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꽃 이야기 - 원예학자와 떠나는 역사 속 꽃 여행, 행복한아침독서 추천도서
김규원 지음 / 한티재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가드닝 책을 하나둘 읽다보니, 슬슬 식물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키우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지가 아니라, 내가 보고 있는 이 식물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라던가, 이 꽃의 꽃말은 어디서 유래된걸까? 뭐 이런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근데 또 곰곰히 생각해보니, 세상에 알려진 꽃말들의 유래는 대게 서양이었다. 예컨데 수선화의 꽃말인 ‘자기애’는 그리스신화의 나르키소스에서 유래된 꽃말이고, 물망초의 꽃말 ‘나를 잊지 마세요’는 헝가리의 다뉴브 전설(루돌프와 베르타)에서 유래되었다. 아네모네의 꽃말도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되었고, 히아신스도 그리스 신화….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꽃말은 전부 서양에서 유래된 이야기다.




나는 우리 역사속에 등장했던 식물들, 꽃과 나무의 이야기를 알고 싶은데 !!!! 왜 때문에, 죄다, 모조리, 전부 !!!! 과반 이상은 그리스/로마신화 이야기요, 나머지는 그외 서양 전설이란 말인가. 정녕 우리 역사 속 식물 이야기는 없는걸까? 하고 슬퍼하던 차에,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냉큼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책 초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꽃 문화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보니, 대부분이 외국의 신화, 설화, 꽃말 등이었다. 이것은 외국의 꽃 문화가 더 좋아서인가, 우리의 꽃 문화가 없어서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꽃 문화는 어떤 모습과 역사를 가졌을까.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꽃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꽃을 어떻게 활용하였을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특히 우리 고대 사회의 꽃 문화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p 009


원예학자인 저자조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저자는 많은 꽃말들이 전부 외국에서 유래된 이야기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고. 그래서 저자는 우리 역사속의 식물들 이야기를 발굴하기 시작했고, 그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동부여에서 물의 신으로 불리는 하백에게는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이라고 하는 세 딸이 있었다. 큰언니 이름으로 쓰인 버들꽃은 노란색으로 이른 봄에 피고, 둘째 이름으로 쓰인 원추리꽃은 주황빛이 도는 노란색으로 초 여름에 핀다. 막내 이름인 갈대꽃은 은색으로 가을에 핀다. 세 자매의 이름은 신기하게도 각 계절을 대표하는 우리나라 토종의 아름다운 꽃이기도 하다. p 031


고구려의 초대왕 주몽. 우리가 알고있는 주몽의 부모는 하늘신 해모수와,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다. 지금까지는 유화라는 이름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와보니, 유화라는 이름의 한자가 꽃이름이다. 버들 유(柳), 꽃 화(花). 한마디로 버들꽃이다. 유화의 언니들 훤화, 위화도 한자를 풀이해보면 꽃 이름이다. 원추리 훤(萱), 꽃 화(花)· 갈대 위(葦), 꽃 화(花). 즉 하백의 딸, 세자매의 이름 유화·훤화·위화는 각각 버들꽃, 원추리꽃, 갈대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를 비추어볼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수 많은 꽃과 나무들이 우리 역사속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화제를 남긴 여인들은 모두 귀하고 특별했다. 왕비이거나 공주이거나 왕의 총애를 받거나 신라 최고의 미인이었다. 이 여인들 이름은 가상 식물이나 특정 식물의 이름, 또는 그 식물의 꽃 이름과 같은 경우가 많았다. 특정 식물의 이름을 그대로 쓰거나, 꽃 화(花)자를 넣어 이름을 지은 것이다. p 048



역사속 등장인물들, 특히 여성들의 이름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주몽의 엄마인 유화를 비롯하여,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꽃과 나무의 이름을 가져다 쓴 경우가 많다. 고구려 유리명왕 부인 송씨부인의 ‘송’은 소나무 송(松)을 썼으며, 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의 부인 계화는 계수나무 계(桂), 꽃 화(花)를 써서 계수나무 꽃, 즉 ‘금목서’라는 이름을 가졌다. 진지왕과 사이에서 비형량을 낳은 도화부인 역시 복숭아 도(桃), 꽃 화(花)를 써서 ‘복사꽃’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우리에게는 진평왕의 셋째딸이자, 백제의 무왕 부인(서동부인)으로 알려진 선화공주는 착할 선(善), 꽃 화(花) 라는 ‘착한꽃’ 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 외에도 찾을라치면, 식물의 이름을 쓴 역사속 인물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우리가 알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을 뿐이다. 이처럼 우리 역사속에는 우리가 생각치 못했던 식물의 이름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심지어는 식물들과 관련된 이야기도 곳곳에서 등장한다.


박/석/김씨가 돌아가며 왕을 했던 신라 초기. 첫 ‘김’씨 왕조를 열게 한 왕이 바로 미추왕이다(물론 미추왕 사후 다시 석씨가 왕이 되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미추왕의 아들인 내물왕을 시작으로 신라의 왕은 ‘김’씨가 대물림한다). 이 미추왕이 묻혀있는 왕릉이, 경주 대릉원에 있는 ‘미추왕릉’이다.



경주에 있는 수많은 신라 왕릉의 대다수는 추정의 형식으로, ‘ㅇㅇ왕릉’이라고 명명되었지만 미추왕릉은 예외다. 그 옛날부터 계속 이 무덤은 미추왕릉이라고 구전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왕릉 주인이 구전되어 내려온 이유 중 하나가, 다름아닌 미추왕 호국신화에 기인한다


신라 13대 미추왕의 무덤은 대릉 또는 죽장릉(竹長:긴 대나무)이라고 불렀다. 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이 공격해왔는데 신라는 맞설 힘이 부족했다. 그때 알수 없는 병사들이 나타나서 신라의 군사를 도왔는데 모두 귀에 댓잎을 꽃고 있었다. 적이 물러간 후에 그 죽엽군들은 사라졌고, 댓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있었다. 이때부터 이 능을 댓잎이 쌓여 있다 하여 죽현릉(竹現:대나무가 나타난)이라고 불렀다. p 078


이 호국 신화에 등장하는 미추왕의 병사들은 귀에 대나무잎을 꽂았다고 하는데, 이 신화로 인해 미추왕릉은 ‘죽장릉/죽현릉’ 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이와 비슷한 시기 고구려에서도 식물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심지어 이 일화에서 나온  한 단어는, 지금까지도 계속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바로 ‘쑥대밭’에 관한 일화다.


고구려 동천왕 20년에 왕이 중국을 적대시하자 신하 득례는 “장차 이 땅에 봉호(쑥대)가 날 것”이라 말하고 굶어 죽었다. 쑥은 우리가 즐겨 먹는 계절 음식으로 땅속줄기에서는 새싹이 많이 나고 땅 위에 올라온 싹은 자라는 속도가 빠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쑥줄기, 곧 쑥대가 나면 다른 농작물이 자랄 수 없는 쓸모 없는 밭이 되는데, 이런 밭을 쑥대밭이라고 한다. p 104


우리는 삼국지에서 비롯된 사자성어(고사성어)는 많이 알고 있지만, 이상하리만치 ‘쑥대밭’ 처럼 우리 역사에서 비롯된 단어는 잘 알지 못한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향유하는 동안, 정작 우리 문화를 등한시한 것이다. 꽃말도 당연히 서양의 신화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는데, 누굴 탓할까. 그저 이런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풀이나 나무 등을 용기에 심어서 기르는 것을 분화나 용기재배라고 한다. 용기재배는 절화와 함꼐 화훼산업과 생활원예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직사각형이나 원형 또는 연꽃 모양의 돌 용기에서 연꽃과 창포를 수경재배하였다. 절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떄 원형이나 직사각형의 석조와 석련지에 연꽃을 심어서 절 주변을 장식하였고, 백제 관사에서는 원형의 돌 용기에 창포를 심어 건물 주변을 장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p 148


신라 사람들의 허리띠에는 정사각형의 작은 용기에 심겨있는 소나무 그림이 있다. 이로보아 삼국시대에는 소나무도 용기재배를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p 153


분재 또는 화분등의 용기에서 식물을 키우는 문화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속에서도 이런 분재나 용기로 식물을 키웠다는 사실은 유물이나, 옛 기록에서 뜨문뜨문 나타난다. 심지어 고려시대에 간행된 문집이나, 병풍 같은 문화재를 보면 당대에 소나무나 매화나무등의 분재가 활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흠흠흠, 다시 역사속의 신기한 식물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과거에 영주 여행시, 부석사에서 애지중지 보호되고 있는 한 나무를 보았다. ‘선비화’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고 본인의 지팡이를 땅에 푹 꽂았는데, 그 지팡이가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거 참, 뭐라고해야할까. 식물의 ‘ㅅ’도 보르던 식초보시철, 나는 이 이야기를 그저 전설에 치부했다. 


