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시선
파울 첼란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 자다가 든 생각, 여름이 가고 있다.

어느 순간 한기가 돌아 몸 밑에 짓눌려 있던 요인지 이불인지를 질질 끌어올려 발부터 목까지 가지런히 덮었던 기억.

이 무시무시했던 더위도 곧 잊히겠구나, 세상에.

파울 첼란의 여름을 옮겨 놓는다.


<여름소식>


이제는 아무도 밟지 않는,

에둘러 가는 백리향(百里香) 양탄자.

종소리벌판을, 가로

질러 놓인 빈 행(行).

바람이 짓부수어 놓은 곳으로는 아무것도 실려 오지 않는다.


다시금 흩어진

말들과의 만남, 가령

낙석(落石), 딱딱한 풀들, 시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어둠의 근원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원열 옮김 / 시작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미결살인사건의 피해자인 어머니의 사건기록이 대뜸, 예의 그 건조한 문체로 뚝뚝 그려진다. 독서에 발동이 걸리지 않고 처음 책갈피를 물리고 다른 책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지점이 바로 이 1부에서였는데 생각해보니 그 이유가 끊임없이 나오는 수많은 이름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경관, 보안관, 경사, 형사, 목격자, 용의자, 피해자, 주변인물, 다른 사건의 피해자, 용의자, 목격자, 피의자... 게다가 몇몇 중요한 이름은 나중에 다시 반복 언급되니 오랫동안 이 책을 떠나있다가는 실마리를 다시 잡기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사건서류를 영구적으로 넘겨받았다고 하니 이름들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엘로이의 기억력이 정말 대단함은 2부에서 드러난다. 다름 아닌 자신의 청년기 기록이다. 약물과 알콜, 절도, 노숙, 주거침입, 감옥, 병원 등으로 점철된 십 수 년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데 읽기만 해도 취할 지경에다 피곤이 쌓이는 느낌, 몸이 어떻게 견뎠을까 싶은 남용과 추락과 깊은 어둠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36년 전의 사건을 함께 파헤치는 동반자 스토너 이야기가 3부를 이루는데, 독립적인 한 편의 다이제스트 추리물로 읽힐 만한 부분이다.

그리고 핵심이 바로 4부인 것. 엘로이는 어머니를 알고 싶어 했다. 죽음이 아니라 삶을, 알고 알아서 온전히 내 것으로 취하고 싶은 집요함. 1부에서 꺼끌꺼끌 다가가기 힘들게 했던 그 많은 이름들에도 불구하고 엘로이는 더 더 더 많은 이름들을 원한다. 어머니를 여는 열쇠가 그것이므로. 건조함으로 마음을 내보일 틈을 주지 않았던 1, 2, 3부에 비해 감정의 촉촉함이 스멀스멀 비어져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엘로이가 어머니를 사랑한다!


네 개의 부로 된 구성이 이렇게 멋질 수가 없어서 허풍떠는 나약한 아버지의 이미지가 드러난 2부를 받쳐주는 것은 듬직한 아버지처럼 많은 가르침을 주는 최고의 친구 스토너 3부이다. 1부 제목 ‘빨강머리 여자’에서 4부 ‘제네바 힐리커’로의 이행에서는 마치 내가 알지 못했던, 왜곡된 인상으로 죽은 어머니로부터 어머니의 진짜 모습이자 원래 이름(또!)으로 회복, 보완, 오류수정, 완성시켜나가는 과정임을 느낄 수 있다.

빈틈투성이였던 어머니의 생애를 조금씩 채워나가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다. 경찰서의 사건기록만으로는 결코 뼈와 살(은유임, 장르가 장르이다 보니 이런 표현도 조심스럽다)을 모조리 찾아낼 수 없다. 태어나고 생활했던 곳, 공부하고 놀고 사랑하고 고민했던 시절, 그 부모들, 피붙이들과의 접촉, 결국 내 ‘근원’을 찾는 여정에 다름 아니다(우리말 제목 잘 붙였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다). 내가 ‘빨강머리 여자’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것은 파편화된 어머니를 온전한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 여자는 또한 ‘나를 구원할 것’이기에. 이 작품 이후에 엘로이는 분명 더 온전해졌음에 틀림없다. 


