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로이 대산세계문학총서 75
사무엘 베케트 지음, 김경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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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두었던, 은 거짓말이다. 다른 만만한 술들을 먼저 꺼내 마시다보니 마지막, 다시 말해 오늘까지 손대지 않은 병으로 남아 있던 포도주를 땄다. 크리스마스라기에, 그리고 마침 아주 조금은, 나 외로운가? 아니, 외로워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 아닌 자책이 들어, 부제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든 책을 들었다가 조금 전에 집어던진 참이다. 제목에 속으면 안 된다. 형식에도, 인터넷 사전을 띄워놓고 단어를 확인해가며 읽게 하는 현란함에도, 단정함에도, 책 만듦새에도, 필자의 이름에도.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약간의 위무를 찾고 있었지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틀 전에 읽은 놀라운 책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기에, 좀처럼 하지 않는, 그것은 내가 반추동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으른 습성에 따른 것이기도 한데, 되새김질을 해서라도 자위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적잖은 걱정거리를 던져주는 일임을 모르지 않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볼 어떤 한 시선이 벌써부터 따갑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위무가 필요한 나는 그 책 바깥에서는 어떠한 어루만짐도 만날 수 없고 지금 나는 그런 손길이 무척 필요하므로 차라리 뚫어보고자 하는 그 시선을 견디어내고 말리라.

 

결코 이야기가 되지 않으려 하는 쓰기, 그래서 어쩌면 성공적으로 이야기 아님, 또는 아무것도 아님이 되어버린 어떤 글로부터 어떻게 감동을 받으며 아름답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수 있었는가가 의문인, 그래, 언젠가는 밝혀야 할 제목, 사뮈엘 베케트의 『몰로이』다. 아니, 질문이 틀렸다. ‘이야기 아님’에 어째서 감동받을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답다는 감탄도 불가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 거지? 감동이 일관된 ‘이야기’에서 오는 거란 말인가? 알아 볼 일, 그러므로 리뷰에 소설의 줄거리가 들어갈 필요가 하등 없음주의자!인 나의 게으른 성격에 참으로 맞춤한 작품이건만, 간혹 일탈하고 싶어 하는 기질이 하필 지금 발현하여, 굳이 줄거리를 여기에 한 줄로 말하겠으니, 소설에서 이야기를 원하는 영혼들에게 이건 엄청난 스포일러가 될 터이다, 아무렴. 몰로이는 모친의 집을 찾아가는 중이고 모랑은 그런 몰로이를 찾으러 다니는 이야기다. 끝.


하지만 나도 인간이라,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전진은 이러한 일의 정황으로 영향을 받아, 내가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든지 간에, 그때까지 항상 그랬었듯이, 느리고 고통스러운 데서 이제는,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정지의 끝도 없고, 십자가형의 희망도 없고, 내 진정으로 말하건대, 시몬도 없는, 진짜 갈보리의 고난으로 변했고, 난 빈번하게 멈춰야만 했다. 그렇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나는 점점 더 자주 멈춰야 했고, 멈추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114쪽)


낯선 숲길을 한참이나 헤매는, 꿈인지 왜곡된 기억인지 심각한 농담인지 저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은밀하게 올라가는 장난인지, 내뱉는 말은 통하지 않고 귀도 어두우며 다리까지 굳어 몹시도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발걸음, 급기야는 배를 땅에 대고 기어, 기어서 나아가는 악몽 같은 여정에 오로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줄기차게 혼자 말하는 문장들만이 명료하다. 꿈같은 공간, 종잡을 수 없는 시간, 끊임없이 이어지는 중얼거림. 배경 없는 인물 사진에서 인화된 인물만이 부담스럽게 두드러지며 관람자를 쳐다보듯, 사유들이 수정 같은 문장들로 성큼 와서 뜻밖의, 맙소사, 위로를 선사한다.


나는 주머니에서 야채 칼을 꺼내 손목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통증이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난 먼저 소리를 질렀고, 그러고 나서 멈추고 칼을 닫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는데, 내심 다른 결말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거다. 본래로 돌아간다는 것은 나를 항상 슬프게 했지만, 삶이란 본래로 돌아감의 연속인 것 같고, 죽음 또한 일종의 본래로 돌아가는 것임이 분명한 듯하다, 그렇다고 한들 내겐 놀랍지 않다. 바람이 그쳤다고 내가 말했던가? 가랑비가 내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바람에 관한 모든 생각을 제외시킨다. (90-91쪽)


