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읽었다. 예전에 오마이뉴스 특강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지만 마지막에 사르트르와 지젝과 레닌의 공부(공부일까? 학습일까?)에 대한 이야기 말곤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 기분 좋은 낯섦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실은 격주로 일요일마다 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다뤄서 러시아문학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부분도 있었고,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모스필름 90주년 특집으로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씨네토크 자리에서 이현우 선생님을 직접 뵙고, 질문도 드리면서 내 나름대로 인연을 본격적으로 튼 기념으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꺼내든 것이었다(어느 누가 적은대로 그는 눈이 깊은 미남이었다). 


 니진스키로 시작해서 에밀 시오랑으로 끝난다고 말할 수도 있는 이 책은 문학, 영화, 미술, 인문학 전반을 넘나들며 사유의 고공비행보다 섹시한 저공비행을 보여줬다. 지젝도 지젝이었지만 데리다의 <법의 힘>에 대한 독후감이 압권이었다. 아감벤을 읽으면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와 데리다의 법의 힘을 독서리스트에 올려놨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좀 더 읽고 읽은 다음에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판단이 들어 묵혀 두었는데 로쟈의 친절한 패러프레이징 덕분에 읽었던 부분 또 읽는 버퍼링을 겪었지만 나름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노트에 적은 구절을 나누고자 한다.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 법과 정의 사이. <법의 힘>

1부 <법에서 정의로> (정의의 권리에 대하여) 


 계산 가능한 것 : 법 - 계산 불가능한 것 : 정의 


정의는 법/권리를 넘어선다. 계산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다만 요구/요청일 따름이다. 


해체/와/정의/의/가능성 : 각각에 대해서는 기꺼이/충분히 말해볼 수 있지만 합쳐진 어구에 대해 말하는 건 곤란. 


'판단을 허락해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잠깐 나의 생각. 이 구절을 읽으면서 보르헤스를 읽으면서 어렴풋이 가졌던 질문이 다시 부상했다. 추상적으로 표현해보자면 언어와 정신의 미묘한 관계랄까. 인간들이 생각이라는 걸 하고, 거듭하고, 심지어 사유를 하고,(어머나) 사상 수준의 정신작용을 해버리는 바람에 생각을 판단하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생각해놓고 자신도 알 듯 모를 듯한 헷갈려서 문자로 정리해 기록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대한 생각이 기록으로 남겨지고[성문법], 사람들은 생각에 대한 생각을 수용하기도 하고 대결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사고관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불문법과 성문법. 책과 문자가 빈곤하던 시절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성장했을까? 어휘는 언제 어떻게 폭발적으로 증가했을까? 문명이 건설되면서부터였을까? 밥 먹고, 사냥하고, 채집-수렵에 쓰는 일상적 대화만 했다면 고차원적 생각을 하기 힘들었을까? 그러면 누가 언제 어떻게 왜 고차원적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또 고차원적 생각은 무엇인가? 개별적 현상이 아닌 보편적 원리를 구하는 생각? 형이상학적인 생각? 죽음과 신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은 고차원적이라 분류해도 적당한가? 눈을 감고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몸이 차갑게 굳은 가시적, 경험적 생각에서 몸은 차갑게 굳고 몸 안에 있던 정신-영혼이 다른 어딘가로,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한 신의 품으로 갈 거란 생각은 고차원적인가? 그냥 단순한 헛소리일지도 모르는데도? 그 고차원적 생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신과 삶이 한층 고양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단순히 기계의 고장처럼 받아들여졌다면 죽음의 프리즘으로 삶의 의미를 반추하고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자신을 삶과 죽음의 중간에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은 어떤 경계를 넘어갔을 것이다. 니체가 인간을 짐승과 신의 교량이라 표현한 것처럼 짐승의 경계를 넘어갔으나 신에 다다르지 못한, 그래서 항상 '긴장'이란 상태 속에서 실존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생각에 대한 생각 혹은 고차원적 생각들 중에 몇몇은 후세에 남겨졌을 것이다. 그 생존의 기준이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권력자의 머리에서 나와서 그랬는지 몰라도 어떤 생각은 후세에 전해지고, 어떤 생각은 사라졌을 것이다. 좀 더 큰 범위에서 생각해본다면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나오는 에피소드처럼 힘 있는 문명이 다른 문명의 정신적 뿌리를 완전히 박멸하고 말살해 사상, 민족의 정신이 사라지기도 했을 것이다(일제강점기가 더 길어졌다면 혹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지구가 멸망한다면 성경도, 호머의 일리아드, 오뒷세이아도, 코란도, 불경도, 일반상대성이론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멸망하기 전에 다른 곳에 저장해두거나 다른 지적 생명체에게 지식을 전수한다면 인간의 정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반대로 지금의 제도권 교육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물어보자. 고등학교 수학에서는 미적분을 가르치고, 한국 국어교육에서는 윤동주와 이상, 김수영을 읽고, 제1외국어로 영어를 배운다. 현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살고 있다고 답안지에 써도 오답은 아닐 테고, 미성년자를 성폭행해도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없다. 4대 의무라고 해서 납세를 하면 4대강에 쏟아붓고, 국방의 의무라고 군대를 가면 집단적으로 폭행당하는데 군은 이 사실을 알아도 입을 다물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살면서 공부를 하지 않는 여동생 때문에 골머리가 앓는다.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다른 걸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떼웠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여동생을 중독시킨 스마트폰의 최초 발명자라고 알려진 스티브 잡스에게 욕을 퍼붓는다. 그러다 잡스처럼 자식에게 스마트폰을 쓰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 부모님의 탓으로 돌린다. 자식들을 위해 힘쓰지만 고등교육까지 받게 못 받은 부모님의 성실한 무지에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인류 역사 이후로 한 번도 노동자 혹은 노예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나쁜 피'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다.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땅이 뒤집히고, 천지개벽 속에서도 한 번도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성실한 영혼에 대해.(부모님의 경우 내가 열심히 해서 나중에 효도하면 되는데, 아무리 대화를 시도해도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동생의 경우 답답하다) 


