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개인적으로 손에 꼽는 광고 카피 중 하나다. 이 세상에는 참 좋아도 설명할 방법이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이 불충분한 설명, 그러니까 화자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본디 언어화를 거부하는 사물이 있다는 것, 언어화할 수 없는 불가능의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때문이다.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나의' 좋음을 너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이 어려움에 대처하는 태도가 크게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태도와 '좋은 게 좋은 거지' 같은 모호한 동어반복이 산출하는 뉘앙스를 통해 은근슬쩍 넘어가는 태도와 네가 뭘 좋아하는지, 심지어 내가 뭘 좋아하는지에 무관심한 태도. 

 각자 개별성을 존중하는 자유주의적 태도라 볼 수 있는 첫 번째 태도는 '쿨'하지만 나의 좋음을 너에게 설명할 수 없다(좋음을 언어로 설명하기에 어려움과 가까스로 언어화해도 상대방과 소통하는데 어려움)는 불가능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한적 소통을 하고 있고, 이 제한은 언어의 재현 불가능성이란 본질적 불가능이 아닌 특정 대화 소재의 금기화라는 점에서 불가능인 척하는 인위적 불가능의 토대 위에 있다. 소통가능한 것인지 불가능한 것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검토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채, 충분히 시도해보지 않은 채 말할 수 없는 것, 말 꺼내면 피곤하기만 한 귀찮은 것으로 합의한 것처첨 보인다. 정치적 냉소주의를 깔고 있는 다원주의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는(예를 들면 과학의 과학의 영역, 종교는 종교의 영역, 선을 나누고 소통을 거부하는 태도) 여지가 보인다.    

 두 번째 태도는 갑질 같은 자기동일성의 폭력적 양태에서 흔히 볼 수 있으니 자세히 서술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세 번째 태도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세 번째 태도의 지배적 정서는 무심함이다. 정서적 권태라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이 무심함은 나의 좋음을 너에게 설명하는 어려움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했다기보다 삶이 기계적으로 변하고, 기계적 작업 이외의 정서와 느낌의 영역이 일상에서 추방당하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사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정서와 느낌의 영역이 일상에서 추방되는 과정에서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경우에서 그래도 공유할 순 없을 지라도 각자의 좋음/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타자가 존재한다면 이 경우에서 타자는 없다. 타자의 느낌에 무관심하지만 자기 느낌에 취해 있는 나르시시트도 있겠지만 느낌의 소통불가능성에 좌절해 느낌의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킨 이들도 있을 것이다. 피곤해서 정서적으로까지 피곤해지길 거부한 사람, 그래서 정서 자체가 피곤-권태로워진 사람.

 

 무심함, 정서적 권태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보자. 이를 테면 사무적 대화. 사회에서는 사무적 대화라는 대화양식이 존재한다. 사무적 대화는 일, 작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대화를 칭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사무적 대화의 포인트는 주체성의 제거, '나'를 드러내는 정서나 느낌의 은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무적 대화는 직장에서 대화가 아니라 영혼 없이 정보만 공유하는 대화를 의미한다. 기계적 대화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으나 주체성의 제거와 더불어 나의 느낌의 은폐라는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사무적 대화라는 표현을 채택했다.) 우리는 복사기에게 작업시키면서 수고해달라는 말을 건네거나 깔끔하게 잘 뽑아다고 격려해주지 않는다. 복사기는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여기엔 작업의 성과나 결과만 중요할 뿐 작업과정 속에 노고, 감정상태, 고통 등은 중요하지 않다.(기계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잘 쓰면 오래가고, 잘 못 쓰면 얼마 못 가 고장나는 기계를 보면서 기계도 단순히 소모품이 아니라 소중히 다뤄야 하는 사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지만 기계처럼 대하고, 다루고, 살면 기계와 비슷해진다. 인간-기계. 

 직장이 아닌 생활공간에서는 사무적 대화가 아닌 정서적 대화가 충분히 가능하고 이뤄지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생활공간에서도 정서는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들처럼 기운 없이 누워 있는, 흡사 죽은 것처럼 있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굉장히 복합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라 피상적 차원의 논의는 의미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블로그인만큼 자유롭게 생각을 풀어보고자 한다. 과잉연결/접속, 피상성, 고독의 부재, 타인에게 곁을 내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상의 키워드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이 필요한 시간>과 엄기호의 <단속사회>에서 빌려왔다. 타인에게 곁을 내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 배제의 두려움이 가장 큰 요인이리라. 무심함은 무한단속의 반복이 만들어낸 정서의 굳은 살, 죽은 딱딱한 껍질 같은 것은 아닐까.

