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알아요

 

 

엘르 코리아에서 배우 한예리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중 일부를 옮긴다.

 

행복지수도 높아졌나요 :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어요. <청춘시대>만 봐도 20대는 많이 흔들리잖아요. 저도 그랬고, 서른이란 나이의 안정감을 기대했어요. 그 나이가 되면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한 시간이 한결 선명해지고 생각도 성숙해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 대로 됐나요 : 확실히 30대가 좋아요. 저란 사람에 대해 더 알게 된 만큼 재미있고 행복해요.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행복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이 특수한 지식은 전적으로 행복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윤리학적 재료들이다. 자신에 대한 앎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활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무엇보다도 자신이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근거이다. 자신은 동적인 사람인데 이를 평생 인식하지 못하고 데스크 업무만 보고, 집에서만 여가시간을 보낸다면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행복의 방정식은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겨질 것이다.

 

 행복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 다르겠으나 행복이 슬픔이 아닌 기쁨과 관련되어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감정, 정동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쁨은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때 생성되는 감정이다. 들뢰즈는 어느 강연에서 길에서 사람을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이는 자신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혼자를 기르는 법>의 김정연 작가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자기 방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좋다는 것, 그야말로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살고 있는 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30대가 되면 조금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알게 된다는 말에 심심한 위로를 받으면서 한편으로 이십대의 격렬한 방황과 좌충우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점에서 20대는 실험의 연속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다운 나를 찾기 위한, 또 만들어나가기 위한 연습과 연마의 시간. 연애를 통해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시행하고, 소비와 문화적인 편력을 통해 자기만의 감수성과 취향을 실험하고, 독립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시공간의 디자인을 실험하고, 취업 및 도전을 통해 이상과 현실 사이 적절한 타협점을 실험한다. 사랑의 경험을 통해 자기 몸과 처음으로 내밀한 소통을 시작하게 되고, 진부한 비유이긴 하지만 상대방의 연주에 따라 자신이 어떤 음을 낼 때 가장 빛나는 악기인지 차차 알아가고,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함에 따라 자기만의 시공간을 확보하게 되고, 그 시공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디자인하면서 멋을 찾아가기 시작하고, 욕망과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고 자신의 포지션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나’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고 노래 부를 수 있는게 아닐까.

 

 이렇게 자신에 대한 앎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호명 및 심문은 중대한 역할을 차지한다. ‘누구냐, 넌’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자기소개를 하고, 자소설이란 오명이 씌워지긴 했지만 자소서를 쓰는 등 사실은 ‘나는 누구인가’ 반복적으로 규정하게끔 유도·강제하는 규율을 통해 자아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구축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나’는 누구인가. 알튀쎄의 호명 메커니즘을 적용시킨다면 ‘나는 누구인가’ 묻는 ‘나’는 대타자-이데올로기에 호명된 주체이기 때문에 실상 ‘누구냐, 넌’이란 질문의 뒤집힌 형태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양동혁이다, 남자다, 한국인이다,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이다, 대학원생이다, 이런 식의 답변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정보일지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무의미한 기호일 뿐이다. 명사가 아닌 동사로 주술 구조를 갖춰 서술했을 때 내 본질을 조금이나마 담아낼 수 있다. ‘누구’인가도 문제적이지만 ‘나’라는 개념 자체도 그 못지 않다. 니체가 말했듯 ‘나’가 문법적 환상에 불과하고, 행위가 주체를 구성한다는 수행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내가 한 행동들의 총체 정도라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정희진이 데카르트 식 코기토에 대항하며 피력한 의견과도 동일한데 이와 더불어 나는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총체라는 관계론적 관점이 탈근대 철학적 지평에서 바라보는 주체의 이미지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한 행동들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설명하면 나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브레인라이팅-생각하는 즉시 그대로 문자로 옮겨지는 기술-과 카메라로 전 생애 전체를 기록하고, 텍스트로 남긴다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만 볼 수 있게 해놓더라도 내 삶이 전부 기록되고 있다는 의식이 살아가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망각으로 인해 고초를 겪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인생을 기록하는 ‘블랙박스’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한 평전을 쓸 수 없듯 객관적인 거리가 확보되지 않아 비평적 관점을 취하기 힘든 반성적인 내면 성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예술가의 경우 작품을 통해 창작자의 심리와 세계를 해석하는 게 가능하지만 작품 및 기록물archive 자체가 양적으로 빈약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보니 기술의 도움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이 확장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이 기록들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공산이 농후해보였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면 남의 인생을 사후적으로 구성하고, 해석하는 데는 유용한 자료가 되겠지만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될 거라 예상되었다. 영상이든 문자든 이미지든 기호들은 해석을 통해 주체로 편입되는데 해석할 자료가 양적으로 많다고 해서 해석의 질적 깊이나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신식의 심리테스트나 과학기술이 개발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지식은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걸 보면 자신에 대한 앎은 ‘그 지식을 매개 삼아 지적 주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가’ 지식의 윤리성(윤여일은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에서 지식을 정합성, 기능성, 윤리성의 측면으로 구분하여 논하면서 지식의 윤리성을 화두로 독자들에게 건넨다)이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여기’의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차리고’ 행동하면서 자아라는 허상, 집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뿐더러 스스로에게 진실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2부 ‘지금’의 함춘수(정재영), 내면이 배배 꼬여 있지 않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 진실한 사람이 되려면 행동을 바꾸고 욕망을 바꿔야 했다. 다른 것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욕망하는 도주선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삶.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라캉)

p.s 난 알아요. 무엇을? 난 날 알아요. 어떻게? 난 날 잘 알아요. 왜? 왜 난 날 잘 알아요? 왜 난 알아요(김승일). 왜 무無가 아니라 존재인지 물었던 것처럼 왜 무지가 아니라 앎인지 물어보자.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데 그만큼 잘 알고 있는지, 나아가 윤리적인지 따져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언어의 토대 - 구조기능주의 입문 ㅣ 파라디그마 Paradigma 2
로만 야콥슨.모리스 할레 지음, 박여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

 

 

4차 산업혁명을 몰고 올 거라 예견되는 인공지능 기술의 등장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직업 중 하나가 번역가이다. 그런데 사실 번역은 인공지능의 역사 초창기부터 연구된 분야였으나 딥러닝 기반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가 일어나지 전까지 진척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분야이기도 했다. 이 이유를 야콥슨 식으로 설명하면 기존의 인공지능은 ‘은유’와 ‘환유’, 인접성과 유사성의 메커니즘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녕’은 문맥에 따라 만나서 반갑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다음에 또 보자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How do you do?’라는 문장을 영한사전만 펼쳐놓고 번역하면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어?’가 아니라 ‘너는 어떻게 하고 있어’ 같은 엉뚱한 오역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언어는 축자적 의미가 아닌 문맥에 따라 코드화된 의미를 지니고, 이 코드화는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에 의해 이뤄진다. 인공지능은 딥 러닝을 통해 이 캐비닛에 해당되는 빅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은유와 환유, 유사성과 인접성의 메커니즘을 적용시켜 불가능해보였던 번역기술을 정복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여태껏 인공지능의 발전에 있어 발목을 잡던 부분이 ‘명명할 수 있는 능력’, 추상적 범주를 사고할 수 있는 메타인지 능력의 부재였는데 이를 빅데이터를 통한 딥러닝으로 돌파해낸 것이다.