 다시 <법의 힘>으로 돌아오자. 


"분명 적용되지 않는 법들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적용가능성[집행]이 없이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힘이 없이는 어떠한 법의 적용가능성이나 '강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 (강제적인) '집행'이 없다면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법의 힘과 폭력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이렇듯 힘이 법에 내재적이며 본질적이라면, (정당한) '법의 힘'과 (부당한) '폭력'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폭력 Gewalt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Zur kritik der Gewalt] 

적법한 권력/권위와 공적인 힘을 의미하기도 함. 


데리다는 영어에서 '법=힘', 독일어에서 '힘=폭력' 등식을 끌어온다. 고로 법=폭력?! 

force

gewalt macht


해체야말로 법과 정의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 

"해체적인 질문하기는 노모스와 퓌지스, 테시스와 퓌지스의 대립, 곧 한편으로 법, 관습, 제도와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대립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조건 짓는 모든 대립, 예컨대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을 동요시키면서 복잡하게 만들면서 출발하며 "이러한 해체적 질문하기는 전적으로 법과 정의에 대한 질문하기, 법과 도덕, 정치의 토대들에 대한 질문하기"이기 때문이다. 


정의의 문제야말로 해체의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다! 


[팡세] 정의, 힘 -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어떤 이는 정의의 본질은 입법가의 권위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주권자의 편의라고 말하며, 또 다른 이는 현재의 관습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말이 가장 사실에 가깝다. (...)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귄위를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 


개념이 '닳아빠진 은유'인 것처럼 성문법이란 '닳아빠진 관습법'에 다름 아니다.        

 

몽네뉴=파스칼에 따르면, 법적 권위의 토대는 관습이며, 법이 법인 한에서 그것은 정의와 무관하다.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은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를 함축하고 있다. (...) 법을 정초하고 창설하고 정당화하는 작용, 법을 만드는 작용은 어떤 힘의 발동, 곧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되어 있는 어떤 선행하는 정의, 어떤 법, 미리 존재하는 어떤 토대도 정의상 보증하거나 반역할 수 없는 또는 취소할 수 없는,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석적인 폭력. 어떤 법의 최초 정초의 순간. 그 법의 적법성/불법성은 판정 불가능하다. 그 법의 적법성/정당성을 보증해줄 수 있는 메타언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폭력gewalt'이다. '정초적 폭력'(르네 지라르)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그러한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적 권위)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이것이 데리다가 기술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 '법의 구조'다. 


'해체는 정의의 해체 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을 분리시키는 간극에서 발생한다. 


address 무엇인가를 목적지/대상에 '정확하게' 전달하다

편지/문자 letter는 목적지에 전달하지 않는다 - 해체주의의 표어 

'길-없음'이란 의미에서 아포리아는 '도단'을 뜻하는 바, 해체의 지배적 관점은 언어(로고스)의 궁지, '언어도단'에 대한 관심이며, 이에 대한 관심은 해체의 장기이자 책임이고 윤리이기도 하다. 

"하나의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하고 특유한 반면, 법으로서의 정의는 항상 어떤 규칙이나 규범 또는 보편적 명령의 일반성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합법성과 정당성은 상호배제적이지 않은가? 