한 작가의 작품(특히 처음 읽는 작가)을 대할 때 항상 전체에 대한 갈망이 있다. 난 이 작가 이것밖에 몰라, 라는 불완전함. 그래서 완전히 ‘꽂힌’ 작가(전작주의가 될 거니까)가 아니라면 주로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만)을 찾아 읽게 된다. 물론 자서전이라고 해서 대표작이 되기는커녕 전全작의 또 다른 일부가 되거나 작품들과 더 멀어지게 하는 화장을 잔뜩 한 사람만을 경험하게 되는 수도 있는데 엘로이의 자서전은 나에게 저 전체의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사람과 작품을 모두 말해주므로 엘로이 좀 알 것 같은 느낌이랄까. 장르 상 기존작품에 가까이 있는 글이라 그럴 수도 있고 자신의 많은 작품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는데 앞으로 계획하는 작품이 역사소설이라니, 엘로이의 전체가 다시 너무 커져서 난 엘로이 어둠밖에 몰라, 라고 하게 될 상황도 기쁠 것 같다. 이번에 확 꽂힌 작가가 되어버렸으니. 이제부터 따라 읽으면 될 터, 내 읽는 속도가 이래봬도 쓰는 속도는 능가한다ㅎ(번역 출간 여부가 문제될 수는 있겠지만). 전체를 향한 집요함, 엘로이가 이 책에서 그러하듯. 한 방에 엘로이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대단한 작품이다.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출판사 제공 책소개 끝줄은 엄청난 스포일러다. 책의 중후반에 이르렀을 때 저 문장을 저주했다. 이 책 읽으실 분은 참고하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하에 부는 서늘한 바람 밀리언셀러 클럽 120
돈 윈슬로 지음, 전행선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아메리카 대륙의 마약과 정치 지하세계를 건조하고 냉혹하게, 마치 저널리스트가 쓴 보고서처럼 긴 시간 치밀하게 그려낸 마력의 <개의 힘> 이후 거슬러 찾아 읽은 작가의 데뷔작. 같은 작가 안에 이런 따뜻함과 유머가 있을 줄이야. 물론 현 사건의 빠른 진행만을 기대하고 본다면 과거의 이야기나 거리에서 서성대는 문단이 영 ‘곁다리’ 서사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닐의 현재를 지탱해줄 뿐 아니라 문장이 좋아서 군더더기로 보일 부분, 나는 찾지 못했다.


여태 본 탐정 중 가장 젊고 매력적인 캐릭터, 닐. 아래 접힌 글은 이 책을 읽지 않을 분들만 펼쳐 보시라.


접힌 부분 펼치기 ▼

닐의 매력 포인트.

-운전을 못한다.

-운동, 싸움을 못한다.

-문학을 전공하는 청년으로 진심 책을 좋아한다.

-세제 박박 청소 잘한다. (전수 받은 기능)


세상에, 탐정 소설에서 이런 자동차 (추격?) 장면을 본 적 없다. 닐이 운전석에 있고 그 차에 쫓기는 콜린이다.


닐은 운전에 그다지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후진 솜씨는 저주받았다고 할 만했다. 콜린의 모습을 봤을 때 그는 차를 세우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브레이크에 올려놓으려던 발이 가속기로 가 버리면 차는 더 빨리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콜린은 영리하고 거친 남자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만한 대응을 했다.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직선으로 달리지도 않았다. 갈지자로 달렸다. 그리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사람이, 사타구니를 거칠게 두들겨 맞은 사람이, 그리고 차에 치어 거의 죽을 뻔했던 사람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력을 내며 달렸다. 하지만 그 쥐새끼만 한 차는 마치 그의 엉덩이에 자석이라도 붙어 있는 것처럼 죽자 사자 그의 뒤를 따라왔다. 닐은 콜린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반대로 생각하는 재주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탓에 자신의 의도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상황이 벌어지게끔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미친 듯이 도망치는 콜린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애쓸 때마다 어찌된 일인지 차는 정확히 콜린의 방향으로 맹렬하게 돌진했다.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는데, 특히나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 전혀 통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운동에 관한 부분. 약골을 면하게 해 주려고 권투를 하게 하는데 기대할 법한 ‘의외의 역전승’ 따위 절대 없다. 매우 마음에 들었다.