몰로이가 길을 나선 게 맞나? 어디로 가던 중이었지? 모친의 침대에서 글을 쓰고 있노라고 시작한 이 불구의 노인네, 사기꾼, 거짓말쟁이, 간절하게 원하나 허망하게 도달하지 않는 오르가슴의 좌절 같은 여정을 써 놓고 툭,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리는 배신자. 그렇다면 모랑은? 아, 투덜이 모랑, 몰로이를 찾는 임무를 맡은 모랑은 몰로이를 찾아내어서(찾아낸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또 다른 배신자이며 시간이, 그런 게 있다면, 흐를수록 몰로이와 똑같아지는, ‘맹렬히 붕괴해가는’ 섬뜩한 거울 이미지다. 언어를 믿지 않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이야기, ‘부재로의 귀환.’ 말을 하면 할수록 저만치 달아나는 핵심, 혹은 에두를 수밖에 없는, 결코 1:1 대응으로 나서주지 않는 글, 속절없는 무능력 또는 불가능성이 몰로이 혹은 모랑의 절뚝거리며 에두르는 헛걸음이 상징하는 것인가. 상징이라니, 베게트가 들으면 펄쩍 뛰실 일. 무의미, 부재를 추구하는 작품에서 숨겨진 의미 따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부조리’ 정도에서 머물러야지. 부조리극의 대명사, 땅 밑에서 곧 올라와 사방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작가에 의해 몇 년 뒤 ‘심심풀이’ 삼아 쓰일, 고도Godot의 움. 몰로이와 모랑, 행인 A와 B, 혹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라고 불러도 될 베케트 적 연속성.


왜냐하면 내 안엔 항상 여러 어릿광대 중 두 놈이 있는데, 한 놈은 자신이 있는 곳에 그대로 남기만을 주장하고, 다른 한 놈은 좀 더 멀리 가면 덜 나쁠 거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나는 무엇을 하든 간에, 이 분야에서는 항상 만족했다. 그리고 난 불쌍한 그 친구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이해시키려고 번갈아 양보했다. (71-72쪽)


자, 네모반듯하게, ‘까맣게 종이를 채웠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늘 배신하는 글과 말을 보란 듯이 꺼내, 오늘은 날이 좋구나, 볕에 척 널어 말리듯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발을 질질 끌며 하염없이 흔적만 남기는 에두름, 어디로 가기를 원했더라? 나에게? 그 사람에게? 맞다, 그랬었지, 내 마음 어루만지러. 저 잘생긴 아일랜드 작가가 언어의 장식성을 배제하기 위해 프랑스어로 쓴 글, 한국어 번역으로 읽는 내게까지 전해지는 아득한 감동, ‘반(反)전통’, ‘반(反)내러티브’라는 전위성과 시대성을 뛰어넘어, 아니 그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어슴푸레한 저녁에 위로하는 빛처럼, 마음을 열고 무장해제한 채 보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 그래, 문학의 힘, 2013년 12월 25일에 내가 포도주를 따기까지, 『몰로이』에 다가가기 위해 혹은 멀어지기 위해, 아니 차라리 『몰로이』를 구실로, 흔적을 남기기까지 조용히 기다려온 듬직한 예술. 아껴두었던, 은 거짓말이 아니다. 오늘을 위해 기꺼이 남겨 두었던 포도주를 땄었다. 내 다정한 친구, 내 갑옷.


Merci, Samuel Barclay Beckett. (1906~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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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괴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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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이상하게 타는 바람에 책무더기가 산을 이룰 지경인데 <결괴>를 읽고 나서 다음  책을 선뜻 손에 들지 못하고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그만큼 센 작품을 내 놓은 거 맞다. 1천 쪽도 안 되는 주제에-_-; 낭만주의 언저리에만 정통한 줄 알았던 작가가 현재사회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무기는 날카로운 칼이건만 충격은 망치 같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칼에 베는 순간의 충격이 욱신욱신 쨍- 한 게 망치와 크게 다름은 없을 수도 있겠다. 줄거리와 스포일러 없는 리뷰가 가능할 것인가 과연.


1.


