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221514491&code=940100&nv=stand


<청소년교육 활동가 김은산씨는 “남자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건강한 공격성을 해소할 기회가 없다보니 무기력해지거나 게임·야동·여성에 대한 공격으로 이를 발산하고 있다”며 “공격성을 풀어낼 장소, 기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부분을 읽고 소년성에 대해 생각이 점화되었다. 최근 씨네21에 연재되고 있는 김중혁 소설가의 <바디무비>에서 다룬 <보이후드>에서 '소년'이란 화두를 전달받았는데 잠복하고 있던 생각이 점화되는 순간은 이렇게 글쓰고 싶은 욕구와 함께 오곤 한다. 


 공격성. 이 단어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이었다. 프로이트는 세계대전이 억눌려 있던 공격본능이 한꺼번에 분출된 것이라고 그의 유명한 개념인 '억압된 것의 회귀The return of the repressed'로 설명한다. 투견, 투우 등 공격성, 폭력성을 표출할 수 있는 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야만'이라 규정하고 문명이란 이름 아래 억압한 결과 한꺼번에 공격성, 폭력성이 표출된 거라는 설명이다. 우리는 분석의 적확성을 떠나 문명이라는 양식과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으로서 공격성과 폭력성이 조화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볼 수 있다. 폭력성은 꼭 폭력적인 방식에 의해 해소될 수 있는가? 경험상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공격성과 폭력성-남성성과 소년성. 연결이 되면서도 다른 지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 남성성의 경우 부정적인 측면은 몸소 경험했으나 긍정적인 측면은 별로 경험하지도 책에서 읽어보지도 못해 고등학교 때 괜한 부채의식에 사로잡히곤 했다. 당시엔 몰랐는데 돌아보니 상대방에게 상처를 줬을 만한 상황이 많았다. 대부분 에너지가 넘쳐서 행동을 했거나(중학교 때 친한 친구에 대한 애정표시로 툭툭 친다던지), 어떤 불만을 참으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표출한 것이 후회의 대상이 되었다. 나이 먹고 읽은 책들에 등장한 (특히 현대프랑스철학) '여성성'은 남성성의 부정적 측면을 상기시키면서 이해됐던 것 같다. 남성성의 긍정적 측면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물론 문학서적에서 본 남성적 문체 같은 표현을 보면서 남성성의 긍정적 측면의 뉘앙스를 어렴풋이 전달받을 수 있었다. 힘 있고, 추진력이 강하고, 외향적인. 또 함성호 시인과 김소연 시인을 함께 다룬 기사에서 김소연 시인이 함성호 시인의 <키르티무카>를 평가하면서 남성적 상상력으로 쓴 시라는 표현을 듣고 스케일이 큰, 굵직굵직한, 촘촘하고 섬세한 여성적 세계와 대비되는 남성적 세계의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었다. 


 소년성에 대해서도 갖고 있는 한 가지 재밌는 이미지가 있다. 어떤 역사학자가 친일파 청산 문제 얘기를 하면서 대한민국의 문제는 진짜 보수의 부재를 지적했는데 그러면서 일제강점기 같으면 나라 팔아먹는 수꼴매국노 새끼들은 십대 후반 소년들에 의해 찔렸는데 지금은 그런 실행력이 강한 급진좌파 세력이 없어서 수꼴들이 무서움 없이 날뛴다는 이야기. 어쩄든 소년에겐 바로크적인 면, 과장되고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순수해질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책을 읽으면서, 특히 글을 쓰면서 공격성을 표출했다. 수능만을 위한 교육 시스템과 야자가 있던 시절의 폭압적인 남고의 관습, 그 시스템 자체인 베테랑 교사들. 폭력과 폭언을 교육이라 믿는, 아니 교육은 상관없고 그냥 학교가 굴러갈 수 있도록 편한 통제수단으로 삼는 아저씨들. 나는 그들을 혐오했다. 폭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이 상하기도 했고, 교사의 권위를 오용하는 행태에 분노하면서 속으로 삭여야 했다. 잘못된 건 알았지만 그 잘못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할 확신이 없었고, 괜히 '나댔다가' '찍힐까봐' 피곤해질까봐 참는 쪽으로 타협했다. 덕분에 그때 내가 즐겨 쓰는 어휘는 '부조리'였다(당연히 카뮈에 심취했다). 가장 무서운 건 그 폭압적 방식에 '적응'해버린 아이들의 회고담, 직접 듣진 못했지만 선생님들의 입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선생님들이 '관리'해주시는 그때가 좋았었지라며 후일담을 늘어놓는다고 했다. 일상 속의 파시즘. 자기예속의 메커니즘. 최근엔 엄기호 등의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교사 자질의 문제가 아닌 무너진 공교육의 시스템의 문제란 건 이해했지만 내게 직접적으로 가해진 상처를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감정은 이성보다 호소력이 클 떄가 많다. 