“아마 때리기 힘들걸.”

“그 친구 말이 맞을 거야.”

그레이엄도 거들었다. 닐이 주저하며 오른쪽 주먹을 날렸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린 전구를 때리려고 애쓰는 새끼 고양이의 앞발에서 느껴질 만한 ‘치명적 위험’을 담고 있는 주먹이었다.


스파링이 끝난 후 닐과 그레이엄은 버거조인트에 있었다. 닐의 턱은 약간 부어 있었고 한쪽 눈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재밌었어, 닐. 아주 즐겁게 봤는걸. 오후 시간 때우게 해 줘서 고맙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잖아요.”

“너도 꽤 잘 했어. 네 갈비뼈가 그 녀석 주먹을 멍들게 했을걸.”

“그것도 다 작전이었어요. 10분만 더 있었으면 다운시켰을 텐데.”


펼친 부분 접기 ▲


책을 좋아하는 닐이 고전 속의 캐릭터를 소환하여 누군가를 호명하는 방식도 무척 재미있어서, 거론되는 책들을 더불어 읽어보고 싶어진다. 여기서는 특히 찰스 디킨스와 토비아스 스몰렛 등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돈 윈슬로 정말 멋지다. 닐 캐리 시리즈가 또 번역되어 나오면 계속 읽어볼 게 틀림없지만, 만남이 길어지면 혹시 실망할 부분이 생길까 조금 두려워지기까지 할 정도로 좋다. 원 문장이 워낙 훌륭하리라 짐작되는 바이나 '옮긴이의 말'도 없고 약력도 없는 번역자의 능수능란한 해석도 큰 한 몫을 차지하지 싶다. 런던의 ‘산소가 없는 듯한’ 숨 막히는 더위가 요즘 같은 날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독서였다. 아, 행복해.



*접힌 부분이 펼쳐지지 않는 기현상이-_-. 그나마 서재에서는 작동함.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쥐새 2013-07-1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기현상' 때문에 에르고숨님 서재에 와 봅니다~ 책소개 감사드려요~

에르고숨 2013-07-17 13:57   좋아요 0 | URL
흡- 낚이셨군요ㅎㅎ. 이 책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너무 기대하시게 될까봐 문득 걱정도 되네요. 반갑습니다.
 
망친 책,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 위대한 작가들의 실패에서 배우는 성공적인 글쓰기 패러독스 12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망친 책이라니 과연 엉뚱하고도 매력적인 상상력의 바야르다. ‘읽지 않은 책’에 주눅 들지 않던 모습 그대로 작가들의 실패한 작품에 들이대는 칼날이 아주 거침없다. 더군다나 목차를 보면 프랑스 문학사에서 늘 키워드로 등장하는 큰 이름들, 그 권위로 말하자면 읽지 않은 책일지라도 먼저 고개를 숙이고 긍정부터 하게 될 성 싶은 거물들이라는 사실.


먼저 프랑스문학의 르네상스기에 프랑스어를 더욱 아름답게 빚었다는 뒤 벨레와 롱사르, 고전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르네유와 몰리에르, 계몽주의의 두 거물 볼테르와 루소,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시기의 샤토브리앙과 위고, 단편의 귀재 모파상, 20세기를 알리는 프루스트,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샤르, 『지붕위의 기병』으로 유명한 장 지오노,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누보로망 작가 뒤라스까지. 자, 이 정도면 가뿐하겠어~.


그런데!! 작품의 제목들을 보자;;


뒤 벨레 『올리브』(1549),

롱사르 『라 프랑시아드』(1572),

코르네유 『동방의 황제 헤라클리우스』(1646),

몰리에르 『동 가르시 드 나바르 혹은 질투심 많은 군주』(1661),

볼테르 『라 앙리아드』(1728),

루소 『루소가 장 자크를 심판하다』(1776),

샤토브리앙 『순교자들 혹은 기독교의 승리』(1809),

위고 『』(1857),

모파상 『죽음처럼 강한』(1889),

프루스트 『장 상퇴이』(1904),

샤르 『원조 방앗간』(1936),

지오노 『열광적 행복』(1957),

뒤라스 『사랑』(1971).


