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노동자 위령비를 찾아서 1 일제침탈사 바로알기 8
안해룡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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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 하지만 꼭 알아야 하는 역사가 있다. 바로 내 나라가 사라지고 언어가 사라졌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로 살아야 했던 시기다.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조선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빼앗아갔다. 크게는 나라를 빼앗아갔고, 세부적으로는 인적자원, 물적자원, 천연자원 그리고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자리잡은 역사 문화를 빼앗아갔다. 일제가 빼앗아간 것들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날이 새도 모자를 정도로 많다. 





이 역사책 『조선인 노동자 위령비를 찾아서1』은 그런 일제 침탈사 중에서도 인적 자원 침탈, 그 중에서도 일제 산업현장에 ‘강제동원’된 노동자를 이야기한다. 





강제동원. 지난 정권 때도, 현 정권 때도 강제동원은 한일 외교에서 단연 중요한 문제다. 지난 정권 때 우리나라 재판부는 일본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했고, 일본은 이에 반발하여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한국에선 반일운동이 거셌다. 당연히 한일관계도 최악으로 치달았다. 현 정권은 정반대다. 재판부가 아닌, 정권에서 나서서 제3자 변제를 이야기하며,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기업이 돈을 모아서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라며, 일본의 사죄는 커녕 일본을 감싸주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덕분에 현 정부와 일본 관계는 좋다못해 그야말로 최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바라는건 배상도 배상이지만,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생존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이제 몇 분 안남았다. 지금까지 일본은 사죄 및 배상은 커녕, 외려 자신들이 왜 사죄를 해야하느냐고 반발한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려 자기들은 잘못이 없다고 으시대고 있다. 놀랍게도 현 정권은 이런 일본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현 정권이 보호해야할 사람은 일본이 아닌, 자국민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임에도 말이다. 뭐, 여기서 각설하고.





그렇다면 일본은 왜 자신들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사죄 및 배상의 의무가 없다고 나오는 것일까? 그 근거가 있는건가? 슬프게도 그 근거가 있다. 심지어 그 근거는 우리가 일본에게 사죄와 배상을 강제할 수 없는 강력한 족쇄가 되었다. 다름아닌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과 맺었던 ‘한일기본조약’ 및 ‘한일청구권협정’이다.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을 살펴보면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조약, 협정은 이미 무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일간의 재산, 권리 등에 대한 청구권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라는 등의 조항이 있다. 이 조항 덕택에 일본은 일제강점기 때 자행한 수많은 죄악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무효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강제동원 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한인, 원폭 피해자, B·C급 전범, 독도문제, 문화재 환수등 등 모든 문제를 지금까지도 해결할 수 없는 이유다. 



일본 기업은 1910년 한일병합 이전부터 조선인을 고용해왔다. 위험한 업무에 낮은 임금으로 사람을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호황을 맞은 일본은 점점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유럽의 전쟁 확대로 주문이 폭주하면서 노동자 확보는 일본 산업계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탄광과 철도뿐만이 아니었다. 댐과 발전소 건설 현장의 노동력 부족도 심각했다. 특히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1920~1930년 대 집중적으로 지어진 여러 발전소와 댐에는 현장마다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p 016




조선 땅에 이른바 ‘모집인’이 나타난 시기가 이때다. 그들은 감언이설로 조선인을 속여 대한해협을 건너게했다. 일제 산업현장에 투입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값 싼 불쏘시개였다.



일본 내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보호장구도 없었다. 고노마이 광산에서 발생했던 사고를 보자. 일본인 갱내 근무자가 19.2%가 상해를 입은데 반해, 조선인 갱내 근무자는 53.5%나 되었다. 심지어 고노마이 광산에서 사망한 근로자는 대체로 조선인이었다. 갱내 사고사가 제일 많았고, 근무 환경으로 인한 폐결핵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병사가 뒤를 이었다. 광산 측에선 조선인 근무자가 병에 걸렸을 때, 치료 불능이라 판단되면 바로 귀국시켰다. 명백한 책임 회피였다.



하나오카 광산에서는 함몰사고로 일본인 11명과 조선인 12명이 갱내에 갇혔다. 광업소 측은 갱도 피해를 우선시 해 ‘조난자들을 순직한 것으로 보고’하고 구출작업을 중지했다.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은 그렇게 광산에 생매장 되었다. ‘재해 보고서’에 따르면 순직한 조선인 노동자중 3명은 광산에 도착한지 겨우 20일 된 이들도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들 시신은 차디찬 광산 갱도에 묻혀있다.



일본 내 발전소나 수로 건설 공사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동원되었다. 발파 작업 등 위험한 작업 최전선에는 언제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센다쓰 발전소 건설된 조선인 306명은 대부분 전라남도 출신이었다. 그들 중에는 13~15세의 소년들도 있었다. 이 306명 가운데 259명이 일본 패전 후 고국으로 귀국하였지만, 그들은 정당한 수당을 받지 못했다.



이게 바로 일본 제국주의 산업환경에 강제동원된 대다수 조선인들에 대한 처우다. 