 한 가지 재밌는 기억은 인권조례 발의로 야자는 해제되었지만 대책은 없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대로 “옛것은 죽었으나 새것은 태어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참여한 토론대회이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것이었나, 교육을 위한 체벌은 필요한가, 불필요한가, 뭔가 그런 풍의 주제였던 것 같은데 시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대표로 뽑히려면 A4 2~3장 분량의 글을 써서 예선(?)을 통과해야 했다. 어떻게 어떻게 예선을 통과하긴 했는데 지금도 의아한 점은 내 작은 반항심으로 선생님을 선생님이 아닌 선생이라 표현한 글이 통과됐다는 것이다. 2인 1조로 참여하는 대회에서 전교권에서 노는 얘와 토론 잘하는 친구가 한 팀을 먹고 경쟁했는데 친구 조는 아마 이런저런 외부자료를 갖다쓰느라 자기 주장을 펼치는 데 부족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만나지 않는 친구라 확인할 길은 요원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시대회에 나가 1번 타자로 '심문'을 받고 처참하게 꺠졌다. 나는 공부 잘하는 친구와 팀을 만들어 나갔는데 친구는 완전히 이과형 인간이라 토론/주제에 열의도 없었고, 외워서 발표하라고 준 발표문도 다 외우지 못했다. 나도 열심히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결과는 안 좋았지만 나름 재밌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공격성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는 마음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압박을 심하게 받지 않았는데 만약 심하게 받았다면, 문자로라도 얘기할 수 있었던 친구여자가 한 명도 주변에 없었다면, 약자를 비하하고 공격하는 데서 쾌감을 찾는 가학적이고 도착적인 방식으로 공격성을 표출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중학생의 내가 친구들을 툭툭 치면서 잘못된 방식으로 애정표현을 한 것처럼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기가 속한 동일성의 세계로부터 거리가 확보되지 않으면 객관적 시선을 갖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중독의 무서운 점은 자기가 중독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 중독이라는 악무한, 인문학-비판과 성찰의 지성이 없는 사회는 경제성장이 됐든 뭐가 됐든 악무한의 길을 달리다 스스로 추락, 침몰할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너지의 흐름. 욕망의 흐름.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쾌락을 맛본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찍은 사진을 개인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뭔가를 참고 견디는 자신을 대견해하면서, 참고 견디는 인고의 시간 끝에 성취를 하면서, 연인과 사랑을 나누면서, 연인과 나눌 사랑의 에너지까지 모아 수행에 쓰면서(쿤달리니 탄트라),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예술작품을 수집하면서, 익스트림 스포츠처럼 위험한 행동을 하면서, 규칙을 위반하면서, 직장상사, 재수없는 놈, 부패한 정치인들을 욕하면서, 소유하면서 소비하면서 낭비하면서 과시하면서 향유하면서 절제하면서 고통을 가하면서 고통을 당하면서 쾌락을 맛본다. 


 중요한 건 이 흐름이 고이면 안 된다는 점이다. 특정행동을 할 때 얻는 쾌락은 반복될수록, 그러니까 습관화되고 상투화될수록 옅어진다. 무감각해진다. 무조건적으로 통용되는 공식은 아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김치찌개를 먹어도 맛있게 먹기도 하고, 어쩔 때는 반복을 통해 숙련된 행동에서 더 큰 쾌락을 얻기도 한다.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인용한다면, 처음엔 빛이 태양에서 지구까지 오는 시간 만큼 사랑을 나눴다면, 그 다음엔 좀 더 오래 사랑을 지속하면서 두 사람 모두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조절이 가능해진다. 공부의 경우엔 특히 더할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얻는 재미도 크지만, 오랜 세월동안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향상된 실력에서 오는 더 깊고 넓은 배움에서 얻는 재미도 크다. 한 번 볼 때 뭐가 뭔지 모르겠는 영화/소설을 몇 번 보다가 어느 순간 딱 뭐가 뭔지 알 것 같은 순간 오는 쾌락이 이와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어떤 쾌락은 습관화되더라도 즐거움을 주는 반면, 어떤 쾌락은 습관화되면 점점 권태로워지는 걸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식은 결핍의 충족됨, 비어 있음이 채워지면서 쾌락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밥의 쾌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배고픔(결핍)이 채워지면서 쾌락이 온다. 재밌는 점은 포만감 - 배부른 느낌에서 좋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과 채소나 곡식에 비해 고기-육고기류나 초콜릿 같은 음식을 먹었을 때 혀끝에서 전해지는 쾌감이 월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포만감은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사람에겐 불쾌감(너무 많이 먹었다고 하는 데서 오는 죄책감)으로 바뀔 수도 있고,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의 경우 고기나 몸에 안 좋은 음식을 먹으면 건강이 나빠질 것을 우려할 것이기 때문에 쾌락을 덜 느낄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몸이 나빠져도 고기는 여전히 맛있는데 건강을 생각해서 참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담배의 경우에도 입에서 계속 당기지만 건강 때문에 참는 것일 뿐 담배맛은 여전히 맛있을 것이다. 감각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확실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급한 쾌락과 영혼을 고양시키는 고급한 쾌락, 쾌락에도 위계가 있는 것 같다. 


