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더 홀리데이 wander holiday

 저... 할 말이 있어요. 
 무슨 일이신데요?
 그게 이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쫌 거북목이세요
 맞아요. 원래 좀 그런데 지금은 너무 추워 가지고 어쩔 수가 없네요
 제가 뭐 지적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못 보잖아요. 그래서 혹시라도 모를 수도 있으니까 알려드리려구.
 네, 괜찮아요. 
 
 이건 제가 신문 기사에서 본 거거든요. 올바른 걷기 자세에 대해 알려줬어요. 턱은 조금 당기고, 어깨는 쫙 펴고. 조금 부담스럽게 생각될 정도로 쫙이요. 특히 여성들은 남성들의 시선 때문에 평소에 많이 움츠러 들어 있잖아요. 가슴은 쫙 펴고, 시선은 정면을 응시해야 해요. 조금 멀리 바라본다고 생각하고. 팔은 적당한 힘을 주어서 앞뒤로 흔들고, 걷을 때는 발바닥 뒷면부터 바닥에 닿도록. 평소에 이렇게 걷지 못하더라도 올바른 걸음에 대한 인식을 머릿속에 갖고 있으면 그래도 도움이 되니까
 
 참고할게요. 
 
 바른 자세로 걷기만 해도 목이나 허리가 펴지고, 자세교정이 되면서 건강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목디스크, 허리디스크, 손목터널증후군 이런 걸 조심해야 되니까 평소에 관리 잘해야죠.  

요가를 꾸준히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저 그리고 헬스도 시작했어요. 원래 요가 하면 같이 할 수 있는 건데 지금까지 안 했거든요. 그래서 저번에 한 번 헬스를 했는데 너무 피곤하더라고요.

 원래 운동을 계속 하다 보면 운동을 해야지 오히려 피로가 풀리고 그러는데 운동을 안 하다가 갑자기 하면 그게 그만큼 추가적인 피로로 쌓이니까. 꾸준히 하면 체력에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공부하는 데 체력이 중요하니까. 자전거 많이 타세요. 하체가 탄탄하면 몸 전체를 지탱해주면서 균형이 잡힐 거예요.

 저한테는 걷기가 되게 좋은 운동이라 하더라고요. 많이 걸으려고요.

 사실 제가 저번주에 연극을 봤거든요. 두산아트센터 리뷰어를 하고 있어서. 9월부터 12월까지 2편의 연극이랑 2번의 전시를 보고 리뷰를 써야 해요.  
 
 저번에 한 번 말씀해주신 것 같아요. 리뷰어 하신다고.

 아마 <20세기 건담기> 할 때 말씀드렸나봐요. 이상 좋아하시니까 연극 아마 재밌게 보실 수 있으셨을 텐데.

 그러게요. 이번에 보신 건  무슨 연극인데요?

  워킹 홀리데이라는 연극인데 우리가 아는 그 워킹 홀리데이가 아니라 wɔ:kɪŋ 걷기랑 홀리데이는 이게 분단을 소재로 한 거라 휴전을 휴일holiday라 표현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음, 그렇구나.
 
 휴전한 이후의 나날들을 휴일이라 한 것 같아요. 파주에서 동해 바다까지 DMZ를 따라 걷는 내용이에요. 연극을 하기 전에 연극배우들이 직접 걸어간 걸 영상으로 찍어서 연극을 할 때 스크린에 영상을 띄워서 같이 보여줬어요. 저번에 얘기했던 영화 <와일드>처럼 계속 걸으면서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랄까.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것도 있지만 타인이나 역사에 새겨진 상처를 보듬어 나가는.  
 
 오, 재밌을 것 같은데요?!

 아, 예전에 들은 재미 있는 얘기가 있는데요. 프랑스에서인가 어느 나라는 청소년 범죄자들에게 몇 백 킬로인가를 걸으면 출소시켜주는 제도 같은 게 있대요.

 오, 그게 되게 좋은 것 같아요.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설명해주는 식인데 길가다 마주친 군인에 대해 얘기한다든지, 배우들이 군대에 있을 때 체험한 일들에 대해 얘기한다든지, 총 쏘는 걸 체험하면서 총구를 통해 사람을 바라보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표적으로 보인다던지 그런 얘기들을 쭉 하는데 사실 이 연극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걷기에 대한 거였어요. 오래 걸으려면 제일 못 걷는 사람들이 가운데에 서야 한대요. 50분 걷고, 10분 정도 쉬어야 하고 쉴 때는 다리를 머리보다 높게 올리면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고요. 양말은 발가락 양말을 신는 게 좋고. 몇 겹씩 신어야 한대요. 여기서 상대방의 걸음걸이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게 제일 재밌었어요. 걸음걸이에 그 사람의 인격과 성격이 묻어난달까. 그 중 인물 누구는 아까 말한 올바른 걸음걸이에 가깝게 걷고, 누구는 발걸음이 되게 가벼운데 그러면서도 균형이 잡혀 있고 안정감이 느껴지고. 누구는 탄탄한 하체를 바탕으로 앞으로 쭉쭉 걸어나가는데 거기서 남미의 춤 리듬이 연상되고. 그 장면을 본 이후로 길 가다가 마주친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더라구요.   
 
 스스로의 걸음걸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저는 정자세로 걸을 때도 있긴 한데 좀 바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돼서 그런지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가요. 한 칸씩 올라가면 뭔가 엔진은 쌩쌩 돌아가는데 바퀴가 거기에 맞춰서 안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저도 걸음걸이가 빠른 편인데 되게 빠르신 것 같아요.
 열심히 따라가느라고 그렇죠 !! 예전부터 되게 빠르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쫓아간 거였어요.
 아, 죄송해요
 아니에요. 개인의 성향이 그런 건데요, 뭘.
 아니에요. 그건 제가 배려하고 맞출 수 있는 부분이니까. 다음부터 말씀해주세요. 
 걷기 좋아하세요? 산책 같은 거.
 좋아하긴 하는데 걷는 거 자체가 좋기보다는 걸으면서 보이는 풍경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풍경을 즐기려면 보통 천천히 걷지 않나요? 빨리 걸으면서 바뀌는 풍경을 보는 걸 좋아하는 건가요?
 맞아요.
 
 전에 건축신문에서 걷기와 도시를 주제로 한 글들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북촌-서촌 쪽부터 학교까지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조성할 거라는 얘기를 봤어요. 보통 서촌에서 부암동까지 1시간 정도 걸려서 몇 번 걸어가봤는데 지나가면서 보이는 풍경도 괜찮고, 차 소음도 다른 데보다 심하지 않아서 걸으면서 얘기하기 괜찮은 코스더라고요. 부암동은 워낙 조용하고 여유로운 동네니까. 괜찮은 카페들도 많고요. 나중에 시간되면 같이 가요.

 그래요.

