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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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징후적(증상적) 독해를 비롯한 비평적 독해와 언어학적 분석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둘을 적절히 혼합하여 녹여내는 방식으로 글을 써보고자 한다. <무진기행>은 내면의 풍경을 유려한 한국어 문장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그런데 이 유려함이란 가치판단은 서술자의 미학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씨발이라는 비속어 파롤은 그 자체로 쿨함이나 멋있음을 담지하지 않지만 선생님에게 대드는 것과 같은 권위, 권력에 저항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었을 때 쿨함이나 멋있음의 태도를 드러내는 기표로 기능하게 된다. <무진기행>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이나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같은 강렬하고 나름대로 참신한 이미지들이 열거돼있지만 그것들을 아우르는 미학적 태도가 토대가 없었다면 감수성의 혁명이란 상찬을 얻는 대신 2병 문체라는 비아냥에 시달렸을 지도 모른다(실제로 <무진기행>의 문학적 권위에 무지한 독자가 이 소설을 읽는다면 중2병적 심성의 맹아를 단번에 포착할지 모를 일이다). 

 

   <무진기행> 미학적 태도는 기만적 부끄러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주체에게 윤리적 주체성이나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퇴행적이고 자폐적인 부끄러움, 부끄러운 일을 부끄럽다고 느낌으로써, 즉 주체적으로 끌어안으면서 일종의 참회와 정화의 기능을 수행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부끄러움에 안긴 채 변화의 의지 없이 끊임없이 자기를 연민하는 기만적 부끄러움이다. 이는 또한 어떤 타락한 세계로 인해 상실된 자신의 순수성을 애도하는 자기기만적 낭만적 태도이고, 주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외부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수동적으로 겪어내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비극적 태도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식의 유체이탈 화법처럼 윤희중/서술자는 자신의 몸과 의식을 철저히 분리하고,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몸 바깥에 위치한 (척하는) 반성적·초월적 의식이 관조적으로 바라보며 권태와 허무가 섞인 목소리로 끊임없이 내면풍경을 읊조린다. 모든 속물들을 힐난하면서 누구보다 속물적인 자신에게 비판의 화살은 끝까지 돌리지 않는 희중은 그런 면에서 철저히 비윤리적인 인물로 보인다. 인숙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비판의 대상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소외시키는 윤리적 단절, 남들을 윤리적 가치판단대상으로 놓고 자신을 판단을 내리는 심판관의 우월적 지위에 위치시키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은 철저히 2적이다. 아니 사실은 희중도 자신이 속물임을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반성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어떤 변화의 실천적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이 무기력과 권태, 허무로 점철된 염세주의적 태도는 196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해될 수 있다. 4.19라는 시적 혁명을 통해 자유의 공간을 열어젖혔으나 빈곤과 허기, 이승만 타도 이외에 국가를 새롭게 이끌어나갈 만한 비전과 디자인이 없었던 4.19 혁명(주체)의 내재적 한계와 그에 따른 강력한 아버지의 집권(5.16 쿠데타)으로 인한 좌절이라는 시대의 공기를 충분히 고려해야만 <무진기행>의 문학사적 가치에 타당한 독해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자아는 상징계적 질서에 진입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윤희중의 자아를 구성하는 데 있어 원초적 사건격인 병역기피를 위한 골방 유폐는 모두가 나의 홀어머님 때문이었”(164), 희중이 무진에 오게 된 것도 아내와 장인의 권유 때문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끌려가는 수동적 인물로 묘사된다. 야콥슨의 환유적 독해를 받아들여 인접한 이미지들을 쭉 나열해보면 무진 광주에서 본 미친 여자 골방[어머니(의 무덤)] - 인숙이 된다. 서울이 근대화된 공간을 표상하고, 근대의 합리성이 남성적 질서와 연결된다면 무진은 아직 근대화가 진행되지 않은 자연의 공간, 그래서 희중으로 하여금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온 것처럼, ‘아이(161)’처럼 긴장을 풀게 만들어 억압된 욕망이 충동적으로 발현하는 곳(억압된 것의 회귀the return of the repressed), 봉합되고 치유되지 않은 콤플렉스가 주체를 지배하는 무대로 보인다.

