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동쪽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8
한진오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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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도슨트 신간이 나왔다. 그 이름하야 #제주동쪽 이야기. 지금까지 출간된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는 보통 도시 하나당 한 권이었다. 제주 같은 경우는 제주시, 서귀포시로 나뉘어있는지라 당연히 그렇게 책이 나올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달까? 이 책을 읽고보니, 제주사람들은 옛날부터 동/서쪽으로 나눠살았고, 동/서쪽으로 생활방식도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 이런 관습을 무시하고 남, 북으로 제주시/서귀포시로 나눈 행정체계란!!!! 으이구!!!!




흠흠.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는 집에 세 권을(춘천, 신안, 통영편) 미루어볼때, 제주동쪽편도 인문/지리/역사가 총망라된 인문지리서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무엇보다 내 개인적인 여행 취향이 역사 여행(인문학 여행)인 지라, 이 책에 대해 많은 기대도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중점으로 생각했던 부분은 이거다. 


“얼마나 많은 제주 역사가 담겨있는지, 이 책속에 내가 모르는 제주의 역사는 어느정도인지, 제주의 아픈 근대 역사를 얼마나 담고있는지.”



생각보다 많은 제주 여행서적은,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만 노래할뿐, 제주의 역사에 대해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제주의 역사를 얼마나 담고 있는지가 제일 궁금했고,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내 걱정은 한낱 외부인의 기우였을뿐! 제주에서 나고자란 저자는, 제주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책에 담고자 노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일러 1만 8천 신들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유별하게 왕성한 무속신앙의 배경에는 척발한 자연환경과 정치적 변방이라는 또렷한 이유가 있다. 뭍사람들은 제주를 돌, 바람, 여자가 많은 삼다도라고 부르지만, 제주 사람들은 풍재, 수재, 한재의 세 가지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는 삼재도라고 불러왔다. p 024



예컨데 제주가 신들의 고향이라는 점도 책의 첫머리서부터 짚고 넘어갔다. 실제로 한반도에 남아있는 신화의 고향은 대부분 제주도다. 본토는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속신앙이 무참히 밟혀나갔지만, 바다건너에 있던 제주도는 본토와 떨어진 만큼 그네들의 민속신앙을 고이 간직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설문대할망, 소별왕과 대별왕, 금백조, 소로소천국, 궤네깃또 같은 제주 신들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래될 수 있었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니다. 제주 신화가 지금까지 지켜져왔던 이면에는, 제주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자연재해가 있었다. 본토와 떨어진 섬이다보니, 재해가 발생해도 정부의 구휼이나 지원이 쉽지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늘신이 노하지 않기를, 바다신이 노하지 않기를… 이런 식으로 본인들이 믿고 있는 자연신, 마을신, 성황신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방법밖에 없었던 거다. 



지금까지 제주신화가 지켜질 수 있었던 건, 무사안녕을 바라던 제주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 덕분이었다.




성산을 비롯한 제주는 발길 닿는 모든 곳이 아름답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제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제주 토박이들은 감탄 속에 한탄을 섞어 내뱉는다. 저 높은 한라산은 긴긴 한숨이 쌓이고 쌓인 것이고, 드넓은 제주 바다는 끝도 없이 흘러넘친 피눈물이 응어리진 것이기 때문이다. 기나긴 세월 변방의 보잘것없는 섬이라는 이유로 같은 탄압과 차별을 받아온 수난의 역사가 풍광의 아름다움 너머에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p 030


