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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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는 그림과 언어의 예술이다. 문학과 그림의 예술로써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면, 그 둘이 보완관계인 만화 역시 예술로써 그에 비준한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만, 문학이나 미술작품이 모두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모든 만화를 예술이라 할 수는 없다.

  몇 장을 넘기다 작가 약력을 살펴보았다. 77년생 아직은 세상에 찌들기엔 이른. 그래서인지 그 표현 방식이 과감하고 충격적이다. 순간을 놓치지 않는  관찰력, 극에 닿은 상상. 작가는 자신의 말처럼 젊음만큼이나 솔직한 생각들을 드러냈다.

자아실현, 사회참여, 고차원적 소통, 남위에 서기, 칭찬듣기, 정신적 노출증... 이런 고상하거나 혹은 세속적인 많은 부모들에게 태어나기 했지만 그것들과 관계없이 이 책 속에는 읽히기를 바라는 저의 간절한 마음과 그것을 위한 노력만이 들어 있습니다.

작가가 작품에 쏟은 정성과 노력이 많이 읽히기 바라는 마음으로 자극적인 방식을 택했다면 독자는 약간에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솔직했지만 나는 그를 예술가라 부르기를 보류한다.  
    
  우리는 가끔 자신이 다른 생명체를 먹고 살과 피를 만드는 것에 혐오감을 느낀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곧 이런 죄책감을 위해 적당한 변명을 만들어낸다.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허접 쓰레기 같은 인생이지만 이나마 지탱하는 대에는 또 다른 희생을 정당화 해야한다. 콜라맨을 밟고 일어선 소년이 그렇고, 명랑만화가 끝난 공룡 둘리 친구들이 그렇다.


  최규석의 작품은 극에 닿아 있다. 다음에 올 것은 희망 밖에 없다. 그저 여기가 끝이라고 극점(한계점)을 찍어 놓는다.  

  그런 가운데 ‘리바이어던’에선 한계점마저 발견되지 않아, 깊은 나락으로 빠져드는 작품이다. 배고 푼 백성의 고통을 알지 못한 착한 왕을 몰아내고 청년이 등장한다. 청년은 영웅답게 스스로 왕이 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찾아 줄  ‘리바이어던’을 새 왕으로 모신다.

 리바이어던이란 구약성서 《욥기(記)》에 나오는 거대한 영생(永生)동물의 이름이다. 홉스는 책에선  리바이어던을 교회권력으로부터 해방된 국가를 가리키며 그러한 국가의 성립을 논했다. 왕이 된 리바이어던은 모든 사람들에게 “착한 마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착한 마음”을 받은 백성들은 리바이어던이 시키는 것을 그대로 따르기만 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아주아주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림 속 ‘리바이어던 눈’은 미소 뒤에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낸다. 영생동물(리바이어던)은 인간과는 다른 위치로 교회권력으로부터 해방된 국가라는 의미가 주어진다. 그러나  “착한마음”이 의미하는 것은 국민을 다루기 위한 또 다른 수단으로 선, 덕, 인간애 따위를 강조하고 있음이다. 

국민들은 “착한마음”으로 무장하여 분노를 억누르고 행복을 가장한다. 지능화된 폭력 앞에서 사람들은 행복이란 거짓 미소에 익숙하다.

이 작품에 절망하는 이유는 인류가 잉여생산이 만들어 낸 이후 계층 간의 갈등이 계속 되어 왔다는 데에 있다. 작가의 말처럼 영웅이 나타나 혁명을 이룬다 해도 권력은 또 다른 권력으로의 이양일 뿐 하층민은 언제나 누군가의 지배와 조정아래 살아야 했다. 젊은 혈기는 개혁을 꿈꾸지만 지배구조는 축이 되어 빙빙 돌 뿐 자신들의 축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나의 생각들은 작가의 그것과 좀 다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세상을 자기식대로 읽고 표현 했다면,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내식대로 읽었다. 작가 최규석은 젊음만큼이나 과감하게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그림만 보아도 섬듯한 그의 작품들은 나에게 드러난 현실보다 리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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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3 19: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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