"타자에게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가능한 정의의 조건처럼 보인다"

"서양에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에 대한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중심적 공리계 전체를 재고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우리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 이상의 언어에서 물려받은 거소가 관련하여 역사적이고 해석적인 기억의 과제는 해체의 중심에 놓여 있다. (...) 해체는 무한한 정의의 요구에 이미 서약하고 있으며, 그에 참여하고 있다. 

(2) "기억 앞에서의 이러한 책임은 우리의 행동 및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정치적인 우리의 결정들의 정의와 정확성을 규제하는 책임의 개념 자체 앞에서의 책임이다. (...) 결국 해체는 규정된 맥락에서의 정의, 정의의 가능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기존의 규정들을 넘어서 있는, 항상 충족되지 않는 이러한 호소에서만 자신의 힘과 운동, 자신의 동기를 발견"한다. 


 만약 정의와 법의 이러한 구분이 진정한 구분, (-)이라면, 문제는 아주 간단할 것이다. 하지만 법은 정의의 이름으로 실행된다고 주장하고, 정의는 작동되어야(구성되고 적용되어야, 곧 힘에 의해 '강제되어야')하는 법 안에 자기 자신을 설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해체는 항상 이 양자 사이에 놓여 있으며, 이 사이에서 자신을 전위시킨다. 


 (1) "어떤 결정이 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중지적이어야 한다." [규칙의 판단중지]

(2) "딱 잘라 판단을 내리는 단절의 결정 없이는 어떤 정의도 실행될 수 없고, 어떤 정의도 발휘되지 못하며, 어떤 정의도 실현되지 못할 뿐더러 법의 형태로 규정될 수도 없다."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 

"결정 불가능한 것은 적어도 하나의 유령, 하지만 본질적인 유령으로서, 모든 결정, 모든 결정의 사건에 포함되고 깃들어 있다. 이것이 유령성을 결정의 정당성, 모든 확실성, 모든 현전의 안정성 또는 모든 공언된 척도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 


(3) 현전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정의는 기다리지 앟는다. 오히려 "하나의 정당한 결정은 항상 직접적으로 당장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르게 요구된다. [지식의 지평을 차단하는 긴급성] 


"결정의 순간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듯 하나의 광기다. 시간을 잘라내야 하고 변증법들에 저항해야 하는 정당한 결정의 순간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과잉 능동적이면서 수동적, 마치 결정자는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기 자신이 변형되도록 내맡김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 자신의 결정이 타자로부터 그에게 도래하는 것처럼 이러한 결정은 수동적인 어떤 것을 보존하고 있다." 


1. 결정/판결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불가능성]

2. 하지만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내려야 한다[불가피성]

3. 그러한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그것도 최대한 빨리 내려야만 한다[긴급성]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으로서의 정의는 현전 불가능하지만, 이는 사건의 기회이며 역사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릴케의 <비가>에 대한 로쟈의 애정, 자작시, 레오 까락스의 <나쁜 피>, 에밀 쿠스트리차의 <인생은 기적처럼>, '아줌마 철학'이라 재치 있게 명명한 니체에 대한 글, 김기덕의 <빈 집>과 <사마리아>에 대한 비평, 문학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에 대한 글이 흥미로웠다. 아, 김훈은 에세이스트지 소설을 쓴 적이 없다는 평도 김훈 소설을 읽어본 적 없는 내게도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말한 걸 반대로 말해도 말이 되는 걸 아는 허무주의자.(21세기문학 가을호에 실린 이소연 비평가의 글에서 본 김훈 소설가의 글이 좋아서 빨리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되길 기다리고 있다. 강산무진 읽어봐야지...) 


마지막으로 독서모임에서 '앙코르' 반응까지 이끌어낸 에밀 시오랑의 글로 채워진 에필로그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대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책에 따라 살기> 북콘서트에서 만난 김수환 선생님도 '도스토예스프키"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 이번 겨울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 Cogito ergo Boom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근대 철학의 개시를 선언한 것이었다면, 시오랑이 미덥잖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코기토의 불철저성이다. "철학의 잘못은 너무 참을만하다는 것이다"(독설의 팡세- 고뇌의 삼단논법) 사유를 철저하게 극단에까지 밀어붙인다면, 그것은 자연스레 '존재'를 통과하여 의당 '폭발'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시오랑의 아포리즘들은 어떤 사유의 응집으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폭발의 잔재로서 읽혀야 한다. 