제주가 ‘신들의 고향’이라 말하니 묘하게 신비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그 신비함이 느껴지는 것이 무색하게, 제주의 아픔을 알게 된다. 발길 닿는 모든 곳에서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제주지만, 제주 섬 전역에는 엄청난 아픔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에는 몽고에 항쟁한다는 미명하에 삼별초군이 제주까지 밀고들어와, 제주는 원치않게도 대몽항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렸다(당시엔 고려왕조는 이미 몽고와 화해를 넘어서, 사돈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제주까지 온 삼별초는 권력을 놓지 못한 자들의 발악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감귤과 전복 진상으로 제주 농부들과 해녀들이 갈려나갔다. 귤나무에 핀 꽃 수대로 귤을 진상하지 않으면 치도곤을 맞다가 죽어갔고, 진상할 전복 수량을 위해 험한 바다로 나갔다가 해일에 휩쓸려 죽어가는 해녀들이 즐비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되자, 일제는 제주도를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제주 산악지대 곳곳에 진지동굴을 팠고, 들판에는 전투기 비행장을 만들었다. 겨우 해방이 되어 봄날이 오려나 싶었더니, 이번엔 빨갱이를 잡는다는 미명하에 제주 전역에선 4.3학살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제주는 황홀한 곳이지만, 눈부신 풍경 뒤 끔찍한 아픔이 숨겨진 곳이기도 하다. 광치기해변의 절경은 응달에 가려진 그림차처럼 은폐되었던 역사의 아픔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 아픔의 배후에는 1947년부터 시작해 무려 7년 7개월 동안 벌어진 엄청난 학살 제주4.3이 있다. p 055


내가 제주도를 갈때마다 잊지않고 꼭 들르는 유적지가 있다. 바로 4.3 유적지다. 심지어 제주 여행을 갈때마다, 매번 두,세차례씩 다른 4.3유적지를 방문하고 있음에도, 아직 못가본 4.3유적지가 즐비하다. 왜인고 하면, 답은 아주 쉽게 나온다. 제주 4.3 학살은 제주 전역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꼭 가보아야 할 바닷가(협재해변, 광치기해변 등)라던가, 성산일출봉, 각종 오름들도 모두 4.3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터진목과 광치기해변은 칠십여년 전을 기억하고 있을까? 거센 파도가 너럭바위에 부딪히며 쾅쾅거리는 소리를 낸대서 광치기라고 부른다는 말은 어저면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의 원혼이 통곡하여 가슴을 치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p 057



성산일출봉에서 터진목, 광치기해변으로 이어지는 제주 올레 1코스. 해안 드라이브코스로도 각광받는 이 해안가는 제주 4.3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이다. 터진목 해안가에 가보면 ‘제주 4.3 성산읍지역 양민학살터 표지석’도 설치되어있다. 하지만 이 곳을 오는 사람들이라곤 유가족 정도일뿐이다. 내가 이곳을 들렀을 때도, 이 곳을 찾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도로에 해안 드라이브를 하는 차량들만 쌩 하고 지나갔을뿐. 조금만 신경썼다면, 이 곳에서 4.3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았았더라면, 이 곳을 지나는 차량들 중 못해도 30%정도는 차에서 잠깐 내려서 한번쯤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까? 당시 느꼈던 씁쓸함을, 다시한번 느낀다.



함덕리를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열에 아홉은 해변으로 돌진한다. 그러나 한 번쯤 이 아름다운 해변을 품은 마을은 어떻게 생겼을까 관심을 가져보라 권하고 싶다. p 160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풍광이 아름다운 제주 해변가 대부분은 4.3 학살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했다. 협재가 그랬고, 성산일출봉 일대 앞바다가 그랬다. 함덕해변도 4.3학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확히는 함덕해변 주변에 있는 모든 곳에서 4.3 학살이 자행되었다. 서우봉이 그랬고, 북촌이 그랬다.



일제강점기에 태평양전쟁을 이르킨 일본군은 옥쇄작전을 세우고 자신들의 본토와 제주도에 최후의 진지를 구축했다. 동쪽의 일출봉부터 서쪽 끝의 송악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뚫어놓은 진지동굴은 서우봉에도 무려 20여 군데가 남아있다. 서우봉의 참상은 진지동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근현대사의 참극인 4.3의 무도한 학살 역시 벌어진 것이다. p 166