아흑. 비교적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대화』(책세상, 2012. 상품사진 넣지 않으련다. ‘망친 책’ 리뷰에 검색되어봐야...)와 1994년에 나왔으나 지금은 품절인 뒤라스의 『사랑』외에는 우리말로 나오지도 않은 듯(알라딘에서 대강 검색해본 결과가 그렇다는 얘기, 장담할 수는 없다). 이 둘을 빼고는 제목들이 어찌나 생소한지, 바야르가 혹시 조르주 페렉 식의 거창한 농담을 뒤에 숨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해 보았을 지경인데-_-; 이 책 분명히 소설은 아니다.


(이럴 줄 알았는지) 친절한 바야르 씨, ‘연구 작품’ 목록에 초간단 줄거리를 넣어놓으셨다. 덕분에 이 실패작들을 깎아내리고(<경악>), 프로이트를 소환해 생각해보고(<성찰>), 떼어내어 다른 곳에 붙이거나 등장인물을 바꾸고 작가의 현전 농도를 서로 교환해 보는 등의 온갖 하이브리드 텍스트(<개선>)의 짧은 사례들을 따라 읽기가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 쭉쭉 읽혔다는 뜻은 아닌데, 중간 부분 프로이트할배(아, 나 이 사람 정말 싫어하나봐)가 등장할 때는 문장이 쉬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어쩜, 이 책 스스로가 ‘망친 책’이 되려나보다, 라고까지 생각했을 정도. 다행히 <개선> 장이 정말 재미가 있어서 망친 느낌 다 벌충하고도 남는다.


그 중에서 모파상의 실패작을 뒤라스로 개선하는 부분은 정말 최고로 웃기고 아름다워서 발췌해 놓으려 한다. 『죽음처럼 강한』과 『사랑』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로 작가의 현전 정도(거칠게 말하자면, 작가가 너무 드러나거나 개입하는 ‘환각의 글쓰기’ / 작가가 심하게 부재하는 ‘고립의 글쓰기’)를 꼽는데, 그 양 극단에 이 두 작품이 위치하기 때문에 둘을 절충한다는 얘기다. 모파상에 뒤라스 조금, 뒤라스에 모파상 조금. 이 발칙한 상상/개선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순서대로 원래 모파상과, 뒤라스를 가미한 모파상이다. (작품 속 여자의 이름이 ‘아니(아마도 Annie)다. 부정의 답 (도리도리)아니’로 읽힐까봐 Annie는 내가 삽입)


그녀는 그를 붙잡아 다른 거실, 사람들이 말소리를 들을 수 없는 안쪽 거실로 이끌었다. 그의 재킷 자락을 움켜쥐고는, 그에게 꼭 달라붙은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를 끌고 갔다. 그녀는 그를 원형의 작은 의자까지 끌고 가서, 억지로 그를 의자에 주저앉히고는 자신도 그의 곁에 앉았다.

“올리비에, 나의 친구, 나의 유일한 친구여, 제발 부탁이니, 그 앨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이 하는 모든 행동에서 느끼고 있어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목숨을 걸 수도 있어요. 단지 당신의 입을 통해 알고 싶은 거예요.”

그래도 여전히 그가 발버둥을 치자, 그녀는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오! 친구여, 친구여, 나의 유일한 친구여, 정말 그녀를 사랑하세요?”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면서 외쳤다.

“천만에, 천만에! 맹세컨대 절대 아니오!”

그녀는 손을 그의 입 쪽으로 내밀어 그의 입을 봉하듯 막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오! 거짓말 말아요, 너무 괴로워요!”

이어 그녀는 그의 두 무릎 위에 머리를 떨군 채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그에게 보이는 거라곤 그녀의 목덜미와 흰 머리카락들이 많이 섞여 있는 금발 머리 타래뿐이었다. 어떤 거대한 연민이, 어떤 거대한 고통이 그의 전신을 관통했다.

그는 그녀의 무거운 머리 타래를 한 움큼 가득 쥐고 머리를 난폭하게 다시 세워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격정적인 두 눈을 자기 쪽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눈물이 가득한 두 눈 위에,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입술을 던졌다.

“아니Annie! 아니! 나의 소중한, 나의 소중한 아니!”