'눈물의 일반이론' : "나는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눈물들은 생각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들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쓰라지지 않을까?"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은 인간을 각자의 운명 속으로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겨울 여행 / 어제 여행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자크 루보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 9월 23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서울국제작가축제에 다녀왔다. 2년마다 하는 행사라고 알고 있다. 한국의 소설가, 시인(극작가가 참여한 적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과 세계 각국의 소설가, 시인이 서울에 모여 작품을 낭독하고 다채로운 공연을 하는 본격 문학축제였다. 점심 시간대부터 저녁 전까지의 시간은 웅진 W스테이지에서 평론가가 사회를 맡고, 한국-외국 작가들이 대담하는 형식으로 채워졌고, 저녁 시간에는 북촌 창우극장과 나무 현대미술 갤러리에서 각각 이틀 간 공연이 이어졌다. 기억에 남는 순간 베스트 5를 꼽으라면 이렇게 열거하고 싶다. 


최고은의 노래 - 김소연 시인의 낭독 

한유주의 <불가능한 동화> 낭독

다니엘 레빈 베커의 '우연히 마주친 음악incidental music' 연극공연 

다와다 요코의 낭독과 북 연주 

터키 작가 르자 크라치의 낭독 및 흡연 및 탈의 및 음주 및 탈의 퍼포먼스(조연호 시인과 강정 시인의 밴드 공연, 이영광 시인의 '유령' 연작 낭독과 판소리 공연을 놓친 게 두고두고 아쉽다 ㅜㅜ).


대체로 대담보다는 공연이 흥미로웠는데 한유주 - 다니엘 레빈 베커의 대담은 특별했다. 1960년에 결성된 프랑스의 실험문학 집단 '울리포'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울리포는 작가뿐만 아니라 수학자, 화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형식적 제약'을 스스로 가해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고자 했다. 옛날의 정형시나 시조 같이 정해진 규칙에 맞춰 창작하는게 아니라 작가가 임의로 만든 형식적 제약 안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울리포의 수장 격이라 볼 수 있는 레몽 크노를 이웃블로거 '곰곰생각하는발' 님을 통해 알게 됐다.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의 일부분을 번역해 올려주신 덕분에 울리포란 이름은 모르는 상태에서 '울리포적'인 것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한유주 작가의 경우 울리포의 회원은 아니지만 울리포프레스라는 독특한 출판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고(500부 limited edition 자크 드뉘망의 '뿔바지'를 소장하고 계신 분이 관객 석에 있으셨다... 부러워요ㅜ), 미국의 소설사 다니엘 레빈 베커는 울리포의 회원이라고 했다. 다니엘은 울리포란 단체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르주 페렉의 작품들을 예로 들었는데 알파벳 e가 없는 단어로만 쓴 작품 <실종>(1969)과 모음 e만 사용해 완성한 작품 <돌아온 사람들>의 존재는 거의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런 '미친' 짓의 시초가 페렉은 아니라고 한 사실이 더 놀라웠는데 아무튼 문학동네의 인문서가에 꽂힌 작가 선집에 포함된 조르주 페렉과 레몽 크노의 작품들이 하루빨리 출간되길 기다리면서 이미 출간된 사물들, w 또는 유년의 기억, 인생사용법, 잠자는 남자, 겨울여행/어제여행,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읽고자 했다. 그 중 예전에 주문해놓은(고로 한 장도 펼쳐보지 않은) <잠자는 남자>를 펼쳤으나 이상 빰치는 혹은 프루스트 빰치는 난해한 문체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페렉과 나는 2달 정도의 조정기간을 들어갔다. 


 두 달만에 페렉을 다시 펼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건 한예종에서 하는 추계특강 세 번째 강의에 페렉을 번역하신 김호영 선생님의 조르주 페렉 강의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 거의 꼬박 하루를 <잠자는 남자>에 '꼬라박아' 겨우 완독해낼 수 있었다. 절대적 고독의 아우라를 풍기는 이방인L'etranger.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이상의 <날개> 등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난해한 문체 때문에 어떤 작품과도 섞이지 않는 강한 개성을 느꼈다.  


 하지만 막상 <잠자는 남자>는 조재룡 평론가가 번역한 작품이어서 그런지 강의 시간에 많이 다뤄지진 않았다. 강의시간이 2시간으로 제한돼 있었기도 하고, 선생님이 감기에 걸리셨는지 몸이 안 좋으셔서 시간여유가 없었다. 대신 페렉의 대표작인 <인생사용법>에 대해선 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바로 어제 인생사용법을 다 읽었는데 인생사용법 작가노트도 꼭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100개의 장으로 구상되었으나 99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이뤄진 점, 라틴제곱 삼각형을 통해 만든 표로 어느 장에 어떤 색깔이 들어가게 할지, 어떤 작가를 인용할지 결정한 점, 인생사용법 작가노트를 출간해 독자들에게 인생사용법이란 대단히 복잡한 구조를 지닌 작품의 수수께끼 같은 탄생비화를 알린 점이 나를 매혹시켰다. 자발적으로 엄숙주의에 빠져 문학을 굉장히 무겁고 진지하게'만' 바라보았던 내게 페렉의 유희정신은 어떤 해방감과 자유로움, 신선한 쾌락이었다. 페렉이 젊은 시절 좌파잡지를 출간하기도 하고, 정치에 꽤 열정적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유대인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은 그였지만 자서전과 소설을 섞은 'w 또는 유년의 기억'을 집필하고 내면의 그늘을 거의 극복하고 한강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빛'이 있는 세계로 넘어왔다고 김호영 선생님은 설명하셨다. 