감각적 쾌락/ 정신적 쾌락/ 감각적 쾌락-정신적 쾌락 


감각적 쾌락에는 무엇이 있을까. 걸그룹 직캠 영상? 술, 담배, 도박에서 돈 땄을 때 등등 


정신적 쾌락에는 무엇이 있을까. 처음엔 지루하고 재미 없지만 발동이 걸리면 몰입되면서 재밌는 책 읽기, 공부? 


감각적 쾌락-정신적 쾌락에는 무엇이 있을까? 

예술작품에서 오는 심미적 쾌락은 어디에 해당될까? 

이런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실 앞으로 쓸 글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시작한 논의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Wasted Lives.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서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이 주는 느낌이 강렬해 입가에서 맴돌고 있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쓰레기가 되는 건 간단하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그/그녀는 쓰레기가 된다. 학교 와서 잠만 자고,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니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으리 만무하고, 여기에 외모치장까지 하는 '좀 노는' 학생이라면 더 불량해보이고 천박해보이고 싸구려 같아 보인다. 저 새끼 나중에 커서 뭐가 될라고/ 뭐가 되려면 적어도 중학교 때부터 어떤 코스를 밟았어야 했는데 거기서 한 번 미끄러진 아이들. 다시 궤도에 오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역전-반전은 없다. 스포츠 쪽이나 연예계 쪽으로 진출한다면 모를까 장밋빛 미래를 전망하기 힘들다. 그렇게 학교의 품을 떠난 아이는 직업시장에서 '너 아니여도 일할 사람 많아'란 고용주(그 역시 '너 아니여도 일할 곳 많아', 포화된 자영업 시장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다)의 '선고/판결'에 생존하기 위해 부조리를 견뎌야 하는 을이 된다. 그나마 일할 의지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이 의지가 상실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떤가. 


 5포 세대. 불임/불모/불가능의 리비도. 계급적 리비도-쾌락. 

 아프리카 tv에서 무한도전/예능을 보는 데서 쾌락을 느낀다면 그는 낮은 계급이 될 확률이 높다. 본방을 사수하지 못해 최신방송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무한회귀하는 '레전드' 편을 보는 사람이라면 더 더욱.

 중-고등학생일 때 이성친구 혹은 친구들과 노는 데 평균 이상의 쾌락을 느낀다면 그는 낮은 계급이 될 확률이 높다.  

 영어공부에 남들보다 더 큰 쾌락을 느낀다면 그는 높은 계급이 될 확률이 높다. 

 

등등등. 


 잠재적 경제성이 높은 쾌락에 젖줄을 대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부모와 학교, 주변환경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집단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쉬운 반면 노는 집단에서 놀면서, 인터넷쇼핑몰에서 옷 사입으면서, 허구한 날 피씨방 가고, 노래방 가고, 밥 먹고 시간-돈 축내면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래서 탄생한 게 '단속사회'다. 불결하고 천박하고 경제성이 낮은 리비도가 침투할 수 없도록 장벽을 치는 것. 고급정원에 잡초가 생기지 않도록 솎아주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잘 키운 아들이 낮은 계급의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 것! 어떻게 보면 주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르는 주식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토막 나는 주식을 사는 개미들이 있다. 오르는 주식과 오르지 않는 주식, 이 기준-정보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거의 결정된다. 인생은. 그렇게 되어버렸다. 모르면 어느새 쓰레기가 되어 있는 삶을 발견해야 하는 삶. 알면 쓰레기들을 이용해 좀 더 충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삶. 삶과 삶이 아닌 삶. 


 p.s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임대주민과 임대 아닌 주민들의 구분짓기. 구분짓기는 점점 더 세밀화되고 정교해진다. 건강한 리비도의 흐름에 이물질이 끼어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21세기의 위생주의. 엄기호가 단속사회 에필로그에서 오디세우스는 타자를 자신의 성장을 위해 소비하는 유형이라 지적했듯 타자 역시 '블루오션' 같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다뤄지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쉽게 안 바뀐다는 말이 있다. 저급한 리비도에 중독된 아이들이여, 그 진창에서 탈출하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는 더 이상 걸음마를 할 수 없다. 걸음을 걸어버린 우리는. 