그녀는 그를 붙잡아 다른 거실로, 사람들이 말소리를 들을 수 없는 안쪽 거실로 이끈다. 그의 재킷 자락을 잡아끌고 간다. 그를 원형의 작은 의자까지 끌고 간 뒤, 억지로 그를 의자에 주저앉히고는, 자신도 그의 곁에 앉는다.

그의 곁에 앉아 그녀가 말한다.

“이봐요, 올리비에.”

그녀의 목소리.

“오!”

“천만에.”

그녀가 손을 그의 입 쪽으로 뻗는다. 머리를 떨군다. 그 남자의 무릎 위에서, 그녀가 흐느낀다.

그녀가 흐느낀다.

그의 곁에 앉아 있다.

그녀의 목덜미와, 어떤 거대한 고통.

그 머리타래를, 그가 다시 들어올린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아니Anni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 vs 뉴욕 - 두 도시 이야기
바랑 뮈라티앙 지음, 최하나 옮김 / 새움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발코니에서 보는 발랄한 일러스트 책.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앗, 일시정지 당했다.



아무리 글 없는 그림책이라지만, 일러스트들도 어찌나 종알대고 있었는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그 형태들을 ‘읽어’내고 있었는지 새삼 깨닫는 페이지였기 때문. 어떤 말 많은 면보다 더 오래 사람을 붙드는 마력의 추상화, 미니멀리스트 페이지, 상상의 창, 최고의 88-89쪽, 어떻게 부르든.

우디 앨런이 말한 바 있는 ‘파리의 완벽한 회색’과 <해리샐리>에서 봤던 뉴욕의 가을 하늘이다. 이 작은 페이지 안에서 나는 이미 파리와 뉴욕의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 안에 있었는데 그래서 저 밑의 깨알 같은 글씨는 사족, 아니 비행기 창문에 붙어 있는 경고문(‘열거나 나가지 마시오, 까마득한 추락의 위험이 있습니다’)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파리와 뉴욕은 아니지만 저 두 하늘과 두 가지 언어의 느낌 간 대비를 보여주던 옛날 영화가 떠올랐다. 젊은 프랑스 여자가 미국으로 건너가 그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 하며 겪는 우여곡절, 거의 존재감 없이 사라졌던 <퍼시픽 팰리세이드>.

외로운 영혼 소피 마르소가 L.A.의 해변을 거닐다가 마침 담배(인지 불인지)가 없어, 조깅하던 노부부에게 ‘혹시 담배 좀...’ 하니, 거의 경멸에 찬 시선으로 ‘우린 담배 따위 안 피웁니다. 담배란 말이지요, 건강에 해롭고 어쩌고...’


  


딱 이거다. ‘빌어먹을 웰빙어들, 재섭서...’의 표정을 소피의 얼굴에, 그래도 아름다웠던 그녀. 사랑에 있어서도 무척 힘들어했다. ‘쉽게’ 밤을 함께 보내려 하지 않는 미국 남자들 때문에.


 


저 두 가지 인사의 차이만큼이나 소피에게는 친밀감을 느끼기 힘든 미국.

그래서 어떻게 되냐고?

기억이 안 난다.


매력의 두 도시, 난 아무래도 파리 쪽이다. 누가 ‘파리’ 하면 덜컥 향수nostalgia(약간의 perfume도 되겠다)부터 느낀다. 헤밍웨이가 말한 ‘행운’이 내게도 있었기 때문이고 그게 벌써 오래전 과거가 되어버렸으며 이제는 함께 나눌 사람이 점점 없어져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하여 기억자체마저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것입니다.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어니스트 헤밍웨이 (212쪽)


저 두 페이지의 일시정지 마법에 취해 발코니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며 축제... 후의 숙취 같은 젠장 향수, 하다가 문득 서울의 하늘은 어떻지? 플레이모드로 돌아왔던 봄날 오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3-11-05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삽입하신 영화는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은 작품인가보네요. 알라딘 검색해도 dvd 안나오고 ..ㅠㅠ

에르고숨 2013-11-05 18:06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 <고요한 펠리세이드>(버나드(베르나르) 슈미트, 1990)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나봐요. 어찌어찌하면 어둠의 경로로 보실 수도 있을 듯하나, 뭐 그런 노력까지 들일 만한 영화였던지는 장담 못하겠네욤, 샤샤샥-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