 기존의 소설이 서사 중심이었다면 페렉의 소설은 묘사 중심이다. 제인 오스틴처럼 내면의 감정묘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페렉은 '사물'에 집중한다(그의 데뷔작 이름은 '사물들'이다!). 그는 묘사의 글쓰기를 통해 침묵하고 있는 사물들에게 말을 걸고, 겉보기에 별 것 없는 것 같고 너무 친숙해서 보이지 않는 사물들이 기억하고 있는 풍요로운 서사를 끌어낸다. 이에 '일상의 사회학'이란 멋진 표현이 붙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기억-과거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색했고, 제임스 조이스가 현재의 순간에 현현하는 진리, 소위 에피파니라고 그려내려고자 애썼다면, 조르주 페렉은 맑스적 의미에서 사물화된, 타성에 젖어 생명력을 잃은 일상의 사물들을 살려냄으로써 사물을 통해 일상을 구원하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구원은 너무 거창하다. 페렉이라면 훨씬 ''귀엽게' 표현했을 텐데... 연인끼리 사랑하는 사람의 쇄골, 어깨, 귓볼, 복숭아뼈를 하나하나 호명함으로써 사랑의 구체적인 물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페렉은 일상을 구성하는 사물 하나하의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일상회된 의식이 감각하지 못하는 일상의 풍요로운 속살을 불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연인, 페렉.       


 <겨울여행>은 아주 짧은 분량의 소설이다. 주인공 뱅상 드그라엘이 동료 드니 보라드의 별장에서 무명시인 위고 베르니에가 쓴 <겨울여행> 시집을 발견한다. 출간연도가 1864년이란 걸 확인하고 깜짝 놀란다. 이게 사실이라면 보들레르, 폴 베를렌 같은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들이 위고 베르니레의 표절자인 셈이 밝혀지기 떄문이다. <어제여행>은 자크 루보가 페렉의 <겨울여행>을 이어썼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후 울리포 회원들이 이 패러디를 연작으로 계속 써내려가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됐다고 한다. 


  창작과 표절에 대한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질문을 던지는 겨울여행/어제여행. 피에르 바야르의 <예상표절>이란 작품과 있지만 창조가 불가피하게 모방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창작과 표절 사이의 질문은 끊임없이 제기될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페렉은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힘들다며 미래의 글쓰기는 인용의 글쓰기가 될 거라 미국의 한 대학강연에서 말한 적 있다. 페렉보다 앞서 인용의 글쓰기를 시도한 사람으로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책'을 쓰고 싶다던 미완성 저작 아케이트 프로젝트(파사젠베르크)의 저자 발터 벤야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인용은 기본적으로 기억이라 볼 수 있다. 인용구가 놓인 맥락을 벗겨 현재 글에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인용의 글쓰기는 과거를 재배치해 현재를 재구성하는 기억의 건축술이다. 이미 쓴 텍스트를 바탕으로 축조되는 비평은 그런 의미에서 인용의 글쓰기를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의 저서 중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제목이 흥미롭다. 아아, 세계를 완전히 분해해서 다시 조립할 수 있다면,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인용한 오마르 카이얌의 구절은 아직까지(아마 앞으로도) 내게 최고의 아포리즘 중 하나이다. 


 페렉이 <W 또는 유년의 기억>에서 인용한 레몽 크노의 문장을 이 글을 닫고자 한다. 


그림자들이 요동치는 저 미친 안개

어떻게 환히 밝힐 수 있을까?


그림자들이 요동치는 저 미친 안개

저기에 나의 미래가 있단 말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14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주세요!

덕분에 신간평가단이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책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는 재미도 아주 쏠쏠했구요 ^^ 

다음 기에도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14기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한강, 소년이 온다


할 말이 정말 많아서 리뷰를 3부로 나누기도 했던 한강의 소년이 온다. 

개인적으로 시민행성 낭독회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던 한강 소설가의 낭독과 

그때의 그 분위기, 조르조 아감벤의 저작들과 소설이 겹치면서 극대화됐던 파토스, 

아마 처음인 것 같습니다. 소설 읽다 눈물 흘린 건... 