아도르노는 계몽주의자, 합리주의자였다. 그래서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는 일종의 소설이라고 프로이트를 비판했다(실제로 어떤 평론가는 프로이트를 최고의 소설가 중 한 명이라 하기도 했다). 통과제의적 성격을 지닌 오이디푸스 단계에 대해서도 둘의 의견을 갈렸다. 프로이트는 분리와 미분리 상태를 명확히 구별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아도르노는 두 상태가 중첩돼 있다고 보았다. 아도르노는 동물/인간의 도식에서 동물이 분리/통과 이전에 이미 인간의 자의식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달팽이의 더듬이의 은유가 흥미로웠다. 달팽이는 하나의 육질덩어리인데 달팽이집에서 나오면서 육질덩어리가 더듬이로 변했다고 한다. 이는 미분리 상태(더듬이가 몸에 붙어 있으므로)이면서 동시에 분리 상태(더듬이가 바깥으로 나와 있으므로)-중첩 상태를 보여준다. 육체이면서 동시에 의식인 달팽이의 더듬이는 통과제의 이전의 미분리 단계에 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그러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말 것!).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분리의 고통/상처는 끊임없이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열린 상처이다   
기존의 명제들이 반복학습되었다. 

아이는 달팽이라고 볼 수 있는 존재다. 아이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모든 사물에 다가간다. 즐거움을 위해 욕동하는 순수한 호기심에 몸을 맡긴 부드러운 존재. 하지만 그는 상처를 입게 된다. 이 상처로 인해 생긴 경계심이 호기심을 억누른다. 

 mimic과 mimesis의 비교. 

 mimic은 똑같아 지려는 것이고, mimesis는 비슷해지려는 것이다. 
위협당한 벌레를 보자. 그는 살아 있으나 죽음을 mimic모방한다. 죽은 척. 그는 살기 위해 죽음에 잠시 몸을 내맡긴다. 그는 부활하기 위해 죽는다. 죽음에 언제든지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위태로운 삶의 피신처로서의 죽음이라는 토포스. 

 벌레만 죽은 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k.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하면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수동성은 묘하게 적극성을 띤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k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법.(k는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그는 어떤 일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일단 행동을 하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다가오는 미래를 끊임없이 유예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 그는 현재라는 지점/모멘트에 당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행복한 분리는 없다. 분리는 불행하게 이뤄진다. 문명/문화라는 이름으로 실행되는 폭력. 
문화를 또 이렇게 설명한다. 참을 수 없는 기억(크리스테바 식으로 비체)을 쫓아내기 위한 시스템. 비체는 배설물이나 피 같은 것이다. 생명의 근저를 이루지만 밖으로 '드러났을' 때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현대문명은 샘-위생적인 (그렇게 보이는) 하얀 변기를 발명해내며 더러운 배설물로부터 인간들을 분리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뱃속은 똥으로 가득 차 있다. 아도르노는 아담이 죽인 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약자에 대한 최초의 원초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명은 폭력, 문명이 극복하고자 했던 야만보다 더 야만적인 폭력으로 이뤄진 신화라는 것.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모든 문화는 쓰레기라고 고발한다. 

 다시 아이들. 
아이들은 질문한다. '나 어디서 나왔어? 나 어떻게 태어났어?' 억압되지 않은, 분리되지 않은 영혼은 순수한 질문을 던진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한다. 보이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이들에게 그 발화는 폭로가 된다. 이 굴절은 보임과 보이지 않음, 뭔가를 보게 만들고 보지 않게 만드는 시선-말의 지배하는 통치성에 기인한다. 그 그물에 포섭되지 않은 아이와의 대화는 우리의 잠들어 있는 부분을 일꺠운다. 아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놓치고 있었던 부분, 대답을 받아냈어야 할 근원적 질문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아이들의 입을 틍러막는 폭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혹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기존의 체제에 균열이 생길 것을 염려한 어른들의 검은 손이 아닐까. 기형도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개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적었듯 문명/폭력의 양식에 가담하고 있는 어른들의 세계에 내던져진 아이들은 상처의 기원을 찾지 못한다. 그렇게 멜랑콜리에 빠지게 된다. 이 상처의 내면화는 타자화로 부를 수도 있다. 우리가 말하는 건강한 주체는 사실 자신을 타자화시킴으로써 만들어졌다. 시스템이라는 왜곡의 양식에 적응해내면 왜곡이 정상이 왼다. 