“(…)문제는 단 하나, 살인이 나 자신에게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야. 그게 바로 평화라는 것의 기만적인 정체야! 평화가 평화로 느껴지려면 평화롭지 않은 현실이 불가결하지. 어디에 얼룩을 찍을 것인가? 어디 먼 곳,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서 살인이 일어난다면 기가 막히게 이상적이지!(…)”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의 핵심을 그대로 읽는 듯한 이 문장은 현대의 범죄자, 사이코패스라는 병명을 가진 ‘환자’가 하는 말이다. <죄와 벌>을 염두에 두고 착상했다는 이 작품 <결괴>는 현대의 죄가 질병이며 그것의 치료는 행복을 위한 것임을 짚고 있다. 그러나 행복이란 것이 상품광고에서나 가능한 허상임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곪은 속을 얼마나 잘 포장하느냐, 자신조차 기만할 정도로 얼마나 더 능숙하게 거짓말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테러범들의 경고 동영상을 연상시키는 스너프 필름 속에서 환자-살인자는 다름 아니라 저 행복에 관해 질문한다. 소위 ‘행복 파시즘’에 대한 도전이자 폭로인 셈인데, 피해자는 목숨을 걸고서도 허상을 지키고 싶어 한다. 


2.


일관적이며 완결적인 하나의 ‘나’를 상정하기란 어렵다. 구체적인 나, 즉 어제/오늘/내일의 나, 너/그/그녀와 있을 때의 나, 거기/저기/여기에 있을 때의 나, ‘대학 친구와 고등학교 친구를 우연히 한꺼번에 마주치면 왠지 좀 어색’한 나, 복수형의 ‘나들’이 히라노가 말하는 ‘분인(分人, dividual)’ 개념이다. 이러한 개인을 밖에서 볼 때 당연히! ‘알 수 없다.’


“인간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 윤곽이 풀린 정보 다발이야. 살아가는 한 내 정보는 계속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여러 장소, 여러 시간에 편재하는 나라는 인간의 정보를 모두 파악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해! 게다가 입수되는 정보는 항상 우연적이고 단편적이고 이차적이며,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십인십색이지! 그렇게 수집된 정보와 정보원(情報源)인 나 자신은 절대로 완전히 일치할 수 없어!(…)”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해와 왜곡이 더해지기까지 한다.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는 모르는 선정적인 신문, 시체에 꼬이는 파리들 같은 방송, 어떤 경우는 가해자보다 더 심한 상처를 주는 파렴치한 미디어들의 행태 말이다. 파리 떼가 시체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은 본능이니 이들이 반성하거나 변화하는 것은 진정 돌연변이를 기대하는 수준이 될까. 과도한 정보와 원치 않는 감동들을 조금 덜 느끼고 조금 덜 알 순 없나, 좀 덜.


3.


<장송>에서도 느꼈지만 죽음과 부재의 분위기를 어쩌면 이렇게 잘 표현할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병으로 희미해져 가는 존재의 선, 희박해지는 쇼팽의 호흡에 얼마나 저릿했던가. <결괴>에서는 갑작스런 부재다. 이안 감독의 <색, 계>에서 ‘댕-’하는 시계소리 한 방 같은 그런 부재. 현학적인 다카시(주요인물)의 무수한 문장들이 있지만 가장 허전-한 장면은 요시에(죽은 이의 아내)와 그들의 아이가 나오는 지점이다.


순간 요시에는 하마터면 ‘아빠 오면 혼내주라고 한다!’라고 말할 뻔했다.


저 막막한 놀라움 너무 잘 알겠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가서 다 그대로인 것 같은데, 도대체 뭐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하다가 바보처럼 ‘근데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라고 입을 떼는 대학생(내 얘기다)처럼. 그제야 가슴 가득 할머니의 부재가 스며들던 경험. 있던 사람이 더 이상 없음, 그 생기를 가져간 본인 몸 안의 질병에게서도 변명을 듣고 싶은 심정인데 하물며 타자의 병-살인자에게 희생당한 경우라면 어떻겠는가. 용서라는 크고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용서한다는 건 결국 끝낸다는 것이 아닐까? ……잊을 수 없다면 용서하고 끝내는 수밖에 없어.(…)”


용서가 끝내는 것이라면, 결코 잊지 않고 끝내지 않기 위해서는 용서를 행사할 권리가 있는 사람의 단호한 죽음 밖에 다른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디에서 봤더라, 자살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어느 정도는 세상과 타협한 것이라는 말. 서로 통한다. 용서하고 잊어 세상과 타협할 것인가 결코 잊지 않고 용서하지 않으며 끝내 타협하지 않고 죽을 것인가.


현대사회 3부작의 첫 작품이라는데 벌써 기대 이상을 봐버렸다. 좀 소름 돋지만, 고백할 수밖에 없겠다. 히라노 씨, 팬입니다. <결괴>를 읽은 지금 이 순간의 제가 말입니다.