특히 소년이 온다 5부 동호 어머니의 들어본 적 없는 음성은 제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광주의 맑고 용기 있는 영혼들의 노래도요. 


- 14기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1. 한강, 소년이 온다 

2. 이승우, 신중한 사람 

3.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4. 성석제, 투명인간 

5. 토마스 핀천, 느리게 배우는 사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라딘신간평가단 2014-10-28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한강님의 낭독을 들으셨군요.
저는 한강님의 목소리를 정말 정말 사랑한답니다. 너무 매력적이고, 들을수록 빠져들고!!

즐겁게 활동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기수에도 지원해주세요~
좋은 계절 보내시고요

rendevous 2014-10-28 21:02   좋아요 0 | URL
저는 이 댓글을 읽다 보면 이동진 평론가가 빨간책방 시작하면서 느끼고 싶다 했던 느슨한 연대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하는데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말 건네지만 또 오히려 그래서 소소한 기쁨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다음 기수도 꼭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제르미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르미날 1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그간 이 리뷰는 신간평가단 활동하면서 쓴 리뷰 중에 가장 허접한 리뷰가 될 것이다. 제르미날, 에밀 졸라, 자연주의와 내가 궁합이 맞지 않아서 책을 애정 있게 읽지 못했다. 예전에는 책장을 펼치면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책이 재밌듯, 재미없듯, 잘 읽히든, 잘 읽히지 않든 다른 책으로 외도하지 않았다. 그 당시 책을 읽다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번역상의 오류나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내 지식이 빈곤하고 독서력이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읽었다. 취향이 생길 만큼 다양한, 또 많은 작품들을 읽지 않은 상태였다. 


 에밀 졸라의 작품은 읽은 적 있다. 목로주점. 딱히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부분이 없어 시간만 투자하면 읽어낼 수 있는 책이었다. 제르베즈의 핍진한 생존기와 삶의 눅진한 냄새가 베어나오는 노동자들의 삶 묘사를 흥미롭게 읽혔다. 


 약 4년 만에 제르미날로 다시 만난 에밀 졸라. 알고 보니 그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 그러니까 서사의 리듬이 너무 촘촘해 지루하게 느껴졌다. 노동자들의 힘겨운 생애를 따라 읽고, 체험하고, 공감하는 작업들이 분명 의미 있을 거라는 생각을 들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 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최근 독서모임에서 다루게 될 보르헤스를 읽기 시작하면서 그의 '구라', 가짜 사실주의, 마술적 리얼리즘, 추리소설적 기법, 형이상학적-신비주의적 정신사적 편력에 완전히 심취했기 때문에 거의 정반대의 위치하고 있는 에밀 졸라의 소설이 시시하게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제르미날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방안으로 맑스와 겹쳐읽기를 계획했다. 맑스가 봤을 풍경들을 에밀 졸라의 텍스트의 창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소설 텍스트가 관념과 추상의 세계에 생생한 색과 냄새, 사람들의 표정을 부여해주리라. 최근 파주북소리축제에 갔다 창비를 구독하게 되었다. 주머니가 가벼워 고뇌하는 중생에게 직원 분이 자비를 베풀어 로베르트 쿠르츠의 <맑스를 읽다>와 표도르 쏠로구쁘의 <허접한 악마>를 선물로 받았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문제점, 심각성에 공감한 사람들의 요구에 힘입어 맑스 관련 책들이 몇 권 출간되었다.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공부>-경향시민대학에서 강의를 하신다고 했다, 양자오의 <자본론을 읽다>. 개인적으로 알랭 바디우의 공산주의 개념을 비판했다고 하는 브루노 보스틸스의 <공산주의의 현실성>과 최근 방한했던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읽어볼까 한다. 그렇게 읽다 보면 소설과 시의 품으로 자연히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해보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4.9.20 인문까페 창비 11:15 ~ 1:10 

 

 인문까페 창비에서 천명관 소설가를 만났습니다. 가장 먼저와 위치선정을 제대로 한 덕분에 바로 옆에서 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의 아버지와 동갑이셔서 왠지 모르게 더 정이 가더군요. 오, 아버지... 

나이도 나이지만 무엇보다 사람냄새-땀냄새 나는 글을 쓰는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이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천명관 소설가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명색히 애독자를 모아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데 신간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완독하지 못한 상태로 자리에 착석했거든요. <봄, 사자의 서><파충류의 밤><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까지 부랴부랴 읽었으나 다른 분들이 <우이동의 봄><동백꽃>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얘기하는 데 어려움이 겪기도 했습니다. 