2 산책하는 자의 다섯 가지 즐거움

 저는 산책을 좋아합니다. 목적지를 갖고 움직이는 '이동'이 아닌 걷기 행위 그 자체에 목적을 둔 산책-
 VR 기술이 발달하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흐르지 않는 영원의 시간에 갇혀 제자리에서 걷고 있는 느낌은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분명 걸어서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는데 나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없을 때 무슨 생각이 머릿속을 스칠지, 어떤 기분에 사로잡힐지 ...
 예전에는 근처 호수공원 같은 곳도 가곤 했는데 요즘은 거의 학교 안에서만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밥 먹고 캠퍼스를 한 바퀴 도는 코스인데 풍경이 익숙해서 그런지 차분하게 저 자신에 집중하기가 편합니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지만 가끔 생각이 멈춘 듯한 평온한 순간이 찾아올 때를 가장 좋아합니다. 예전에 니체에 대한 어느 책에서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평지를 산책하는 게 좋고, 생각이 막혀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기에는 산을 올라가는 게 좋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평지 산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산행에서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겠지만 지형과 걷기 스타일에 따라 걷기의 다양한 변주가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1절에서 썼듯 좋아하는 사람과 걸으면 대화를 나누는 시간만한 게 세상에 또 없는 것 같습니다. 밥 먹으면서 여유롭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 신체적으로 에너지가 가라앉아서 그런지 대화에 온전히 집중 못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분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가라앉다 보면 밤이나 새벽에 출몰하는 내면의 자아가 깨어나 대화의 흐름에 집중하는 걸 방해합니다. 대신 걸으면서 대화를 하면 몸에 기분 좋은 긴장이 유지되고, 두뇌회전도 뭔가 더 빠른 느낌이고, 대화가 좀 더 탄력적으로 굴러가는 느낌을 줍니다. 풍경이 즉각적으로 바뀌는 게 영향이 꽤 큰 것 같습니다. 누구와 어디서 함께 했는지, 어디서 누구와 함께 했는지 장소와 사람이 연결되어 기억에 남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친한 친구와 일요일에 동묘에서 옷 구경했던 게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어떤 친구와는 연남동 '연트럴파크'를 걸었던 기억이 가장 오래 남을 것 같고, 어떤 친구와는 건대 - 종합운동장 사이에 있는 공원이, 어떤 친구와는 부암동에서 서촌으로 오는 길이, 어떤 친구와는 성북천이, 어떤 친구와는 ... ...
 
 음악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 나름의 맛이 있습니다. 음악은 기분과 정서를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쳐 신체의 리듬을 바꾸는 역할을 하는데 가끔 데이빗 보위의 <Modern Love>를 켜놓고 <나쁜 피>의 드니 라방의 질주를 머릿속에 그리며 달리곤 합니다. 8월에 구례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에 한밤중의 터널에서 창문을 열고 <Heroes>를 열창했던 기억도 떠오르네요. 잠깐 샛길로 따지자면 올해 9월에 책방 숨도에서 코스모스 책 모임을 하면서 <Life on Mars>를 듣고, 뤽 베송의 <발레리안> 초입부에 흘러나온 <Space oddity>에 소름 돋았던 기억, EIDF에서 데이비드 보위 다큐멘터리를 봤던 기억 등 데이비드 보위에 대한 추억들이 많이 쌓인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 예정대로 그가 출연했더라면 어땠을지... 사이먼 크리츨리가 쓴 <데이비드 보위(그의 영향)>을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보위는 미지의 쾌락과 반짝이는 지성의 세계를 구현했다. 보위는 우리가 살고 있던 몹시 기분 나쁜 중산층 주택가에서 탈출할 길을 열어 주었다. 보위는 불만을 품은 사람, 자기 자신이 편안하지 않은 사람, 사회적으로 서투른 사람, 소외된 사람에게 가장 능란하게 말했다. 괴짜들, 괴물들, 아웃사이더들에게 말했고, 특별한 친밀함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완전히 환상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이것은 사랑 이야기다. 내 경우에는, 44년 동안 계속된 사랑 이야기.” (pp.189-190)

 3. 워킹 홀리데이Walking Holiday 

 서설이 너무 길었네요. 연극 얘기를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DMZ 도보여행을 통해 분단을 얘기한다'

 작품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한 문장을 이보다 더 잘 쓰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극적인 사건이나 서사가 두드러지는 작품과는 성격을 달리 합니다. 저번에 봤던 <생각은 자유>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적절한 명명인지 모르겠지만 에세이 연극이랄까요. 에세이가 사유와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 쓴 글쓰기 양식이라면 에세이 연극은 이 사유와 감정을 연극적 방법과 장치들을 활용하여 펼쳐 낸 양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은 자유>가 연출가의 독일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에서 바라본 한국사회에 대한 감정과 생각 들을 풀어냈듯, <워킹 홀리데이>는 DMZ 도보 여행을 바탕으로 걸으면서 분단 상황에 대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풀어냅니다. <생각은 자유>가 독일이란 외부의 위치에서 조금 다른 각도로 한국을 바라보게끔 했다면, <워킹 홀리데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배우들의 도보여행에 동참하게끔 유도합니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 인도인 럭키가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인도 하면 '갠지스 강' '코끼리' '요가' '카레' '소' 등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친구들과의 여행을 통해 인도의 젊은 모습,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아마 그의 말에는 '실상'이란 말이 괄호쳐져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듯 북한 혹은 분단 하면 '탈북자' '김정은' '핵무기' 를 먼저 떠올리는 우리가 DMZ를 걸으며 분단을, 또 평화를 실감 있게 느끼고, 가상과 허상의 이미지들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실상을 바라보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마 이 연극을 보고 나서 DMZ 도보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관객이 있다면 연출가의 입장에서 최고의 반응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도보여행으로 DMZ를 걸으며 분단상황을 생각하고 '체험'한다는 포맷은 자칫 잘못 하면 굉장히 평면적이고 단순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시놉시스만 읽었을 때 사실 연극이 그렇게 기대되지 않았거든요. 현장에 직접 가봐야 역사를, 역사의 흔적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메시지는 이미 역사책이나 하다 못해 유홍준 선생님의 답사기를 통해 익히 들어온 얘기인데 도보여행을 통해 분단상황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을지 기대치가 높지 않았습니다. 물론 간단하고 익숙한 메시지더라도 이를 어떻게 새롭게 전달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술에 있어 창조는 마술과 달리 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낸다기보다 기존의 것을 새롭게 감각하고 해석하게 만드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를 테면 반전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은 수도 없이 생산되었지만 이들은 저마다의 접근방식을 취했습니다. 저쟁터에 카메라를 가져가 전투의 참혹한 광경을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둔 방식이 있었고, 스펙터클한 전투를 배제한 채 전쟁터 뒤에 남겨진 일반 사람들에 주목해 전쟁상황이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내모는 상황을 조명하는 데 방점을 찍은 방식이 있었고, 지도자 급의 사람들의 고뇌에 초점을 맞춘 방식, 일반 서민들 중에서도 특히 이중, 삼중적으로 고통받았던 여성을 조명하는 방식, 전후에 상흔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비추는 방식 등등 대부분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전쟁의 잔혹함과 폭력성 앞에 참혹하게 뭉개진 삶/죽음을 포착하여 슬픔에 동화되게끔 비극적으로 연출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워킹 홀리데이에서는 뭔가 새로운 게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 으로 연극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 커다랗지 않은 화면에 배우들이 등장하여 걷기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걷다 보면 자기 자신이 소멸되는 느낌이 든다는, 그리하여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선우'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무대 위 연극과 다큐멘터리 영상이 함께 작품을 이끌어나갈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냥 다큐멘터리로 제작해도 되었을 것 같은데 이걸 무대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워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지를 작품의 관전 포인트로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 놀았던 놀이터를 닮은 흙 무대에 눈길이 갔습니다. DMZ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무대 역할을 하는 흙 위에서 모형을 통해 현실을 아날로그적으로 재현했습니다. 이를 배우가 캠코더로 찍어서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연극이 다큐멘터리가 되고, 다큐멘터리가 연극이 되는 상황, 아니 그보다 녹화된 영상, 시시각각 스크린으로 송출되는 영상, 스크린을 거치지 않는 연기의 앙상블이 한편의 연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연극은 어떤 눈으로, 어떤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구를 통해 사람을 바라보면 그저 명중시켜야 할 '표적'으로 인식되듯 '렌즈'와' '각도'에 따라 사물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미디어에 의해 현실이 재편되고 재구성됨에 따라 인간의 지각방식과 환경 또한 달라진다는, '미디어는 메세지'라는 명제를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다른 시공간에 있는 사물들을 찍어 스크린에 '완성된' 영상을 띄워 보여줬더라면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줄어들었을 텐데  흙 위에 나무가 심어지고, 비닐을 깔아 강이 흐르기 시작하고, 북한군들이 묶는 모텔이 세우는 모습 등을 지켜보고, 그걸 캠코더로 찍어 화면에 띄운 모습과 비교해보면서 결국 이 모든 게 나의 인식/해석에 의해 완성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기승전칸트??). 