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인도로 떠났다. 처마 밑에 지팡이를 꽂으면서, “내가 떠나면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날 것이다. 그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라”고 하였다.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지팡이에서 싹이 났다. p 180


식집사가 된 지금, 나는 이 이야기가 어쩌면 전설이 아닌 사실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무 번식 기법 중에는 삽목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꺾꽂이, 물꽂이 기타등이 있는데, 나 역시도 매화나무가지를 잘라서 물꽂이를 해서 성공했다. 물론 이렇게 삽목을 할 때는, 환경등 필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의상의 지팡이는 실제로 갈잎 떨기나무인 골담초 줄기이며, 나무 줄기를 자른 시기는 눈이 자발적으로 휴면을 하는 가을에서 강제휴면을 하는 늦겨울 사이이고, 살아 있는 눈이 붙어 있는 지팡이를 꽂은 시기는 이른 봄 지팡이에서 싹이 나기 전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팡이를 꽂은 장소는 처마 밑이라 하였으니 직사광선이 없는 반그늘로, 상대습도가 높고, 토양 수분이 충분하고, 토질도 적당하여 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었으리라 본다. p  182


결과적으로 의상대사가 쓰던 지팡이가 막 추위가 와서 잎눈이 휴면하는 시기에 나무에서 뚝 끊어서 쓰던 지팡이였다고 가정하면, 그 지팡이를 얼마 안 쓰고 봄이 올 즈음에 때마침 직광이 들지 않던 처마 밑 흙에 푹 꽂았기 때문에, 이 지팡이는 흙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의상대사가 삽목의 원리를 알고, 하필 그런 환경에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의상대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삽목을 시도해서 성공한 사람으로 기록에 남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따지면, 부석사에 있는 저 나무는 진짜로 의상대사가 쓰던 지팡이가 된다. 나같이 아둔한 중생은 그것도 모르고, 의상대사를 의심하다니, 천벌받을 뻔 했다. 아휴..


의상대사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삽목을 성공한 사람이라면, 위라나라 최로의 원예학자로는 이두문자로 유명한 신라의 설총을 꼽을 수 있다. 그 근거로는 설총이 지은 설화 「화왕계」를 들 수 있다.


네이버에서 검색한 「화왕계」 일부를 발췌했다.


"이 몸은 설백(雪白)의 모래사장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라났습니다. 

봄비가 내리면 목욕하여 몸의 먼지를 씻고, 

상쾌하고 맑은 바람 속에 유유자적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름은 장미(薔薇)라 하옵니다. 

전하의 높으신 덕을 듣자옵고, 

꽃다운 침소에 그윽한 향기를 더하여 모시고자 찾아왔습니다. 

전하께서 이 몸을 받아주실는지요?"



자기를 장미로 소개한 이 꽃은, 우리가 아는 장미가 아니라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당화로 추청한다.


설총은 이두를 집대성한 신라 10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무열왕 때 원효법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화왕계」에는 모란, 장미(해당화), 할미꽃의 생태, 형태, 생장습성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점이 놀랍다. 이렇게 보면, 설총은 식물에 대한 이해와 관찰력이 뛰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학자 또는 식물학자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p 197


모란, 해당화, 할미꽃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려운 식물의 습성을 자세히 적어가며 설화를 지어, 신문왕에게 올렸던 설총. 그는 유학자이기 이전에 식물학자였다.


이토록 우리 역사에는 식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이 있었다. 왜 우리 이야기에는 눈을 감고, 외국의 이야기에만 귀를 쫑긋했었는지. 식집사가 된 지금, 이제라도 우리 역사 속 식물 이야기를 인지하고, 주의깊게 보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식물 책은 뭘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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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7-14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설마 지팡이가 나무가 되겠어? 했는데 실제로 묘목을 보니 진짜 지팡이같이 생겼더라고요 ㅎㅎㅎ 이 책 정말 재미있겠어요 !!! 저는 세계사를 바꾼 17가지 꽃이야기 지금 읽고 있어요 ㅎㅎ

피로 2021-07-16 14:58   좋아요 1 | URL
오옷 재밌어보이는 책을 읽고 계시는군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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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읽은 책들을 떠올려보니, 묘하게 유퀴즈에 출연한 저자들의 책이 많다. 이거참, 의도한건 아닌데. 허허허. 그런 의미에서 오늘 리뷰하는 이 책도 유퀴즈에 출연했던, 특수청소부 김완님이 쓰신 (자전적인?) 에세이다. 이러다가 내가 책을 선별하는 조건에 ‘유퀴즈’까지 포함될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인 뭐지...........? 




이 책의 제목은 특수청소부인 저자의 일을 그대로 보여준다. 제목 자체가 「죽은 자의 집 청소」이기 때문이다. 유퀴즈에서 저자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 신기하긴 했다.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특수청소부,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서. 그러다 저자의 소개글을 보고 조금은 이해가 갔다. 



저자는 몇년 간 일본에 거주하며, 특수청소업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가 일본에 거주했을 때 동일본 대지진을 마주하고, 수 많은 죽음을 보았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일본은 우리와 달리, ‘죽음’에 대한 준비가 철저하다는 거다. 그 나라는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노년층이 증가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하였다. 가파르게 노년층이 증가하며 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로써는, 지금의 일본의 모습이 미래의 우리 모습이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뭐, 그러한 이유로 일본은 고독사(특히 노년층의 고독사)에 대한 처리가 이미 시스템화 되어있고,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특수청소도 우리보다 일반화되어있으며, 디지털 장의사라던가, 의도하지 않은 죽음에 대한 대처가 우리보다 앞서있다. 이렇게 죽음을 정리하는 일본의 모습을 수년간 보았던 저자가 한국에 돌아와서 택한 직업이 바로 죽은자의 집을 청소하는 특수청소업이다. 그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에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년간 일본에 있으면서, 죽음에 대한 처리를 하는 일본의 모습이 저자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자명하다.



건물 청소를 하는 이가 전하는 그녀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다. 그 착한 여인은 어쩌면 스스로에게는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죽인 사람이 되어 생을 마쳤다. 자신을 죽일 도구마저 끝내 분리해서 버린 그 착하고 바른 심성을 왜 자기 자신에겐 돌려주지 못했을까? 왜 자신에게만은 친절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오히려 그 바른 마음이 날카로운 바늘이자 강박이 되어 그녀를 부단히 찔러 온 것은 아닐까? p 027


저자가 청소를 하는 곳은 대게, 흔히들 말하는 호상은 아닌 곳이다. 뉴스에서 종종 보는 ‘고독사’ 하신 분들, 혹은 너무 힘들어서 홀로 생을 끊으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위 여성도 그랬다. 주위 사람들에겐 항상 착하고 바른 사람이었던 사람이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착하지 못했던 사람. 남에게는 폐끼치기 싫어하는 그 사람은 본인 스스로를 죽이는 와중에도, 집안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기를 죽이는 도구마저도 분리수거를 했다.



자기 집을 치울, 이름모를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죽이는 도구마저 분리수거할 정도의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모진 마음을 품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상황에 쳐했던건지를 생각하면, 괜시리 마음이 씁쓸해진다.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 때때로 부유한 자가 혼자 살다가 자살하는 일도 있지만, 자살을 고독사의 범주에 포함하는 문제는 세계적인 인류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니 일단 논외로 하자. 고급 빌라나 호화주택에 고가의 세간을 남긴 채, 이른바 금은보화에 둘러싸인 채 뒤늦게 발견된 고독사는 본적이 없다. p 041



그가 살던 202호 현관문에는 ‘전기공급 제한 예정알림’이라는 굵은 고딕체의 제목이 붙은 노란딱지가 붙어 있다. 문구 전체가 인쇄된 다른 예고장과 달리 사인펜으로 직접 쓴 예정일자가 눈에 띈다. 아마도 악성 체납요금 문제를 직접 처리할 담당자가 배정되고, 그가 집까지 찾아와서 딱지를 붙이고 손수 날짜를 써놓고 간것이리라. 전기공급 중단 예정일과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이 겹친다. p 046


이 챕터를 읽고 죽음에도 빈부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지금까지 뉴스에 보도된 고독사 관련 기사를 보면, 대부분이 가난한 이였다. 챙겨줄 사람 하나 없는,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소액으로 겨우 먹고 사는, 아픈 몸을 이끌고 폐지를 수거하러 다니시는 그런 분들.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온다는데, 찾아오는 방식에서조차도 빈부격차가 느껴진다는 사실이 치가떨렸다. 살아서도 돈때문에 힘들었는데, 죽으면서까지도 돈때문에 힘들어야한다니, 맨날 ‘지원’한다고 말하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 맞는건가?