 

 참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네. 이 말을 인문학에게 빌려줘도 괜찮을 것 같다. 인문학도들은 알고 있다. 인문학에 길이 있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치와 깊이의 마르지 않는 샘이 있음을. 그런데 그 좋음을 남들에게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의미나 가치는 공부-실천 속에서 체득되어야 하는 것인데 외부로부터 강요되면 심리적 거부감을 야기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육체활동처럼 직접 한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뜸과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보니 접근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조력자의 길잡이 역할-자발적 향유 수순이 일반적일 텐데 일차적으로 제도권 교육 내에서 '인문정신'-비판적, 성찰적 지성을 가르치는 교육이 작동하지 않고 있고, 작동하는 곳에서도 밥벌이에 대한 지난한 압박이 향유를 가로막는다. 또 향유라는 말이 의미하듯 공부는 고통과 뒤섞인 쾌락이다. 처음에 인문정신을 가르쳐주시는 스승을 만나기도 힘들고, 그래서 처음에 재미 붙이기도 힘들고, 재미는 붙였는데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교양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으로 만들기가 어렵다. 인문학에서 쌀이 안 나오기 때문에. 인문학으로 사람사는 구색 갖춰놓으면 살 수 있는 사람은 대학교수 등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젊은 학생들에게 인문학공부는 애초에 '지는 싸움' 정도가 아닌가 싶다. 최고 수준의 인문학자, 예술가를 보면 인생을 거기에 다 걸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정도로 치열하게 할 자신이 없으면 다른 직업생활하면서 책 읽는 게 나을 지도... 

 

 인문학도의 부정적 이미지 : 현실도피(책에 파묻혀 사는 상아탑의 이미지), 백수(아무 것도 하는 게 없어 보이는 사람), 세상에 불만이 많은 불평분자, 반동분자(너는 왜 그렇게 세상에 불만이 많니? 둥글게 살아), 이상주의자(넌 너무 이상적이야. 현실과 이상을 타협하는 게 중요해), 현실감각 떨어지는 사람,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배부른 사람, 책 좋아하는 사람(책 읽는 거 좋아하나봐요. 취미로서의 독서), 문자놀음하는 현학적인 사람, 취업 잘 안 됨, 먹고 살기 힘듬, 스티브 잡스처럼 기술에 인문학을 접목시킬 것, 융복합의 시대-통섭의 시대-'쓸모 있는' 인문학의 발명(인문학 2.0), '시대에 맞춰 인문학도 변해야 합니다' 운운.

 

 문학을 읽으면서 갖게 된 내 질문은 왜 그들은 이런 삶을 선택했을까였다. 처음엔(고등학교1학년 때) 자기희생을 통한 인류공헌한 위대한 구도자의 이미지로 봤지만 후에 그게 전부가 아님을, 물론 시대의 광풍 속에서 길을 제시하기 위해 지식인으로서, 예술가로서, 구도자로서 피할 수 없는 당위도 있지만 그것보다 그들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음을, 남들이 보기에 고통으로 가득찬 수행의 길인데 그들에겐 고통 속에 즐거움/향유가 있는 행복한 실존의 길이었음을 조금 알게 되었다(하지만 이 행복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복과는 다른 무엇일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투사일 것 같았던 이육사 시인이 실은 심약한 젊은이였음을, '천사'라고 못 박아놓은 나이팅게일(혹은 슈바이처 박사일 지도 모르겠다)이 구호활동에 번민하고 회의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질문을 앎의 차원, 인식론적 차원에 한정했기 때문에 고통 속에 향유가 존재함을 결코 알 수 없었다. 그건 정신적 차원이 아닌 물질적 삶의 차원, 존재론적 차원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보지 않는다면 결코 제대로 알기 힘든 것을 말/지식으로 설명하려고 하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울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슬프다는 정보는 습득할 수 있지만 그 슬픔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에서 인문학부가 축소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입시생들이 '취업 잘 되는 이공계열'로 다 가려고 하는 인문계열 기피현상이 위기인가? 모든 것을 화폐가치로 환원하는 물신주의, 신자유주의 질서에 매몰된 사회에 비판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힘 없는 인문학의 위상이 위기인가? 인문서적이 서점에서 안 팔리는 게 위기인가? 인문서적 안 읽는 학생-시민들이?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시민의식이? 스펙 쌓느라, 돈 버느라 책을 안 읽게 하는? 책을 재미없게 쓰는 작가들이? 책을 재미없게 쓰게끔 인간과 사회를 이따구로 만든 신이? 공부해도 직업현장에서 써먹을 게 없는, 인문학도를 받아주는 데가 없는 직업생태가 문제인가? 그런 직업생태계를 조장하는 사회구조가? 모든 걸 문제라 지목하면 아무 것도 문제가 아닌 게 된다. 구체적인 토론내용으로 들어가보자.  