가장 재밌게 읽은 작품을 뽑는 시간을 가졌는데 <우이동의 봄>이 1위로 뽑혔습니다. 천명관 소설가는 이 작품과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실린 <二十歲>와 같이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소개해주시면서 사람들은 '진전성'이 담긴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덧붙여주셨습니다. 저는 '진정성'이란 단어를 맞닥뜨렸을 때 미학적 보수, 휴머니즘 같은 낡은 서정의 권위에 기댄 개념 어쩌구저쩌구 비판적인 생각들이 휘몰아쳤지만 이윽고 문학동네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신형철 평론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요즘 진정성이란 개념이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진정성의 참뜻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진정성. 저는 진정성이 작가라면 당연히 갖춰야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 생각해서 되려 진정성을 강조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졌는데 이내 기본에 충실하기가 어렵다는 생각까지하지 못한 제 자신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쁜 의미에서 제가 평론가들의 프레임에 많이 갇혀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예술/문학작품을 감상-감각의 대상이 아닌 평가의 대상으로 먼저 바라보진 않았는가. 이런 반성들을 하면서 꿋꿋이 하고자 했던 질문을 꺼내들었습니다. 

 

 배수아 작가가 지향하는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가 지워진 소설, 물 흐르듯 결말을 향해 돌진하는 근대소설이 아니라 서사의 흐름을 일부러 타지 않음으로써 '사유'의 공간을 창출하는 현대소설, 영상과 문학이 은밀하게 몸을 섞고 있는 시대에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소설적인 것'에 대한 천명관 소설가의 생각을 듣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천명관 소설가가 거의 정반대의 소설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재밌는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서로 다른 소설을 지향하는 작가들의 소설관을 비교해봄으로써 '소설이란 무엇인가/무엇이어야 하는가'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천명관 소설가의 답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기질'이었습니다. 배수아 소설가는 제발트, 로베르트 무질 같은 소설가와 기질이 맞기 때문에 그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고,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지우는 소설실험을 하는 것이고, 자신은 자신의 기질에 맞는 작품을 창작하고, 자신과 기질이 맞는 독자들이 작품을 읽는 것이라고. 이 얘기를 들으면서 하나 생각난 이야기는 푸코였나 사르트르가 했던 이야기인데 책은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독자수를 갖고 태어난다는 말. <말과 사물>이란 어려운 책이 바게트 땅 팔리듯 베스트셀러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푸코가 이런 말을 했다고... 또 그러면서 재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중국소설가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을 인용해주셨는데 내용은 이랬습니다. 모옌이 윌리엄 포크너와 헤밍웨이 같이 서사가 강한 작품들을 즐겨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과 그 작가들의 영혼이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 말을 받아서 박민규 소설가와 천명관 소설가의 영혼이 닮았기 때문에 잘 통하는 게 아닐까요? 물었는데 오히려 박민규 소설가와 자신은 거의 정반대에 가깝다고,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좋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 다음 책 읽는당 모임 때는 박민규 소설가를 초청해주셨으면 ㅜㅜ 가을에 신간 출간된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창비에서 출판하시길 ㅜㅜ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단편 쓰는 몸과 장편 쓰는 몸이 어떻게 다른지, <핑크>를 쓰실 때 마감에 쫓겨 3일 만에 쓴 소설이라는데 당신의 친구 분 중에 대리운전하는 친구가 해준 이야기 '몸무게가 많이 나오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에서 시작한 소설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평소 단편을 쓰실 때 그런 식으로 상상력을 마음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씨앗 같은 한 문장에서 시작하시는지,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에서처럼 칠면조로 싸움을 패는 인상적인 이미지에서 착상해서 작품을 쓰시는지, 초반과 결말을 먼저 쓰시고 작품을 쓰시는지, 작품을 써나가면서 결말을 만드시는지, 정영문 소설가처럼 (김중혁 소설가의 빨간책방 방송에 의하면) 침대에서 구상을 다 하시고 집필에 들어가시는지, 김연수 소설가처럼 (문학동네 팟캐스트 방송에 따르면) 서사와 서사가 충돌시킴으로써 서사가 다른 층위로 점프되는 식으로 끝에 가셔야 결말이 정해지시는지, 아침에 쓰는지 밤에 쓰는지 등등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사실은 천명관 소설가의 작품을 다 읽어본 다음에 스스로 생각해볼 때 더 의미 있는 질문/답변이 나올 것 같아서 아껴두기로 했습니다, (라고 쓰고 시간이 없었다고 읽는다)