다코베야란 훗카이도 개척을 위한 죄수노동이 폐지되면서 토목 공사등에 필요한 노동자를 ‘좋은 일이 있다’고 속여서 데리고 와서 감금 상태로 장시간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노동을 강제하는 노동 고용구조를 말한다. 이러한 노동자의 함바를 통칭 ‘다코베야’, ‘감옥베야’라고 불렀다. ‘다코’는 일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p 023



다코베야는 일본 정부와 대기업에는 채택하기 좋은 제도였다. 일본 정부는 값싼 노동력을 신소하게 동원하 공사를 수행할 수 있는 청부제도를 묵인해왔다. 정치헌금이나 담합금은 원청에서 중청, 다시 하청으로 이어지는 자금의 먹이사슬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청회사는 원청회사가 청부받은 공사 예정 가격의 3할 정도에서 공사를 진행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공사 현장에서는 하청 회사의 ‘다코베야’ 노동자에게 저임금과 장시간의 가혹한 노동을 강제해야만 했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도망간 다코베야 노동자는 사기죄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p 025



 
가혹한 노동 현장에서는 공사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빈번했지만,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기된 위령비나 추모비는 많지 않았다. 건설 당시만해도 아시아에서 가장 긴 터널이었던 시미즈 터널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관동과 관서를 나누는 조에쓰선 시미즈터널 부근 순직비에는 조선인 이름이 없다. 1920년대 조에쓰선 건설에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됐고, 사고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비석의 ‘기억’에는 남기지 않았다. (…) 일본에 세워진 위령비와 추모비에는 한반도 식민의 역사와 분단의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애방 이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일본에 있는 민족단체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과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으로 분리되었다. 해방 전 조선에서 일본으로 간 노동자들의 죽음 역시 설립 주체에 따라 총련에서 세운 위령비는 ‘조선인’으로, 민단에서 세운 위령비는 ‘한국인’으로 표기되었다. 위령비에서마저 분단의 경계선이 만들어졌다. p 018



기본적으로 일본 내 세워진 위령비는 일본 정부가 아닌 해당 일본 기업이나 민간에서 세운게 대다수다. 그들이 위령비를 세운 목적은 하나다. 이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근무자들을 혼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뭐 그 속에는 일본 특유의 사후관이 반영되어 있을테지만, 그건 각설하고라도 이런식으로나마 위령비를 세운건 후세대로써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 조금 씁쓸한 지점이 있다. 일본 기업이 위로하는 혼은 일본인 근무자 한정이다. 자기네들이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던 사실을 지우고자 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아니 대놓고 깔려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 씁쓸했다.







그나마 일본 기업이 아닌, 일본 민간단체에서 세운 일부 위령비(또는 추모비)는 공사현장에서 죽어간 조선인 근무자들 이름이나, 관련된 내용을 비문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나 역시 조금은 위로받았다. 아래 비문은 다자와후 주변 덴카쿠지에 건립된, 착한마음모임이라는 일본 민간단체에서 세운 ‘조선인 무연불 위령비’ 비문이다.

센다쓰발전소, 나쓰세발전소 댐 공사에는 1944년 이후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이들 공사 중에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이 땅에는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국의 흙이 된 조선인 무연고자가 묻혀있다. 가장 불항핸 시대에 발생한 통한의 역사를 가슴에 새겨 정화하고자 모금을 통해 이 비를 세운다. p 066





이 책 저자가 찾은 위령비 중 하나인 ‘도쿄도 위령당’은 나도 방문했던 장소다. 도쿄 료고쿠 요코야미초 공원에 자리한 위령당이다.



조그만 동네에 있는 공원으로 관광객 발길은 당연히 없다. 현지인들은 이곳이 관동대지진 당시 죽어간 일본인을 위한 추모하기 위한 공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곳을 굳이 찾아갔다. 관동대지진 당시 죽어간 일본인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아니. 그렇지 않다. 공원 한켠에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공원 중앙에 관동대지진 당시 사망한 일본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당이 기세 높게 세워져있고,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는 공원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곳을 찾았던 당시 나는 거대한 위령당을 보고 당황했었다. 지들이 학살한 조선인을 추모하는 비석은 공원 한 켠에 조그맣게 만든 반면(그나마도 일본 민간단체에서 겨우겨우 만든), 관동대지진때 죽어간 일본인을 위해선 이렇게 거대한 위령당을 지어놨구나! 하며 분노를 했었다. 관동대지진 때 죽어간 자기 동포들의 죽음은 그렇게 슬퍼하면서, 관동대지진 때 유언비어를 퍼트려 자기들이 학살한 조선인 희생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슬픔은 저 커다란 위령당에 없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일제 침탈사는 언제 봐도 분노스러운 역사다. 잊고 싶지만 절대 잊으면 안되는 ‘우리’ 역사다. 우리마저 잊으면, 이 역사는 가해자 일본이 원하는 데로 없던 사실이 되버리기 때문이다. 문득 독일 사례가 떠올랐다. 



1970년 12월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방문 당시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이후 2013년 1월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폴란드 방문 당시 유대인 게토 묘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독일은 끊임없이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향해 사죄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사과를 그만둘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할 것입니다. 나치의 범죄는 무한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배 및 침탈한 가해자이며, 현재 일본은 한국과 함께 할 외교 파트너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오랜시간 독일이 몸소 보여주었다. 하지만 일본은 지금까지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현 정부는 그런 일본을 감싸주는 상황에서 나를 비롯한 국민들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일본이 식민지배와 침탈 역사에 사과를 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그 날이 왔으면 좋겠지만, 그건 내 바람으로 끝날 것 같아서 괜시리 마음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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