우리나라에는 분명 홀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지원해주는 행정부처가 있는데, 그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까지 뉴스에 나온 사건들을 보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악순환되고 있으니까. 일단 누가봐도 지원을 받아야하는 사람들인데, 지자체에선 이래서 안된다, 저래서 안된다, 뭔놈의 안된다고 하는 이유가 쌓이고 쌓였다. 이런 이유를 뚫고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그 금액이 하도 소액이라서 집세, 각종 공과금 생각하면, 하루에 1끼를 먹는게 고작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본 뉴스 및 시사보도 방송에서는 그랬다. 



6월마다 돌아오는 6월 25일은 법적으로 지정된 한국전쟁 기념일이다. 법적으로 기념일을 지정할정도로,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의 의미는 크다. 이렇게 기념일로 지정한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받쳤던, 아직까지 생존한 국가유공자들이 우리 곁에 있다. 국가유공자기 때문에 당연히 나라에서 지원해줄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나라가  지급하는 유공자 연금은 진짜 쥐꼬리만해서 생활비는 커녕 병원치료비로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국가유공자들의 연세를 생각했을때, 대부분이 건강이 좋지않은 노년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심지어 이 국가유공자 연금을 받고 있다고 해서, 다른 기초연금은 중복지급이 안된다고 하는게 바로 우리나라다. 과거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쳤던 노인들에게도 이런 대우를 하는데, 이런 훈장조차 없는 그저 길에서 폐지를 추워야만 하루 한끼 꼬박 먹을 수 있는 노인들은 어떨까. 



죽음의 빈부격차를 만든건 결국 나라를 꾸려간다는 위정자들이다. 그 위정자들이 비정한 행정가들이고, 그들이 만든게 오늘날의 비정한도시다.



행정부처 직원들이 탁상행정만 하지않고, 두발로 뛰며 지원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집을 주기적으로, 아니 한번이라도 방문을 했다면? 국가유공자들의 삶을 한번이라도 두 눈으로 봤다면? 그들이 정말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사회가 이렇게까지 비정해지지는 않았을거다. 그랬다면 ‘전기공급 제한’을 알려주로 한전 사람이 집 앞을 찾아왔을때, 그 집앞에 우편물이 오랫동안 쌓여있는 것에 의문을 품고 신고를 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의 빈부격차가 나타나야 사회가 변할까? 하긴, 아동학대 사건도 많은 아이들이 죽고나서야, 뒤늦게 이런저런 법안 만들기에 급급한 대한민국인데, 뭐 얼마나 더 바라겠는가. 겉으론 아닌척하면서 뒤로는 죽음의 빈부격차를 만든 나라, 참 씁쓸하다.



휴대전화를 꺼내 몇 번이나 메시지를 다시 읽어본다. 나쁜 시키, 나쁜 시키. 그래,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인지도 모른다. 오늘 당신을 속였고, 그 바람에 당신의 계획을 아주 보기 좋게 망쳐놓았다. 스스로도 잘 모를 이야기를 남발했으며 당신이 자유로울 권리를 공권력을 이용해서 침해했다. 그런 사람을 나쁜시키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온당한 일일 것이다. 고백하건대, 당신의 전화번호를 내 휴대전화에 고이 저장해두었다. 당신이 나에게 또다시 전화를 걸어오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때도 내가 당신을 막기로 할지, 과연 또 한번 당신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탁하건대, 언젠가는 내가 당신의 자살을 막은 것을 용서해주면 좋겠다. 나는 그 순간 살아야했고, 당신을 살려야만 내가 계속 살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p 184



비정한 사회가 되면서 타인의 일에 개입하는 일이 극히 드물어진 지금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비정해진 사회이지만, 그럼에도 희망이 보인다. 저자처럼 죽으려하던 누군가를 살리고, 죽어가는 누군가를 살리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덕분에 비정하기만 한 사회에도 아주 조금이지만, 가슴을 따뜻하게하는 온기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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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7-09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족음에도 빈부격차가 있다는 말 정말 공감합니다. 쓸쓸하고 외로운 가난한 죽음 ㅠㅠ 저도 참 맘 아프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피로 2021-07-14 07:50   좋아요 1 | URL
정말 저 구절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ㅜㅜ..

초딩 2021-08-06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로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이하라 2021-08-06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전국일주 가이드북 - 대한민국 전국여행 백과사전!, 2021-2022 최신 개정판
유철상 외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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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출판에서 매년 출간하는 #전국일주가이드북 2021년 개정판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한 지역구나, 같은 도로상에 있는 인접 지역들을 묶어서 여행을 다니는 나로써는, 여행계획을 짤 때 이 책에 꽤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 이건 과거형이구나! 꽤 많은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예정이다.


아, 그나저나 이 책의 리뷰는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앞서 19년 개정판, 20년 개정판을 리뷰를 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 이후에도, 이 책에 도움을 받아 많은 여행지를 갔었지만, 같은 포맷으로 리뷰를 하자니, 내 마음이 스크래치(!!!!). 그래서 고민을 해봤다. 어떻게 써야하나. 그러면서 또 나는 이번 여름휴가를 또 어디로 가야하나.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물어뜯고 하다가, 생각의 종착지에 다다랐으니, 바로 우리나라 명실상부 여름휴가 관광지! 양대바다!! “동해안vs서해안”!!!!!!!!!!!!!


내 국내여행의 최종 목표는 전국일주다. 여행을 갔다오면, 백지도를 펼치고 다녀온 여행지를 색칠하는 것으로 여행을 끝낸다. 때마침! 난 올해를 기점으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충청도 서해안 권역 도장깨기에 성공했고, 동해안 7번국도가 지나가는 강원도 동해안 권역 도장깨기도 성공했다. 물론 서해안이 충청도만 있는게 아니고, 동해안이 강원도만 있는 건 아니지만(엄밀히 따지면 아주아주 어렸을때, 초/중딩 시절 엄마아빠과 해안도로를 달리며 서/남/동해안을 다 깨부셨다는건 안비밀)! 고로 이 책을 바탕으로, “동해안vs서해안” 여행일주를 경험에 미루어 리뷰해도 좋을 것 같다는 뭐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거기다 곧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여름휴가철이다. 여름휴가의 백미는 바다가 아니겠는가! 옛날같으면 많은 사람들이 해외에 있는 바다를 찾아 떠나갔겠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해외여행은 꿈도 못꾸는 상황이니까. 우리는 우리 땅에 있는 아름다운 바다를 찾아나서야만 한다. 더군다나 우리는 3면이 바다로 둘러쌓여있는, 반도에 살고 있으니까!

가깝게는 수도권에서 만날 수 있는 서해 인천 앞 바다, 시흥/화성 앞 바다가 있고, 2시간 이내에 만날 수 있는 동해바다도 있으며, 멀게는 6시간은 족히 가야 만날 수 있는 남해 바다도 있다. 고로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바다를 보러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거 !!!!!

그래서 오늘의 리뷰 주제는 “동해안vs서해안” 인 것이다...ㅋㅋㅋㅋㅋㅋㅋ 남해는 너무 멀어서, 자주 못가봤으니까 패스 T_T


파도소리를 따라가는 동해안 여행

동해안 7번 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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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속초-양양-강릉-동해-삼척-울진-영덕-포항-경주-울산-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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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에서 동해안 7번국도로 가는 아주 가깝고 보편적인 방법은 두가지다. 영동고속도를 타고 강릉에서 내리는 것과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타고 양양에서 내리는 방법이다. 그래서 여름휴가철에 동해안 7번 국도상에 있는 지역중 고속도로의 끝지점과 양양, 강릉은 아주 박터진다. 여기서 알 수 있는점! 동해안 7번국도를 타고 조금만 위로 가거나, 조금만 아래로 내려와도 조금더 한산하고,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

나는 동해안 7번국도를 타며 여행을 하면서 대부분의 도시를 다 찍고 왔다. 이 도로 선상에서 못가본 도시는 딱 3개(영덕, 포항, 울산). 고로 이 3개의 도시는 제외한다. 못가봤으니, 평가를 할 수가 없잖아...ㅜㅜ...


매년 휴가철마다 동해안과 속초 일대는 로망의 대상이다. 푸른 바다는 한가로운 피서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고, 7번 국도와 해안도로는 자동차로 드라이브하기에 그만이다. 설악산의 신비로운 풍광을 멀리서 감상할 수 있고 동해안의 크고 작은 포구에서는 감칠맛 나는 싱싱한 회를 맛볼 수도 있다. 그야말로 바다의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이다. p 096



동해안 7번국도 시작점인 강원도 고성은 유독 관광객이 적다. 아마 북한과 접경지역이라는 요소가 한몫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난 오히려 북한과 접경지역이라는 게 흥미로운 관광요소가 아닐까 싶다. 접경지역이라면 으레 있는 통일전망대가 고성에도 있는데, 지금껏 내가 봐왔던 통일전망대 중에선, 고성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제일 멋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금강산이 보이잖아! 북한에만 있을거라 생각한 금강산이, 바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와 이건 직접 가봐야 알 수 있다.