 

 이 수동적 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지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에서 발견되는 신체와 정신의 분리, 주체 내부의 외부에 위치한 반성적·초월적 의식은 감각과 욕망의 장난에 의해 휘둘리는 몸, 속물덩어리(몸뚱어리)로 대상화된 타자들을 관조하거나 냉소한다. 이를 테면 나는 () 나의 감각 속에서 () 느끼곤 했었다(177)’, ‘나의 감각 속에서 일어나곤 했었던 것이다(177)’, ‘나의 시력에 뚜렷이 보여오는 것이었다(178)’, ‘그 대화들이 내 귓속에서 내 머릿속으로 자리를 옮길 때는 그리고 머릿속에서 심장 속으로 옮겨갈 때는 또 몇 개가 더 없어져버릴 것인가. 아니 결국엔 모두 없어져버릴지도 모른다.’고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관찰하는 식으로 감각을 바라보는 식이다. 이런 주체형성 과정을 홀어머니 슬하에서 상징계적 질서에 진입을 실패했다는 정신분석적 언어로 해명했지만 희중의 개인사와 사회의 역사를 연결시켜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혁명과 반동 모두가 개인이 소용돌이같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수동성과 무기력, 관조적 자의식을 정치적 무의식의 차원에서 징후적으로 독해해볼 수 있다. 희중은 자기인식의 반작용으로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부분은 상징적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그는 아내와 장인영감은 자신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퍽 영리한 권유를 했다고 평가를 내리고, 신문지국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은 이제 점점 수근거림의 소용돌이(필자 강조)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함도 모른다는 듯이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167)’라고 조소한다. 이런 몸과 정신의 분리는 니체의 소크라테스 및 형이상학 비판이 지적했듯 필연적으로 권태와 허무를 낳는다. ‘그러자 나는 이 모든 것이 장난처럼 생각되었다. () 이 모든 것이 실없는 장난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려서 낑낑댄다는 것이 우습게 생각되었다(167).’

 

 

 여성들과의 만남 또한 생각해보면 모두 외부에서 들이닥친 사고와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홀어머니와는 혈연이라는 끈으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만난 셈이고, 광주역의 미친 여자 역시 여자가 자기 눈앞에 나타나버렸기에 피할 수 없는 마주침이었고, 인숙과의 만남 역시 나는 그 여자가 내 생애 속에 끼어든 것을 느꼈다(176)’고 말한다. 희중은 박 선생과 같은 진정성 있는 주체 혹은 진정성 자체를 냉소하고, 여성을 굉장히 대상화되고 타자화된 시선으로 관음한다는 점에서 박가분이 분석한 일베의 마음과 비슷해 보이기까지 한다. 내면의 목소리가 사이버공간 상에서 발화된다는 점과 그 발화의 성격이 수동적 냉소가 아닌 공격적 혐오라는 변화/차이가 있지만 끝까지 자기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윤리적 빈사상태만큼은 꼭 닮았다. 그래서 희중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파도에 휩쓸리는 배처럼 외부에 자극에 의해 충동에 휩싸이고 이를 몰아내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충동과 번민에 휩싸이는 욕망하는 갈대이지만 희중의 경우 수동성과 주체성/능동성의 극적 대비로 인해 흔들림이 강조된다. ‘여자는 잠깐 내 팔을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나는 갑자기 흥분되었다.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찡그리고 찡그리고 또 찡그렸다. 그러자 흥분이 가셨다.(179)’ 나는 그 여자를 어서 만나보고 싶었다. () 나는 그 여자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그러나 잠시 후엔 그 여자를 어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되살아났다.(186)‘

 

 