 

 abstract, 사물로부터 공통되는 특성을 추출해 범주화하는 능력을 구사하는 일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겠으나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추상적인 체계, 에피스테메를 학습하는 게 그 못지않게 어려웠을 거라 예상된다. 사실 나는 인간의 추상적인 사고에 정밀하고 정확한 수학적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한편으로 고도의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사유가 실증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초월적 가능성(창의성, 창조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포퍼나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이 보여주듯 사변과 추상의 자의성, 시-픽션적인 성격이 내재하고 있는 부정확성, 오류가 걸리는 순간이 있다. 데이터 및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유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데 부정적이지만 더 이상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인공지능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상대한다면 이는 인간에게도 결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거울삼아 인간의 정신활동을 탈마법화, 탈신화화해서 정신에 대해 좀 더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된다면 인류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다른 지적 존재에게 자신의 언어를 가르치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 말하면 가르치는 데 성공한 게 아니라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진 기계를 발명하는 데 성공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앞으로 인공지능이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언어를 학습하게끔 가르쳐주는 역할을 할 수 없을까? 마치 영화 <컨택트arrival>에서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찾아와 그들의 언어를 가르쳐줌으로써 루이스가 과거-현재-미래를 선형적으로 인식하던 기존의 인식체계와 결별하고 (이종필의 표현을 빌리자면)일괴암적 인식을 배운 것처럼 인간이 지닌 생물학적, 역사적, 문화적 조건의 강한 구속 아래 형성된 지금의 언어(학습체계)와 완전히 인식론적으로 단절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고 학습해서 구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루이스는 미래를 기억하는 비선형적 사고를 하면서도 여전히 기존의 방식 그대로 산문적이고 선형적인 언어를 구사했는데 비선형적 언어, 이를 테면 이미지나 음악, 시어를 통한 대화와 소통은 불가능한 일일까? 인간이 만든 언어가 기표가 기의에 미끄러질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언어를 바꿔야 할까? 매체를 바꿔야 할까? 텍스트에 기입되는 문자언어나 공기 매질을 통해 진동하는 음성언어가 아닌 텔레파시와 같이 매개(필연적으로 굴절을 일으키는) 없이 직접적으로 상대방의 의식에 언어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오늘날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는 반동의 시대에 과연 계몽주의적 비전이 여전히 유효한지, 시민사회의 의식수준의 지표라 일컬어지는 독서대중reading public의 규모를 일정 수준 이상 높일 수 있는 정책적 변화와 노력들을 하다 보면 사회가 정말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지 회의적이다. 테크놀로지가 유토피아를 가져올 거란 낙관적인 생각에 기대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인공지능을 하나의 지적 행위자agent이자 동료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인간의 힘만으로 인류의 행복과 지구생태계의 존속의 과제를 실현하기 어렵다면 타자에게 SOS를 보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인공지능의 번역 정복기를 관찰하면서 자연스레 인간의 외국어 학습과 비교해보게 되었다. 나이를 먹고 외국어를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사고가 모국어로 이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모국어로 사유된 문장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식으로 말하고, 듣고, 읽고, 쓴다. 외국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진행할 때 머릿속에 한국어로 완성된 문장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일대일 대응 식으로 해석하다 보니 문맥에 맞는 단어를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문장을 해석하고,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아볼 때 한영사전에 기대 문장 단위가 아닌 단어 단위로 학습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한국어 단어에 맞는 영어단어를 선택·대체alternation하는 데는 능통하지만 대체와 조합이 동시에 이뤄지지 않고, 대체된 단어들을 짜 맞추면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기 힘들다(예전에 이런 식의 문장을 보고 ‘번역기’ 돌렸다는 비아냥을 들었는데 인공지능 번역기술이 더 발전하면 이런 표현은 ‘사어’가 될 것이다). 그래서 단어를 외울 때는 영영사전을 이용하고, 문장을 통째로 외우거나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으라고 조언하는 이들이 있다. 독일어처럼 명사의 성과 격에 따라 변화를 여러 군데 줘야 하는 언어의 경우 사태가 심각해진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언어감각을 키운다고 했을 때 이 언어감각은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이 일정 크기 이상이 되면서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즉각적으로 불러올 수 있고, 문장들에 내재된 문법적 요소들을 직관적으로 터득함으로써 얻어진 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언어감각을 체득하게 되면 더 이상 모국어 문장을 파편적으로 쪼개 일일이 계산하고, 선택하고, 대체하는 게 아니라 문장 단위로의 즉각적 변환, 선택과 조합이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게 가능해진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가 주목한 자코토의 지적 실험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의 문법이나 어휘를 가르쳐준 게 아니라 ‘프랑스어’ 자체를 가르치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그랬기에 필연적으로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부분적, 파편적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전체로서 프랑스어를 파악할 수 있도록 ‘무지한 스승’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지적 평등과 해방의 논의를 전개하는 데 있어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프랑스 선생 자코토의 프랑스어 수업 사례를 선택한 건 굉장히 상징적이라 느껴진다. 아무리 뛰어난 석학이라 해도 배워본 적 없는 외국에 대해서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무지할 수밖에 없다. 외국어 초급반에 들어가면 초등학생부터 5, 60대 장년층까지 똑같이 알파벳과 같은 문자기호들과 읽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학습속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문법을 익히고, 단어를 외우고,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법을 공부해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는 없다.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론이나 일반적인 통념상 언어능력을 담당하는 뇌의 특정 부위의 발달 정도에 따라 언어 습득력의 차이는 있겠으나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것을 반복하면서 익히는 것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애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은 언어구사능력을 갖추고 있다. 설사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했더라도 글쓰기에 불편함을 느낄지언정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례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실어증aphasia적 퇴행은 아동의 음성언어 습득 과정을 거꾸로 반영mirror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하면 실어증은 아동의 언어 습득과 역순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는 문장을 접하면서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 있어 단계가 있다면 그 단계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문법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예상되었다. 인간의 언어학습 과정에 있어 첫 번째 도약하는 단계가 있다면 그건 문장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개별 단어만을 지시하거나 발음할 수 있었던 아이가 ‘엄마, 나 배고파요’ 같은 문장을 구사한다는 건 거울단계를 지나 자타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본인을 주체로서 인식하며, 자신이 배고픔을 느낄 때 배고픔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존재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이는 주어·동사·목적어·서술어 같은 문법용어들을 모르는 상태에서 문법에 맞게 적절한 문장을 구성해낸다. 그건 문장을 통째로 인지함으로써 문장에 내재된 문법규칙을 메타적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리라. 이 메타인지의 중요성은 ‘카르납이 주장하듯이 “우리가 어떤 대상언어에 대해 말할 수 있으려면, 메타언어가 필요하다.”’의 말에서도 발견된다. 이 메타언어/메타인지는 결국 언어가 인접성과 유사성, 은유와 환유의 두 가지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테크놀로지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조합(결합)combination, 구성, 정렬alignment

선택selection, 대체, 교체alternation

환유

은유

인접성contiguity

유사성similarity

리얼리즘

모더니즘

통합체

계열체

그것들을 더 높은 차원의 복잡성을 가지는 언어적 단위들로 조합

일정한 언어적 속성들을 선택

현존하는 결합in presentia. 현재의 연쇄체 안에서 연결되어 구현된 둘 또는 그 이상의 항들

부재하는in absentia 항들을 가상적인

 기억 연쇄체의 구성 성분으로서 연결

연결된 속성들이 메시지와 코드 양자 안에서 또는 실제의 메시지 안에서 연결

코드로 연결된 속성들을 다룸

문맥context

코드code

 

 

표로 은유와 환유의 특징들을 정리해보았다. 문장이 대내적으로 은유와 환유의 원리에 의해 직조된다고 한다면, 문장을 짓는 이는 대외적으로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이라고 하는 사회문화적 문법에 따라 말이 ‘말이 되게끔’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이 보여줬듯 말이 안 되는 말, 즉 아이러니는 말이 ‘말이 되게끔’ 만드는 사회문화적 문법이 얼마나 자의적인지, 어떤 논리를 따져보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폭로한다.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은 기표와 기의의 특정한 결합의 약속을 사회구성원들에게 학습시켜 언어가 커뮤니케이션에 경제적으로, 효율적으로 봉사하게끔 하고, 이 약속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밝혔듯 언어-게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규칙이다. ‘바벨탑의 우화’는 기표의 기의의 분열 및 수많은 외국어로의 분화로 인해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락하고 분화하기 전 보편언어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다. 이런 보편언어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인공언어나 에스페란토어 같은 실험들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기표와 기의 사이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정신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벨탑의 우화’는 어떤 완벽했던 기원을 상정하고 다분화되고 다양화된 오늘날의 언어 생태계를 부정적으로 규정하지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보여주듯 언어의 통일은 곧 사고의 통일일 수밖에 없고, 이는 인간의 근원적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이렇듯 기호의 상징체계, 언어의 의미체계를 규정하는 규칙은 역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에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다. 모든 말들이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해석하는 힘들이 투쟁하는 장이라 했을 때 결국 언어의 사회성은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이다. 예를 들면 ‘정치적’이란 말이 중립을 지키지 않으면서 특정한 진영에 편향적인 태도를 드러낸다는 의미로 부정적으로 전유되는 경우 ‘정치적’이란 말은 공동체 내에서 축자적, 사전적 의미보다 일련의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된, 매개된 의미로 사람들에게 전유되고 소비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정부, 지식인, 출판권력, 신문권력 등 의미체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헤게모니 집단은 규칙, 프레임을 자기 식대로 짠다. 그렇다면 두 가지 질문이 생긴다. 첫째, 언어를 특정한 방식으로 코드화하는 지배적 헤게모니에 저항할 수 있는 대항 헤게모니를 어떻게 생산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 언어의 의미체계(기표와 기의의 특정한 결합방식에 대한 약속)에 의존하더라도 상대방의 메시지를 완벽하게 독해하는 건 불가능한데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다양한 답변이 있을 수 있지만 랑시에르가 말한 ‘문학의 정치’에 주목해보고 싶다. 하지만 ‘문학의 정치’는 추후에 다른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 또한 야콥슨보다 언어와 정치, 언어와 사회를 다루는 파트에서 다루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커리큘럼상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이 빠져 있는데 하버마스가 아니더라도 이런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문학작품-사상을 만나게 되면 추후에 다뤄보고 싶다.