제주섬 어딘들 4.3의피바람이 비껴간 곳이 있을까마는 북촌리의 아픔은 유독 핏물로 흥건한 늪처럼 어둡고 깊기만 하다. 일제강점기에도 북촌리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항일운동을 벌였다. 누구보다 뜨거웠던 청년들은 해방 이후에도 자치 조직을 만들어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희망찬 미래를 설계했다. 하지만 이런 청년들의 활동을 불순하게 역니 경찰들과 간간이 마찰이 있었는데 1947년과 이듬해 사이에 경찰관 폭행과 납치, 살해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인명 학살은 1949년 1월 17일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학살로 이어졌다. 북촌국민학교에서의 총격을 시작으로, 400명 넘는 주민들이 총탄의 희생양이 되었다. 사건이 있고 난 뒤 오랫동안 북촌리는 무남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p 190



심지어 서우봉은 일제강점기 때도 크나큰 아픔을 겪었다. 서우봉 산턱과 해안절벽 곳곳에 일본군이 파놓은 진지동굴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난 함덕에 갔을 때, 함덕해변이 아닌 서우봉을 찾았었다. 일본이 파놓은 진지동굴을 두 눈으로 보기 위해서. 하지만 서우봉 진지동굴 가는 길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우선 진입로가 덤불 속을 헤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과도 같은 샛길이었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산속에 있는 진지동굴은 두 눈으로 확인했지만, 해안가 절벽에 있는 해안진지 동굴은 결국 보지 못했다. 일반인이 가기에는 안전이 걱정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내가 과하게 걱정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으로 봤을 땐 서우봉 해안진지는 무작정 가기엔 좀 그랬다.




 



서우봉이 일본군 진지동굴만 있는게 아니라, 서우봉 자체로도 4.3 학살의 광풍이 불었던 곳이고, 제주 4.3유적지로 정비되어있는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은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최근 몇년간 4.3에 대해 많이 알려졌다고는 하나, 아직 4.3 유적지를 일반인이 관광할 수 있을만큼 정비를 하기엔, 널리 알려져있지는 않은건가 싶었다. 널리 알려져야 찾는 사람들이 많을 테고, 사람들 발길이 많아져야, 그만큼 유적지 정비가 될텐데, 휴..



그래도 서우봉 아래에 있는 북촌리 너븐숭이 유적지는 나름대로 정비가 되어있다. 북촌도 4.3학살의 광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남자들이 전부 죽어서 무남촌이 불렸다. 뿐만 아니다. 여기서 아이들도 많이 죽었는데, 그 아이들을 매장한 곳이 4.3유적지로 정비되어 있는 너븐숭이의 애기무덤이다. 애기무덤 옆 옴팡밭에는 현기영의 「순이삼촌」의 구절을 새긴 비석들이 누워있는데, 이는 4.3당시 죽임을 당한 시신들을 형상화한 모습인지라, 당시 내 눈 앞에 있던 비석 하나하나를 전부 학살된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잊지말자.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한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해안절벽, 오름들. 멋진 풍광속에 들어있는 그 모든 곳에는 억울하게 죽어간 제주 사람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제주 전역이 4.3 학살터라는 것을.



어렵사리 학업을 이어가는 아이들을 보다 못한 마을 해녀들은 또다시 물옷을 입고 바다로 나섰다. 다시 학교 재건 기금을 모으기로 한 온평리 해녀들은 이번에는 아예 마을 바당밧 한 구역을 ‘학교바당’으로 정해놓고 거기서 채취한 해산물의 판매대금은 무조건 학교를 위해 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제주 최초의 학교바당이 만들어졌다. p 072



‘제주’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제주를 지금까지 먹여살린 해녀들 이야기다. 



조선시대 끝없는 귤 진상 요구와 전복 진상요구로 귤 농사를 짓고, 고기잡이를 하던 제주의 남자들은 알음알음 제주를 떠나가기 시작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제주에 있던 행정관들은 귤나무에 핀 꽃의 갯수까지 세서, 그 수만큼 귤을 수확하지 못하면 치도곤을 쳤다. 전복도 마찬가지다. 일정 수량을 채우지 못해도 치도곤을 쳤다. 배를 몰던 제주의 남자들은 그렇게 제주를 떠나갔다. 하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제주에 남아있었다. 그 가족들을 먹여살린 사람들이 바로 제주의 여자, 해녀다. 제주 여자들은 그렇게 물질을 하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가족을 먹여살리고, 제주를 먹여살렸다.