 일상을 살면서 우리가 '분단 상황'을 실감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뉴스에서 북한 및 북핵 관련 이슈가 뜬다고 해서 현상의 갈등 너머 분단 상황, 모순의 본질까지 파고들어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그렇습니다. 영화 <매트릭스>가 보여주듯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는 사실 0과 1로 이뤄진 디지털 신호들일 뿐인데 더 이상 가상과 실재의 구별이 무의미해진 시대에 신체나 감정마저도 직접적으로 체험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걷기를 통해 무뎌져 있는 신체의 감각을 일깨워 뭔가를 실감해낼 수 있을까요? 미디어와 하이테크가 일상에 점점 침투하고 융합되어 우리 몸 자체가 하나의 핫미디어가 되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이를 쿨미디어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요? 그래서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신체나 감각, 감정, 사유 를 지상으로 발 붙이게 만들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가장 실감났던 순간은 관객석 뒤에 서서 배우들이 무대에 세워진 표적을 향해 장난감 총을 발포할 때였습니다. 저는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발 쪽으로 비비탄 총알들이 통통 튀어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그중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친구에게 연극 설명을 해줄 때 이 총알이 열 마디 말 이상의 전달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배후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상상하니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저는 비비탄의 매운 맛을 몸소 체험한 바 있거든요. 초등학생 때 딱지 치기, 미니카 경주 시합, 놀이터에서 놀기, 다양한 방식으로 날아봤지만 그중에는 장난감 총싸움도 있었습니다. 연극에서 사용되었던 소총보다는 주로 권총 형태의 총을 가지고 놀았었죠. 그걸 사람을 향해 발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혹 발사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몸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 발사했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쏜 총알에 맞아 누가 울거나 고통스러워 한 기억은 없거든요. 그런데 집에서 아빠와 놀다가 아빠에게 연극에서 사용된 소품과 거의 똑같은 소총으로 근거리에서 총알에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마 눈물이 고였을 것 같은데 울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라면 사내자식이 그 정도에 우냐며 다그칠 만한 분이었거든요. 총을 빼앗아서 갈겨줬어야 했는데...

 아직 실탄을 발포해본 적 없는 저로선 비비탄 총알이 발사되는 2분, 3분여의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습니다. 언젠가 진짜 총을 잡고 표적을 향해 온 정신을 집중해서 총알을 발사해야 하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명탐정코난 극장판 10기? 탐정들의 진혼가 에서 나온 대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총을 발사하는 순간 내 몸 속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일 겁니다. 하지만 평화를 위해 전술적 핵무기를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평화라는 게 존재론적으로 무엇인지 재정의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평화를 어떤 방식으로 달성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확실한 건 평화가 단순히 육자회담에 참석하는 국가의 지도자들에 의해 법적으로 체결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평화를 희망하는 시민들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 잠시 워킹 홀리데이를 가져보면서 생각하고 느껴보는 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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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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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 대한 2권의 책이 이후 한국전쟁 연구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연 중요한 저작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분량 때문에 시도를 못하고 있었는데 적당한 분량의 책이 나와서 독서욕을 마구 자극하네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와 같이 읽어보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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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읽는 시간 - 관계와 감정이 편해지는 심리학 공부
변지영 지음 / 더퀘스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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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저마다 열심히 삽니다. 만약 누군가 급작스레 무엇을 위해? 왜?라고 기습질문 공격을 들어온다고 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행복이란 정답이 있으니까요.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지는 말아주세요. 머리 아프게 고민하기 시작하면 행복이 달아날 테니까.
 행복에 대한 질문이 너무 거창하고 부담스럽다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지, 내가 행복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는지. 여기에 대해서도 답변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평소에 이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내 마음을 읽어내는 데 미숙하다면 행복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요? 언제 행복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자기 자신에게 행복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미지인지, 의미인지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쉽게 행복을 말합니다.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에겐 세상 어느 수학문제 못지 않게 이 질문이 어렵고 난해하게 느껴집니다. 나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7)

 저자 변지영 선생님은 집필동기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너무 열심히 살아와서 더 이상은 노력할 수도 없는 분들, 방향 없이 너무 오래 달려온 분들, 자신이 해온 것에 비해 만족감이 너무 맞은 분들... 이런 분들에게 '자기이해' 매뉴얼을 하나 만들어드리고 싶었습니다.(9) 이 책에 '나답게 사는 삶'의 실마리를 찾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도구'들을 모아봤습니다.(9)

2 내 마음을 읽는 시간

 이번 장에서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잘 읽는 팁으로 목차를 꼼꼼히 읽을 것을 꼽습니다. 목차를 읽으며 책의 구조를 대강으로나마 머릿속에 그려두면 내용을 흡수하는 데 있어 훨씬 수월하다는 겁니다. 목차를 살펴보면

