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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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이갈리아의 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메갈리아를 경유하지 않는 건 불가능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 페미니즘 역사에 중요한 모멘트로 기록될 2016년에 있어 강남역 살인사건과 더불어 메갈리아가 결정적인 변화의 흐름을 만들었다는데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로 이 메갈리아가 만들어지는데 있어 <이갈리아의 딸들>에 빚을 지고 있기에 둘을 엮어서 함께 다루는 건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메갈리아에게 미러링 전략의 영감을 주었던 <이갈리아의 딸들>은 왠지 읽어보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나는 여성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에 공감하고 있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전제에 동의하고,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전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남성들에게 역지사지를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목적 아래 쓰였다고 생각되는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맨 앞쪽에 있는 이갈리아의 용어들에서 페호를 접하고 내 생각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철학이나 사회과학과 같은 학문의 언어가 하지 못하는 일을 문학의 언어가 한다는 것을, 그래서 작품에 대한 글을 읽었다고 해서 작품을 읽었다는 착각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읽으면서 직접 두 눈으로 읽고 느꼈을 때만이 독후감이 생겨 리뷰를 쓸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독서와 글쓰기 모두 몸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처서야 비로소 완수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이는 내가 본격적으로 읽은 최초의 페미니즘 도서인 <정희진처럼 읽기>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남성작가들이 몸과 정신을 분리시켜 순수성이나 절대성 같은 형이상학적 것을 추구할 때 여성작가들은 몸으로 쓴다는 여성적 글쓰기의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해 남자 얘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한국의 페미니즘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 ‘극단적이다’, ‘평등주의egalitarianism가 페미니즘의 대안이다같은 주장들을 반복적으로 접할 수 있었는데 그런 생각들에는 이 탈각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었고, 몸으로 페미니즘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더 많은 페미니즘 예술들이 나와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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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독서초반에는 예상했던 대로 내용이 진행되어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56페이지에서 웃음이 터졌다. 루스 브램이 맨움용 잠수복을 만드는데 어려움을 느껴 크리스토퍼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었다.
페호 없이 맨움용 잠수복을 만든다면 그 문제가 간단하게 풀릴 거라는 생각이 든 적은 없나요?”
루스 브램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 생각에 전율했다 (...) “아니! 그런 생각이 든 적은 없어, 귀여운 크리스토퍼. 그건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야! (...) 맨뭉들을 위한 옷에는 페호가 있어야 해. 항상 그래 왔고 미래에도 늘 그럴거야. 변하는 것은 단지 높이가 얼마나 올라가는가이고 그것은 팍스의 패션 여왕이 정할 문제야. (...) 나는 내 아들이 그것을 다리 사이에서 흔들며 돌아다니게 하지는 않을거야. 죽어도!”
보수적 입장에서 무질서 혹은 급격한 변화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무질서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야기되는 혼란이 불안을 조장하고, 기존의 가치에 반하는 행동들을 낳는다는 데서 그렇다. 특히 사회에 있어 비록 사회질서가 이상적인 원리를 따르고 있지 않더라도 이상적인 원리를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힘들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 실현가능한 가치의 편에 서 있는 질서를 지킴으로써 사회를 좀 더 이롭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합리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어떤 생각을 이상주의적’‘현실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는 기준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이 반드시 제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실이라는 게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불변적인 대상이 아니라 주체들에 의해 구성적으로 만들어지는 수행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현실을 바라보는 데 있어 시간성과 실천의 측면을 모두 소거하고, ‘어떤현실을 영구적으로 고정시키고 박제시킴으로써 구현되는 질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합리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무질서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기존의 가치가 위협되고 훼손되는 위기상황일 수 있으나 진보적인 입장에서 낡은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태동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상태다. 질서는 단순히 법이나 사회제도의 차원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과 감수성의 영역에도 침투한다. 주의할 점은 법이나 사회제도의 경우 도로 위의 차선과 같이 질서와 무질서를 나누는 경계가 가시적인 데 반해 상상력과 감수성에 내면화된 질서의 경계는 비가시적이라는 데 있다. 상상력과 감수성에 그어진 가이드라인 혹은 폴리스 라인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기에 상상력과 감수성은 특정한 구획 안에서 작동된다. 그래서 상상력과 감수성을 해방시키고자 한 68혁명은 상상력에게 권력을’, ‘금지를 금지하라같은 구호에서 볼 수 있듯 기존의 질서 외부,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상을 욕망했다. 