 

 만약 인접성 장애를 가진 사람끼리, 유사성 장애를 가진 사람끼리 대화를 한다면 진행이 될까? 아마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화상황에서 상대방의 말을 완벽하게 해독할 수 없지만 그래도 대화가 그럭저럭 진행될 수 있는 이유는 논리체계를 공유하고 있기에 해석의 공통적 지평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인접성 장애자끼리 유사성의 체계만으로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해석의 차이는 생길 수밖에 없으며 인접성의 체계가 부재하는 만큼 정보의 부족의 해석력의 결여가 소통을 불가능상태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처럼 메시지의 인코딩과 디코딩의 관점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대화를 발신자의 텍스트와 수신자의 해석이 만나 공동의 의미지평을 형성하고 그 속에서 상호주체적으로 이해와 공감, 상상 등의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텍스트에 대한 더 좋은 해석을 만들어나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본다면, 즉 대화는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작업으로 인식한다면(무한한 대화, 끝나지 않는 대화) 소통(불가능성)을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포스트구조주의를 비롯한 인문명저들을 살펴보면 정신의학이나 병리학이 다룰 법한 주제를 탐구한 책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대표적으로 프로이트, 푸코와 깡길렘 등을 꼽을 수 이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데 20세기 서구철학이 헤겔로 대변되는 이성과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었다는 측면에서 병리현상과 장애가 추상적인 이성과 정신에 구체적인 균열을 일으켜 이들이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분절articulation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나 정신병에 걸린 환자들의 꿈과 말을 분석해 무의식을 발견했고, 푸코는 광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담론화되었는지 계보학적으로 탐구해 이성과 광기가 시대에 따라 관계적으로 구성됨을 밝혀냈다(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도 기억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 있어 기억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다룬 것으로 알고 있다). 야콥슨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기억이나 상상 같은 정신활동의 구조를 탐구하는 데 있어 장애를 가지고 있는 대상들을 관찰하거나 사고실험의 형태로 장애를 가정하는 전제, 가설들을 세워보고 논증해봄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모음 중 ‘e’가 들어간 단어만 쓴다거나 ‘e’가 들어간 단어는 배제하고 소설을 썼던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울리포의 멤버였던 조르주 페렉의 실험이 보여주듯 규칙의 제정을 통한 자유의 제약, 한계의 부여는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언어의 결과 겹을 가장 섬세하고 다루는 시인들의 전위적인 시들은 대부분 조재룡 평론가가 지적한 바 있듯(‘알레고리, 지금-여기를 궁리하는 현대시의 조건’) 환유적으로 조직되었다. 기존의 서정과 은유의 문법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이 보기에 이런 시들은 죄다 ‘난해시’로 치부되었으나 신진 비평가들은 이들의 낯선 발화와 이미지가 자폐적인 ‘개인방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현대시는 주체의 감정을 재현하는 대신 타자를 감각하고, 이를 비재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처럼 은유가 지배적인 조직원리였던 시에 환유를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현대시의 지평이 열렸듯 다른 분야에 있어서도 그것을 이루고 있는 내재적 원리로서 은유와 환유, 인접성과 유사성의 분배, 분할관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새롭게 갱신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한다. 장애학은 비장애인을 완전성의 기준으로 두고, 장애를 결핍된 상태로 보는 기존의 관점을 뒤집어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불)온전함을 갖고 있는 개체로 인식하여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굴하는 분야라고 한다. 베케트, 이인성, 배수아, 정영문, 한유주 같이 ‘건강한’ ‘정상’언어의 관점에서 장애인에 가까운 이들의 언어에서 불온한 정치성, 새로운 인식론적 가능성들을 읽어낼 수 있다면 <문학과 언어> 수업을 제대로 수강했다고 말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무진기행 ㅣ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진기행

 

 

징후적(증상적) 독해를 비롯한 비평적 독해와 언어학적 분석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둘을 적절히 혼합하여 녹여내는 방식으로 글을 써보고자 한다. <무진기행>은 내면의 풍경을 유려한 한국어 문장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그런데 이 ‘유려함’이란 가치판단은 서술자의 미학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씨발’이라는 비속어 파롤은 그 자체로 쿨함이나 멋있음을 담지하지 않지만 선생님에게 대드는 것과 같은 권위, 권력에 저항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었을 때 쿨함이나 멋있음의 태도를 드러내는 기표로 기능하게 된다. <무진기행>은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이나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 같은 강렬하고 나름대로 참신한 이미지들이 열거돼있지만 그것들을 아우르는 미학적 태도가 토대가 없었다면 ‘감수성의 혁명’이란 상찬을 얻는 대신 ‘중2병 문체’라는 비아냥에 시달렸을 지도 모른다(실제로 <무진기행>의 문학적 권위에 무지한 독자가 이 소설을 읽는다면 중2병적 심성의 맹아를 단번에 포착할지 모를 일이다). 

 

   <무진기행> 미학적 태도는 기만적 부끄러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주체에게 윤리적 주체성이나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퇴행적이고 자폐적인 부끄러움, 부끄러운 일을 부끄럽다고 느낌으로써, 즉 주체적으로 끌어안으면서 일종의 참회와 정화의 기능을 수행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부끄러움에 안긴 채 변화의 의지 없이 끊임없이 자기를 연민하는 기만적 부끄러움이다. 이는 또한 어떤 타락한 세계로 인해 상실된 자신의 순수성을 애도하는 자기기만적 낭만적 태도이고, 주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외부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수동적으로 겪어내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비극적 태도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식의 유체이탈 화법처럼 윤희중/서술자는 자신의 몸과 의식을 철저히 분리하고,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몸 바깥에 위치한 (척하는) 반성적·초월적 의식이 관조적으로 바라보며 권태와 허무가 섞인 목소리로 끊임없이 내면풍경을 읊조린다. 모든 속물들을 힐난하면서 누구보다 속물적인 자신에게 비판의 화살은 끝까지 돌리지 않는 희중은 그런 면에서 철저히 비윤리적인 인물로 보인다. 인숙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비판의 대상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소외시키는 윤리적 단절, 남들을 윤리적 가치판단대상으로 놓고 자신을 판단을 내리는 심판관의 우월적 지위에 위치시키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은 철저히 ‘중2병’적이다. 아니 사실은 희중도 자신이 속물임을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반성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어떤 변화의 실천적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이 무기력과 권태, 허무로 점철된 염세주의적 태도는 196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해될 수 있다. 4.19라는 시적 혁명을 통해 자유의 공간을 열어젖혔으나 빈곤과 허기, 이승만 타도 이외에 국가를 새롭게 이끌어나갈 만한 비전과 디자인이 없었던 4.19 혁명(주체)의 내재적 한계와 그에 따른 강력한 아버지의 집권(5.16 쿠데타)으로 인한 좌절이라는 시대의 공기를 충분히 고려해야만 <무진기행>의 문학사적 가치에 타당한 독해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자아는 상징계적 질서에 진입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윤희중의 자아를 구성하는 데 있어 원초적 사건격인 병역기피를 위한 골방 유폐는 “모두가 나의 홀어머님 때문이었”(164)고, 희중이 무진에 오게 된 것도 아내와 장인의 권유 때문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끌려가는 수동적 인물로 묘사된다. 야콥슨의 환유적 독해를 받아들여 인접한 이미지들을 쭉 나열해보면 무진 – 광주에서 본 미친 여자 – 골방[어머니(의 무덤)] - 인숙이 된다. 서울이 근대화된 공간을 표상하고, 근대의 합리성이 남성적 질서와 연결된다면 무진은 아직 근대화가 진행되지 않은 자연의 공간, 그래서 희중으로 하여금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온 것처럼, ‘아이(161)’처럼 긴장을 풀게 만들어 억압된 욕망이 충동적으로 발현하는 곳(억압된 것의 회귀the return of the repressed), 봉합되고 치유되지 않은 콤플렉스가 주체를 지배하는 무대로 보인다.