 

**결괴 (터질 결決, 무너질 괴壞) : 물에 밀려서 터져 무너지게 되다, 둑이나 방죽 따위가 물에 밀려서 터져 무너짐 (다음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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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
마리 드루베 지음, 임영신 옮김 / 윌컴퍼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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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이 나올 즈음 자신은 이 세상에 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저자의 마지막 글이라 처음부터 울컥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는, 원제 <살아야 할 6개월>이다. 대대적으로 광고가 되어 소개 글만 보아도 내용이 훤하나 슬픔과 고통의 구구절절을 읽으면서 갖는 차분한 시간은 경건하고 소중했다.


하지만 환자는 자기 몸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치료받도록 부추기는 의사와 가족들한테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몸이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 말이다! 소중한 사람을 자기 곁에 계속 두기 위해서 사람들은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떠나는 사람은 그럼 이기적이어도 되는가. 소중한 사람들끼리, 물론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서로의 이기심이 충돌할 때 불치병으로 무의미한 고통을 받는 당사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게 여전한 내 생각이다. 슬픔은 당연히, 남는 사람들의 몫. 그것과 함께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당사자 본인에게 주는 것이 남는 사람들의 마지막 예의이자 배려일 거라 본다. 헛된 고통을 중지시키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끝까지 괜찮은 모습으로 기억되고자 하는 바람. 오규원 선생의 <죽고 난 뒤의 팬티>가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마리 드루베의 글을 보충하는 남편 베르트랑의 문장이 군데군데 보라색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내게는 온통 눈물로 보였다. 벨기에로의 마지막 여정은 둘이 가서 혼자 돌아오는 ‘막막한 외로움’, 왜 아니겠는가. 드루베가 ‘선택’한 죽음의 기록의 뭉클함은 저 사랑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자주 나에게 와서 말을 걸어주세요. 다정히 대답할게요, 여보. 나의 영원한 사랑.”

-마리가 남편에게 쓴 마지막 편지 중에서


마리 드루베는 살았고 이제는 죽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했던 사람이다.

결국 이게↓ 답이라면,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르네 바르자벨


그럼 나는 이미 죽은 사람, 아니면 이젠 죽지도 못할 인간인가...? 엉뚱하게,

죽기위해 사랑해야겠다, 귀찮기 짝이 없게도.


이런, 참 좋은 책인데 이상하게 삐딱선을 타고 말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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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9-10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에르고숨님, 삐딱선을 타신 게 아니라...생각의 미로가 확장된 것으로 보여요...

오규원의 저 시는 참 와닿네요. 저도 저런 생각을 수시로 하곤 하답니다.^^

에르고숨 2013-09-11 02:32   좋아요 0 | URL
흡- ‘생각의 미로가 확장’, 혹시 그 미로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언젠가부터 말이 많아지면서, 옷을 하나하나 벗어가는 느낌입니다. 부끄럽고, 부끄럽고, 부끄럽고...
견디셔 님도 그 느낌 아실 듯ㅎ.
 
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에세이집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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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을 맞으면서 꼭 읽어보고 싶었다. 9월, 하면 이제는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사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가 막히게 티비화면에 포착된 그 비극을 말함이다.

 

그런데 아룬다티 로이의 명연설문에서 9월은 2001년의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눈물이 쏙 빠지게 더듬고 있다. 칠레 9ㆍ11(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 팔레스타인의 9ㆍ11(1922년, 영국의 신탁통치 선포)을 비롯하여 미국과 동맹국들이 저지른 수많은 패악질 이후 지나온 숱한 9월들 말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글은 미국 현지에서, 그것도 무려 2002년에 행한 연설인데 괄호 속 간결하게 박힌 ‘박수’와 ‘웃음’ 뿐 아니라 글에 다 기록되지 않은 ‘눈물’이 얼마나 많았을지 가히 상상이 가는 명문이다. 

그중에서 첫 (박수)가 등장하는 부분은 여기다. 민족주의에 대한 통찰.


이런저런 종류의 민족주의는 20세기에 일어난 대부분의 집단학살의 원인이었습니다. 국기(國旗)라는 것은 정부가 처음에는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데 사용하고, 그 다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한 수의(壽衣)로 사용하는 색깔 있는 천 조각입니다.

 

                   

                                                                                            (사진출처:해커스AP뉴스받아쓰기카페)

 

 

수전 손택의 ‘바보’와 완전히 상응하는 바로 그 바보, (“슬퍼할지언정 바보는 되지 말자.”) 지금 우리 주류 언론들이 하고 있는 짓. 어쩌면 책이 낡지 않은 게 아니고 우리가 낡은 건지도 모르겠다.