 한 토론자는 인도를 이야기했다. 인도에 IT붐이 일었을 때 대학에서 IT관련 학과들을 신설하거나 다른 과를 IT과로 바꿨다고 한다. 그 결과 비약적인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그런데 사회자가 IT 밀어주기에 따른 인문학의 축소로 인해 사회에 부정적 결과는 없었냐고 묻자 토론자는 거기까지 조사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경제성장지표(경제성장률 ~%, GDP ~~달러)만으로 그 국가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사고방식. 이 노린내 나는 썩은 정신이 상류층으로 갈수록 넓게 퍼져 있으리라. 암세포처럼.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 사회의 주류일 것이다. 사회적 권력으로 보나 숫자로 보나. 대학 안에든 밖에든 CEO든 노동자든. bon sens. 교육현장에서 기업가적 주체를 양산하는 동시에 산업현장에서 노동자의 권리, 아니 목숨을 짓밟는 나라. 나라가 경제성장할수록 서민들은 살기 힘들어지는 나라. 그 많던 경제성장은 누구 주머니로 갔을까.

 인문학이 사회에 구체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을 수치로 환산하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라는 의견은 역시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지만 일견 타당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를 잘 수행한 예시가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에 제시돼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문학작품이 법정에서 합리적 판단을 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법이 시민사회의 일반적인, 평균적인 의식을 반영한다고 했을 때 더 많은 문학이 있는 시민사회는 더 정의로운 법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또 평화지수나 행복지수 같이 더 나은 삶을 위해 경제보다 어떤 가치가 중시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더 많이 발명되고, 그 지표를 경제성장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면 인문학이 우리 구체적인 삶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문학의 본질은 잉여적인 것, 통상적인 관점에서 쓸모없음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인문학의 쓸모없음으로 해서 사회가 말하는 쓸모있음을 반성적,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많은 분들이 김현 평론가의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또 창조나 창의성은 현재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이행하는 데서 산출되지 않는다. 창조는 미래의 것을 현재에 도래시키는 행위가 아닌가. 현재를 열심히 따라가는 사람은 지금 시스템에서 잘 생활할 수 있을진 몰라도 미래의 것을 창조해내지 못할 것이다(토마스 만은 토니오 크뢰거에서 생활하는 자는 창조하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스마트폰 기계는 열심히 만들어도 기술은 발명하지 못하는 나라. 

 스티브 잡스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사실 인문학이 어떤 방식으로든 경제적 효과를 내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불편함을 느꼈다. 경제-쓸모와 가장 멀리 있는 지점에 인문학 본연의 가치가 있는데 이제 인문학자들도 이게 이렇게 해서 쓸모가 있고, 도움이 되는 겁니다, 인문학의 쓸모 있음을 해명해야 하는 시대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서... 학제적 연구, 통섭적 연구 다 좋은데 자기 할 일부터 제대로 하고 융합하고 통섭하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만 평생을 해도 제대로 하기 힘든 게 학문 아니던가...      

 '조급함은 죄다' 카프카의 경구를 몸 속 깊이 새기게 되는 날들의 연속이다. 그런데 도저히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무한경쟁을 조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대기권 속에서 살고 있다. 숨을 쉬어야 사는데 숨을 쉴수록 힘들어진다. 점점. 체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점프'하게 되면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게 된다. 작년 와우북축제에서 고병권은 이런 말을 남겼다. 묵묵. 묵묵히 읽고 쓰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아닐까 하고. 묵묵히 공부하는 것. 다음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더 잘 공부하는 것(여기서 공부는 읽고 쓰는 행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p.s 최근에 철학과 다니는 친구를 사귀었다. 만나면 서로 넋두리를 풀어놓게 된다. 친구는 자꾸 지금이라도 취업공부할까 나에게 묻는 것 같진 않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처럼 툭 뱉는다. 나는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길이 나오지 않을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게 말해 본다. 어느 때보다도 고학력자들이 많은데 역설적으로 공부하기 힘든 시대. 이 풍요와 빈곤의 양극화 속에서 공부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인문학)공부하는가, 왜 공부해야 하는가 묻고 묻고 묻는다. 인문학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인문학을 공부하기 힘들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현실'이란 그럴 듯한 명분으로 우리를 협박하는 불한당들은 누구인가. 경희대 대학원 이만열(임마누엘페스트라이쉬) 교수의 말을 옮기면서 번잡한 글을 일단 닫는다. '현실은 직업 활동이 아니다. 현실은 기후 변화, 도덕/윤리 의식의 위기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바로 그것이다.    

 

 참 좋은데 말로 설명할 길이 없구나. 직접 읽어보길, 직접 느껴보길, 직접 살아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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