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뤽케 사계절 1318 문고 12
페터 헤르틀링 지음, 유혜자 옮김 / 사계절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도서명 : 크뤽케
저 자  : 페터 헤르틀링
출판사 : 사계절

꽁꽁 언 땅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을 보자 토마스는 집에 있을 스케이트가 생각났다. 제대로 갖추어진 침실과 욕조를 보고 전쟁이 나기 전 자신의 집을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따뜻한 집과 깨끗한 이불, 가족을 위해 만들어진 소박한 음식이 주는 안락함과 평화로움이 토마스에게도 있었다.

토마스의 아버지는 2차 대전 참전해 돌아가셨다. 엄마와 함께 피난열차를 타려다 많은 인파에 휩쓸려 헤어지게 되었다. 토마스는 혼자서  엄마와 함께 가려던 이모 집을 찾아 빈에 도착하지만 그 곳도 이미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였다. 이모 집이 있어야 할 헬러가 9번지엔 낯선 아주머니가 앉아 있다.
"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어디로 갈 셈이냐?"
" 사실은 반다 이모를 찾아갈 생각이었거든요."
아주머니는 웃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흔들면 웃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찍어  냈다.
" 그 '사실은'이라는 말이 너무 우스워서 그랬다.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말이 너무 많아. 그 말 한마디로 참혹한 이 현실이 다 표현된 것 같구나. 사실은 나도 집에 편안히 앉아 남편인 크루제 대위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지. 그리고 사실은 너하고 내가 여기에서 만날 이유가 없었지 . 사실은 내가 너를 더 친절하게 대해 줘야만 했지...... ."

전쟁 속에서 고아가 된 토마스에게 거칠게 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가 살아 갈 수 있었던 것은 비좁고 더러운 공간이나마 내어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외다리 사나이 크뤽케를 보자 주저 없이 그를 따라간다. 이 외다리 사내가, 어디에 가면 먹을 만한 햄이나 빵이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집 없는 떠돌이 생활에서 얻어진 경험이다.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서 비롯된다.

토마스의 짐작대로 크뤽케는 전쟁에서 한 쪽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지만 수단이 좋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안정된 숙식을 제공받게 되었고, 마지막엔 토마스가 엄마를 찾을 수 있게 한다. 돼지와 페르시아제 카펫을 맞바꾸는 거래에서 중 돼지 대신 새끼 돼지를 받았지만 크뤽케가 건네 카펫도 사실은 가짜였다. 크뤽케는 독백처럼 말을 한다.
"그래, 우리도 타락했지."
서로가 서로를 속이며 타락하지만 반 나치스트였던 크뤽케는 이젠 더 이상 도덕적 가치에 민감해 하지 않는다.

국제 적십자사에서 가족을 찾으려고 서류를 접수하는 길고 긴 줄을 바라보며 크뤽케는 말한다.
" 거의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야. 어머니는 자식을 찾고, 아내는 남편을 찾고, 아이들은 부모를 찾겠지. 이 모든 것이 '위대한 지도자(히틀러)'께서 세계의 절반을 정복하셨기 때문에 생겨난 일들이지."
사실은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따뜻한 저녁을 함께 했어야 했다. 사실은 늦 잠자는 아이를 엄마가 애써 깨워야 했다. 사실은 크뤽케와 토마스는 평생 모르는 사이여야 했다.

토마스와 크뤽케는 빈에서 독일로 돌아온다. 그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동물 우리를 방불케 하는 끔찍한 기차여행과 수용소 생활을 한다. 겨우 도착한 그들의 정착지 풍경을 바라보며 크뤽케는 말문을 연다.
"토마스, 우리가 지금 도대체 어는 별에 와 있는 거야. 지금이 어느 시대지?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총을 쏘지 않았었나? 가축 우리 같은 곳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래도 우리가 인간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었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시내로 들어와 봤더니 우리를 마치 페스트처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대문을 꼭꼭 닫아걸고는 우리를 보려고도,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어. 그러면서 교회에 모여 성탄절을 준비하고 있다니!"

헤르틀링 작품 속 어른들은 가난하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다. 크뤽케 역시 비록 외다리에 전쟁 떠돌이지만 자신의 처지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안다. 크뤽케는 그들을 경계하는 바그너 부인의 다락방에서 토마스를 위해, 또한 자신을 위해 정성껏 크리스마스를 준비한다. 그리고 아래층에 내려가 가족이 모두 함께 있는 바그너 부인에게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라는 인사를 한다. 크뤽케는 바그너 가족에게 불쌍하고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토마스가 명절에 슬픈 얼굴을 하고 있지 않기를 바랬다. 바그너 부인은 그들의 크리스마스 인사에 당황했지만 과자가 잔뜩 담긴 접시를 토마스에게 건네 준다.
"바그너 부인은 마음씨가 괜찮은 사람일 거야. 단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잔재인 우리들이 이 집에 들어와 살아야 하는 현실이 문제지. 그러니 우리를 따뜻하게 환영해 달라고까지 요구할 수는 없어."

헤르틀링은 작품속 주인공을 극한 상황이나 비극적인 현실에 고립시키지 않는다.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기관이나 개인에게 당당히 도움을 청한다. 혼자의 힘으로 어려우면 여럿이 힘을 모은다. 절대로 사회에서 낙오시키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만들지 않는다. 독재자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황폐해졌지만 개인간의 오가는 정이 살아있어 토마스는 무사히 살아 남는다. 토마스는 엄마를 찾으려고 처절하게 매달리지 않는다. 우연히 어떤 일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엄마를 만나기 전에 당장당장 살아 나가야하는 현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선 어린아이들은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한다. 크뤽케와 같이 육체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면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다.  과장되지 않고,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따뜻한 이웃이 있고, 건강한 정신을 갖은 어른이 있으며, 공공기관에서 제 역할을 해주는 그래서 불행에 처한 한 아이를 구원해 내는 것이 헤르틀링의 작품들이다.

어찌보면 이런 설정 역시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토마스가 그나마 운이 좋은 아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아이에게 가장 불행한 상황을 설정해 놓고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단순히 소설로서 이야기를 만들었다기보다는 '불행한 아이'를 어떻게 부양해야 하며, 어떤 이웃이어야 하는지, 또 기관에는 어떤 도움들을 받아야 하지를 말하고 있다. 헤르틀링의 작품은  [할머니]에 이어 [크뤽케]를 두 번째로 읽는다.  다음에 읽을 책은 [바람 속으로 떠난 여행]이다. 누군가가 아이들을 위해 어떤 소설이 나오길 바라느냐고 내게 물으면 이렇게 말하겠다.
"페터 헤르틀링 작품들을 읽어보세요. 우리는 도움을 주고받을 줄 몰라요. 어려움에 처했을 땐 당당히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도 상상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 나가야 합니다. 스스로를 지켜내고 자신도 사회에 일원으로서 행복해야 한다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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