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언어의 토대 - 구조기능주의 입문 ㅣ 파라디그마 Paradigma 2
로만 야콥슨.모리스 할레 지음, 박여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
4차 산업혁명을 몰고 올 거라 예견되는 인공지능 기술의 등장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직업 중 하나가 번역가이다. 그런데 사실 번역은 인공지능의 역사 초창기부터 연구된 분야였으나 딥러닝 기반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가 일어나지 전까지 진척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분야이기도 했다. 이 이유를 야콥슨 식으로 설명하면 기존의 인공지능은 ‘은유’와 ‘환유’, 인접성과 유사성의 메커니즘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녕’은 문맥에 따라 만나서 반갑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다음에 또 보자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How do you do?’라는 문장을 영한사전만 펼쳐놓고 번역하면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어?’가 아니라 ‘너는 어떻게 하고 있어’ 같은 엉뚱한 오역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언어는 축자적 의미가 아닌 문맥에 따라 코드화된 의미를 지니고, 이 코드화는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에 의해 이뤄진다. 인공지능은 딥 러닝을 통해 이 캐비닛에 해당되는 빅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은유와 환유, 유사성과 인접성의 메커니즘을 적용시켜 불가능해보였던 번역기술을 정복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여태껏 인공지능의 발전에 있어 발목을 잡던 부분이 ‘명명할 수 있는 능력’, 추상적 범주를 사고할 수 있는 메타인지 능력의 부재였는데 이를 빅데이터를 통한 딥러닝으로 돌파해낸 것이다.
abstract, 사물로부터 공통되는 특성을 추출해 범주화하는 능력을 구사하는 일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겠으나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추상적인 체계, 에피스테메를 학습하는 게 그 못지않게 어려웠을 거라 예상된다. 사실 나는 인간의 추상적인 사고에 정밀하고 정확한 수학적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한편으로 고도의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사유가 실증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초월적 가능성(창의성, 창조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포퍼나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이 보여주듯 사변과 추상의 자의성, 시-픽션적인 성격이 내재하고 있는 부정확성, 오류가 걸리는 순간이 있다. 데이터 및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유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데 부정적이지만 더 이상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인공지능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상대한다면 이는 인간에게도 결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거울삼아 인간의 정신활동을 탈마법화, 탈신화화해서 정신에 대해 좀 더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된다면 인류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다른 지적 존재에게 자신의 언어를 가르치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 말하면 가르치는 데 성공한 게 아니라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진 기계를 발명하는 데 성공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앞으로 인공지능이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언어를 학습하게끔 가르쳐주는 역할을 할 수 없을까? 마치 영화 <컨택트arrival>에서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찾아와 그들의 언어를 가르쳐줌으로써 루이스가 과거-현재-미래를 선형적으로 인식하던 기존의 인식체계와 결별하고 (이종필의 표현을 빌리자면)일괴암적 인식을 배운 것처럼 인간이 지닌 생물학적, 역사적, 문화적 조건의 강한 구속 아래 형성된 지금의 언어(학습체계)와 완전히 인식론적으로 단절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고 학습해서 구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루이스는 미래를 기억하는 비선형적 사고를 하면서도 여전히 기존의 방식 그대로 산문적이고 선형적인 언어를 구사했는데 비선형적 언어, 이를 테면 이미지나 음악, 시어를 통한 대화와 소통은 불가능한 일일까? 인간이 만든 언어가 기표가 기의에 미끄러질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언어를 바꿔야 할까? 매체를 바꿔야 할까? 텍스트에 기입되는 문자언어나 공기 매질을 통해 진동하는 음성언어가 아닌 텔레파시와 같이 매개(필연적으로 굴절을 일으키는) 없이 직접적으로 상대방의 의식에 언어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오늘날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는 반동의 시대에 과연 계몽주의적 비전이 여전히 유효한지, 시민사회의 의식수준의 지표라 일컬어지는 독서대중reading public의 규모를 일정 수준 이상 높일 수 있는 정책적 변화와 노력들을 하다 보면 사회가 정말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지 회의적이다. 