통일전망대에서 조금 대려오면 화진포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로도 이용된 곳인데, 뭐 명작이라고 해봐야 워낙 오래된 드라마니, 기억하는 사람들은 옛날사람(...)인 정도. 한마디로 동해안 해수욕장인대도 불구하고 화진포 해수욕장은 꽤 한산한 편에 속한다. 이 화진포 해수욕장 인근에는 우리 현대사에서 절대로 잊으면 안되는 그들의 별장도 있다.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 김일성 별장이 바로 그곳이다.

고성에서 7번국도를 따라 내려오면 속초가 나온다. 속초는 뭐니뭐니해도 설악산! 특히나 난 설악산에 자리한 한 호텔에 숙박도 했었는데, 와 피톤치드가 우와. 설악산 등반을 할 자신이 없으면, 차로 올라갈 수 있는 곳 만큼이라도 가보는 걸 추천한다.

속초에서 7번국도를 따라 내려오면 이번엔 양양이다. 무엇보다 양양은 고속도로 버프를 받아 언제나 사시사철 사람이 많다. 근데 또 사람이 없는 곳은, 계속 사람이 없다. 예컨데 언제나 유명한 낙산사와 낙산사 해수욕장은 사시사철 사람이 많고, 하조대 해수욕장이나 남대천 생태관광지는 그닥 사람이 없다. 고로 양양에서 조금이라도 여유로운 해수욕을 하고 싶다면 무조건 하조대 해수욕장으로!

자, 또 양양에서 7번국도를 타고 내려오자. 이번엔 또다른 고속도로 버프를 받는 강릉에 도착한다. 강릉도 정말 어딜가나 박터진다. 문제는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만큼 볼거리도 많다. 여유로운 여행을 하려면 강릉을 포기해야하는데, 그러기엔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엄청나게 고민이 되는 도시인것이다. 정동진역&모래시계공원, 경포대&경포해변, 영진해변, 커피거리,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나열하면 입만 아프다. 그래도 그나마 조금 사색하며 해안길을 걷고 싶다면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추천한다.

강릉에서 7번국도를 타고 내려오면 이번엔 동해다. 바다를 뜻하는 동해 아니고, 지자체인 ‘동해시’다. 강원도에선 제일 작은 땅덩어리를 가진 지자체다. 땅덩어리가 작다보니 해안선도 당연히 작고, 관광객들의 시야에서도 조금은 벗어나 있는 곳이다. 동해시를 간다면 볼만한게 그나마 촛대바위와 천곡동굴 정도랄까? 어쩌면 7번 국도 드라이브를 하면서 그냥 스쳐지나가는 도시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허를 찌르자. 남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곳은 그만큼 여유롭게 바다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 바다보면서 대게도 먹으면 1석 2조!

동해시에서 7번국도를 타고 또 아래로 내려가면, 이번엔 삼척이다. 삼척은 땅덩어리도 넓다. 거기다 여름휴가 여행 뿐만 아니라, 인문학 여행도 가능한 곳이 바로 삼척이다. 다만 강릉은 관광지간 간격이 좁아서, 여기저기 바글바글하다면, 삼척은 관광지간 간격이 넓어서 타이밍만 잘 잡으면 여유로운 여행이 가능하다. 내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는 바다를 품고 있는 해신당 공원! 이유불문, 여기는 진짜 무조건 백프로 가봐야한다.

인문학 여행으로 눈길을 돌리자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이 이곳에 있다. 뿐만 아니라 고대국가 시절, 삼척이 ‘실직국’이었던 시절의 흔적도 ‘실직군왕릉’이라는 이름안에 남아있으며, 조선왕조의 뿌리인 준경묘와 영경묘가 바로 삼척에 있다. 진짜 내 개인적으로 7번국도 여행을 한다면, 삼척을 1순위로 추천하고 싶은 바다.

삼척에서 7번국도를 타고 내려오면 이번엔 경상도 울진이다. 울진에 오면 모름지기 후포항에 가서 울진 대게를 먹어야....흠흠. 울진은에는 관동제일루인 망양정이 있는데, 망양정에서 내려다보는 망양해수욕장 풍광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거기다 한 여름에 에어컨을 튼 것 마냥 시원한, 천연 석회암동굴인 성류굴도 있다. 여기서! 역사덕후라면 놓치면 안될 것이, 봉평 신라비가 바로 울진에 있다. 역덕이라면 꼭 봐야해!!!

중간 건너뛰기하고 7번국도를 따라 내려오다보면 경주와 부산이 나온다. 경주는 천년고도라고도 불리우는, 땅 밑에 파면 문화재가 나온다는 역사의 도시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경주만 3박 4일을 갔었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모든 문화재, 관광지를 다 보고 오지 못하였다T_T. 신라의 역사를 느끼고자 한다면 무조건 경주다. 거기다 (피장자가 밝혀진)유일무이한 수중릉인 문무대왕릉이 바로 경주 앞 바다에 있다. 진짜 이건 꼭 봐야해!!!

부산은...부산은... 고작 반나절만 있었기에, 그나마도 시내쪽에만 있었고, 바닷가는 대마도행 배를 타기 위해서를 빼고는, 나가보질 못해서 뭐라 말을 못하겠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거라면, 부산은 시내에도 사람이 참 바글바글했고, 도로가 도로가 와, 도로가 왜이런미닛? 그리고 음식이 내 잎에 안맞았다. 그럼에도 사람이 없는 부산 바닷가를 말한다면 가덕도 외양포마을 정도랄까? 뭐 그래도 언제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부산은 다시 가볼 생각이다.



찬혜의 아름다움을 만끽하자!

15번 서해안 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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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태안-서산-홍성-보령-서천-군산-김제

-부안-고창-영광-함평-무안-목포-영암-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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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서해안을 보고 똥물이라고 그러지만, 나 역시도 가끔 똥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렁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해마지않는 바다는 역시 서해안이다. 내 생활권이 서해안이라 당연한건가 싶기도 하고! 그도 그럴것이 나는 서해를 보며 출근하고, 서해를 보며 퇴근한다. 때에 따라선 물이 꽉 들어차있을 때도 있고, 물이 빠져 뻘이 있을때도 있다. 무엇보다 내가사는 도시 시흥은, 서해를 끼고 있다. 아이러뷰 서해안♡

개인적으로 서해안고속도로 선상에 있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유일무이 시흥(생활권버프ㅋ) 갯골생태공원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오이도 선사유적공원, 대부도 대부해솔길 1코스를 추천한다. 요즘 SNS명소로 뜨고있는 이국적인 서해를 조망할 수 있는 시흥 배곧 한울공원, 시흥 거북섬 웨이브파크도 한창 뜨고 있기도!

자 그럼 이제 책속으로!


서해안고속도로는 우리나라에서 경부고속도로 다음으로 긴 고속도로다. 1980년부터 서해안고속도로의 건설은 논의되었지만 구체화된 것은 1987년부터다. 서해안 지역의 자원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한 이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태안, 서산, 변산반도 등의 아름다운 풍광을 조금 더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특히 태안 부근을 서울에서 2시간 안팎이면 갈 수 있게 되어 신년이나 연말이면 낙조나 일출, 일몰 등을 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찾는다. p 240


본격적으로 서해바다를 끼고있다고 생각되는 지역은 충남 당진부터다. 보통 서해는 일몰이 아름다운 곳으로 생각되는데, 당진에는 유독 일출과 일몰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바닷가가 있으니, 바로 왜목마을이다. 거기다 당진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우리나라 전통주, 면천 두견주를 만드는 곳인데, 해당 양조장에선 두견주를 일반가보다 더 저렴하게 살 수도 있다.

당진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면 서산/태안을 만난다. 나는 서산과 태안을 항시 묶어서 여행을 다녔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서산과 태안을 묶어서 여행다니라고 권한다. 서산에는 바닷길이 열려야만 들어갈 수 있는 암자, 간월암이 있다. 만조일 때는 바다위에 둥둥 떠있는 바위섬위에 있는 간월암은, 오로지 물이 빠졌을 때만 들어갈 수 있다. 서산엔 특히 봄에 가면 아름다운 장소가 있다. 수선화가 만발한 유기방 가옥과 겹벚꽃이 아름다운 개심사다. 이 두곳은 무조건 봄!! 봄에 가야 좋다. 서산에서 조금더 바닷가쪽으로 내려가면 태안이 나오는데, 태안 바다는 또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특히 바다를 끼고 있는 수목원, 천리포 수목원은 매 계절마다 색다른 매력을 뽐낸다. 근처에 있는 천리포, 만리포 해수욕장은 사람들이 꽤 많지만, 조금 더 가면 나오는 구례포 해수욕장은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여유롭게 바다를 즐길 수 있다.