 많은 사람들은 이 통과제의를 나름대로 해내지만 여기에 결정적으로 불화한, 실패한 하위주체들이 있다. 괴물들(프랑코 모레티의 <공포의 변증법>은 이런 관점에서 흥미롭게 읽힌다). 요괴, 구미호 등등... 그들은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인간이 되긴 됐는데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 되지 못한 이들. 정상적인 표준질서에 편입되고자 했으나 태생적으로 인간이 아니었던 이는 인간이 되어도 그 과정 속에서 고통 떄문에 인간이 아닌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근원적 불화. 
 이 고통은 의식에 기입되지 않지만 몸에 기입된다. 몸은 증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대부분 이 증상을 읽어내지 못한다. 병든 사람들. 병들었는데 병든 줄도 모르는 사람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날 이후 모두 병들었고 모두 아픈데 고칠 생각을 안 하고 더 나쁜 쪽으로 달리는 사람들. - 돈을 그렇게 많이 벌고 있으면서 세금/겅강보험료를 뺴돌리는 부자들... 물신, 도착... 언제 잠깨는가

 마취에 대해. 클로로포름. 고통이 척추[중추]에 모였닥 뇌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하고 발명된 마취의학. 뇌는 고통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몸은 기억한다, 모두. 우리는 문명화가 인류의 집단마취는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전신마취, 심한 마취에서 깨어난 이를 본 적 있다면 떠올려보라. 깨어 있으나 깨어나지 않은 것 같은 그 멍한 얼굴을.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자신이 병들었는지 아닌지, 상처의 기원이 어디인지 알아야 최소한의 치유의 길이 열린다.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배회하고 있는 멜랑콜리의 유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ttp://rikszine.korea.ac.kr/…/article/discourseList.minyeon…

'불행한 일들이 많고, 생존경쟁이 공격적으로 격화된 시대에 명랑을 말하기가 참 그렇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또 명랑해야 된다는 생각을 나는 하는데, 명랑하다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 전체, 그 힘 전체를 표현해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이다. 명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온갖 힘을 다 해서 우선 그 자리를 밝게 만들고 우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활력을 갖게 만들어주고 하는 태도다. 자기 자신도 거기에서부터 어떤 힘을 얻고 또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서 희망 같은 것을 얻어내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다. 그건 이런 시대에 한 개인의 성격적 표현이 아니라 어떤 덕목의 실천이라고 나는 생각을 한다. 명랑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 생각하고, 사랑하고, 옆에 사람들 염두에 두고 그래야 명랑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 희망을 가지려고 애쓰고 이럴 때 그 명랑함이 만들어지고 그 덕목이 실천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명랑이란 단어를 딱 듣자마자 김애란 소설가의 '달려라 아비'가 생각났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 전체, 그 힘 전체를 표현해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 요즘 정치적 냉소주의나 냉소적 우월성-나르시시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어쩌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 전체를 다 쓰지 않아서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 쓰지 못하고 남은 힘이 다 쓰지 못하게끔 만든 대상을 향해 이상한 방식으로 투사된 결과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 명랑했던 적이 있었는가 자문해보게 된다. 그 자리를 어둡게 만들고 주변 사람들의 힘을 빼앗았던 적은 기억이 잘 나는데... 왠지 모르게 피곤하고, 권태롭고, 무기력한 기분에 자주 빠지게 되는 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명랑. 어떤 위기상황을 대비해 여분의 힘을 남겨놓지 않고 다 쓴다는 것.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쓰이는 '애쓴다'는 표현이 입가에 맴돈다. 애쓴다, 애써. 무엇이 이뤄지고 이뤄지지 않고를 떠나서 애쓰는 자세 자체가 참 중요하게 느껴진다. 언어 속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상실하는 사람. 진은영 시인은 모리스 블랑쇼를 이렇게 소개했다. 애쓰는 언어는 가난하면서 고귀할 것이다. '달성되기 위한 희망의 아니라 희망 그 자체로 남기 위한 희망'을 제 청춘을 기어코 만들어내는 젊은 시인의 언어처럼. 희망은 그렇게 가까스로 태어난다(고 말하고 싶다)

http://www.hankookilbo.com/v/b4c11c623b7842ccb4a5538a66a1f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참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개인적으로 손에 꼽는 광고 카피 중 하나다. 이 세상에는 참 좋아도 설명할 방법이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이 불충분한 설명, 그러니까 화자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본디 언어화를 거부하는 사물이 있다는 것, 언어화할 수 없는 불가능의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때문이다.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나의' 좋음을 너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이 어려움에 대처하는 태도가 크게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태도와 '좋은 게 좋은 거지' 같은 모호한 동어반복이 산출하는 뉘앙스를 통해 은근슬쩍 넘어가는 태도와 네가 뭘 좋아하는지, 심지어 내가 뭘 좋아하는지에 무관심한 태도. 