 내 마음을 읽는 법. 관계는 어렵고 감정은 모르겠다면
 1장 나는 왜 항상 휘둘리는가? 나를 읽는 마음도구 1. 자기분화
 2장 일과 사람에 둘러싸여도 허전한 진짜 이유. 나를 읽는 마음도구 2. 애착
 3장 내 감정을 알면 보이는 것들. 나를 읽는 마음도구. 3. 정서분별
 4장 감정은 내 마음의 SOS 신호. 나를 읽는 마음도구. 4. 정서조절
 
 삶을 탄탄하게 구축하는 법. 관계와 감정의 회복을 향하여
 5장 감정에 쓸려가지 않게 닻을 내리는 법. 나를 바꾸는 마음도구 1. 마음챙김
 6장 그 누구보다도 나에게 친절할 수 있다면. 나를 바꾸는 마음도구 2. 자기자비
 7장 마침내, 진짜 나를 만날 시간. 나를 바꾸는 마음도구. 3 조망수용

 1~4장은 마음을 읽는 도구들을, 5~7장은 마음을 바꾸는 도구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책의 만듦새가 깔끔하고 좋았습니다. 장이 시작되기 전 멋진 인용구를 배치하는 전략은 교과서적이긴 하지만 인용구들을 다 메모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구절들만 골라 놓아서 새로운 장을 읽기 전에 독서에 탄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장의 자기분화는 '자율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중요한 타인과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34). 타인의 일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융합은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어 관계의 건강하지 못하고 지속가능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을 자신의 것과 구분하지 못한 채 그저 동의하고 따라가는 것은 말려드는 것enmeshment이라고 표현합니다. 타인에게 말려들지 않고, 자신을 잘 지키면서 상대방에게 친밀한 행동을 취하는 게 바로 공감입니다. 참된 공감은 타인에 대한 진심 어린 염려와 관심에서 나옵니다. '나를 지키면서 상대를 존중하는 건강한 경계'(54)가 지켜졌을 때 참된 공감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친밀성을 나눔과 유지가 가능해진다. 
 
 2장에서 다루는 애착이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을 연결해주는 깊고 지속적인 정서적 유대"(66)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착은 어떤 잉여적인 감정 에너지를 특정 대상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존을 위한 본능'(67)이라고 합니다. 애착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애착 유형은 초기 아동기에 부모를 비롯한 일차적 애착 대상과의 관계에서 형성되어, 우리가 성인이 되어 맺는 관계들에서도 '내적 작동 모델'로 기능합니다(69).
 일상적으로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어른이 되어 상대방에게 사랑을 많이 줄 수 있다고 하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애정결핍이 있어 상대방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는 안정형, 양가형, 회피형의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어렸을 때 한 번 만들어진 애착 유형, 관계의 패턴이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 없이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애착 유형이 한 번 만들어지면 굳어져서 사후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애착 관계가 균형 있게 안정적으로 지속되지 못하고, 특히 급작스런 단절의 경험을 겪은 이들은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은 정서적 유대bond를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관계의 안정성을 검사하고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로 표출되는데 이는 소유욕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결국 관계를 숨막히게suffocating 만들어 함께 가꾸어가야 할 관계의 공유지를 불모지로 변모시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같다고나 할까요. 이성관계에게 남성이 여성을 대리 어머니로 삼는다거나 반대로 여성이 남성을 대리 아버지로 삼는 경우가 어렵지 않게 발견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결핍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집합이 공집합을 포함하고 있듯 말이지요. 이 결핍-공백을 채우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자율적인 관계 맺음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3장 정서분별에서는 구체적으로 정서를 분별할 것을 주문합니다. 우리가 정서에 대해 잘 모르는 이유는 평소에 마음에 의식을 두지 않아서기도 하지만 정서를 인지하고 표현할 만한 어휘가 빈약한 탓이기도 합니다. 언어는 세상을 보이게 만드는 발견의 도구이자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발명의 도구입니다. 좋다 - 나쁘다, 기쁘다 슬프다 화난다 우울하다 짜증난다 같은 어휘로 다 담길 수 있는 감정들의 세세한 결들을 살릴 수 있는 섬세한 표현법을 익혀야 합니다. 이렇게 내가 느끼는 정서가 무엇인지 좀 더 정확하게 인지하게 되었을 때, 즉 정서분별력이 높아졌을 때 '스트레스 상황에 상대적으로덜 압도'(98)된다고 합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내용이 무엇인지 막연하고 모호할 때, 이 감정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자기 마음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되어 외부의 자극에 쉽게 흔들리고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어떤 슬픔은 타인의 위안을 필요로 하지만, 어떤 슬픔은 혼자만의 시간을 진득하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어떤 우울은 밝고 즐거운 분위기로 전환을 통해 거기에 신경을 쏟지 않는 게 낫지만 어떤 우울은 감정의 뿌리까지 파고들어가 심층적 자아와 대면해야지만 해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면적으로 겪는 문제들 중 많은 경우가 무엇이 문제인지 원인파악이 제대로 안 돼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문제화하는 능력, 문제를 잘 파악한다면 문제풀이는 생각만큼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4장 정서조절에서 감정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지를 검토합니다. 감정은 외부 자극에 의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면이 있지만 외부 자극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화적, 사회적 성격이 큰 것이지요. 저는 인간이 감정을 인지하고 명명하는 방식이 색을 인지하고 명명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감정이 일어나는 과정과 감각적 지각이 이뤄지는 과정이 비슷하다(134)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색을 보고 '빨간색'이라 한다면 이는 오답일 겁니다. 순수한 빨간색이 아니라 다른 빨간색일 텐데 이 미세한 차이를 분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그럴 필요도 잘 못 느낄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데이터들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미지와 개념들을 바탕으로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뇌가 예측기계(134)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뇌는 생존하기 위해 정보를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데 여기서 비슷한 비슷한 것들로의 분류가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뇌가 무지, 텅 빔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기존의 지식들을 바탕으로 미지수에 값을 매기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정서가 구성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어떤 정서를 구성할 지에 대한 질문이 남게 됩니다. 책에서는 목표가 정서를 구성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흐르는 물과 같다면 목표는 물이 흐르는 물길을 바꿔 같은 정서적 내용이지만 다른 효과를 내게끔 하는 요인인 겁니다. 이는 굉장히 복합적인 과정이지만 여기서 핵심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감정에 수동적으로 휘둘리는 게 아니라 감정을 맥락적으로 읽고, 설정한 목표를 바탕으로 능동적인 해석을 통해 구성해낼 수 있다는 주체성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 의지로 감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감정-감성적 영역과 지성적/인식적 영역이 통하는 지점을 발견하여 감정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5장에서 마음챙김이란 무언가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166)이라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찰에서 참선을 경험하면서 그때 배운 '알아차림awareness'와 마음챙김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장에서 둘의 차이를 구분하면서 마음챙김을 설명해서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알아차림/마음챙김과 현대(서구)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음챙김 사이 세 가지 차이점이 있다고 말해지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차이는 내면에만 집중하느냐 혹은 바깥세계의 모든 대상을 포함하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불교의 마음챙김이 무아나 무상을 목표로 한다면, 서구의 심리학은 자아의 내면적 균형과 정서적 건강을 중시하는 데서 비롯되는 차이로 보였습니다.
 한 번 간단하게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누구나 한 번쯤 누군가를 챙겨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누군가를 챙길 때 신경을 온통 그 대상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편안해하는지, 불편해하지는 않는지 알아차리기 위해, 또 상황을 최대한 장악하여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육체적, 정서적 에너지가 강하게 소비되는 챙김뿐만 아니라 작고 사소한 챙김 또한 있습니다. 평소 호흡기가 안 좋은 친구에게 미세먼지가 심한 날 마스크를 건넨다든지, 시험을 앞둔 친구에게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다든지 하는 것들이요. 여기서 챙김은 상대방을 평소에 의식하고 있으면서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을 적절한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건강/몸을 잘 챙기라는 말은 해도 마음을 잘 챙기라는 말은 안 하는데요. 좋아하는 사람을 챙기는 마음으로 자신의 상태를 평소에 의식하고, 필요할 때 도움이 될 만한 행동을 적절히 취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답답해 하는 것 같으면 산책을 나가거나 여행을 떠나고, 쉬고 싶다고 하면 아무 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하루를 보내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싶으면 핸드폰을 꺼두고 영화를 본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하며 말이죠.   