서산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홍성, 보령, 서천을 만난다. 서천까지가 서해를 접하는 충청남도의 끝이다. 다만 홍성에선 바다를 조망하는 관광지가 있다기 보단, 내륙쪽에서 돌아보는 인문학적 여행을 할 만한 유적지가 많다. 홍주 의사총, 홍주성, 흥선대원군 척화비, 성삼문 유허비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보령과 서천은 아름다운 서해를 조망할 수 있는 관광지가 있다. 대표적인 곳이 보령 죽도 상화원과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이다. 이 두 곳은 드넓은 모래사장이 있는 장소는 아니지만,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상화원과 동백나무 숲 곳곳을 산책할 수 있다.

서천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면 이제는 전라북도 군산이다. 군산은 자타공인 근대문화유산 거리로 유명한 곳이다. 심지어 근대문화유산들 대부분이 지척에 모여있어서 뚜벅이 여행자들에게도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차가 있다면(!) 근대문화유산거리를 벗어나, 신들의 섬 고군산군도로 가보길 추천한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해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했던 곳인데, 바다를 아우르는 대교가 건설되면서, 육로로 접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군산에서 더 내려오면 김제, 부안이 나오지만, 제대로 가본적이 없어서 패스하고(!!) 바로 고창영광이다. 개인적으로 내 외갓집이 영광이다보니 영광 근교로는 꽤 다녀봤는데, 고창은 뭐니뭐니해도 고인돌이다. 무려 유네스코에 지정된 자랑스런 우리 문화재니까. 근데 영광에도 아는 사람만 아는 고인돌 군락지가 있다ㅋㅋㅋ. 아참참 고창에 가면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무장읍성도 한번 찍어주고, TV예능 삼시세끼에서도 나왔던 고창읍성 한번 찍어주면 더 좋다. 영광에 간다면 법성포 영광굴비 한번 찍고, 근처에 있는 백제시대에 불교가 최초로 넘어온 백제불교최초도래지, 마라난타사를 가보면 좋다. 한국 사찰에선 보기 드문 모습이, 마라난타사에서는 볼 수 있다. 꼭 인도에 온 거 같은 기분이랄까?

자, 영광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내가 가보지 못한 함평, 무안은 패스하고 바로 목포로 도착! 목포에도 우리 외가친척들이 있기 때문에 자주 들렀던 곳이다. 목포도 군산 만큼이나 근대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다. 다만, 군산처럼 대대적으로 정비를 하진 않는 것 같아서 언제 가도 실망만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아는 사람 눈에는 다 보이니까! 특히 목포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유달산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 손에 많은 곳이 변해버렸던 산이기도 하다. 유달산 곳곳에는 일제가 만든 불상과 탑들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유실되었지만, 아직도 일등봉 밑에는 일제가 조각한 부동명왕상이 남아있고, 바위 곳곳에 탑을 세웠던 흔적도 남아있다. 뿐만아니라, 노적봉 주차장 앞 계단은 일제가 신사참배를 위해 깔아놓은 돌계단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내 개인적으로는 일제강점기 관련 수 많은 유적지를 봐왔지만, 목포의 유달산만큼 아픈손가락이 또 있을까 싶다.


우와, 동해안 7번국도와 서해안고속도로 선상에 있는 여행지에 대해서만 섰는데도 이렇게 많다. 각 고속도로에 대해 전부 쓰고자 했다면, 다 쓸 수도 있을것 같기는 한데,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니까 ㅠㅠㅠㅠ..


아참참, 이 책에서 눈 여겨봐야할 챕터는 더 있다.

요즘 여행 트렌드를 주도하는건 다름아닌 SNS다. 하지만 일반적인 여행책에는 SNS 핫플레이스가 잘 나오지 않는다. 예컨데 어떤 카페에 가면 감성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어떤 식당에 가면 생전 처음보는 디자인의 음식이 나오는지 등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2021년 개정판 #전국일주가이드북 은 바로 이 SNS핫플레이스 정보를 수집하여 각 지역별 챕터에 실었다.

인★그램에 갬성사진 하나 올리려면, 지역별 SNS 핫플레이스 하나 쯤은 가봐야 하는게 요즘 여행!


이 외에 드라이브 코스나, 계절별 유명 여행지, 입장료가 없는 여행지는 기존 구판에서 개정되어 수록되었다. 하지만 유독 내 마음에 드는 챕터가 있었으니..


바로 요거 !!!! 우리나라 세계문화유산 챕터를 별도로 정리한것!!!!!!!!!!!!!!! 크흡 ㅠㅠ 역사더쿠로써 무한 갬동갬동 T_T

모름지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내가 발을 디디고 사는 이 땅에 세계문화유산이 어떤것이 있는지는 알아줘야 인지상정!


이런 여행책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면, 다가올 여름휴가 여행계획 짜기도 식은 죽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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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7-05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것만으로도 여행 가는 느낌. 피로님의 씐남이 느껴집니다 ~~ 아 저도 여행가고 싶어요. 못 간지 ㅠㅠ

피로 2021-07-08 07:00   좋아요 1 | URL
저도 맘 편히 여행가고 싶네요 ㅠㅠ!
코로나가 뭔지 ㅜㅜ
 
제주 동쪽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8
한진오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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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도슨트 신간이 나왔다. 그 이름하야 #제주동쪽 이야기. 지금까지 출간된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는 보통 도시 하나당 한 권이었다. 제주 같은 경우는 제주시, 서귀포시로 나뉘어있는지라 당연히 그렇게 책이 나올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달까? 이 책을 읽고보니, 제주사람들은 옛날부터 동/서쪽으로 나눠살았고, 동/서쪽으로 생활방식도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 이런 관습을 무시하고 남, 북으로 제주시/서귀포시로 나눈 행정체계란!!!! 으이구!!!!




흠흠.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는 집에 세 권을(춘천, 신안, 통영편) 미루어볼때, 제주동쪽편도 인문/지리/역사가 총망라된 인문지리서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무엇보다 내 개인적인 여행 취향이 역사 여행(인문학 여행)인 지라, 이 책에 대해 많은 기대도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중점으로 생각했던 부분은 이거다. 


“얼마나 많은 제주 역사가 담겨있는지, 이 책속에 내가 모르는 제주의 역사는 어느정도인지, 제주의 아픈 근대 역사를 얼마나 담고있는지.”



생각보다 많은 제주 여행서적은,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만 노래할뿐, 제주의 역사에 대해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제주의 역사를 얼마나 담고 있는지가 제일 궁금했고,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내 걱정은 한낱 외부인의 기우였을뿐! 제주에서 나고자란 저자는, 제주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책에 담고자 노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일러 1만 8천 신들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유별하게 왕성한 무속신앙의 배경에는 척발한 자연환경과 정치적 변방이라는 또렷한 이유가 있다. 뭍사람들은 제주를 돌, 바람, 여자가 많은 삼다도라고 부르지만, 제주 사람들은 풍재, 수재, 한재의 세 가지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는 삼재도라고 불러왔다. p 024



예컨데 제주가 신들의 고향이라는 점도 책의 첫머리서부터 짚고 넘어갔다. 실제로 한반도에 남아있는 신화의 고향은 대부분 제주도다. 본토는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속신앙이 무참히 밟혀나갔지만, 바다건너에 있던 제주도는 본토와 떨어진 만큼 그네들의 민속신앙을 고이 간직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설문대할망, 소별왕과 대별왕, 금백조, 소로소천국, 궤네깃또 같은 제주 신들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래될 수 있었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니다. 제주 신화가 지금까지 지켜져왔던 이면에는, 제주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자연재해가 있었다. 본토와 떨어진 섬이다보니, 재해가 발생해도 정부의 구휼이나 지원이 쉽지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늘신이 노하지 않기를, 바다신이 노하지 않기를… 이런 식으로 본인들이 믿고 있는 자연신, 마을신, 성황신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방법밖에 없었던 거다. 



지금까지 제주신화가 지켜질 수 있었던 건, 무사안녕을 바라던 제주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 덕분이었다.