파시즘 정부가 정권교체로 사라진다고 해도 통치과정에서 파시즘을 내면화한 마음들에서 일상 안의 파시즘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정권교체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통감한 결과였다. 지금, 여기의 외부, 너머를 상상하는 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각적인 것의 ()분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남성주의적 사회를 완전히 뒤집은 이갈리아를 통해 여성이 타자이자 외부였음을 남성들에게도 보이게끔, 느낄 수 있게끔 만든다. 혹자는 브래지어를 안 한 여성의 가슴에서 불쾌감을 느낀다고 솔직한심정을 토로하지만 타자에 대한 고려가 없는 일방적인 솔직함은 폭력적일 따름이다. ‘니들이 동성애를 하든 안 하든 상관 안하는데 내 눈앞에는 얼씬 거리지마라고 말하는 이에 있어서도 타자에 대한 포용과 이해는 외부에 있는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는 동성애 혐오에까지 적용되었을 때 자기기만적 오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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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논의해보고 싶은 대상은 시선강간과 관련된 사안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남성들은 대체로 움츠리고 있다. 움츠림, 이거야말로 보이지 않는 권력의 교묘한 행사인데 어떤 문화적 헤게모니가 주체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움츠림을 선택하도록 만들기에 여기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다니는 능동적인 여성이라고 해서 남성의 응시에 따른 성적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연예인의 사례를 들며, 혹은 아름답게 꾸미고 다니는 여성은 타인의 시선을 욕망하기 때문에 응시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건 웃기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응시에는 심리적으로 상대방을 자신의 아래로 두려는 권력의 행사의 성격이 있기에 여성이 타인의 시선을 욕망하는지 안 하는지는 차치하고서도 폭력이다. 만약 남녀가 평등한 사회였다면 시선강간 대신 시선폭력 정도로 언어를 순화할 수 있었겠으나 젠더에 따른 권력 차이가 사회적으로 실재하기에 강간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혐오의 미러링>에 이어 <포비아 페미니즘>을 출간한 박가분은 블로그에서 시선강간이란 용어가 응시에 따른 폭력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는 점이 있지만 개념으로서 정합성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읽을 당시 타당한 지적이라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봤을 때 문제화의 차원에서 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윤여일의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http://sanzinibook.tistory.com/532)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념의 정합성, 기능성, 윤리성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시선강간'은 정합성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시선에 있어 젠더적 권력-폭력의 문제를 가시화하고 관음증적 시선처리의 폭력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수행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기능성의 측면에서 좋은 개념이라 판단된다. 윤리성은 지식이 지적 주체를 변화시켰는지를 여부를 묻는데("지식의 윤리성은 지식과 지적 주체의 관계에서 빚어진다. 물론 지식은 지적 주체가 생산하지만, 지식의 윤리성이란 그 지식을 매개 삼아 지적 주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가의 여부와 관련된다." (본문 17쪽) 시선강간이라 명명했을 때 가해자가 심리적 저항감을 느껴 개념이 담지한 메시지를 거부하려 들 수 있다는 점에서 표현강도를 강하게 한 전략에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된다. 여성에 대한 시선폭력과 시선강간을 비교해봤을 때 후자 쪽이 남성의 관음증적 욕망을 명시하고 있기에 강력하게 시선의 윤리성을 환기시킨다는 면에서 지식-개념의 윤리성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된다.



 새로운 언어의 생산은 시각/관점을 생산하며, 문제를 생산한다. 문제화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정상/일상의 비정상성, 모순과 부조리가 인식되게끔 만든다.  정확하고 좋은 질문을 하느냐가 좋은 답변을 도출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4  H 평론가와의 뒷풀이 경험.
 예전에 H 평론가의 수업을 들은 바 있는 분이 새롭게 오셔서 자리를 채워주셨다. 나중에 그분은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셨다. H 평론가는 그분이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있고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았지만 수술을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음은 몰랐다며, 그래서 처음 봤을 때 긴가민가했는데 수술사실을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는 소회를 밝혔다. 이후 H 평론가는 대학원 시절 페미니즘 수업을 들었던 흑역사에 대해 얘기했다. H 평론가는 자신이 페미니즘의 정전에 해당되는 책들을 어느 정도 숙지한 상태에서 수업에 들어가 비판적인 질문을 던졌던 것인데 교수님이 이를 탐탁지 않게, 불편하게 여겨서 그런지 자신을 소외시켰다고 했다. 그러자 트랜스젠더 분은 남성이 페미니즘으로 인해 겪는 고통은 기껏 해야 대학원 수업에서 소외되는 정도인데 그것 자체가 권력이라고 날 선 비판을 가했다. 그 이후에 트랜스젠더 분의 비판이 이어졌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H 평론가의 답변만 확실히 기억난다. ‘“그건 네가 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본인이 남성 지식인으로서 젠더에 있어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공공적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을 갖고 페미니즘에서 하는 얘기를 들으려고 귀 기울이는 편이지만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다른 문제라고. 서동진처럼 실존적인 이유에서 공부하면 몰라도 단순히 실존적인 이유가 없으면 공부하는 데 있어 한계가 있다고 했다. H 평론가는 페미니즘으로 어느 수준 이상으로 깊숙이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곤혹을 토로했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뭔가가 흔들리고 상실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사실 페미니즘에 있어 남성으로서 주체성을 어떻게 구축해야 할지의 고민은 나 또한 해본 적이 있는 것이었기에 이를 테면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나는 페미니즘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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