 6장은 자기자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근래 들어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는 '자존감'에 대한 비판적인 서술이었습니다. '자존감self-esteem'이라는 원래 "자신에게 중요한 영역에서 실패한 것 대비 성공 비율"(215)을 뜻한다고 합니다. 로젠버그는 자존감을 "비교적 안정적이고 전반적인 자기 가치감"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보통 자존심과 자존감을 한짝으로 묶어 설명하는데 거칠게 구분하면 자존심은 타인에 대하여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라면, 자존감은 스스로에 대하여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자존감이 사회적 기준과 가치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 걸 보면 이 주관적 자기 가치감이라는 게 굉장히 애매해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존감 향상을 자기기만이나 정신승리로 비하하는 시각도 출현하게 되는 것이지요. 책은 자존감에 대해 여러 의문을 던지면서 "자존감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우, 자기중심성과 자기애로 이어지면서 대인관계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지적합니다. 랜디 패터슨의 경우 "'자기혐오'가 있을 뿐 '자존감'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리처드 라이언과 커크 워런 브라운이 발표한 글 <왜 우리에게 자존감이 필요 없는가?>에서 이들은 "'나'를 대상으로 바라보는 서구 심리학의 오랜 관습 때문에 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의견을 내면화한 것을 '나'로 착각하게 되었다고 설명"(218)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존감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자기자비는 어떤 걸까요? 일반적으로 자비는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는 데 세심하고 그것을 덜어주거나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깊게 헌신하는 것"(220)을 뜻합니다. 자비 하면 불교-종교적인 느낌이 강한데 자비는 단순히 연민지정을 느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고통을 없애거나 줄이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몸과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을 말합니다.(220) 자비는 시혜적으로 베푸는 동정과 다르고, 감정을 같이 느끼는 게 핵심인 공감과도 다릅니다. "네프 박사에 따르면, 자기자비란 역경에 처했을 때나 자신의 취약함을 지각했을 때 자신을 비난하는 대신 친절한 마음으로 자신을 보살피는 것을 말합니다."(222) 자기 동정은 타인과 분리된 느낌을 들게 만들지만(그래서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불쌍한 것처럼 치기 어린 감정에 빠지게 되지만) 자기자비는 "자기와 타인이 '다르지 않다'는 경험을 상위인지(meta-cognition)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특정한 경험 감정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이클을 깨뜨려 혼자 동떨어진 것만 같은 자기중심적 정서를 줄이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 연결된 느낌을 늘려주는 경향이 있습니다."(223) 자기자비의 세 가지 요소로 자기친절, 인간보편성, 마음챙김이 있는데 이중에 조금 생소한 개념인 인간보편성common humanity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자신과 타인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바라봄으로써 어떤 사건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무너지는 이유는 고통이나 불행을 객관화시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관조적으로 불행과 고통을 바라볼 수 있었을 때 이를 이겨낼 수 있는 심리적 여유가 확보됩니다.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청승 떨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7장 조망수용 perspective taking은 "타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능력이자 자기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두어 생각해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타인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257)입니다. 공감과 비슷해 보이지만 감정에 집중하는 공감보다 외연이 넓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과 처지, 상황 등을 그 사람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처지나 상황도 위에서 조망하고 내려다볼 수 있는 프로세스"(257)를 말합니다. 사실 위에서 얘기한 내용들과 조금씩 겹치긴 하는데 결국 정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 목표가 중요했듯, 자기자비를 발휘하는 데 있어 인간보편성의 지평과 태도가 중요했듯 조망수용이 시사하는 바는 관점과 태도의 중요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이런 식으로 접근했을 때 진의를 파악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음먹기는 판타지 영화에서 부리는 마법이 아니라 방향을 설정하는 키를 잡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가 목적지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올바른 방향을 찾아나가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을 잘 읽고 마음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고 해서 모든 불행과 고통이 일시에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불행과 고통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겁니다. 바닷가에 파도가 몰아치듯 말이지요. 대신 마음을 잘 읽고 마음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피할 수 있는 고통을 피하고, 마음을 좋은 감정 쪽으로 이끌어나갈 지혜와 힘을 키울 순 있을 겁니다. 하늘과 파도를 잘 읽어 선원들과 배를 지키며 항해를 해냈던 선장처럼 말이지요. 우리 마음의 나침반을 잘 지켜보며 이 거친 세상을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화이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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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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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수한 독서, 오염된 독서

 