 

 이 수동적 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지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에서 발견되는 신체와 정신의 분리, 주체 내부의 외부에 위치한 반성적·초월적 의식은 감각과 욕망의 ‘장난’에 의해 휘둘리는 몸, 속물덩어리(몸뚱어리)로 대상화된 타자들을 관조하거나 냉소한다. 이를 테면 ‘나는 (…) 나의 감각 속에서 (…) 느끼곤 했었다(177)’, ‘나의 감각 속에서 일어나곤 했었던 것이다(177)’, ‘나의 시력에 뚜렷이 보여오는 것이었다(178)’, ‘그 대화들이 내 귓속에서 내 머릿속으로 자리를 옮길 때는 그리고 머릿속에서 심장 속으로 옮겨갈 때는 또 몇 개가 더 없어져버릴 것인가. 아니 결국엔 모두 없어져버릴지도 모른다.’고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관찰하는 식으로 감각을 바라보는 식이다. 이런 주체형성 과정을 홀어머니 슬하에서 상징계적 질서에 진입을 실패했다는 정신분석적 언어로 해명했지만 희중의 개인사와 사회의 역사를 연결시켜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혁명과 반동 모두가 개인이 ‘소용돌이’ 같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수동성과 무기력, 관조적 자의식을 정치적 무의식의 차원에서 징후적으로 독해해볼 수 있다. 희중은 자기인식의 반작용으로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부분은 상징적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그는 ‘아내와 장인영감은 자신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퍽 영리한 권유’를 했다고 평가를 내리고, 신문지국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은 이제 점점 수근거림의 소용돌이(필자 강조)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함도 모른다는 듯이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167)’라고 조소한다. 이런 몸과 정신의 분리는 니체의 소크라테스 및 형이상학 비판이 지적했듯 필연적으로 권태와 허무를 낳는다. ‘그러자 나는 이 모든 것이 장난처럼 생각되었다. (…) 이 모든 것이 실없는 장난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려서 낑낑댄다는 것이 우습게 생각되었다(167).’

 

 

 여성들과의 만남 또한 생각해보면 모두 외부에서 들이닥친 사고와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홀어머니와는 혈연이라는 끈으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만난 셈이고, 광주역의 미친 여자 역시 여자가 자기 눈앞에 나타나버렸기에 피할 수 없는 마주침이었고, 인숙과의 만남 역시 ‘나는 그 여자가 내 생애 속에 끼어든 것을 느꼈다(176)’고 말한다. 희중은 박 선생과 같은 진정성 있는 주체 혹은 진정성 자체를 냉소하고, 여성을 굉장히 대상화되고 타자화된 시선으로 관음한다는 점에서 박가분이 분석한 ‘일베’의 마음과 비슷해 보이기까지 한다. 내면의 목소리가 사이버공간 상에서 발화된다는 점과 그 발화의 성격이 수동적 냉소가 아닌 공격적 혐오라는 변화/차이가 있지만 ‘끝까지 자기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윤리적 빈사상태만큼은 꼭 닮았다. 그래서 희중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파도에 휩쓸리는 배처럼 외부에 자극에 의해 충동에 휩싸이고 이를 몰아내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충동과 번민에 휩싸이는 ‘욕망하는 갈대’이지만 희중의 경우 수동성과 주체성/능동성의 극적 대비로 인해 흔들림이 강조된다. ‘여자는 잠깐 내 팔을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나는 갑자기 흥분되었다.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찡그리고 찡그리고 또 찡그렸다. 그러자 흥분이 가셨다.(179)’ 나는 그 여자를 어서 만나보고 싶었다. (…) 나는 그 여자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그러나 잠시 후엔 그 여자를 어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되살아났다.(186)‘

 

 

 희중은 인숙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방식으로밖에 사랑하지 못한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184)’,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193)’ 이 나르시시즘적 자아는 ‘옛날의 나’로 표상되는 상처, 콤플렉스를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여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이 자기연민에서 자기기만이 파생되는데 희중은 자신의 감정을 어색해하고 낯설어한다(uncanny). 김다혜 학우가 지적해준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가장 극명하게 이를 반증하고, ‘쓸쓸하다’라는 단어를 ‘허깨비 같은 단어 하나(189)’로 인식하는 구절이 그러하다. 감응-기계로서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감정을 느끼고 산출하던 그였기에 자기만의 온전한 감정을 느끼는 방법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기 못했기에 타자와의 관계에서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느끼더라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찢어버린 편지는 그의 분열된 자아, 균열이 나 있고 어긋난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싶다. 무진이라는 내면의 동굴로부터 나와 타자를 만나고, 상호주체적 관계를 맺지 않는 이상 이 균열을 결코 메워질 수 없을 것이다(이런 점에서 희중은 오뒷세우스를 연상시키는 데 엄기호는 <단속사회>에서 오뒷세우스의 여행을 자신의 성장을 위해 타자를 대상화시키고 정복시켜 나가는 침략적 성격이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뒷세우스의 여행이 귀향이라는 목적론적 서사에 종속되어 있기에 붓다의 여행과 다르게 길 위에 있으면서도 집을 벗어나지 못했던 거라면, 윤희중의 여행은 정신적으로 무진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무진으로 여행을 갔기에 여기서 타자를 만나지도, 그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성장을 하는 데도 실패한 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진으로 표상되는 자연, 감각, 물질의 세계는 희중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무진에서는 항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과거의 경험에 의한 조건반사였었다.(162)’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었다.(161)’ 소설에서 무진은 ‘그것은 무진이었다’(163), ‘무진이다’(171)‘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174)’라는 식으로 단독적으로 호출되며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런 호명은 단순히 반복을 통한 강조의 의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진을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인식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무진은 일종의 자연화된 여성, 하나의 거대한 ‘자궁’인 것이다. 자궁의 메타포는 주체에게 극도의 수동성을 강제한다는 점, 본능적인 충동과 억압된 것들이 회귀한다는 점, 물의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의 강조, 관념적이고 정신분석학적 기호, 장소성 같은 점에서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문득 한적이 그리울 때도 나는 무진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의 무진은 내가 관념 속에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지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163)’

 

 이런 점에서 무진의 명물인 안개를 비롯한 물의 이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가 나를 굉장한 효자로 만들어주었다(182)‘거나 바다 앞에서 희중이 온갖 상념에 빠지고, 감각에 압도당해 수동적으로 감응하는(affect) 주체가 된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물이 신화적·상징적으로 여성성을 표상한다는데 이렇게 보면 앞서 무진-여성들의 계열에 물을 추가적으로 위치시킬 수 있다.

 

 

 청각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각은 그야말로 수동적인 감각의 전형이 아니던가. ‘모든 사물이 모든 사고가 그 사이렌에 흡수되어갔다. 마침내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어져버렸다. 사이렌만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180)’ 그렇게 사이렌 소리가 지나간 후 희중은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힌다. ‘어디선가 부부들은 교합하리라. 아니다. 부부가 아니라 창부와 그 여자의 손님이리라. 나는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181)’ 죽은 여자를 보고 욕정에 사로잡힌다거나(‘그들의 푸른색 유니폼이 물에 거꾸로 비쳐 있었다. 푸른색의 깃발들이 시체를 옹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를 향하여 이상스레 정욕이 끓어오름을 느꼈다’(183)는 부분에서 역시 물의 이미지가 중요한 리비도 충동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인숙에게 욕망을 느끼는 지점들을 뜯어보면 금지된 것이나 위반적인 것(죽음, 사체, 불륜)을 욕망하는 바타유식의 사고에 들어맞는 사례인 듯 하면서도 그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잉여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 신형철 평론가를 비롯해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진기행>을 읽어낸 사례가 많았는데 그런 이론적 도식으로 포착되지 않는 어떤 잉여적인 부분에서 이 소설을 이해하는 핵심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잉여는 젊은 날의 골방을 열등감과 죄책감으로 가득 채워본 적이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명확하고 단단한 형태로 발설되지 못한 말들이 안으로 자꾸 삼켜져 곤죽처럼 녹아 늪과 안개를 이루는 내면의 방, 그곳을 밝히는 부끄러움이란 화염, 그 어두운 불꽃에 덴 언어들의 그을음을 읽어내는 게 <무진기행>을 읽어내는 방법 중 하나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리뷰는 아니고, 이 책을 바탕으로 진행된 '반지성주의' 강의에 대한 리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퍼가 아닌 리뷰로 글을 올려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어 글을 올립니다.