책에 실린 8편이 모두 10여 년 전에 행해지거나 쓰인 연설과 기고문인데 미국 제국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비판을 기저에 깔고 있는 그것들에 먼지가 앉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가령 세계화에 대한 지적을 보면.


‘자유 시장’이 훼손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 주권이 아니라 민주주의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저 보이지 않는 주먹이 더욱 큰 역할을 합니다.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줄 ‘달콤한 거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다국적기업들은 관련 개발도상국의 국가기구-경찰, 법원, 때로는 군대-로부터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이러한 거래를 추진하거나 프로젝트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계화’는 가난한 국가에서 인기 없는 구조개혁을 밀어붙이고,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충성스럽고, 부패하고, 가급적 권위주의적인 정부들로 구성된 국제적 연합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일러스트출처:한국경제)

 

 

또한 이 책의 현재성이 우리에게 특히 더 가까이 다가오는 지점은 첫 장인데, 인도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져오던 댐 삽질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로이는 댐 건설을 반대하다가 어이없게도 ‘법정 모욕’ 이유로 기소되기도 했다. 


“50년대에는 댐이 환상적인 기술공학의 위업처럼 보였다는 것이 짐작이 가요, 하지만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이제, 어떻게 지금도 그게 환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자연의 복잡한 과정에 이렇게 대규모로 간섭하는 것은 거미줄에 장화를 신고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물을 내려 보면서 거기에 시멘트를 쏟아 붓는 장면을 상상하라고 가르치니 도대체 이게 무슨 문명인가요?”

 

               


 

훌륭한 글이 이렇게 오랜 현재성을 갖는 것, 그것에 감동하는 것이 과연 벅차기만 한 일인가. 바보는 되지 않아야겠고 분노는 쌓이고. 로이가 주는 답은 ‘저항하라’이다. 말과 행동으로 하는 저항만큼 매일을 살아가는 방식으로도. ‘고통스럽고 또한 기쁘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저항하며 살기를 말함이렷다.

 

‘작가 겸 활동가’라는 명칭에서 ‘침대 겸 소파’가 연상되는가? 로이는 그렇단다. 아룬다티 로이는 그저tout court 작가다. 문장이 낡지 않는, ‘아픈 눈을 뜨고 있는’ 아름답고 강한 작가.

 

“나의 경우처럼, 평화롭다고 추정되는 상황 가운데에서 한 작가가 불행하게도 조용한 전쟁에 마주치게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일단 그것을 보고 나면, 그걸 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본 다음에는 입 다물고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발설하는 것만큼이나 정치적인 행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침저녁 낯선, 아마 일 년 전에 익숙했을 그 바람이다. 이번에는 마치 대단한 노력으로 9월을 내가 끌어다 놓는 기분으로 맞아본다(무슨 말인가? 달력을 어제 미리! 넘겨 놓는 놀라운 부지런함으로 이 달을 마중했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문득 발 시린 가차 없는 가을에 이번엔 결코 놀라지 않겠다는 듯이.

9월이여, 오라. 살아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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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9-06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 was a lie, tout court.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거짓말이었다.)
tout court 가 무슨 말인가, 찾아보니 이런 예문이 뜨네요.

아룬다티 로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러니까 뼛속까지 작가다, 뭐 그런 뜻인가요?

에르고숨 2013-09-06 22:25   좋아요 0 | URL
tout court는 그저, 간단히 말해서, 말 덧붙일 필요 없이, 등의 뜻을 가진 프랑스어입니다. 그러니까 ~겸 작가, 작가 겸~ 에서 ~라는 수식 안 들어간 ‘그냥(simply) 작가’라는 의미로 쓰고자 했던 것이지요. 에긔긔... 꼼꼼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시선
파울 첼란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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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자다가 든 생각, 여름이 가고 있다.

어느 순간 한기가 돌아 몸 밑에 짓눌려 있던 요인지 이불인지를 질질 끌어올려 발부터 목까지 가지런히 덮었던 기억.

이 무시무시했던 더위도 곧 잊히겠구나, 세상에.

파울 첼란의 여름을 옮겨 놓는다.


<여름소식>


이제는 아무도 밟지 않는,

에둘러 가는 백리향(百里香) 양탄자.

종소리벌판을, 가로

질러 놓인 빈 행(行).

바람이 짓부수어 놓은 곳으로는 아무것도 실려 오지 않는다.


다시금 흩어진

말들과의 만남, 가령

낙석(落石), 딱딱한 풀들,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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