 각자 개별성을 존중하는 자유주의적 태도라 볼 수 있는 첫 번째 태도는 '쿨'하지만 나의 좋음을 너에게 설명할 수 없다(좋음을 언어로 설명하기에 어려움과 가까스로 언어화해도 상대방과 소통하는데 어려움)는 불가능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한적 소통을 하고 있고, 이 제한은 언어의 재현 불가능성이란 본질적 불가능이 아닌 특정 대화 소재의 금기화라는 점에서 불가능인 척하는 인위적 불가능의 토대 위에 있다. 소통가능한 것인지 불가능한 것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검토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채, 충분히 시도해보지 않은 채 말할 수 없는 것, 말 꺼내면 피곤하기만 한 귀찮은 것으로 합의한 것처첨 보인다. 정치적 냉소주의를 깔고 있는 다원주의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는(예를 들면 과학의 과학의 영역, 종교는 종교의 영역, 선을 나누고 소통을 거부하는 태도) 여지가 보인다.    

 두 번째 태도는 갑질 같은 자기동일성의 폭력적 양태에서 흔히 볼 수 있으니 자세히 서술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세 번째 태도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세 번째 태도의 지배적 정서는 무심함이다. 정서적 권태라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이 무심함은 나의 좋음을 너에게 설명하는 어려움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했다기보다 삶이 기계적으로 변하고, 기계적 작업 이외의 정서와 느낌의 영역이 일상에서 추방당하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사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정서와 느낌의 영역이 일상에서 추방되는 과정에서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경우에서 그래도 공유할 순 없을 지라도 각자의 좋음/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타자가 존재한다면 이 경우에서 타자는 없다. 타자의 느낌에 무관심하지만 자기 느낌에 취해 있는 나르시시트도 있겠지만 느낌의 소통불가능성에 좌절해 느낌의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킨 이들도 있을 것이다. 피곤해서 정서적으로까지 피곤해지길 거부한 사람, 그래서 정서 자체가 피곤-권태로워진 사람.

 

 무심함, 정서적 권태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보자. 이를 테면 사무적 대화. 사회에서는 사무적 대화라는 대화양식이 존재한다. 사무적 대화는 일, 작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대화를 칭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사무적 대화의 포인트는 주체성의 제거, '나'를 드러내는 정서나 느낌의 은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무적 대화는 직장에서 대화가 아니라 영혼 없이 정보만 공유하는 대화를 의미한다. 기계적 대화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으나 주체성의 제거와 더불어 나의 느낌의 은폐라는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사무적 대화라는 표현을 채택했다.) 우리는 복사기에게 작업시키면서 수고해달라는 말을 건네거나 깔끔하게 잘 뽑아다고 격려해주지 않는다. 복사기는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여기엔 작업의 성과나 결과만 중요할 뿐 작업과정 속에 노고, 감정상태, 고통 등은 중요하지 않다.(기계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잘 쓰면 오래가고, 잘 못 쓰면 얼마 못 가 고장나는 기계를 보면서 기계도 단순히 소모품이 아니라 소중히 다뤄야 하는 사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지만 기계처럼 대하고, 다루고, 살면 기계와 비슷해진다. 인간-기계. 

 직장이 아닌 생활공간에서는 사무적 대화가 아닌 정서적 대화가 충분히 가능하고 이뤄지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생활공간에서도 정서는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들처럼 기운 없이 누워 있는, 흡사 죽은 것처럼 있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굉장히 복합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라 피상적 차원의 논의는 의미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블로그인만큼 자유롭게 생각을 풀어보고자 한다. 과잉연결/접속, 피상성, 고독의 부재, 타인에게 곁을 내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상의 키워드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이 필요한 시간>과 엄기호의 <단속사회>에서 빌려왔다. 타인에게 곁을 내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 배제의 두려움이 가장 큰 요인이리라. 무심함은 무한단속의 반복이 만들어낸 정서의 굳은 살, 죽은 딱딱한 껍질 같은 것은 아닐까.