 

문제의식 : 지식인과 반지성주의

 

나는 지성사와 문화사 연구에 관심이 많은데 5월 15일 비교문학문화방법론 특강 반지성주의 세션에서 이택광 교수의 수업을 듣고 맑스주의와 반지성주의를 연결시켜보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강의를 간략하게 요약해본다면 반지성주의는 반공주의와 기독교 복음주의의 결합물로 인식되지만 여기에 항이 하나 더 추가돼야 하는데 바로 자유주의이다. 미국에서 진보는 ‘리버럴’이고, 이 리버럴들은 백인 노동자들의 반지성주의로 인해 트럼프가 당선되었다고 반지성주의를 비판하지만 사실 그들은 반지성주의와 은연중에 공모관계를 맺고 있다. 반지성주의는 자유주의의 이면이라 볼 수 있는데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반지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정초자 중 한 명인 홉스의 저작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홉스는 경험과 같은 계열의 심려prudentia를 이성과 같은 계열의 학식(사유)sapientia 위에 위치시킨다. 무기를 다루는 데 있어 ‘탁월한 능력과 기교를 갖추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 무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책으로 아무리 배워도 실전에서 쓸모가 없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또, 대중은 자신보다 뛰어난 역량의 소유자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막상 그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대중에게는 반엘리트주의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홉스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주권자를 지지하는 국가주의적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반민주주의자로 분류되지만 강력한 주권의 필요성을 만인의 평등성에 찾는다는 점, 또 안보를 비롯한 국가의 역할을 뛰어넘는 월권적 권력 오남용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그리스 시대 소피스트들부터 계보가 이어지는데 이들의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정치적 냉소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좌파의 상황과도 관련이 깊다. 체제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본주의를 유일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변혁할 수 있는 래디컬한 사상과 정치운동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앤서니 기든스가 천명한 ‘제3의 길’부터 중도 실용주의 노선이 우세해졌고, 이 경향은 기존의 정치세력의 몰락을 극명하게 보여준 마크롱의 당선까지 이어지고 있다. 좌파가 몰락한 자리에 극우가 득세하고 있는 가운데 정치는 소멸되고, ‘사물들의 관리’를 행하는 행정만이 남는다. 이런 정치적 맥락에서 지성주의는 결국 소피스트부터 영국경험론, 영미철학으로 이어지는 영미철학(바디우 식으로 표현하면 반철학)의 반대급부, 플라톤 전통의 대륙철학, 그중에서도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주장하는 좌파들의 입장이다.

 

 몇 가지 질문이 생기긴 했다. 진보적 자유주의 지식인 또한 반지성주의에 기여한다는 건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수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럴진대 반지성주의의 개념규정이 좀 더 명확하게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반지성주의가 표면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나 ‘지적 활동을 통한 지성의 습득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고, 이면적으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는 점까지 이해가 되는데 자유주의 체제에 반하지 않는 입장은 모두 반지성주의인지 의문스러웠다. 특히 지성주의를 공산주의와 등치시켰을 때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도그마적인 태도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지성주의, 또는 플라톤 계열의 철학(반철학에 반대되는)이 엘리트주의적 측면을 띤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또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가 이어지고 일상성과 차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했지만 이제는 다시 일반이론과 총체성을 재사유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기존의 후기구조주의를 비롯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을 수용하고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론이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지성주의를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데 국한시키지 않고 사민주의나 공산주의를 갱신하고 쇄신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생산적이지 않을까 싶다.

 

 반지성주의할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일베처럼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거부하고, 부분적인 사실이나 경험에 기초해 가치나 이념, 지적 담론을 부정하는 태도였다. 확실히 한국에서 반지성주의 집단으로 표상되는 일베의 쾌락의 극단적 평등주의나 모두가 다 ‘속물’이고 ‘병신’이라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사고방식, ‘정치적 사실주의’를 내세워 팩트 너머의 이념이나 대의, 진실을 부정하는 점을 통찰하는 데 반지성주의는 유효한 관점을 제시한다. 또, 페미니즘에 가해지는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를 분석하는 데도 있어서도 그렇다. ‘페미니즘은 피해망상증에 가까운 정신병이다’ 같은 원색적인 비난뿐만 아니라 ‘한국의 페미니즘은 ~~’라는 식으로 서구의 사상을 그대로 이식해서 한국적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이나 ‘페미니즘은 필요하지만 메갈리아는 여자일베다’라는 식으로 온건하게 제도권 내에서 성 평등의 실현을 지지하되 급진적으로 갈등과 분란을 조장하는 운동에 있어 맹목적으로 적대적인 자세를 보이는 입장도 반지성주의의 관점으로 고찰해볼만한 대상이다.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자임하는 남성들 중에는 정말이지 페미니즘을 ‘공부’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공부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이 노동운동이나 노조, 마르크스 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처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부드러운 통치는 가부장제 질서라는 반지성을 비판하는 페미니즘의 지성의 목소리를 면역학적으로 부정하는 모양새다. 그들의 주장은 논리가 결여된 주관적인 주장, 자신의 육체성과 비체성을 순수한 정신logos으로 지우지 못한 오물과 같은 것이기에 자아를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원천적으로 목소리voice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렇듯 반지성주의는 신자유주의 사회와 적극적으로 연결시켜 논의되어야 하며, 신자유주의라는 체제를 논하는 것이기에 맑스주의와 반지성주의(사실 이택광의 논의에 따르면 반지성주의 안에 이미 내재적 타자로서 맑스주의/공산주의가 자리하고 있지만)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아직까지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는 기독교 (복음주의), 반공주의, 자유주의는 각각 낙태금지법 투쟁에서 제기된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비롯해 소수자들의 권리를 억압하는 젠더 갈등, 신자유주의 체제하에 비정규직 양산을 비롯한 노동의 위기와 흙수저 담론에서 제기된 불평등 문제를 포함한 계급 갈등,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사회민주주의적 복지 담론을 색깔론을 통해 원천적으로 봉쇄했던 이데올로기 갈등을 조장하는 핵심적인 기제였다. 반지성주의를 단순히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적인 것’의 죽음, 사회 없는 사회의 도래에 따른 문화적 현상으로 볼 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시기부터 구축된 모순의 중층구조의 결과라고 보는 편이 논의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김교신, 함석헌, 장준하 등 서북 계열의 월남 지식인들을 한국 보수의 뿌리이자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라고 본 김건우의 작업이나 남한의 근대화와 서구화의 창구였던 기독교가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보수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분석한 김진호의 작업들을 유심히 지켜본 나로선 앞으로 이 주제를 좀 더 발전시키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7-05-2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스리 님. 소식이 없길래 군대 가신 줄 알았는데..
잘 지내시고 계십니까 ?

2017-05-20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학의 기쁨
금정연.정지돈 지음 / 루페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정지돈과 금정연(가나다 순으로 표기한다면 위치를 바꿔야겠지만 <작가세계>에서 진행한 '이 계절의 문학' 대담을 보면 대부분 이 순서로 이름이 배치되어 있어 이를 따르기로 했다. 나이도 많고, 가나다 순으로도 앞에 위치한 금정연이 '서평가'이기 때문에 뒤에 배치된 게 아니길 바랄 뿐이다)이 좋다. 다짜고짜 이렇게 고백하면 말하는 입장에서나 듣는 입장에서나(나는 의도적으로 쓰는 입장에서나 읽는 입장에서나 라고 쓰지 않았는데 나는 심층독서가 '듣기'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눈으로 훑으며 '보는' 것과 마음속으로 읽으며[묵독] 텍스트에 내면의 소리를 굴절시켜 '읽는' 것은 다르다. 물론 이 글은 읽지 않고 봐도 무방하지만 방금 전 읽은 그들의 대담에서 인용된 롤랑 바르트의 구절을 '킵'해놓고자 썼다. 말이 나온 김에 생각을 좀 더 풀어낸다면 정보와 지식의 용량capacity이 유한하다면 우리는 1 글뭉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무엇을 읽을 것인가)와 2 글뭉치를 어떤 식으로 재구성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것인가(어떻게 읽을 것인가. 즉 해석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맑스주의와 페미니즘, 서양현대철학, 한국문학 사이에서 부유하면서 어떻게 내 이론을 세우고, 작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지는 나날이다) 당황스럽기 마련이고, 진정성이 의심되기 마련인데(블로그를 통해 진정성 있는 고백이 가능한지 자체가 의문이긴 하지만) 좋아하는 이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글을 시작하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괄호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문장을 다시금 여기 쓴다. 정지돈과 금정연이 좋다. 정지돈과 금정연이 좋다. 정지돈과 금정연이 좋다.(어떤 선언이나 서약의 의도는 없다.)