성산을 비롯한 제주는 발길 닿는 모든 곳이 아름답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제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제주 토박이들은 감탄 속에 한탄을 섞어 내뱉는다. 저 높은 한라산은 긴긴 한숨이 쌓이고 쌓인 것이고, 드넓은 제주 바다는 끝도 없이 흘러넘친 피눈물이 응어리진 것이기 때문이다. 기나긴 세월 변방의 보잘것없는 섬이라는 이유로 같은 탄압과 차별을 받아온 수난의 역사가 풍광의 아름다움 너머에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p 030


제주가 ‘신들의 고향’이라 말하니 묘하게 신비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그 신비함이 느껴지는 것이 무색하게, 제주의 아픔을 알게 된다. 발길 닿는 모든 곳에서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제주지만, 제주 섬 전역에는 엄청난 아픔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에는 몽고에 항쟁한다는 미명하에 삼별초군이 제주까지 밀고들어와, 제주는 원치않게도 대몽항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렸다(당시엔 고려왕조는 이미 몽고와 화해를 넘어서, 사돈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제주까지 온 삼별초는 권력을 놓지 못한 자들의 발악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감귤과 전복 진상으로 제주 농부들과 해녀들이 갈려나갔다. 귤나무에 핀 꽃 수대로 귤을 진상하지 않으면 치도곤을 맞다가 죽어갔고, 진상할 전복 수량을 위해 험한 바다로 나갔다가 해일에 휩쓸려 죽어가는 해녀들이 즐비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되자, 일제는 제주도를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제주 산악지대 곳곳에 진지동굴을 팠고, 들판에는 전투기 비행장을 만들었다. 겨우 해방이 되어 봄날이 오려나 싶었더니, 이번엔 빨갱이를 잡는다는 미명하에 제주 전역에선 4.3학살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제주는 황홀한 곳이지만, 눈부신 풍경 뒤 끔찍한 아픔이 숨겨진 곳이기도 하다. 광치기해변의 절경은 응달에 가려진 그림차처럼 은폐되었던 역사의 아픔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 아픔의 배후에는 1947년부터 시작해 무려 7년 7개월 동안 벌어진 엄청난 학살 제주4.3이 있다. p 055


내가 제주도를 갈때마다 잊지않고 꼭 들르는 유적지가 있다. 바로 4.3 유적지다. 심지어 제주 여행을 갈때마다, 매번 두,세차례씩 다른 4.3유적지를 방문하고 있음에도, 아직 못가본 4.3유적지가 즐비하다. 왜인고 하면, 답은 아주 쉽게 나온다. 제주 4.3 학살은 제주 전역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꼭 가보아야 할 바닷가(협재해변, 광치기해변 등)라던가, 성산일출봉, 각종 오름들도 모두 4.3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터진목과 광치기해변은 칠십여년 전을 기억하고 있을까? 거센 파도가 너럭바위에 부딪히며 쾅쾅거리는 소리를 낸대서 광치기라고 부른다는 말은 어저면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의 원혼이 통곡하여 가슴을 치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p 057



성산일출봉에서 터진목, 광치기해변으로 이어지는 제주 올레 1코스. 해안 드라이브코스로도 각광받는 이 해안가는 제주 4.3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이다. 터진목 해안가에 가보면 ‘제주 4.3 성산읍지역 양민학살터 표지석’도 설치되어있다. 하지만 이 곳을 오는 사람들이라곤 유가족 정도일뿐이다. 내가 이곳을 들렀을 때도, 이 곳을 찾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도로에 해안 드라이브를 하는 차량들만 쌩 하고 지나갔을뿐. 조금만 신경썼다면, 이 곳에서 4.3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았았더라면, 이 곳을 지나는 차량들 중 못해도 30%정도는 차에서 잠깐 내려서 한번쯤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까? 당시 느꼈던 씁쓸함을, 다시한번 느낀다.



함덕리를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열에 아홉은 해변으로 돌진한다. 그러나 한 번쯤 이 아름다운 해변을 품은 마을은 어떻게 생겼을까 관심을 가져보라 권하고 싶다. p 160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풍광이 아름다운 제주 해변가 대부분은 4.3 학살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했다. 협재가 그랬고, 성산일출봉 일대 앞바다가 그랬다. 함덕해변도 4.3학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확히는 함덕해변 주변에 있는 모든 곳에서 4.3 학살이 자행되었다. 서우봉이 그랬고, 북촌이 그랬다.



일제강점기에 태평양전쟁을 이르킨 일본군은 옥쇄작전을 세우고 자신들의 본토와 제주도에 최후의 진지를 구축했다. 동쪽의 일출봉부터 서쪽 끝의 송악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뚫어놓은 진지동굴은 서우봉에도 무려 20여 군데가 남아있다. 서우봉의 참상은 진지동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근현대사의 참극인 4.3의 무도한 학살 역시 벌어진 것이다. p 166



제주섬 어딘들 4.3의피바람이 비껴간 곳이 있을까마는 북촌리의 아픔은 유독 핏물로 흥건한 늪처럼 어둡고 깊기만 하다. 일제강점기에도 북촌리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항일운동을 벌였다. 누구보다 뜨거웠던 청년들은 해방 이후에도 자치 조직을 만들어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희망찬 미래를 설계했다. 하지만 이런 청년들의 활동을 불순하게 역니 경찰들과 간간이 마찰이 있었는데 1947년과 이듬해 사이에 경찰관 폭행과 납치, 살해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인명 학살은 1949년 1월 17일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학살로 이어졌다. 북촌국민학교에서의 총격을 시작으로, 400명 넘는 주민들이 총탄의 희생양이 되었다. 사건이 있고 난 뒤 오랫동안 북촌리는 무남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p 190



심지어 서우봉은 일제강점기 때도 크나큰 아픔을 겪었다. 서우봉 산턱과 해안절벽 곳곳에 일본군이 파놓은 진지동굴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난 함덕에 갔을 때, 함덕해변이 아닌 서우봉을 찾았었다. 일본이 파놓은 진지동굴을 두 눈으로 보기 위해서. 하지만 서우봉 진지동굴 가는 길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우선 진입로가 덤불 속을 헤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과도 같은 샛길이었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산속에 있는 진지동굴은 두 눈으로 확인했지만, 해안가 절벽에 있는 해안진지 동굴은 결국 보지 못했다. 일반인이 가기에는 안전이 걱정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내가 과하게 걱정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으로 봤을 땐 서우봉 해안진지는 무작정 가기엔 좀 그랬다.




 



서우봉이 일본군 진지동굴만 있는게 아니라, 서우봉 자체로도 4.3 학살의 광풍이 불었던 곳이고, 제주 4.3유적지로 정비되어있는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은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최근 몇년간 4.3에 대해 많이 알려졌다고는 하나, 아직 4.3 유적지를 일반인이 관광할 수 있을만큼 정비를 하기엔, 널리 알려져있지는 않은건가 싶었다. 널리 알려져야 찾는 사람들이 많을 테고, 사람들 발길이 많아져야, 그만큼 유적지 정비가 될텐데, 휴..



그래도 서우봉 아래에 있는 북촌리 너븐숭이 유적지는 나름대로 정비가 되어있다. 북촌도 4.3학살의 광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남자들이 전부 죽어서 무남촌이 불렸다. 뿐만 아니다. 여기서 아이들도 많이 죽었는데, 그 아이들을 매장한 곳이 4.3유적지로 정비되어 있는 너븐숭이의 애기무덤이다. 애기무덤 옆 옴팡밭에는 현기영의 「순이삼촌」의 구절을 새긴 비석들이 누워있는데, 이는 4.3당시 죽임을 당한 시신들을 형상화한 모습인지라, 당시 내 눈 앞에 있던 비석 하나하나를 전부 학살된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잊지말자.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한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해안절벽, 오름들. 멋진 풍광속에 들어있는 그 모든 곳에는 억울하게 죽어간 제주 사람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제주 전역이 4.3 학살터라는 것을.



어렵사리 학업을 이어가는 아이들을 보다 못한 마을 해녀들은 또다시 물옷을 입고 바다로 나섰다. 다시 학교 재건 기금을 모으기로 한 온평리 해녀들은 이번에는 아예 마을 바당밧 한 구역을 ‘학교바당’으로 정해놓고 거기서 채취한 해산물의 판매대금은 무조건 학교를 위해 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제주 최초의 학교바당이 만들어졌다. p 072



‘제주’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제주를 지금까지 먹여살린 해녀들 이야기다. 



조선시대 끝없는 귤 진상 요구와 전복 진상요구로 귤 농사를 짓고, 고기잡이를 하던 제주의 남자들은 알음알음 제주를 떠나가기 시작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제주에 있던 행정관들은 귤나무에 핀 꽃의 갯수까지 세서, 그 수만큼 귤을 수확하지 못하면 치도곤을 쳤다. 전복도 마찬가지다. 일정 수량을 채우지 못해도 치도곤을 쳤다. 배를 몰던 제주의 남자들은 그렇게 제주를 떠나갔다. 하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제주에 남아있었다. 그 가족들을 먹여살린 사람들이 바로 제주의 여자, 해녀다. 제주 여자들은 그렇게 물질을 하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가족을 먹여살리고, 제주를 먹여살렸다.



일제강점기가 되고, 수탈이 시작되었다. 참다 못한 제주 해녀들도 뭍으로 나왔다. 그녀들은 일제에 저항하였고, ‘해녀의노래’를 부르며 항일운동을 하며 제주 바다를 지키고자 했다. 해방 후에는 제주의 아이들을 위해 나섰다. 제주의 아이들이 공부할수 있는 공간이 없자, 해녀들이 물질을 하여 나온 수익을 학교 건설을 위해 쓰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해녀들이 벌어온 수익으로 제주 온평리에는 학교가 세워졌다.