 희중은 인숙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방식으로밖에 사랑하지 못한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184)’,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193)’ 이 나르시시즘적 자아는 옛날의 나로 표상되는 상처, 콤플렉스를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여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이 자기연민에서 자기기만이 파생되는데 희중은 자신의 감정을 어색해하고 낯설어한다(uncanny). 김다혜 학우가 지적해준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가장 극명하게 이를 반증하고, ‘쓸쓸하다라는 단어를 허깨비 같은 단어 하나(189)’로 인식하는 구절이 그러하다. 감응-기계로서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감정을 느끼고 산출하던 그였기에 자기만의 온전한 감정을 느끼는 방법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기 못했기에 타자와의 관계에서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느끼더라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찢어버린 편지는 그의 분열된 자아, 균열이 나 있고 어긋난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싶다. 무진이라는 내면의 동굴로부터 나와 타자를 만나고, 상호주체적 관계를 맺지 않는 이상 이 균열을 결코 메워질 수 없을 것이다(이런 점에서 희중은 오뒷세우스를 연상시키는 데 엄기호는 <단속사회>에서 오뒷세우스의 여행을 자신의 성장을 위해 타자를 대상화시키고 정복시켜 나가는 침략적 성격이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뒷세우스의 여행이 귀향이라는 목적론적 서사에 종속되어 있기에 붓다의 여행과 다르게 길 위에 있으면서도 집을 벗어나지 못했던 거라면, 윤희중의 여행은 정신적으로 무진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무진으로 여행을 갔기에 여기서 타자를 만나지도, 그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성장을 하는 데도 실패한 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진으로 표상되는 자연, 감각, 물질의 세계는 희중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무진에서는 항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과거의 경험에 의한 조건반사였었다.(162)’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었다.(161)’ 소설에서 무진은 그것은 무진이었다’(163), ‘무진이다’(171)‘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174)’라는 식으로 단독적으로 호출되며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런 호명은 단순히 반복을 통한 강조의 의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진을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인식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무진은 일종의 자연화된 여성, 하나의 거대한 자궁인 것이다. 자궁의 메타포는 주체에게 극도의 수동성을 강제한다는 점, 본능적인 충동과 억압된 것들이 회귀한다는 점, 물의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의 강조, 관념적이고 정신분석학적 기호, 장소성 같은 점에서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문득 한적이 그리울 때도 나는 무진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의 무진은 내가 관념 속에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지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163)’

 

 이런 점에서 무진의 명물인 안개를 비롯한 물의 이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가 나를 굉장한 효자로 만들어주었다(182)‘거나 바다 앞에서 희중이 온갖 상념에 빠지고, 감각에 압도당해 수동적으로 감응하는(affect) 주체가 된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물이 신화적·상징적으로 여성성을 표상한다는데 이렇게 보면 앞서 무진-여성들의 계열에 물을 추가적으로 위치시킬 수 있다.

 

 

 청각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각은 그야말로 수동적인 감각의 전형이 아니던가. ‘모든 사물이 모든 사고가 그 사이렌에 흡수되어갔다. 마침내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어져버렸다. 사이렌만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180)’ 그렇게 사이렌 소리가 지나간 후 희중은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힌다. ‘어디선가 부부들은 교합하리라. 아니다. 부부가 아니라 창부와 그 여자의 손님이리라. 나는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181)’ 죽은 여자를 보고 욕정에 사로잡힌다거나(‘그들의 푸른색 유니폼이 물에 거꾸로 비쳐 있었다. 푸른색의 깃발들이 시체를 옹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를 향하여 이상스레 정욕이 끓어오름을 느꼈다’(183)는 부분에서 역시 물의 이미지가 중요한 리비도 충동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인숙에게 욕망을 느끼는 지점들을 뜯어보면 금지된 것이나 위반적인 것(죽음, 사체, 불륜)을 욕망하는 바타유식의 사고에 들어맞는 사례인 듯 하면서도 그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잉여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 신형철 평론가를 비롯해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진기행>을 읽어낸 사례가 많았는데 그런 이론적 도식으로 포착되지 않는 어떤 잉여적인 부분에서 이 소설을 이해하는 핵심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잉여는 젊은 날의 골방을 열등감과 죄책감으로 가득 채워본 적이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명확하고 단단한 형태로 발설되지 못한 말들이 안으로 자꾸 삼켜져 곤죽처럼 녹아 늪과 안개를 이루는 내면의 방, 그곳을 밝히는 부끄러움이란 화염, 그 어두운 불꽃에 덴 언어들의 그을음을 읽어내는 게 <무진기행>을 읽어내는 방법 중 하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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