테크놀로지가 유토피아를 가져올 거란 낙관적인 생각에 기대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인공지능을 하나의 지적 행위자agent이자 동료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인간의 힘만으로 인류의 행복과 지구생태계의 존속의 과제를 실현하기 어렵다면 타자에게 SOS를 보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인공지능의 번역 정복기를 관찰하면서 자연스레 인간의 외국어 학습과 비교해보게 되었다. 나이를 먹고 외국어를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사고가 모국어로 이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모국어로 사유된 문장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식으로 말하고, 듣고, 읽고, 쓴다. 외국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진행할 때 머릿속에 한국어로 완성된 문장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일대일 대응 식으로 해석하다 보니 문맥에 맞는 단어를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문장을 해석하고,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아볼 때 한영사전에 기대 문장 단위가 아닌 단어 단위로 학습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한국어 단어에 맞는 영어단어를 선택·대체alternation하는 데는 능통하지만 대체와 조합이 동시에 이뤄지지 않고, 대체된 단어들을 짜 맞추면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기 힘들다(예전에 이런 식의 문장을 보고 ‘번역기’ 돌렸다는 비아냥을 들었는데 인공지능 번역기술이 더 발전하면 이런 표현은 ‘사어’가 될 것이다). 그래서 단어를 외울 때는 영영사전을 이용하고, 문장을 통째로 외우거나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으라고 조언하는 이들이 있다. 독일어처럼 명사의 성과 격에 따라 변화를 여러 군데 줘야 하는 언어의 경우 사태가 심각해진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언어감각을 키운다고 했을 때 이 언어감각은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이 일정 크기 이상이 되면서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즉각적으로 불러올 수 있고, 문장들에 내재된 문법적 요소들을 직관적으로 터득함으로써 얻어진 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언어감각을 체득하게 되면 더 이상 모국어 문장을 파편적으로 쪼개 일일이 계산하고, 선택하고, 대체하는 게 아니라 문장 단위로의 즉각적 변환, 선택과 조합이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게 가능해진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가 주목한 자코토의 지적 실험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의 문법이나 어휘를 가르쳐준 게 아니라 ‘프랑스어’ 자체를 가르치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그랬기에 필연적으로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부분적, 파편적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전체로서 프랑스어를 파악할 수 있도록 ‘무지한 스승’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지적 평등과 해방의 논의를 전개하는 데 있어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프랑스 선생 자코토의 프랑스어 수업 사례를 선택한 건 굉장히 상징적이라 느껴진다. 아무리 뛰어난 석학이라 해도 배워본 적 없는 외국에 대해서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무지할 수밖에 없다. 외국어 초급반에 들어가면 초등학생부터 5, 60대 장년층까지 똑같이 알파벳과 같은 문자기호들과 읽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학습속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문법을 익히고, 단어를 외우고,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법을 공부해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는 없다.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론이나 일반적인 통념상 언어능력을 담당하는 뇌의 특정 부위의 발달 정도에 따라 언어 습득력의 차이는 있겠으나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것을 반복하면서 익히는 것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애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은 언어구사능력을 갖추고 있다. 설사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했더라도 글쓰기에 불편함을 느낄지언정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례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실어증aphasia적 퇴행은 아동의 음성언어 습득 과정을 거꾸로 반영mirror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하면 실어증은 아동의 언어 습득과 역순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는 문장을 접하면서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 있어 단계가 있다면 그 단계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문법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예상되었다. 