​

 사실 나는 후장사실주의를 사지/읽어보지 않았고, 정지돈의 <내가 싸우듯이>는 알라딘 중고책방에서 샀으며(그래도 졸업하기 전 학교도서관에 이 책을 내 힘으로 신청한 전력이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금정연의 <난폭한 독서> 또한 도서관에 신청하긴 했지만 읽지 않은 상태다.  정지돈과 금정연이 글 쓰는 데만 집중할 수 있길 바라며 기본소득이나 박근혜 정부가 망친 우수문예지 지원사업의 부활과 문화예술인의 복지의 확충을 소망하고 있지만(하지만 금정연에게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그 정도로는 택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시대의 결혼은 어떤 의미에서 '숭고한' 실존적 도약/선택에 가깝지 않나 싶다) 모순적이게도 <문학의 기쁨>을 구매할 계획은 없다. 이미 디비피아에서 제공하는 <작가세계>에 연재된 글들은 프린트해서 읽었으며, 지인을 통해 확인된 추가된 새로운 글에 대해서도 도서관에서 읽고 공책이나 노트북에 정리하는 선에서 '처리'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워크룸프레스에서 나온 베케트의 책들을 주문한 이후로 신간을 사지 않고 있는 상태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알라딘 중고책방에 '중독'되어 책들을 마구 사들였더니 신간을 거의 구매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통장 잔고와 책장의 자리 부족, 민음사와 와우북축제 같은 할인행사 애용, 두꺼움 어려움 이란 구매기준의 설정 등 다양한 요인들이 얽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게 <문학의 기쁨>을 꼭 읽어보라고,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구매까지 '감행'하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

 2

 금정연 선생님에게, 2015년 10월 15일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제 뵙고 오늘 이렇게 메일을 씁니다. 집에는 잘 들어가셨는지요. 어젯밤에 오한기 씨와 함께 택시를 타러 가는 모습을 보며 생명에 지장은 없을지 걱정되었습니다만(정지돈은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금정연은 매일 술에 취한다고 한다. 하지만 위장에 문제가 생긴 이후로 금주를 철저히 지키며 술자리에서 갤포스 같은 위장약을 먹을 정도로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고 한다), 트위터를 통해 멀쩡한 모습을 뵙고 한시름 놓았습니다.

 올해 여름부터 선생님과 함께 해온 리뷰 원고가 벌써 세 번째 계절을 맞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함께 하게 됐고 어찌어찌 두 개의 원고를 썼지만 매 계절마다 수월하게 넘어가지 않는 듯합니다. 아마 그건 모든 원고가 가진 숙명이겠지요. 선생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어떡하지. 저 정말 글을 못 쓰겠어요. 선생님의 글쓰기 불능 상태는 육성과 트위터를 통해 매일 서너 번씩 듣고 있는지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계절에는 정말 위기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

...작게나마 선생님께 어떤 보답을 드려야 할까 고민하다 아래 내용을 첨부합니다. 선생님의 무기력한 일상에 한줄기 빛이 되길 바라며 이만 편지를 줄입니다.

​

ps.

제1회 서울힙합영화제 2015.10.29~11.01

http://seoulhiphopfilm.com/

​

정지돈 드림 

​


한국문학의 위기

-금정연과 정지돈의 서신교환 중

​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계절마다 세 권씩 한국문학 신간을 골라 종래의 '이 계절에 주목할 만한 신간'을 다루는 방식과 차별화되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낸다. 결국 정지돈과 금정연이 좋은 이유는 역시 "애티튜드"(김태용의 독자는 누구인지 알기 위해 서울예대 출신 신인소설가 양세형과의 대화에서 양세형은 여대생들이 김태용(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로 애티튜드를 꼽았다. 뻔하지 않은 실험을 한다는 거다. 고등학생 때 나는 '반정부적'이란 형용사에 매혹된 바 있었다. 그러니까 국정화 교과서를 반대하면서 'PT 혁명'을 주창했던 어느 여고생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일 것이다. 이는 내가 김승일, 이랑에게 매혹된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 애티튜드로 만들어낸 작업물들이 재밌었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절친이 애정하는 오한기는 아직 최애캐는 아니며, 오히려 최민우와 이상우 쪽으로 눈이 간다. 아 물론 박솔뫼는 사랑이다). 한국문학의 위기는 논하는 장에서 금정연은 자신이 어떻게 무교동 엔젤리너스커피 1층 창가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한다(그, 러, 게, 앤, 젤, 리, 너, 스, 에, 는, 왜, 갔, 어, 쯧, 쯧, 쯧, !) 한국문학의 위기는 모르겠으나 금정연의 위기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게 된다. 김사과가 매우 절제된 문체로 세계의 '망함'을 담백하게 서술해서 매력적이라면, 금정연은 생활에 짙게 밴 생활세계lebenswelt'망함'이 글에서 뚝뚝 떨어져서 매력적이랄까. 서평가(겸 문학평론가)라는 '망캐'를 선택한 플레이어(시인이라는 '망캐'를 선택해서 '어려운' 즐거움, 어려운 걸 해내는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던 김승일. 문예중앙은 디비피아에 안 떠서 확인이 어려운데 문예중앙에서 게임을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다. 커뮤니케이션 총서 <인디 게임>의 저자 이정엽과 김승일, 이강진? 세 명의 글 모두 재밌었다. 김승일의 새 시집과 베드베드북스 새 책은 언제 나올 것인가. 아무튼 '게임 인문학'이 나름 인문학의 노다지가 될 것 같은데 관심이 있는 분들은 팟캐스트 살롱 안드로메다에서 최신 에피소드들을 들어보길 바란다. 제일 좋은 건 마음에 드는 [인디]게임을 직접 해보는 거겠지만)를 구경하는 기분이랄까. 세계와의 대결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음에도 세계와 대적/대결하는 주체의 비장미 같은 게 아니라 망해가고 있는 세계에서 망해가고 있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가려고 애쓰는 이의 소시민적 영웅성, 환상과 낭만을 발라낸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고군분투하는 노동의 윤리, 아름다움 같은 거랄까.

 나도 요즘 들어 유머가 태도라는 명제에 동의하고(빨간책방 오프닝에서 들었다), 유머를 통해 삶을 좀 더 유연하게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둘은 확실히 유머가 있다(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정지돈 소설의 '유머'를 지적한 평이 있지 않은가).

​

 최근 고종석 선생님께서 에밀 시오랑 선생님께 편지를 쓰셨더군요. 서간체의 매력은 대체 무엇일까요. 고종석 선생님은 왜 자꾸 그런 칼럼을 쓰시는 걸까요. 엠마 왓슨이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를 망친 걸까요, 아니면 그 반대인가요. 존 케이지는 에릭 사티에게 편지를 쓰고 조영일 평론가는 신형철 평론가에게 편지를 씁니다(사실 신경숙 표절 사건 이후 문단권력에 대한 비판과 '문단-내-성폭행' 해시태그 말하기 운동 이후 제기된 문단권력에 대한 비판 및 한국문한 전반에 대한 비판과 성찰속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조영일의 편지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권성우까지 꾸준히 제기되었던 문제가 아니던가. 어찌 보면 문단도 정치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저는 금정연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있어요.

​

 플로베르는 편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편지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쓰는 게 귀찮단다! 오늘은 네 통! 어제는 여섯 통! 그저께도 그만큼이었지! 한심한 갈겨쓰기가 내 시간을 잡아먹고 있어.