  나는 <살롱 안드로메다>의 애청자이다. 황호덕 교수님이 게스트로 출연하신 에피소드를 페이스북에 공유해주신 덕분에 알게 된 이 팟캐스트는 영문학, 서양사학(프랑스 역사), 노어노문학을 전공한 깨인, 트인, 파인 선생님 세 분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깨인 선생님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다룬 에피소드 서두에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안티고네하면 여기에 대해 말한 담론들이 먼저 떠오르고, 중요한 사상가들이 다들 한마디씩 거들어서 우리는 진짜 순수한 안티고네를 볼 수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한안티고네라는 표현이 문제적이긴 하지만 이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 즉 선해석에 기대어 텍스트를 특정하게 고정된 의미로 치환, 환원시키지 않고 문학텍스트를 직접 읽어 감각하고 느끼는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는 바이다. 문학에는 말로 쓰여 있지만 말로 설명되기를 끝끝내 거부하는 부분이 있고, 언어를 초과하는 잉여적인 부분이 부분보다 큰 전체로서 문학적 진실을 담고 있는 핵심인 경우가 많다. 이 잉여적인 부분은 이미지나 리듬 등 다양한 양태를 보이는데 텍스트를 직접 읽지 않으면 이미지나 리듬은 체험되지 않는다. 결국 직접적인 감각의 체험이 예술의 독자적인 영역이라 했을 때 문학작품을 읽지 않은 채 비평만 보는 건 어딘지 공허할 것 같은 불완전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종종 소설텍스트보다 비평이 더 뛰어난 경우가 존재한다. 문학작품의 영역과 비평의 영역이 서로 달라 우열의 관점으로 둘을 비교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비평은 단순히 문학텍스트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주석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비판적 해석 작업이기에 비평가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의미들이 문학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의미보다 더 뛰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문학텍스트와 비평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안티고네를,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페이퍼를 지난 학기에 썼는데 이번 학기에 <82년생 김지영>은 다시금 이 주제를 환기시켰다. 깨인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수한’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책을 읽고, 기존의 비평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나만의 시각을 제시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2016년 민음사에서 주관한 페미데이행사에서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의 작품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왜 소설의 제목이 ‘82년생 김지영인지, 소설에 통계나 신문자료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의도는 무엇인지 설명해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소설이 이렇게 화제가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어 대중적인 공감대를 넓게 형성할 수 있겠으나 남녀성비의 차이가 가장 심했던 시기에 태어나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 자신을 맘충이라 부르는 사회와 직면하게 된다는 서사는 뻔하고 일차원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신문기사나 인터뷰, 페미니즘 서적 등 다른 글들을 통해 독서를 대체할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예상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지, 소설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과 회의가 들어 소설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별한 뭔가의 존재 여부를 중시했고, 이런 ()의식의 과잉이 결과적으로 책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설사 소설의 일부 내용과 신문기사나 인터뷰의 내용이 거의 겹친다 하더라도 이를 경장편 분량의 한 권의 책이라는 포맷을 통해 읽었을 때 형성되는 리듬이나 정서적 상태, 의식의 지향성이 있기 때문에 다르게 읽힐 수 있는데 그걸 잊고 있었다.

 

 독서를 시작하기 전 최대한 분석하려 들지 말고 텍스트를 소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자 했다. ‘역시 예상대로 흘러가는구나, 별 거 없네.’라는 경솔한 생각이 들 때마다 에포케를 견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다가 일단은 책장을 덮어 시간적 거리를 확보하는 게 조금이라도 필요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독서를 하기 전 들었던 팟캐스트 방송이 화근이었다. <살롱 안드로메다> 세대론 에피소드 후반부에서 ex libris<할배의 탄생><82년생 김지영>을 함께 다뤘는데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혹독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얘기할 때 이런 소설이 대표작으로 얘기가 된다는 게 한국 페미니즘 (비평)의 비루한 현실을 보여주는 척도다, 차라리 <마담 보바리>를 읽는 게 페미니즘적으로 좀 더 진취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페미니즘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소설을 페미니즘적으로 전유한 건 남성 비평가들이지 않았나, 이 소설에 나오는 내용들은 어디서 다 한 번쯤 듣거나 본 적이 있는 얘기여서 새로운 게 하나도 없다, 특히 김지영이라는 인물은 너무 평면적이고 욕망이 보이지 않아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 미흡하다고 생각된다,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인물을 내세우려 했다는 전략은 알겠으나 대학 나오고 결혼해서 아기 낳고 살고 있는 김지영 씨가 한국사회 여성의 전형이라 볼 수 있는가 등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방송을 다 듣고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지식인(?)들답게 문학성을 중시한다는 점과 페미니즘 담론에 있어서도 책이 지닌 대중적인 파급효과보다 텍스트에 내재되어 있는 논리적 정합성을 주목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들이 취하고 있는 비평적 관점이 조강석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82년생 김지영>정치적 문학인데 기존의 리얼리즘적 관점으로 봐도 새로운 미학적 성취를 거두고 있다고 판단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는 어찌 되었든 고급문학내지는 문학성이라는 보루를 지키려고 하는 지식인-비평가의 입장에서 충분히 합당한 견해라고 생각되었다.

 

 나 또한 이들과 입장을 공유했다. 건질 만한 문장이 하나 없고, 통계자료를 제시하는 전략이 일베의 팩트주의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고 생각되었다. 문학성이 앞에서 얘기했듯 언어를 초과하는 잉여적인 부분, 말로 구성된 사실들을 초과하는 진실을 담아낼 수 있는 문학의 고유성이라 했을 때 특수하고 고유한 인간의 내면에 천착하는 일련의 소설과 달리 전형적인 사실들의 집합으로 구성한 일반성generality으로 보편성universality을 구현(김고연주)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이 떨어져 보였다. 물론 팩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사실 또한 구성된다는 니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사실이 무엇인지 묻는 것보다 무엇이 사실이 되는지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구조적 불평등과 억압을 사실로써 제시하기 위해 통계라는 수단을 이용했다. 굉장히 미학적으로 게으르고, 일차원적인 발상(아마 문창과 수업에서 이런 식으로 써왔으면 교수가 욕했을 것 같다)이란 생각이 들었다.

 

 통계 이야기로 변죽을 올렸지만 이 소설의 핵심적 약점은 김지영이란 인물을 통해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및 일상 전반에 깔려 있는 여성혐오를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이미알고 있는 작가가 아직모르고 있는 독자들에게 부조리를 폭로하는 구도를 취하다 보니 사회적 약자피해자인 여성의 고통에 대한 공감 및 동일시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및 여성혐오 사회에 대한 분노를 자아내는 것 이상의 구조적인 성찰이나 새로운 전망으로 이어지지 못한 거라고 생각되었다. 여성혐오에 대한 고발과 문제제기는 SNS와 저널리즘 공론장을 통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그 서사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이 소설이 하고 있는지 회의적으로 보였다. 미디어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문학은 더 이상 잠수함의 토끼같은 전위의 역할이 아니라 잠수함의 캥거루’(이장욱)와 같이 누구보다 오래 머물고 길게 생각하여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말을 지어내야 한다는 주장에 깊이 공감한 바 있었기 때문에 더 더욱 그랬다.