인간의 언어학습 과정에 있어 첫 번째 도약하는 단계가 있다면 그건 문장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개별 단어만을 지시하거나 발음할 수 있었던 아이가 ‘엄마, 나 배고파요’ 같은 문장을 구사한다는 건 거울단계를 지나 자타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본인을 주체로서 인식하며, 자신이 배고픔을 느낄 때 배고픔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존재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이는 주어·동사·목적어·서술어 같은 문법용어들을 모르는 상태에서 문법에 맞게 적절한 문장을 구성해낸다. 그건 문장을 통째로 인지함으로써 문장에 내재된 문법규칙을 메타적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리라. 이 메타인지의 중요성은 ‘카르납이 주장하듯이 “우리가 어떤 대상언어에 대해 말할 수 있으려면, 메타언어가 필요하다.”’의 말에서도 발견된다. 이 메타언어/메타인지는 결국 언어가 인접성과 유사성, 은유와 환유의 두 가지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테크놀로지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조합(결합)combination, 구성, 정렬alignment | 선택selection, 대체, 교체alternation |
환유 | 은유 |
인접성contiguity | 유사성similarity |
리얼리즘 | 모더니즘 |
통합체 | 계열체 |
그것들을 더 높은 차원의 복잡성을 가지는 언어적 단위들로 조합 | 일정한 언어적 속성들을 선택 |
현존하는 결합in presentia. 현재의 연쇄체 안에서 연결되어 구현된 둘 또는 그 이상의 항들 | 부재하는in absentia 항들을 가상적인 기억 연쇄체의 구성 성분으로서 연결 |
연결된 속성들이 메시지와 코드 양자 안에서 또는 실제의 메시지 안에서 연결 | 코드로 연결된 속성들을 다룸 |
문맥context | 코드code |
| |
표로 은유와 환유의 특징들을 정리해보았다. 문장이 대내적으로 은유와 환유의 원리에 의해 직조된다고 한다면, 문장을 짓는 이는 대외적으로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이라고 하는 사회문화적 문법에 따라 말이 ‘말이 되게끔’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이 보여줬듯 말이 안 되는 말, 즉 아이러니는 말이 ‘말이 되게끔’ 만드는 사회문화적 문법이 얼마나 자의적인지, 어떤 논리를 따져보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폭로한다.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은 기표와 기의의 특정한 결합의 약속을 사회구성원들에게 학습시켜 언어가 커뮤니케이션에 경제적으로, 효율적으로 봉사하게끔 하고, 이 약속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밝혔듯 언어-게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규칙이다. ‘바벨탑의 우화’는 기표의 기의의 분열 및 수많은 외국어로의 분화로 인해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락하고 분화하기 전 보편언어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다. 이런 보편언어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인공언어나 에스페란토어 같은 실험들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기표와 기의 사이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정신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벨탑의 우화’는 어떤 완벽했던 기원을 상정하고 다분화되고 다양화된 오늘날의 언어 생태계를 부정적으로 규정하지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보여주듯 언어의 통일은 곧 사고의 통일일 수밖에 없고, 이는 인간의 근원적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이렇듯 기호의 상징체계, 언어의 의미체계를 규정하는 규칙은 역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에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다. 모든 말들이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해석하는 힘들이 투쟁하는 장이라 했을 때 결국 언어의 사회성은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이다. 예를 들면 ‘정치적’이란 말이 중립을 지키지 않으면서 특정한 진영에 편향적인 태도를 드러낸다는 의미로 부정적으로 전유되는 경우 ‘정치적’이란 말은 공동체 내에서 축자적, 사전적 의미보다 일련의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된, 매개된 의미로 사람들에게 전유되고 소비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정부, 지식인, 출판권력, 신문권력 등 의미체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헤게모니 집단은 규칙, 프레임을 자기 식대로 짠다. 그렇다면 두 가지 질문이 생긴다. 첫째, 언어를 특정한 방식으로 코드화하는 지배적 헤게모니에 저항할 수 있는 대항 헤게모니를 어떻게 생산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 언어의 의미체계(기표와 기의의 특정한 결합방식에 대한 약속)에 의존하더라도 상대방의 메시지를 완벽하게 독해하는 건 불가능한데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다양한 답변이 있을 수 있지만 랑시에르가 말한 ‘문학의 정치’에 주목해보고 싶다. 하지만 ‘문학의 정치’는 추후에 다른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 또한 야콥슨보다 언어와 정치, 언어와 사회를 다루는 파트에서 다루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커리큘럼상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이 빠져 있는데 하버마스가 아니더라도 이런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문학작품-사상을 만나게 되면 추후에 다뤄보고 싶다.