 마지막으로 책 추천을 부탁드렸는데 중국소설들을 추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일본문학에 느끼는 양가적 감정. 우리보다 더 잘 사는 나라로 일본을 동경하고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일제감정기의 기억, 콤플렉스 때문에 그 사실을 부정하는... 그래서 오히려 자신은 작품에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일본어 표현을 그대로 쓴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 한국이 일본/문화를 동경하는 것처럼, 일본은 미국/문화를 동경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루키는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일본인'이라고. 하루키의 작품을 하나도 안 읽어봐서 잘 와닿지는 않았지만 주변 지인들이 하루키에 대해 말했던 내용들이 생각나면서(대부분 부정적 내용) 어떤 맥락인지 감은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런 컴플렉스가 거의 없고, '우아하고 고상한' 맛은 없지만 사람냄새 나는 글을 쓴다고. 허삼관매혈기의 위화, 개구리-붉은 수수밭의 모옌, 쑤퉁... (그러면서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하는 하진 소설가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자유로운 삶>이 좋아서 김연수 소설가가 번역한 <기다림>을 읽어보기로 했는데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있네요 ㅜㅜ)최근 황현산 평론가의 <말과 시간의 깊이>에 수록된 <르네의 바다-김현 론>을 읽으면서 '컴플렉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한 적 있는데 이렇게 또 만나게 되는... 그러면서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박민규 작가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창비 팟캐스트 마지막 부분에 했던 말로 기억나는데 침략당하는 피지배자, 약소국의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지배자, 강대국의 국민으로서 문학을 해보고 싶다고(정확한 인용은 아님). 콤플렉스와 박민규 작가의 말이 만나면서 빚어내는 오묘한 물결무늬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여기서 그만 글을 줄이고자 합니다.  


...


리뷰 :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통틀어 몇 번의 밭은기침이 나왔을까? 아마 이동진 영화평론가라면 필히 그 숫자를 세워봤을 것이다. 밭은기침. 병이나 버릇으로 소리도 크지 아니하고 힘도 그다지 들이지 않으며 자주 하는 기침. 나는 밭은기침의 사전적 정의를 보고 '병든 닭처럼'이란 직유를 떠올렸다. 어딘가 아픈 사람들. 병원에 가서 진찰받아야할 정도로 큰 병은 아니지만 기침을 습관적으로 해야 할 정도로 아픈 느낌을 주는 사람들. 어쩌면 이성복 시인의 시구처럼 모두 병에 걸렸기 때문에 아프지 않을, 아픈 줄도 모를 사람들. 천명관 작가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창비 책읽는당에서도 추천해줬던 중국문학처럼, 이를 테면 피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허심관 같은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 잘난 사람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다 추락하는 비극이 아니라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 보이는 부족한 사람들이 아둥바둥 버티는 희극적인 이야기. 라면국물을 담은 냄비바닥에 종양처럼 남아 있는 검은 조미료 같은, 바닥에 밀착된, 까맣게 타들어간 속내를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 


 무엇보다 이야기꾼이란 별명에 걸맞게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 좋았다. 아마 신간평가단하면서 가독성으로만 따지면 하진의 자유로운 삶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일듯 싶었다. 개인적으로 배수아 소설가의 반서사적 소설관 같이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쭉쭉 읽히는 소설보다 멈칫하게 만들고, 주저하게 만들고, 몸을 차분하게 만들고, 리듬을 한 템포 혹은 두 템포 낮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소설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고 있지만 김승옥 소설가가 소설의 abc라고 정의한 바 있는 '재밌는 이야기'로서의 소설을 읽는 일은 거의 언제나 즐겁다. "봄, 사자의 서"를 제외하곤 막힘 없이 한 번에 내려갈 수 있었다. 김연수 소설가의 "산책하는 자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 떠오르기도 했던 "파충류의 밤",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혀주신 "우이동의 봄", 특유의 입담과 고래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었던 "동백꽃", 박민규 소설가의 "루디"가 떠오르기도 했던 장르소설 "핑크", 봄, 사자의서-파충류의 밤-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만 읽은 상태에서 파충류의 밤을 최고의 단편으로 뽑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책읽는당에 참석한 다른 분들처럼 "우이동의 봄"에 마음이 더 갔다. 진정성. 신형철 평론가가 어디선가 보수적 미학관을 정당화하는 의미로 악용되는 진정성의 용례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했었는데 "우이동의 봄"은 좋은 의미에서 진정성이 있는 작품이라 느꼈다. 할아버지와 손자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도 어려운 관계인데 할아버지와 손자는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발이 하얗게 날리는 할아버지의 주름 깊은 얼굴 뒤로 꽃비가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마지막 문장이 보여주듯 서정적 분위기가 깨끗한 물을 마시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책읽는당 행사 이후 김미월 소설가와 진행한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스테이크를 아주 좋아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작업 중이라고. 영화도 기대되지만 <고래>, <나의 삼촌 브루스리>에 애정이 깊은 독자로서 천명관 소설가의 장편소설이 기다려진다. 천명관 소설가 당신은 밭은기침을 하지 않으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