2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의 문학

  동기와의 대화는 이 책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달리 할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기에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물었을 때 여성 문제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추천할 만 한 것 같지만 문학적으로 가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해서 나는 문학성의 규범적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적이고 논쟁적이라고 답변하며 문학적이지 않다는 말이 기성의 문학 개념에 기댄 쉬운 비판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굉장히 모순적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82년생 김지영>에게 가하기 가장 쉬운 비판은 문학성의 부재인데 그 문학성의 부재를 타인이 지적하는 모습을 보니까 비평적으로 굉장히 불성실한 태도라 여겨졌다. 이후 수업시간에 조강석의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접하면서 지금까지 내 비판이 비판을 위한 비판은 아니었는지, 생산적인 논의를 위한 페미니즘 비평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선우은실의 리뷰는 압축적으로 중요한 지적들을 제시한 사례로 기억되었다. 그녀는 82년생 김지영을 그 어떤 소설보다 감정이입을 하며 읽었음에도 좋은 소설인가 하는 질문에 물음표를 칠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의 호불호를 논하기에 앞서 약자 여성이라는 사실의 확인을 넘어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맞닿기 때문이다. ()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분명 문학이라는 장르에서 아주 중요하고 또 소중하게 소용되는 것이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하고 싶다.”고 비판적인 논평을 남긴다. 하지만 미학적인 관점에 서서 이 소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소설에 반발하는 배타적 시각에서의 독해가 아니라 이 소설에 공감하고 그 가치를 끌어내고자 하는 독자로서 비판적 독해를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공감소설에 대하여 비판적 독해를 통해 소설에 결여된 부분들을 끌어안아 생산적인 담론을 구성해냈을 때 비평의 제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단점에 대해 준엄하게 심판하는 일은 비평의 몫이 아니다. “소설이 제기하는 객관 현실의 문제와 소설적 공감의 차원을 뛰어넘어, 그 너머의 무엇을 상상해야 하는지로 생각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것, 현실과 텍스트 사이 가장 긴장이 첨예한 지점을 진지 삼아 가장 정치적인 것과 가장 미학적인 것의 조우를 꿈꾸는 것이 비평가의 업무이다.

 

 이를테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의 요청에 소설이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 아래 이 소설을 바라본다면 강조점이 다른 쪽에 찍힐 수 있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사회가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 문학 또한 세월호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쓰일 수 없다는 선언이 제기되었다. ‘세월호 이후의 문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대정신은 직간접적으로 세월호 사건을 다루는 작품들의 출현뿐만 아니라 애도의 문제, 폭력의 문제, 공동체적 윤리의 문제의식들이 품은 작품들로 표출되었다. 포스트 세월호 문학과 같이 한국 페미니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포스트 강남역 문학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에서 <82년생 김지영>이 여혐의 실재성을 문학적으로 실증한 사례로서 당대 사회적 요청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한 문학의 사례였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이 느끼는 일상적인 차별과 공포를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연인에게 깊은 실망을 느껴 헤어진 연인이 있다고 할 정도로 소통불가능성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가장 절실한 화두 중 하나였을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최소한의 공통 지평, 공통 감각common sense에 대한 희구가 높았다. 이런 맥락에서 <82년생 김지영>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페미니즘에 대해 잘 모르지만 관심 있는 친구에게 입문용으로 이 책을 선물해준다거나 여성들의 현실을 잘 알아주길 바란다는 마음에서 노회찬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 책을 선물해준 대목이 상징적이었다. 여성들의 입장과 비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듣지 않는, 들으려 노력하지 않는, 듣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공부하지 않(으려)남성들의 질문에 지친 여성들이 말하고 싶은 거의 모든 것들을 대신 말해주고있는 작품이 <82년생 김지영>이 갖는 폭발적인 파급효과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이 시기에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가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던 맥락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혐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여성혐오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82년생 김지영씨를 통해 수 십 년 동안 지영 씨가 겪은 여성혐오를 성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연대기적으로 여성혐오의 삽화들을 열거하고 있기에 기존의 소설이 하듯 한 사건을 깊게 파고들어가지 않는다. 특수성과 주관성이 아닌 일반성과 객관성이 이 소설이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소설이 특수한 개인의 내면을 그려내는 데 천착하여 개인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면, 이 소설은 여성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지영은 문제적 개인이 아니라 전형적 여성이다. 이 전형성에 있어 시각차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김지영이 문제성이 아닌 전형성에 기대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지영의 생애에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여성혐오의 삽화들을 모아 소설은 여성혐오의 단일한 이미지를 구성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공을 거둔다. 이로써 우리는 이 시대 여성혐오를 증언하는 가장 명징한 목소리들 중 하나를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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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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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사회에서 <이갈리아의 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메갈리아를 경유하지 않는 건 불가능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 페미니즘 역사에 중요한 모멘트로 기록될 2016년에 있어 강남역 살인사건과 더불어 메갈리아가 결정적인 변화의 흐름을 만들었다는데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로 이 메갈리아가 만들어지는데 있어 <이갈리아의 딸들>에 빚을 지고 있기에 둘을 엮어서 함께 다루는 건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메갈리아에게 미러링 전략의 영감을 주었던 <이갈리아의 딸들>은 왠지 읽어보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나는 여성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에 공감하고 있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전제에 동의하고,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전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남성들에게 역지사지를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목적 아래 쓰였다고 생각되는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맨 앞쪽에 있는 이갈리아의 용어들에서 페호를 접하고 내 생각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철학이나 사회과학과 같은 학문의 언어가 하지 못하는 일을 문학의 언어가 한다는 것을, 그래서 작품에 대한 글을 읽었다고 해서 작품을 읽었다는 착각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읽으면서 직접 두 눈으로 읽고 느꼈을 때만이 독후감이 생겨 리뷰를 쓸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독서와 글쓰기 모두 몸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처서야 비로소 완수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이는 내가 본격적으로 읽은 최초의 페미니즘 도서인 <정희진처럼 읽기>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남성작가들이 몸과 정신을 분리시켜 순수성이나 절대성 같은 형이상학적 것을 추구할 때 여성작가들은 몸으로 쓴다는 여성적 글쓰기의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해 남자 얘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한국의 페미니즘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 ‘극단적이다’, ‘평등주의egalitarianism가 페미니즘의 대안이다같은 주장들을 반복적으로 접할 수 있었는데 그런 생각들에는 이 탈각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었고, 몸으로 페미니즘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더 많은 페미니즘 예술들이 나와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2
사실 독서초반에는 예상했던 대로 내용이 진행되어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56페이지에서 웃음이 터졌다. 루스 브램이 맨움용 잠수복을 만드는데 어려움을 느껴 크리스토퍼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었다.
페호 없이 맨움용 잠수복을 만든다면 그 문제가 간단하게 풀릴 거라는 생각이 든 적은 없나요?”
루스 브램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 생각에 전율했다 (...) “아니! 그런 생각이 든 적은 없어, 귀여운 크리스토퍼. 그건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야! (...) 맨뭉들을 위한 옷에는 페호가 있어야 해. 항상 그래 왔고 미래에도 늘 그럴거야. 변하는 것은 단지 높이가 얼마나 올라가는가이고 그것은 팍스의 패션 여왕이 정할 문제야. (...) 나는 내 아들이 그것을 다리 사이에서 흔들며 돌아다니게 하지는 않을거야. 죽어도!”
보수적 입장에서 무질서 혹은 급격한 변화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무질서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야기되는 혼란이 불안을 조장하고, 기존의 가치에 반하는 행동들을 낳는다는 데서 그렇다. 특히 사회에 있어 비록 사회질서가 이상적인 원리를 따르고 있지 않더라도 이상적인 원리를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힘들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 실현가능한 가치의 편에 서 있는 질서를 지킴으로써 사회를 좀 더 이롭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합리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어떤 생각을 이상주의적’‘현실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는 기준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이 반드시 제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실이라는 게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불변적인 대상이 아니라 주체들에 의해 구성적으로 만들어지는 수행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현실을 바라보는 데 있어 시간성과 실천의 측면을 모두 소거하고, ‘어떤현실을 영구적으로 고정시키고 박제시킴으로써 구현되는 질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합리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무질서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기존의 가치가 위협되고 훼손되는 위기상황일 수 있으나 진보적인 입장에서 낡은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태동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상태다. 질서는 단순히 법이나 사회제도의 차원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과 감수성의 영역에도 침투한다. 주의할 점은 법이나 사회제도의 경우 도로 위의 차선과 같이 질서와 무질서를 나누는 경계가 가시적인 데 반해 상상력과 감수성에 내면화된 질서의 경계는 비가시적이라는 데 있다. 상상력과 감수성에 그어진 가이드라인 혹은 폴리스 라인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기에 상상력과 감수성은 특정한 구획 안에서 작동된다. 그래서 상상력과 감수성을 해방시키고자 한 68혁명은 상상력에게 권력을’, ‘금지를 금지하라같은 구호에서 볼 수 있듯 기존의 질서 외부,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상을 욕망했다. 파시즘 정부가 정권교체로 사라진다고 해도 통치과정에서 파시즘을 내면화한 마음들에서 일상 안의 파시즘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정권교체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통감한 결과였다. 지금, 여기의 외부, 너머를 상상하는 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각적인 것의 ()분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남성주의적 사회를 완전히 뒤집은 이갈리아를 통해 여성이 타자이자 외부였음을 남성들에게도 보이게끔, 느낄 수 있게끔 만든다. 혹자는 브래지어를 안 한 여성의 가슴에서 불쾌감을 느낀다고 솔직한심정을 토로하지만 타자에 대한 고려가 없는 일방적인 솔직함은 폭력적일 따름이다. ‘니들이 동성애를 하든 안 하든 상관 안하는데 내 눈앞에는 얼씬 거리지마라고 말하는 이에 있어서도 타자에 대한 포용과 이해는 외부에 있는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는 동성애 혐오에까지 적용되었을 때 자기기만적 오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