 



하지만 학교 내 공덕비에는 학교설립을 해야한다는, 대외적으로 나서던 남성 독지가들의 공로만 드높였다. 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비용을 마련한 해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몇몇 정의로운 사람들이 불합리하다고 성토를 한 후에야, 해녀들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그 옛날부터 제주를 먹여살리던 해녀였지만,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가부장제를 이겨내기엔, 제주 여성의 지위는 너무나 초라했다. 


하도리는 물론 제주의 해녀들은 서로를 제 몸처럼 아꼈다. 막 물질을 시작해 솜씨가 서툰 애기잠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수확물이 쥐꼬리만큼이었다. 애기잠수의 풀이 죽은 모습을 본 상군해녀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이 잡은 전복이며 소라를 하나씩 밀어 애기잠수의 망사리를 묵직하게 해줬는데, 이렇게 서로를 배려해 해산물을 나눠주는 것을 개숙이라고 했다. 개숙개는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모여들어 애기잠수의 망사리를 채워주던 갯바위다. p 144



그럼에도 제주 해녀들은 물질이 숙명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가족을, 제주를 먹여살렸다. 제주 해녀란, 제주 그 자체다.



‘북녘을 사모해 그리워한다’는 뜻에서의 북녘은 단순히 방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이르기도 한다. 포구가 뭍과 제주를 오가는 범선과 사람들로 북적대던 조선시대, 그 시절 관원으 신분으로 제주 발령을 받고 부임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색당파의 패권 다툼 속에 죄인이 되어 제주로 귀양 내려온 유배객들도 많았다. 제주에 발을 딛게 된 이들은 항상 바다 건너 북녘이 사무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럴때면 이 정자에 올라 아득한 수평선을 망연히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특히 죄인의 몸인 유배객들은 하루하루가 시련의 나날인 탓에 연북정의 단골손님으로 돌계단이 닳도록 오르내렸으리라. p 247



요즘을 사는 우리는 힐링을 위해, 좋은 곳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제주를 간다. 이 모습을 조선사람들이 본다면 아주 까암짝 놀라고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제주는 제일 최악의 유배지였기 때문이다.



죄질이 나쁠수록, 왕이 죄인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유배지로 배속된다. 그중 제일 끝이 바로 제주였다. 제주는 한양에서 970리나 떨어진, 오늘날로 말하면 390km나 떨어진 곳이다. 이렇게 먼 만큼 유배지인 제주까지 오는 중에 객사할 수도 있다. 배를 타고 제주에 오다가 풍랑을 만나서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운 좋게 유배지인 제주까지 왔다한들, 언제고 유배가 풀릴지 기약이 없었던 것이다.





제주로 유배를 왔던 대표적인 유배인으로는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 소현세자의 세 아들(인조의 손자: 석철, 석린, 석견), 은언군(철종 조부),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개화파 박영효(결국 친일파) 등이 있다. 광해군은 제주에서 천수를 다해 사망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석철과 석린은 제주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서 죽었다. 아니 살해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암 송시열은 장희빈의 아들이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제주로 유배되었고,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시절에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렸다. 친일파는 생략.



한마디로 조선시대에 제주는 역모죄에 달하는 중죄인이 오는 최악의 유배지였다. 제주로 유배왔다가 해배가 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렇게 유배지로 각광받던 제주를, 우리는 제 발로 걸어들어가는 ‘자발적 유배’를 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





이 책으로 다시 한번 깨달은 사실 하나, 제주는 먹방, 힐링뿐만아니라 인문학 여행으로도 최고의 여행지라는 것!


아, 제주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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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스페인은 시골에 있다 - 맛의 멋을 찾아 떠나는 유럽 유랑기
문정훈 지음, 장준우 사진 / 상상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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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읽었던 프랑스 미식여행기 「진짜 프랑스는 시골에 있다」의 후편이 나왔다. 그 이름하야 「진짜 스페인은 시골에 있다」.



알고보니 이 책의 저자들이 프랑스를 여행한 후 스페인으로 떠났는데, 책으로는 ①프랑스편, ②스페인편 나눠서 출간한 것이다. 하긴 프랑스와 스페인, 두 나라를 한 권에 담았다면, 편집되는 분량이 정말 어마어마 했을 것 같기도. 프랑스와 스페인을 나눠서 출간한 건 정말 좋은 선택인듯!


앞서 프랑스편을 읽으면서 프랑스 사람들의 토종닭 사랑과,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었다. 그러다보니 스페인도 왠지 프랑스의 토종닭처럼, 보호하고 지켜나가는 토종 식재료(?)가 나올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 난 스페인에서 나오는 옴춍옴춍 유명한 돼지고기를 알고 있잖아? 심지어 내가 좋아하고, 가끔 사먹는 그 돼지고기! 이베리코 돼지가, 스페인 그니까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고 자라는, 스페인 토종돼지라는 거!! 그러니 분명 이 책안에는 이베리코 돼지고기 이야기가 있을 것 같고! 이베리코 돼지의 이야기를 알면, 난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고?! 흐흐흐.


스페인편 여행에세이를 읽으려고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스페인은 어떤 나라인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음, 내가 알고 있는 스페인이라곤 윤식당과 꽃보다 할배에서 본게 전부네? 아니 근데, 내가 여행관련 방송 프로그램을 보는데 있어서, 좋아라 하는 장르는 사적지 답사를 제외하고는,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같은 장르인데. 음, 내가 알고 있는 스페인은, 내가 원하는 장르의 스페인은 아니었다. 허허허.



하지만! 이 책에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같은 장르니까, 왠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스페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니까 한마디로, 이 책은 스페인 먹거리에 정말 진심인 뭐 그런 내용이랄까?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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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식사 패턴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 스페인 친구들에게 우리나라는 보통 아침 식사를 7시쯤, 점심을 12시, 저녁을 6시나 7시쯤 먹는다고 하니, “너희는 영국 애들이랑 비슷하게 밥을 먹네?”라고 대답이 돌아왔다. p 032


스페인 문화 중의 하나인 시에스타는 점심을 먹고 해가 저물때까지 쉬거나 낮잠을 자는 것을 의미한다. 이젠 도시에선 찾아보기 힘들어진 스페인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골로 가면 여전히 시에스타가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p 187



우리는 아침, 점심, 저녁 1일 3끼를 먹는게 기본이다. 그런데 스페인은 좀 달랐다. 스페인은 무려 1일 5식을 하는 나라! 


잠에서 일어난 뒤 오전 7시쯤 아침을 먹고, 출근하고 나서 10시 반쯤 아점을 먹으며, 2시에 (성대한) 점심을 먹고, 오후 6시 쯤 점저를 먹고, 밤 9시에 본격적으로 저녁밥을 먹는 총 1일 5식을 하는게 이들 식사 문화라고 한다. 이거 참. 놀랍고 부럽고. 아 정확히는 놀랍고 20%, 부럽고 80%. 아니 무슨 위대한 장을 가진 나라인가? 아님 소소하게 먹는다는 아점과 점저가, 내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더 소소한 양인건가? 아니 뭐 그냥 부럽다 ㅜㅜ


근데.. 1일 5식을 하면 살이 안찌나?? 아님 이들은 움직임이 많나? 사무직은 다 똑같은 사무직일건데? 아님 살쪄도 한국처럼 막 과하게 신경쓰거나 그런 나라가 아닌건가. 1일 5식하는 것도 부럽고, 그게 당연한 문화라는 것도 부럽고, 걍 다 부럽다. 세상엔 맛있는게 넘처나는데, 나도 1일 5식이 당연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허 ㅜㅜㅜㅜㅜㅜ


근데 심지어 저렇게 먹는데, ‘시에스타’라는 낮잠 타임까지 있다고? 물론 도시에선 사라져가는 문화라지만, 와....... 스페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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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식사 예절!


1. 양손은 반드시 보이게 테이블 위에 올려둬야 한다. 절대 아래로 내리면 안된다. 이유는 테이블 아래에 칼을 쥐고 있을까봐. 스페인에서 식사를 할 땐 손을 테이블 위의 식기 근처로 두는 것이 좋다.


2. 빵은 보통 접시 위가 아닌 테이블보에 올린다. 한국인에겐 어색하 룻 있다. 그러나 스페인에선 빵을 식기 옆에 두는 것이 원칙이다. 프랑스에서도 바게트를 바구니에 넣어서 내기도 하지만, 그냥 식탁보 위에 올려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3. 2와 이어진짜. 빵을 수프나 소스에 찍어 먹으면 스페인 사람들의 세상은 멸망한다. 한국사람으로 치자면 김칫국물에 마른 멸치를 말아먹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물에 적신 빵을 네게 먹여버리겠다’라는 것은 스페인에서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고문이다.


4. 스페인 대부분 지역에서는 빵에 버터를 발라먹지 않는다.그냥 먹거나, 아니면 올리브 오일에 적셔 먹는다. 딱딱한 빵에 생마늘을 막 비비고 토마토를 막 비벼서 먹는 건 괜찮은데 버터는 이상하단다.