 

 루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점심 후에 더 이상 편지를 전혀 쓰지 않는 행복한 순간을 열렬히 동경하면서 마지못해 몇 통의 하찮은 편지들을 서둘러 썼다.


 저는 이 두 개의 구절을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라는 책에서 인용했습니다. 롤랑 바르트 역시 마합니다. 편지는 사실 성가신 관리 임무, 진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플로베르의 편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플로베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카프카의 편지가 없었다면 카프카는 어떤 인상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을까요. 편지는 카프카와 플로베르와 프루스트와 루소라는 퍼즐의 마지막 피스 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노역, 그들의 번거로움, 그들의 고통과 피로, 편지는 그것의 육화입니다. 대부분의 서간체 문학이 시시한 이유는 그것이 유치하고 뻔뻔하게 진심을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편지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을 쓰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 편지는 우리의 맨살을 드러냅니다. 예술적 맨살이 아니라 진짜 맨살, 생활의 맨살이요. 그리고 늘 그렇듯 생활의 맨살은 우리가 비참할 때만 매력적입니다. ... 카프카의 절망은 문학의 영원한 포카리스웨트 아닌가요.


 같은 곳.


 이후 바르트의 구분에 따라 한국문학에 대해 썰을 푸는 부분이 나온다.


 1. 내가 증오스럽다 - 고전주의적/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정용준)

 2. 내가 자랑스럽다 - 낭만주의적/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구광렬)

 3. 내가 시대에 뒤졌다 - 현대적/최후의 마지막 결말의 끝(곽재식)


 이는 바르트의 4번 분류 '현대적 고전'을 논하기 위한 떡밥에 가깝고, 이 현대적 고전은 '미확정적이고 속임수를 당한다' 데 정지돈은 아감벤의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를 인용한다.

​

 동시대인을 참으로 자신의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자란 자신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자, 하지만 그 간극과 시대착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동시대인인가요. 동시에 우리는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요. 국정 역사교과서라니요. 이런 때에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한국문학에 대해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중의 시대착오에 빠진 건가요. 시대착오적인 시대의 시대착오. 실로 시대유감이 시대정신이 된 시대의 시대착오는 우리를 어떤 시대로 이끌게 될까요, 선생님.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한국 문학은 가능한가. 이런 질문은 시대착오적이지만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시대에 시대착오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동시대성이라고 하는 성취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 혹은 다른 곳에서 말한 unzeit, '지금이 아닌 때'의 시차적 관점을 통해 지금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것, 2백 년 전 여성해방을 말한 페미니스트가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고, 흑인해방을 말한 사람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당했던 것처럼. 김영하 또한 젊었을 적에 쓴 어느 단편에서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나이브함에 대해 냉소를 보내는 서술자를 등장시키지 않았던가(이는 냉소를 보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 냉소를 당하는, '동네북'이 된 문학의 시대적 위상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지만) '문단-내-성폭행' 해시태크 말하기 운동 이후 한국문학이 새롭게 갱신되는 상상력의 원천이 여성주의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역설하는 목소리들이 커지고 있고, 실제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본 한국현대문학사 와 성전쟁 특강이 '대박'을 치면서(여행 여독을 다 풀지 못해 강의를 수강하지 못했으나 페이스북과 기사로 열심히 소식을 접했다. 자과캠에서 조교 일을 같이 할 뻔한 박사과정 선배님이 오혜진 평론가와 페미니즘 스터디를 같이 했다고 했을 때 너무너무 부러웠다...물론 여이연이나 다른 곳에서 페미니스트 선생님들과 같이 공부할 기회는 열려 있긴 하지만) 페미니즘 열풍이 문학계 내에서 어떤 변화의 흐름을 이끌지 기대되는 상황이다. 금정연은 <고종석> 파트를 웃음폭탄을 심어둔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트위터에서는 서울시의 새 슬로건인 "I.SEOUL.U."를 패러디하는 놀이가 한창입니다. S+V+O의 기본적인 3형식 문장. 동사의 자리에 쓰인 SEOUL의 의미를 놓고 말놀이를 하는 것이지요. 내가 너를 서울하겠다 = 전세보증금을 올리겠다 = 코를 베어가겠다 등등.

 SEOUL 대신 다른 단어를 넣는 놀이도 있습니다. 일례로 한 트위터리언은 "I'll kohjongsok you"라는 문장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연쇄서신마'라는 애칭을 불리기도 하는 고종석 선생님의 최근 행보에 영감받은 그 문장의 뜻은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쓸 거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선생님에게 고종석하고 있는 셈입니다.

​

 문학을 사랑한다는 것은, 읽는 그 순간 그 현재, 그 현재성, 그 즉각성에 대한 모든 종류의 의혹을 일소하는 것이고, 그것은 화자가 살아 있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아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혹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죽음에 대해 놀라는 파스칼이고, 그것은 이 오래된 단어들(예컨대 '인간의 비참함', '욕정' 등)이 나 자신 안에 있는 현재적 사실들을 표현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른 어떤 언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

 (2)마르크스가 아놀드 루게에게 보낸 편지 제가 현시대를 과대평가한다고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만약 현시대에 절망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바로 절망적 상황이 저를 희망에 가득 차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

 (3) 금정연이 정지돈에게 보내는 편지

 ... 저는 다만 어떤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절망적 상황이 저를 희망에 가득 차게 만들어주기 대문입니다" 같은, 마르크스의 인용이 아니라면 웃기지 않은 농담이거나 할리우드 B급 영화에서 45분이 지나기 전에 목숨을 잃는 조연이 내뱉을 법한 대사로 들릴 수밖에 없는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태도를...


 예술가/지식인이 지난 시대와 같은 권위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했을 때, 예술과 상품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공공성이 탈색/표백된 상태에서 '취존'이 정언명령화되는 시대에 예술이 제 존재의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의 애티튜드. 그러니까 너도 나도 '예술가'라는 기표의 아우라를 뒤집어 쓰고 싶어서 안달하는 '장사꾼'들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존심, 이 배타적이고 완고한 비타협적 태도가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들어준다. 미셸 우엘벡이 <지도와 영토>에서 그린 현대적 예술가의 초상으로 내세운 제드에게 예술가적 윤리가 있다면 자신의 작업을 제1순위에 놓고, 충실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문단-내-성폭행'이나 여타 문화예술계 성폭행 사건이 보여주듯 유명세와 권력을 얻어 오용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작가와 작품을 따로 봐야 하냐, 함께 봐야 하나 논쟁은 차치하고). 씨네21 대담 중 영화평론가들(김경욱, 김소희, 송효정, 정지은)이 나온 대담에서 한 영화평론가는 영화평론'계'라는 게 존재하느냐고 반문하며, 영화평론가들이 점 조직처럼 움직이고 각개전투를 진행하며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다 보니까 각자의 고민이 공유되어 사회화, 정치화되지 못하고, 인정욕구가 영화계 외부로 굴절돼서 표출된 게 아니냐, 그렇다면 한 개인의 일탈적 범행으로 볼 게 아니라 영화판, 영화평론계라는 사회적 관점에서 재발방지를 접근할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송효정 "어쩌면 본인의 인정욕구를 공식적인 장에서 풀기 어려우니 적극적으로 SNS를 활용한 것일 수도 있다. 영화평론의 장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만큼 이후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장담을 못하겠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6083

). 범죄자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이뤄져야 겠으나(문학3 문학몹에서 권명아가 '성폭행은 성폭행이다'라는 명제를 강조했듯)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무래도 남성중심주의적 문학(성) 자체에 대한 발본적 비판과 성찰이 이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성폭행의 문제에 문단과 문학의 문제를 끌어들임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는 권명아의 비판은 타당하다고 여겨지나 성폭행 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하되 '문단-내-성폭행'이란 복합적인 구조안에서 성폭행을 사유하고, 문학-문단 장을 성찰해야만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문학3 녹취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http://munhak3.com/bbs_detail.php?minihome_id=&bbs_num=12&b_category=&tb=plus3

) <내가 싸우듯이> 후기/작가의 말은 지금까지 읽었던 가장 아름다운 후기 중 하나였다(황정은처럼 깔끔하게 해설을 빼버리는 것도 좋지만 <내가 싸우듯이>는 후기를 통해 한 권의 소설집으로서, 젊은 작가의 출사표/도전장과 같은 첫 번째 작품집으로서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금정연은 오한기와 정지돈을 얘기하고, 정지돈은 오한기와 금정연을 얘기하고, 오한기는 홍학을 얘기한다. 그러니 <홍학이 된 사나이>를 읽으시라(입문자에겐 <의인법>이 더 친절하고 재미있을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

 금정연이 앤젤리너스 카페 같은 잡담만 떠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는 젊은작가 수상집 윤이형의 <쿤의 여행> 해설에서 그럴 듯한 평론가들이 라캉의 상징계 운운할 것이라고 하며 에반게리온 신지의 소중함을 주석을 통해 역설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바르트와 바디우 같은 '기본템'도 곧잘 활용하는 사람이다.