만약 인접성 장애를 가진 사람끼리, 유사성 장애를 가진 사람끼리 대화를 한다면 진행이 될까? 아마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화상황에서 상대방의 말을 완벽하게 해독할 수 없지만 그래도 대화가 그럭저럭 진행될 수 있는 이유는 논리체계를 공유하고 있기에 해석의 공통적 지평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인접성 장애자끼리 유사성의 체계만으로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해석의 차이는 생길 수밖에 없으며 인접성의 체계가 부재하는 만큼 정보의 부족의 해석력의 결여가 소통을 불가능상태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처럼 메시지의 인코딩과 디코딩의 관점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대화를 발신자의 텍스트와 수신자의 해석이 만나 공동의 의미지평을 형성하고 그 속에서 상호주체적으로 이해와 공감, 상상 등의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텍스트에 대한 더 좋은 해석을 만들어나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본다면, 즉 대화는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작업으로 인식한다면(무한한 대화, 끝나지 않는 대화) 소통(불가능성)을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포스트구조주의를 비롯한 인문명저들을 살펴보면 정신의학이나 병리학이 다룰 법한 주제를 탐구한 책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대표적으로 프로이트, 푸코와 깡길렘 등을 꼽을 수 이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데 20세기 서구철학이 헤겔로 대변되는 이성과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었다는 측면에서 병리현상과 장애가 추상적인 이성과 정신에 구체적인 균열을 일으켜 이들이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분절articulation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나 정신병에 걸린 환자들의 꿈과 말을 분석해 무의식을 발견했고, 푸코는 광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담론화되었는지 계보학적으로 탐구해 이성과 광기가 시대에 따라 관계적으로 구성됨을 밝혀냈다(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도 기억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 있어 기억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다룬 것으로 알고 있다). 야콥슨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기억이나 상상 같은 정신활동의 구조를 탐구하는 데 있어 장애를 가지고 있는 대상들을 관찰하거나 사고실험의 형태로 장애를 가정하는 전제, 가설들을 세워보고 논증해봄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모음 중 ‘e’가 들어간 단어만 쓴다거나 ‘e’가 들어간 단어는 배제하고 소설을 썼던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울리포의 멤버였던 조르주 페렉의 실험이 보여주듯 규칙의 제정을 통한 자유의 제약, 한계의 부여는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언어의 결과 겹을 가장 섬세하고 다루는 시인들의 전위적인 시들은 대부분 조재룡 평론가가 지적한 바 있듯(‘알레고리, 지금-여기를 궁리하는 현대시의 조건’) 환유적으로 조직되었다. 기존의 서정과 은유의 문법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이 보기에 이런 시들은 죄다 ‘난해시’로 치부되었으나 신진 비평가들은 이들의 낯선 발화와 이미지가 자폐적인 ‘개인방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현대시는 주체의 감정을 재현하는 대신 타자를 감각하고, 이를 비재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처럼 은유가 지배적인 조직원리였던 시에 환유를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현대시의 지평이 열렸듯 다른 분야에 있어서도 그것을 이루고 있는 내재적 원리로서 은유와 환유, 인접성과 유사성의 분배, 분할관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새롭게 갱신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한다. 장애학은 비장애인을 완전성의 기준으로 두고, 장애를 결핍된 상태로 보는 기존의 관점을 뒤집어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불)온전함을 갖고 있는 개체로 인식하여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굴하는 분야라고 한다. 베케트, 이인성, 배수아, 정영문, 한유주 같이 ‘건강한’ ‘정상’언어의 관점에서 장애인에 가까운 이들의 언어에서 불온한 정치성, 새로운 인식론적 가능성들을 읽어낼 수 있다면 <문학과 언어> 수업을 제대로 수강했다고 말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