 문화생활이다. 미술도서관과 음악도서관 덕택에 현재 의정부시민들은 다양한 예술,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오죽하면 이 도서관을 방문한 외지인들이 “이 도서관이 있는 의정부에 살고 싶다”라고 말하고, “시민 세금을 가장 모범적으로 사용한 사례”라고 말하겠는가. 새삼 부럽다. 내가 사는 시흥 공무원들은 대체 어디서 뭐하나 몰라. 청렴도도 매년 전국 하위권에 머무르는 그들이 좀 본받았으면 싶다. 에휴.



(통닭)다들 가난했던 시절, 예전처럼 닭 한 마리를 백숙처럼 통째로 내던 서울에 반해, 의정부를 위시한 미군 주둔 도시에서는 미국식으로 부위별로 토막을 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지금은 전국 어디서건 의정부에서처럼 먹기 좋게 토막치킨을 내니, 의정부는 신문화를 좀 더 일찍 수용한 셈이다. 그 신식 음식 가운데 한국적인 요리 문화와 미국적인 식재료가 융합해 탄생한 메뉴가 바로 부대찌게다. 다시 말해서 ‘가난’과 ‘미군 식재료’와 ‘한국 특유의 찌개 문화’가 버무려져서 우리의 의정부 부대찌개가 탄생했다. p 111



1998년에 조성된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에는 ‘오뎅식당’이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부대찌개 원조 식당이다. 오뎅식당 또한 시작은 볶음이었고 지금은 찌개가 주 메뉴다. 시작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재료다보니 상호에는 그 서럽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부대찌개’의 ‘부’자도 보이지 않는다. (…) PX가 됐든 부대 식당이 됐든 불법 유통된 식재료를 썼노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던 아픔, 그리고 연유야 어찌 됐건 남의 나라 군인들이 먹는 재료로 음식을 만든다고 하기 거북했던 가난한 자존심이 ‘오뎅식당’이라는 상호에 담겨있다. p 113


용광로 같은 의정부 이주민 문화는 뜻밖에도 의정부를 평양냉면의 성지로 만들었다. 전국 맛집이 몰려 있는 서울에서 가장 활황인 평양냉면집이 있는데,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이다. 이 두 음식점의 친정이 의정부 평양냉면이다. (…) 원조 가운데 원조인 평양은 통일이 된 다음에나 맛볼 수 있겠고, 휴전선 남쪽 대한민국 평양냉면 4대 문파 가운데 셋은 서울에, 하나는 의정부에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다른 3대 문파와 치열하게 쟁패중인 을지면옥과 필동면옥 주인은 의정부 평양면옥집 딸들이니 과연 의정부는 대한민국 평양냉면계를 주름잡고 있는 성지다. 서울 잠원동에 있는 ‘본가평양면옥’도 셋째 딸이 분가해 낸 집이다. p 114


역시 이북 음식인 초계탕은 북경기와 강원도 전역에 퍼져 있다. 초계탕은 식초와 겨자를 넣은 차가운 닭 육수에 메밀면과 닭고기를 가늘게 찢어 넣어 먹는 음식이다.초계탕의 ‘초’는 식초요, ‘계’는 함경도 사투리로 ‘겨자’의 ‘계’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이 차가운 초계탕을 추운 겨울에 별미로 먹었다. 의정부 식당 ‘평양초계탕막국수’도 전국 초계탕 원조 가운데 하나다. p 116 



의정부는 먹방여행으로도 제격인 도시다. 첫번째 음식은 부대찌개다. 모두가 다 알고 있듯, 의정부는 부대찌개가 탄생한 도시다. 그래서 당연히 의정부가면 부대찌개를 먹으면 되겠지! 싶었다. 근데 아니었다. 놀랍게도 의정부는 평양냉면 성지였다. 평양냉면 더쿠들이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서도, 나같은 머글들은 처음듣는 이야기니까. 



6.25 전쟁 이후 이북 출신들이 의정부에 많이 자리를 잡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의정부 평양면옥집 사장이란다. 평양출신으로 의정부에 냉면집을 차렸는데, 의정부에 살던 피란민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더니 어느새 평양냉면 성지가 되었다. 그 평양면옥집 딸들이 서울에 분가를 냈는데, 부모의 손 맛을 그대로 이었는지 서울 분가도 줄줄이 평양냉면 성지가 되었다고.




쇠락한 도시라 생각한 의정부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과거와 달리 많은 게 변했다. 지금 의정부는 산의 도시, 군사도시 라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하다. 등산이나 역사는 당연하고, 트랜드를 선두할 예술문화와 음식이 매력적인 여행도시로 바뀌어 있었다. 특히 내가 혹했던 점은 의정부 경전철과 역사다. 의정부 경전철이 땅이 아닌 고가 선로를 달린다는 점에서 혹했고, 경전철만 타면 의정부의 역사적 장소를 대부분 들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또 혹했다. 그것도 모르고 난 의순공주 묘소 하나만 보고 집으로 컴백했고.. 하..


 


거기다 우리나라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미술도서관과 음악도서관이 의정부에 있다. 흔히들 떠올리는 고리타분한 미술관이 아니다. 일단 그 속은 둘째 치고 건물 사진만 봐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을 정도로 멋진 장소다. 거기에 만인이 향유할 수 있는 전시장까지. 음악도서관은 또 어떠한가. 미군의 음악문화 덕택에 의정부 시민들은 노인들까지도 재즈와 록 음악에 익숙했다고 한다. 이에 착안하여 생겨난게 음악도서관이다. 음악도서관은 매년 의정부음악극축제와 블랙뮤직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여기서 말하는 블랙뮤직은 과거 미군 음악문화로 인해 의정부 시민들이 듣고 자랐던 재즈, 블루스, 가스펠, 솔, R&B, 힙합 등을 이야기한다.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음악들이 아닌가.



산과 역사 하나만 봐도 나에게 의정부는 매력적인 도시로 다가오는데, 여기에 예술문화와 음식까지 더해지다니! 이쯤되면 다시한번 의정부를 찾아가봐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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