 

 참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네. 이 말을 인문학에게 빌려줘도 괜찮을 것 같다. 인문학도들은 알고 있다. 인문학에 길이 있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치와 깊이의 마르지 않는 샘이 있음을. 그런데 그 좋음을 남들에게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의미나 가치는 공부-실천 속에서 체득되어야 하는 것인데 외부로부터 강요되면 심리적 거부감을 야기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육체활동처럼 직접 한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뜸과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보니 접근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조력자의 길잡이 역할-자발적 향유 수순이 일반적일 텐데 일차적으로 제도권 교육 내에서 '인문정신'-비판적, 성찰적 지성을 가르치는 교육이 작동하지 않고 있고, 작동하는 곳에서도 밥벌이에 대한 지난한 압박이 향유를 가로막는다. 또 향유라는 말이 의미하듯 공부는 고통과 뒤섞인 쾌락이다. 처음에 인문정신을 가르쳐주시는 스승을 만나기도 힘들고, 그래서 처음에 재미 붙이기도 힘들고, 재미는 붙였는데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교양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으로 만들기가 어렵다. 인문학에서 쌀이 안 나오기 때문에. 인문학으로 사람사는 구색 갖춰놓으면 살 수 있는 사람은 대학교수 등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젊은 학생들에게 인문학공부는 애초에 '지는 싸움' 정도가 아닌가 싶다. 최고 수준의 인문학자, 예술가를 보면 인생을 거기에 다 걸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정도로 치열하게 할 자신이 없으면 다른 직업생활하면서 책 읽는 게 나을 지도... 

 

 인문학도의 부정적 이미지 : 현실도피(책에 파묻혀 사는 상아탑의 이미지), 백수(아무 것도 하는 게 없어 보이는 사람), 세상에 불만이 많은 불평분자, 반동분자(너는 왜 그렇게 세상에 불만이 많니? 둥글게 살아), 이상주의자(넌 너무 이상적이야. 현실과 이상을 타협하는 게 중요해), 현실감각 떨어지는 사람,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배부른 사람, 책 좋아하는 사람(책 읽는 거 좋아하나봐요. 취미로서의 독서), 문자놀음하는 현학적인 사람, 취업 잘 안 됨, 먹고 살기 힘듬, 스티브 잡스처럼 기술에 인문학을 접목시킬 것, 융복합의 시대-통섭의 시대-'쓸모 있는' 인문학의 발명(인문학 2.0), '시대에 맞춰 인문학도 변해야 합니다' 운운.

 

 문학을 읽으면서 갖게 된 내 질문은 왜 그들은 이런 삶을 선택했을까였다. 처음엔(고등학교1학년 때) 자기희생을 통한 인류공헌한 위대한 구도자의 이미지로 봤지만 후에 그게 전부가 아님을, 물론 시대의 광풍 속에서 길을 제시하기 위해 지식인으로서, 예술가로서, 구도자로서 피할 수 없는 당위도 있지만 그것보다 그들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음을, 남들이 보기에 고통으로 가득찬 수행의 길인데 그들에겐 고통 속에 즐거움/향유가 있는 행복한 실존의 길이었음을 조금 알게 되었다(하지만 이 행복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복과는 다른 무엇일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투사일 것 같았던 이육사 시인이 실은 심약한 젊은이였음을, '천사'라고 못 박아놓은 나이팅게일(혹은 슈바이처 박사일 지도 모르겠다)이 구호활동에 번민하고 회의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질문을 앎의 차원, 인식론적 차원에 한정했기 때문에 고통 속에 향유가 존재함을 결코 알 수 없었다. 그건 정신적 차원이 아닌 물질적 삶의 차원, 존재론적 차원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보지 않는다면 결코 제대로 알기 힘든 것을 말/지식으로 설명하려고 하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울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슬프다는 정보는 습득할 수 있지만 그 슬픔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에서 인문학부가 축소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입시생들이 '취업 잘 되는 이공계열'로 다 가려고 하는 인문계열 기피현상이 위기인가? 모든 것을 화폐가치로 환원하는 물신주의, 신자유주의 질서에 매몰된 사회에 비판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힘 없는 인문학의 위상이 위기인가? 인문서적이 서점에서 안 팔리는 게 위기인가? 인문서적 안 읽는 학생-시민들이?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시민의식이? 스펙 쌓느라, 돈 버느라 책을 안 읽게 하는? 책을 재미없게 쓰는 작가들이? 책을 재미없게 쓰게끔 인간과 사회를 이따구로 만든 신이? 공부해도 직업현장에서 써먹을 게 없는, 인문학도를 받아주는 데가 없는 직업생태가 문제인가? 그런 직업생태계를 조장하는 사회구조가? 모든 걸 문제라 지목하면 아무 것도 문제가 아닌 게 된다. 구체적인 토론내용으로 들어가보자.  