​

 1. 지도주의 - 맑스주의 - 역사적, 국가적으로 예술을 인민에 봉사하도록 함 - 포화상태

 2. 낭만주의 - 독일 해석학 - 하이데거의 이론적 장치 속에서 언제나 신들의 귀환이라는 가정과 연결되어 있는, 순전히 약속에 불과한 어떤 것들이 작동함 - 포화상태

 3. 고전주의 - 정신분석 - 어떤 욕망 이론을 완전히 전개할 때 주어지는 자기의식의 과잉 - 포화상태


 금정연은 바르트가 말년에 준비했던 소설과 바디우의 4번째 도식 '현대적 고전'을 연결시키며 그것이 경이감의 회복과 연관된 개념이자 '삶을 새롭게 발명하기'라고 말한다. 이미 랭보가 말했고, 68의 그 유명한 구호의 반복이기도 하지만 68이 제 이상을 끝까지 실현하지 못한 실패한 혁명이기에(우리는 베케트의 '더 낫게 실패하라'는 말을 떠올려야 한다), 견자의 시선으로 선취한 미래를 지금, 여기에 도래시키는 시적 혁명을 현실화, 현행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다 보면 벌기 위해 살아야 하는 그지같은 전도, 역전이 일어나는데 한 번 사는 인생 그렇게 개 같이 벌다 뒤지긴 아까우니까 '다른 삶'을 모색하고 발생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도주선'(보통 탈주라 번역하지만 김재인의 번역을 따르기로 한다).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 몸을 바꾸는 일, 그러니까 마음을 감싸고 있는 굳은 껍질을 벗기고 기쁨을, 슬픔을, 고통을, 행복을 새롭게 느끼기, 꿈에서 깨는 벤야민식의 사유, 정지 상태의 변증법...

​

 내 미국 삼촌Mon Oncle d'Amerique


 저는 지금 줄무늬에 개가 그려진 오버사이즈의 스위트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언젠가 계절에 맞지 않게 옷을 입고 떨고 있는 저에게 선생님이 선물하신 옷입니다. 지금은 홈웨어가 되었지만 한동안은 외출할 때 입기도 했습니다. 친구가 저에게 한 소리하기 전까지는요. 그건 이런 말이었습니다. 우리 정연이, 미국에 계신 삼촌이 옷 보내주셨구나?


 ... I jungjidon you = 나는 네게 옷을 준다 = 내가 너의 미국 삼촌이다


 2014년 와우북축제 '책읽기는 혁명이다' 사사키 아타루를 초청한 자리에서 금정연이 사회를 봤는데 매끈하고 위트 있는 진행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그 자리에 김소연 시인과 함돈균 평론가도 함께 자리했다. 보고 싶은 함쌤과 김소연 쌤...)


 정리해보면

 I SEOUL YOU 내가 너를 서울하겠다 = 전세보증금을 올리겠다 = 코를 베어가겠다 등등.

 "I'll kohjongsok you" =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쓸 거야"

 

 

 I jungjidon you = 나는 네게 옷을 준다 = 내가 너의 미국 삼촌이다

 I yangdonghyeok you = ?? 나는 어떤 동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네게 음악CD를 선물한다(권나무, 레이첼 야마가타, 최고은) = 나는 네가 조금 슬플 줄 알길 바라는 사람이다. 나는 네게 책을 선물한다(불안의 책, 오규원 시 전집2, 기형도, 황지우, 황인찬, 박준, 허연, 김승일 등등의 시집) = 나는 너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다 ...

​

 다시 한 번 바디우. 새로운 관계를 찾지 못한 창작 에너지는 세 개의 도식에 한 세기 동안 고였고, 결과는 포화 상태의 기능부전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굼의 잘못이 아닙니다. 바디우는 예술을 내재적이고 독특한 진리로서 사유할 때(이것이 그가 더듬는 새로운 도식의 핵심입니다) 유효한 단위는 작품이나 작가가 아니라 사건에 의한 어떤 단절로부터 시작되는 예술적 짜임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문제는 관계 맺음이고, 그것의 상대항인 철학(사상 혹은 비평적 대계)의 부재입니다. (그것은 예술을 사유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라는, 혹은 철학이 없다면 예술을 사유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피할 수 없는 문제는 진리가 여기 있다는 것이고, 이 "진리가 여기 있음"은 바로 진리를 만들어내는 예술과, 진리가 있다는 조건하에서 그것을 보여주는 일을 의무이자 어려운 과업으로 삼는 철학의 공동 책임을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라고 바디우는 <비미학> 서문에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문학의 현재이기도 하다, 라는 생각입니다. 라고 금정연은 썼다. 이론의 탈서구중심주의는 내게 있어 관심 있는 주제 중 하나이지만 어설픈 이론의 민족주의의 사대주의와 짝패임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지금 여기'의 현실을 사유할 것인가-방법의 문제이고, 이론의 수명이 짧고 최신 유행이론이 소비되는 학문적 풍토가 잘못된 것일 뿐 사상의 번역('번역은 창조다' 조재룡의 <번역하는 문장들>을 보라)이, 사상의 대화가 새로운 사상의 원천이 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젊은 비평가들의 서구이론 의존도가 높다는 김인환의 비판은 새겨들어야 겠으나 랑시에르와 바디우를 읽지 않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이론을 퍼날라 표피적으로 소비하는 게 문제이지 (그런 데 표피적으로 소비하지 않으려면 번역이 잘 되어야 할텐데 <존재와 사건> 번역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복도훈 신형철 허윤진에게 가해진 서구 이론 의존성 비판이 생각나는데, 사실 이는 비단 비평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장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복합적으로 생각할 주제일 것 같다) 사상의 보편성의 차원에서 랑시에르와 바디우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국의 '시와 정치'에 대한 담론을 첨예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어느 대학원생 블로그에 말한 것처럼 자기 관점이 있는 글들을 더 많이 만나보고 싶은 게 사실이다. 아감벤, 바우만, 들뢰즈, 데리다, 낭시, 지젝, 바디우 등등이 돌아가면서 등판하는 꼴은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 첨단 이론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자기만의 작업을 하는 이들을 찾아낼 수 있는 눈 밝은 독자, 감식안을 가진 동료 연구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찌 됐든 다음 학기 때 서용순 선생님과 랑시에르, 바디우를 읽게 될 것 같으니 어떻게 프랑스산 이론무기들을 내 것으로 소화시켜 내 작업의 재료들로 활용할 수 있을지 - 불어를 배우긴 힘들 것 같고 - 고민해봐야겠다. 정지돈의 답신을 끝으로 <한국문학의 위기> 편은 이만 마무리하기로 한다. 다음엔 <한국 문학은 가능한가>를 다루도록 하겠다.

​

 '진리가 여기 있음'을 철학과 예술이 증명 - 경이감의 회복 - 삶을 새롭게 발명 

​

 선생님의 각오를 보니 장 뤽 고다르가 1968년 USC(미국 남가주대학)에서 있었던 토론에서 한 말이 떠오릅니다. 고다르의 말을 인용하며 편지를 맺음하겠습니다.


 고다르 : 나는 사람들이 다른 영화를 보러 갈 때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내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관객 : 관객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는 말인가?

 고다르 : 세계를 바꾸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


 (정지돈의 추신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p.s 영화의 역사 를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데... 아마 힘들겠지? 영화를 사랑하는 친구/애인을 사귀어서 같이 영상자료원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 요즘 읽고 있는 디디 위베르만뿐만 아니라 바디우, 랑시에르 등 불란서 학자들이 쓴 영화 관련된 책에는 웬만 하면 언급되는 영화인 듯하여 빠른 시일 내에 봐야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