일제강점기가 되고, 수탈이 시작되었다. 참다 못한 제주 해녀들도 뭍으로 나왔다. 그녀들은 일제에 저항하였고, ‘해녀의노래’를 부르며 항일운동을 하며 제주 바다를 지키고자 했다. 해방 후에는 제주의 아이들을 위해 나섰다. 제주의 아이들이 공부할수 있는 공간이 없자, 해녀들이 물질을 하여 나온 수익을 학교 건설을 위해 쓰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해녀들이 벌어온 수익으로 제주 온평리에는 학교가 세워졌다.




 



하지만 학교 내 공덕비에는 학교설립을 해야한다는, 대외적으로 나서던 남성 독지가들의 공로만 드높였다. 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비용을 마련한 해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몇몇 정의로운 사람들이 불합리하다고 성토를 한 후에야, 해녀들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그 옛날부터 제주를 먹여살리던 해녀였지만,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가부장제를 이겨내기엔, 제주 여성의 지위는 너무나 초라했다. 


하도리는 물론 제주의 해녀들은 서로를 제 몸처럼 아꼈다. 막 물질을 시작해 솜씨가 서툰 애기잠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수확물이 쥐꼬리만큼이었다. 애기잠수의 풀이 죽은 모습을 본 상군해녀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이 잡은 전복이며 소라를 하나씩 밀어 애기잠수의 망사리를 묵직하게 해줬는데, 이렇게 서로를 배려해 해산물을 나눠주는 것을 개숙이라고 했다. 개숙개는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모여들어 애기잠수의 망사리를 채워주던 갯바위다. p 144



그럼에도 제주 해녀들은 물질이 숙명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가족을, 제주를 먹여살렸다. 제주 해녀란, 제주 그 자체다.



‘북녘을 사모해 그리워한다’는 뜻에서의 북녘은 단순히 방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이르기도 한다. 포구가 뭍과 제주를 오가는 범선과 사람들로 북적대던 조선시대, 그 시절 관원으 신분으로 제주 발령을 받고 부임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색당파의 패권 다툼 속에 죄인이 되어 제주로 귀양 내려온 유배객들도 많았다. 제주에 발을 딛게 된 이들은 항상 바다 건너 북녘이 사무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럴때면 이 정자에 올라 아득한 수평선을 망연히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특히 죄인의 몸인 유배객들은 하루하루가 시련의 나날인 탓에 연북정의 단골손님으로 돌계단이 닳도록 오르내렸으리라. p 247



요즘을 사는 우리는 힐링을 위해, 좋은 곳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제주를 간다. 이 모습을 조선사람들이 본다면 아주 까암짝 놀라고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제주는 제일 최악의 유배지였기 때문이다.



죄질이 나쁠수록, 왕이 죄인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유배지로 배속된다. 그중 제일 끝이 바로 제주였다. 제주는 한양에서 970리나 떨어진, 오늘날로 말하면 390km나 떨어진 곳이다. 이렇게 먼 만큼 유배지인 제주까지 오는 중에 객사할 수도 있다. 배를 타고 제주에 오다가 풍랑을 만나서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운 좋게 유배지인 제주까지 왔다한들, 언제고 유배가 풀릴지 기약이 없었던 것이다.





제주로 유배를 왔던 대표적인 유배인으로는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 소현세자의 세 아들(인조의 손자: 석철, 석린, 석견), 은언군(철종 조부),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개화파 박영효(결국 친일파) 등이 있다. 광해군은 제주에서 천수를 다해 사망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석철과 석린은 제주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서 죽었다. 아니 살해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암 송시열은 장희빈의 아들이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제주로 유배되었고,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시절에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렸다. 친일파는 생략.



한마디로 조선시대에 제주는 역모죄에 달하는 중죄인이 오는 최악의 유배지였다. 제주로 유배왔다가 해배가 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렇게 유배지로 각광받던 제주를, 우리는 제 발로 걸어들어가는 ‘자발적 유배’를 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





이 책으로 다시 한번 깨달은 사실 하나, 제주는 먹방, 힐링뿐만아니라 인문학 여행으로도 최고의 여행지라는 것!


아, 제주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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