 한 토론자는 인도를 이야기했다. 인도에 IT붐이 일었을 때 대학에서 IT관련 학과들을 신설하거나 다른 과를 IT과로 바꿨다고 한다. 그 결과 비약적인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그런데 사회자가 IT 밀어주기에 따른 인문학의 축소로 인해 사회에 부정적 결과는 없었냐고 묻자 토론자는 거기까지 조사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경제성장지표(경제성장률 ~%, GDP ~~달러)만으로 그 국가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사고방식. 이 노린내 나는 썩은 정신이 상류층으로 갈수록 넓게 퍼져 있으리라. 암세포처럼.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 사회의 주류일 것이다. 사회적 권력으로 보나 숫자로 보나. 대학 안에든 밖에든 CEO든 노동자든. bon sens. 교육현장에서 기업가적 주체를 양산하는 동시에 산업현장에서 노동자의 권리, 아니 목숨을 짓밟는 나라. 나라가 경제성장할수록 서민들은 살기 힘들어지는 나라. 그 많던 경제성장은 누구 주머니로 갔을까.

 인문학이 사회에 구체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을 수치로 환산하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라는 의견은 역시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지만 일견 타당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를 잘 수행한 예시가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에 제시돼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문학작품이 법정에서 합리적 판단을 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법이 시민사회의 일반적인, 평균적인 의식을 반영한다고 했을 때 더 많은 문학이 있는 시민사회는 더 정의로운 법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또 평화지수나 행복지수 같이 더 나은 삶을 위해 경제보다 어떤 가치가 중시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더 많이 발명되고, 그 지표를 경제성장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면 인문학이 우리 구체적인 삶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문학의 본질은 잉여적인 것, 통상적인 관점에서 쓸모없음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인문학의 쓸모없음으로 해서 사회가 말하는 쓸모있음을 반성적,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많은 분들이 김현 평론가의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또 창조나 창의성은 현재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이행하는 데서 산출되지 않는다. 창조는 미래의 것을 현재에 도래시키는 행위가 아닌가. 현재를 열심히 따라가는 사람은 지금 시스템에서 잘 생활할 수 있을진 몰라도 미래의 것을 창조해내지 못할 것이다(토마스 만은 토니오 크뢰거에서 생활하는 자는 창조하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스마트폰 기계는 열심히 만들어도 기술은 발명하지 못하는 나라. 

 스티브 잡스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사실 인문학이 어떤 방식으로든 경제적 효과를 내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불편함을 느꼈다. 경제-쓸모와 가장 멀리 있는 지점에 인문학 본연의 가치가 있는데 이제 인문학자들도 이게 이렇게 해서 쓸모가 있고, 도움이 되는 겁니다, 인문학의 쓸모 있음을 해명해야 하는 시대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서... 학제적 연구, 통섭적 연구 다 좋은데 자기 할 일부터 제대로 하고 융합하고 통섭하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만 평생을 해도 제대로 하기 힘든 게 학문 아니던가...      

 '조급함은 죄다' 카프카의 경구를 몸 속 깊이 새기게 되는 날들의 연속이다. 그런데 도저히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무한경쟁을 조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대기권 속에서 살고 있다. 숨을 쉬어야 사는데 숨을 쉴수록 힘들어진다. 점점. 체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점프'하게 되면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게 된다. 작년 와우북축제에서 고병권은 이런 말을 남겼다. 묵묵. 묵묵히 읽고 쓰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아닐까 하고. 묵묵히 공부하는 것. 다음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더 잘 공부하는 것(여기서 공부는 읽고 쓰는 행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p.s 최근에 철학과 다니는 친구를 사귀었다. 만나면 서로 넋두리를 풀어놓게 된다. 친구는 자꾸 지금이라도 취업공부할까 나에게 묻는 것 같진 않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처럼 툭 뱉는다. 나는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길이 나오지 않을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게 말해 본다. 어느 때보다도 고학력자들이 많은데 역설적으로 공부하기 힘든 시대. 이 풍요와 빈곤의 양극화 속에서 공부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인문학)공부하는가, 왜 공부해야 하는가 묻고 묻고 묻는다. 인문학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인문학을 공부하기 힘들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현실'이란 그럴 듯한 명분으로 우리를 협박하는 불한당들은 누구인가. 경희대 대학원 이만열(임마누엘페스트라이쉬) 교수의 말을 옮기면서 번잡한 글을 일단 닫는다. '현실은 직업 활동이 아니다. 현실은 기후 변화, 도덕/윤리 의식의 위기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바로 그것이다.    

 

 참 좋은데 말로 설명할 길이 없구나. 직접 읽어보길, 직접 느껴보길, 직접 살아보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