5. 스페인에서도 다른 서양 국가들의 식문화처럼 기본적으로 왼손엔 포크, 오른손엔 나이프를 든다. 대론 오른손에 포크를 쥐고 왼손으로 빵을 쥔 채 빵을 나이프처럼 쓰기도 한다. 물론 스페인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이런 짓을 하면 안된다. 오직 스페인에서만 통하는 식사매너임을 기억하자.


6. 술로 건배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뚫어지게 봐야한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상대를 쳐다보지 않으면 7년 동안 재수가 없다는 말이 있다.


7. 식사 중에 옆 테이블이 시끄럽다고 눈치 주면 안된다. 스페인에서 밥을 먹으려면 시끄러워야 한다. 싸우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건 절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의 절정에 이른 순간이다.


8. 7과 이어진다. 옆 테이블이 시끄러운 것을 참으려면 우리 테이블도 끝없이 떠드는 수 밖에 없다. 가능한 말을 길게 하고 대화가 끊기면 안 된다. 스페인의 식사는 누가 더 시끄럽게 먹는지 겨루는 자리다.


9. 정말 중요한 매너다. 식사를 하며 그 어떤 대화를 나누어도 좋으나 스페인 내전, 프랑코, 바스크와 까딸루냐의 독립 관련 주제는 피해야 한다. 스페인 가정 대다수에는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시절로 인한 상처가 있다. p 076~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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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소고기는 태어난지 2~3년 되는 소를 도축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스페인 소고기는 이런 내 상식을 아주 싸그리 무너뜨렸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우를 28개월에서 33개월을 기른 후 도축한다. 미국에서는 보통 24개월까지만 기른다. 돼지는 6개월 정도를 기른다. 그런데 소의 수명은 대략 20년이고, 돼지는 10년이다. 우리가 이들을 더 오래 기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경제성’이다. p 158



엘 카프리초에서는 최대 19년 된, 몸무게는 더 이상 늘지 않지만, 자신에게 운명으로 주어진 삶의 최고치에 달한 소를 쓰기도 한다. 오래, 그리고 천천히 기른 맛의 성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p 159


소의 수명이 20년이라는데, 그 수명까지 꽉 채워 키운 소를 도축해서 먹는단다. 이렇게 오래 키우면, 그만큼 경제성이 떨어질텐데, 이게 가능한일인가?아니 근데, 경제성이 없으면 이렇게 소를 키울리 없고, 소고기도 팔리가 없을테니, 와. 진짜 놀라웠다. 


쎄시나는 스페인 북부 지역에서 먹는 소고기 숙성 햄이다. 소고기로 하몬을 만든 셈이다. 그러면 그렇지.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기 위해 염장 숙성을 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소고기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좋은 품질의 하몬을 만들려면 데에사라 불리는 관목림 지역에서 방복해 기른 이베리코 돼지가 필요하다. 이 지역에는 데에사가 없는 반면, 초워넹서 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에 소고기를 염장 숙성한 쎄씨나를 즐겨먹는다. 추측건데 한국사람들은 하몬보다 쎄씨나를 훨씬 더 맛있게 먹을 것이다. p 169



두터운 지방을 포크로 쿡 찍어서 입에 넣고 씹었다. 호세의 말처럼 식감이 느껴졌고 육향이 흘러넘쳤다. 평소 같으면 먹지 않고 접시 한쪽에 쌓아둘 지방에서 이런 식감과 향을 느낄 수 있다니! 천천히 오래 기른 맛의 정체를 알게된 순간이었다. p 173


처음엔 경제성이 없었을, 소를 오래오래 키우는게 가능했던 건 역시나 ‘요리’였다. 오래키운 소고기를 내놓라하는 음식으로 만들어냈고, 그 소고기를 맛보기 위해 스페인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비싼 값을 지불한다. 그게 선순환되어, 소도 제 수명을 다 채워서 살 수 있게 되었고, 스페인 사람들은 더 맛있는 소고기를 먹게 되었고, 캬. 멋지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스페인 먹방의 메인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베리코 돼지고기! 


한창 저탄고지 할 때 미친듯이 먹었던 육즙 좔좔인 이베리코 돼지고기! 그리고 육즙 좔좔에 맛도 좋은 만큼...쵸끔 비싼(T.T) 이베리코 돼지고기! 정말 이베리코 돼지고기는 극찬 오브 극찬해도 아깝지 않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돼지고기다.



요 이베리코 돼지는, 스페인의 재래돼지다.


데에사에는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다. 경제적 가치가 뛰어난 스페인의 재래돼지 이베리코를 방목하여 키우는 곳도 데에사다. 이베리코 돼지 중에서도 데에사에서 뛰어놀며 털가시나무와 코르크나무가 떨어뜨리는 도토리를 주워 먹고 자란 녀석들만이 최고 등급인 베요타 등급을 받을 수 있다. 베요타 등급의 이베리코 돼지고기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육향의 정체가 데에사가 만들어낸 도토리다. p 205


이베리코 돼지는 ‘데에사’라고 불리는 너른 자연에 방목해서 자라는 재래돼지다. 그곳에서 도토리를 먹으며 자란다. 물론 사료를 먹이며 키우는 이베리코 돼지도 있긴하다. 하지만 사료를 먹이는 양이 많은 만큼, 이베리코 돼지의 가치는 조금씩 떨어진다. 얼마나 방목하여 키우는지, 혹은 사료를 먹이며 키우는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다. 



제일 높은 등급이 베요타, 그 다음이 세보 데 캄보, 마지막이 세보.


베요타 등급의 이베리코 돼지는 삶의 대부분을 데에사에서 방목되어 도토리를 먹고 자란 애들이고, 세보 등급은 삶의 대부분을 사료를 먹고 자란 애들. 이 등급들의 맛은 천차만별이며, 당연히 그 가치도 다르다. 베요타는 당연히 비싸고, 비싼만큼 맛있다. 



우리나라도 이베리코처럼 재래돼지가 있다. 하지만 알고 있는 재래돼지라고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제주도 흑돼지. 하지만 제주 흑돼지와 이베리코 돼지를 비교하면, 음 뭐랄까. 우리 재래돼지는 그렇게 유명하지도, 그렇게 각광받지도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역시나 ‘경제성’과 ‘효율성’. 새끼를 많이 낳지도 않고, 빨리 자라지도 않는 재래돼지는 경제성도 떨어지고 효율성도 떨어지니 당연히 아웃될 수 밖에 없었다. 새끼를 많이 낳고, 빨리 자라는 외래종을 들여와 개량에 개량을 거쳐, 우리가 먹는 돼지고기가 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재래돼지의 입지는 줄어들대로 줄어들었다. 


베요타 등급의 이베리코 돼지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기에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비싼 가격에 판매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데에사를 없애거나 파괴하지 않고 자연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기 대문이다. 이베리코 돼지의 안락함을 보장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이득이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p 207


스페인도 과거엔 우리처럼 빨리 자라고, 많이 낳는 개량형 돼지가 주류였다고 한다. 하지만 재래돼지의 소멸(?)에 위험을 느낀 쉐프와 농부들이 하나, 둘 재래돼지를 복원 및 키우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입지까지 올라갔다. 오랜기간 방목하며 키우는 만큼 자본이 많이 들어갈텐데도, 농부들은 그걸 묵묵히 감수했다. 쉐프들은 그런 이베리코 돼지로 세계적인 요리를 만들어냈으니, 그 유명한 하몽이다. 



과거 일본 여행때 하몽을 먹어봤는데, 와..........! 바다 건너 온 것도 이리 맛있는데, 본 고장에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ㅜㅜ



자, 그러면 스페인 하몬이 맛있는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몬은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염장 건조해 숙성한 음식을 말한다. 포로 떠서 건조한 것이 아니라, 통째로 건조 숙성시킨 다음에 칼로 얇게 저며 먹으니 돼지 뒷다리 육회라고도 할 수 있다.(생략) 어떤 돼지로든 하몬을 만들 수 있지만, 하몬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돼지 품종이다. 스페인 재래돼지 이베리코로 만든 하몬이 최고로 여겨진다. p 238


스페인의 재래돼지를 지키려는 농부들과 쉐프들의 협동은 하몬을 세계최고의 요리로 올려 놓았다. 하몽이 세계적인 요리가 된만큼, 이베리코 돼지는 농부들에게도, 쉐프들에게도 어마무시한 수입원이 되었다. 



많은 방송에서 우리돼지 한돈 광고를 그렇게 하면서, 실상 그 한돈은 우리 재래돼지가 아닌 많이 낳고 빨리 자라는 개량형 돼지라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왜 우리는 우리의 재래돼지를 이베리코 돼지처럼 상품화시키지 못하는 걸까. 씁쓸할 따름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베리코 돼지고기로 만든 하몽처럼, 우리나라 재래돼지로 만든 세계적인 돼지고기 요리를 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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