3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논의해보고 싶은 대상은 시선강간과 관련된 사안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남성들은 대체로 움츠리고 있다. 움츠림, 이거야말로 보이지 않는 권력의 교묘한 행사인데 어떤 문화적 헤게모니가 주체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움츠림을 선택하도록 만들기에 여기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다니는 능동적인 여성이라고 해서 남성의 응시에 따른 성적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연예인의 사례를 들며, 혹은 아름답게 꾸미고 다니는 여성은 타인의 시선을 욕망하기 때문에 응시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건 웃기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응시에는 심리적으로 상대방을 자신의 아래로 두려는 권력의 행사의 성격이 있기에 여성이 타인의 시선을 욕망하는지 안 하는지는 차치하고서도 폭력이다. 만약 남녀가 평등한 사회였다면 시선강간 대신 시선폭력 정도로 언어를 순화할 수 있었겠으나 젠더에 따른 권력 차이가 사회적으로 실재하기에 강간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혐오의 미러링>에 이어 <포비아 페미니즘>을 출간한 박가분은 블로그에서 시선강간이란 용어가 응시에 따른 폭력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는 점이 있지만 개념으로서 정합성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읽을 당시 타당한 지적이라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봤을 때 문제화의 차원에서 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윤여일의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http://sanzinibook.tistory.com/532)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념의 정합성, 기능성, 윤리성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시선강간'은 정합성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시선에 있어 젠더적 권력-폭력의 문제를 가시화하고 관음증적 시선처리의 폭력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수행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기능성의 측면에서 좋은 개념이라 판단된다. 윤리성은 지식이 지적 주체를 변화시켰는지를 여부를 묻는데("지식의 윤리성은 지식과 지적 주체의 관계에서 빚어진다. 물론 지식은 지적 주체가 생산하지만, 지식의 윤리성이란 그 지식을 매개 삼아 지적 주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가의 여부와 관련된다." (본문 17쪽) 시선강간이라 명명했을 때 가해자가 심리적 저항감을 느껴 개념이 담지한 메시지를 거부하려 들 수 있다는 점에서 표현강도를 강하게 한 전략에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된다. 여성에 대한 시선폭력과 시선강간을 비교해봤을 때 후자 쪽이 남성의 관음증적 욕망을 명시하고 있기에 강력하게 시선의 윤리성을 환기시킨다는 면에서 지식-개념의 윤리성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된다.



 새로운 언어의 생산은 시각/관점을 생산하며, 문제를 생산한다. 문제화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정상/일상의 비정상성, 모순과 부조리가 인식되게끔 만든다.  정확하고 좋은 질문을 하느냐가 좋은 답변을 도출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4  H 평론가와의 뒷풀이 경험.
 예전에 H 평론가의 수업을 들은 바 있는 분이 새롭게 오셔서 자리를 채워주셨다. 나중에 그분은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셨다. H 평론가는 그분이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있고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았지만 수술을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음은 몰랐다며, 그래서 처음 봤을 때 긴가민가했는데 수술사실을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는 소회를 밝혔다. 이후 H 평론가는 대학원 시절 페미니즘 수업을 들었던 흑역사에 대해 얘기했다. H 평론가는 자신이 페미니즘의 정전에 해당되는 책들을 어느 정도 숙지한 상태에서 수업에 들어가 비판적인 질문을 던졌던 것인데 교수님이 이를 탐탁지 않게, 불편하게 여겨서 그런지 자신을 소외시켰다고 했다. 그러자 트랜스젠더 분은 남성이 페미니즘으로 인해 겪는 고통은 기껏 해야 대학원 수업에서 소외되는 정도인데 그것 자체가 권력이라고 날 선 비판을 가했다. 그 이후에 트랜스젠더 분의 비판이 이어졌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H 평론가의 답변만 확실히 기억난다. ‘“그건 네가 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본인이 남성 지식인으로서 젠더에 있어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공공적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을 갖고 페미니즘에서 하는 얘기를 들으려고 귀 기울이는 편이지만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다른 문제라고. 서동진처럼 실존적인 이유에서 공부하면 몰라도 단순히 실존적인 이유가 없으면 공부하는 데 있어 한계가 있다고 했다. H 평론가는 페미니즘으로 어느 수준 이상으로 깊숙이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곤혹을 토로했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뭔가가 흔들리고 상실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사실 페미니즘에 있어 남성으로서 주체성을 어떻게 구축해야 할지의 고민은 나 또한 해본 적이 있는 것이었기에 이를 테면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나는 페미니즘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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