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의 흐름. 욕망의 흐름.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쾌락을 맛본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찍은 사진을 개인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뭔가를 참고 견디는 자신을 대견해하면서, 참고 견디는 인고의 시간 끝에 성취를 하면서, 연인과 사랑을 나누면서, 연인과 나눌 사랑의 에너지까지 모아 수행에 쓰면서(쿤달리니 탄트라),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예술작품을 수집하면서, 익스트림 스포츠처럼 위험한 행동을 하면서, 규칙을 위반하면서, 직장상사, 재수없는 놈, 부패한 정치인들을 욕하면서, 소유하면서 소비하면서 낭비하면서 과시하면서 향유하면서 절제하면서 고통을 가하면서 고통을 당하면서 쾌락을 맛본다. 


 중요한 건 이 흐름이 고이면 안 된다는 점이다. 특정행동을 할 때 얻는 쾌락은 반복될수록, 그러니까 습관화되고 상투화될수록 옅어진다. 무감각해진다. 무조건적으로 통용되는 공식은 아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김치찌개를 먹어도 맛있게 먹기도 하고, 어쩔 때는 반복을 통해 숙련된 행동에서 더 큰 쾌락을 얻기도 한다.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인용한다면, 처음엔 빛이 태양에서 지구까지 오는 시간 만큼 사랑을 나눴다면, 그 다음엔 좀 더 오래 사랑을 지속하면서 두 사람 모두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조절이 가능해진다. 공부의 경우엔 특히 더할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얻는 재미도 크지만, 오랜 세월동안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향상된 실력에서 오는 더 깊고 넓은 배움에서 얻는 재미도 크다. 한 번 볼 때 뭐가 뭔지 모르겠는 영화/소설을 몇 번 보다가 어느 순간 딱 뭐가 뭔지 알 것 같은 순간 오는 쾌락이 이와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어떤 쾌락은 습관화되더라도 즐거움을 주는 반면, 어떤 쾌락은 습관화되면 점점 권태로워지는 걸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식은 결핍의 충족됨, 비어 있음이 채워지면서 쾌락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밥의 쾌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배고픔(결핍)이 채워지면서 쾌락이 온다. 재밌는 점은 포만감 - 배부른 느낌에서 좋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과 채소나 곡식에 비해 고기-육고기류나 초콜릿 같은 음식을 먹었을 때 혀끝에서 전해지는 쾌감이 월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포만감은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사람에겐 불쾌감(너무 많이 먹었다고 하는 데서 오는 죄책감)으로 바뀔 수도 있고,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의 경우 고기나 몸에 안 좋은 음식을 먹으면 건강이 나빠질 것을 우려할 것이기 때문에 쾌락을 덜 느낄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몸이 나빠져도 고기는 여전히 맛있는데 건강을 생각해서 참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담배의 경우에도 입에서 계속 당기지만 건강 때문에 참는 것일 뿐 담배맛은 여전히 맛있을 것이다. 감각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확실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급한 쾌락과 영혼을 고양시키는 고급한 쾌락, 쾌락에도 위계가 있는 것 같다. 


감각적 쾌락/ 정신적 쾌락/ 감각적 쾌락-정신적 쾌락 


감각적 쾌락에는 무엇이 있을까. 걸그룹 직캠 영상? 술, 담배, 도박에서 돈 땄을 때 등등 


정신적 쾌락에는 무엇이 있을까. 처음엔 지루하고 재미 없지만 발동이 걸리면 몰입되면서 재밌는 책 읽기, 공부? 


감각적 쾌락-정신적 쾌락에는 무엇이 있을까? 

예술작품에서 오는 심미적 쾌락은 어디에 해당될까? 

이런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실 앞으로 쓸 글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시작한 논의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Wasted Lives.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서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이 주는 느낌이 강렬해 입가에서 맴돌고 있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쓰레기가 되는 건 간단하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그/그녀는 쓰레기가 된다. 학교 와서 잠만 자고,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니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으리 만무하고, 여기에 외모치장까지 하는 '좀 노는' 학생이라면 더 불량해보이고 천박해보이고 싸구려 같아 보인다. 저 새끼 나중에 커서 뭐가 될라고/ 뭐가 되려면 적어도 중학교 때부터 어떤 코스를 밟았어야 했는데 거기서 한 번 미끄러진 아이들. 다시 궤도에 오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역전-반전은 없다. 스포츠 쪽이나 연예계 쪽으로 진출한다면 모를까 장밋빛 미래를 전망하기 힘들다. 그렇게 학교의 품을 떠난 아이는 직업시장에서 '너 아니여도 일할 사람 많아'란 고용주(그 역시 '너 아니여도 일할 곳 많아', 포화된 자영업 시장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다)의 '선고/판결'에 생존하기 위해 부조리를 견뎌야 하는 을이 된다. 그나마 일할 의지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이 의지가 상실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떤가. 


 5포 세대. 불임/불모/불가능의 리비도. 계급적 리비도-쾌락. 

 아프리카 tv에서 무한도전/예능을 보는 데서 쾌락을 느낀다면 그는 낮은 계급이 될 확률이 높다. 본방을 사수하지 못해 최신방송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무한회귀하는 '레전드' 편을 보는 사람이라면 더 더욱.

 중-고등학생일 때 이성친구 혹은 친구들과 노는 데 평균 이상의 쾌락을 느낀다면 그는 낮은 계급이 될 확률이 높다.  

 영어공부에 남들보다 더 큰 쾌락을 느낀다면 그는 높은 계급이 될 확률이 높다. 

 

등등등. 


 잠재적 경제성이 높은 쾌락에 젖줄을 대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부모와 학교, 주변환경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집단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쉬운 반면 노는 집단에서 놀면서, 인터넷쇼핑몰에서 옷 사입으면서, 허구한 날 피씨방 가고, 노래방 가고, 밥 먹고 시간-돈 축내면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래서 탄생한 게 '단속사회'다. 불결하고 천박하고 경제성이 낮은 리비도가 침투할 수 없도록 장벽을 치는 것. 고급정원에 잡초가 생기지 않도록 솎아주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잘 키운 아들이 낮은 계급의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 것! 어떻게 보면 주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르는 주식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토막 나는 주식을 사는 개미들이 있다. 오르는 주식과 오르지 않는 주식, 이 기준-정보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거의 결정된다. 인생은. 그렇게 되어버렸다. 모르면 어느새 쓰레기가 되어 있는 삶을 발견해야 하는 삶. 알면 쓰레기들을 이용해 좀 더 충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삶. 삶과 삶이 아닌 삶. 


 p.s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임대주민과 임대 아닌 주민들의 구분짓기. 구분짓기는 점점 더 세밀화되고 정교해진다. 건강한 리비도의 흐름에 이물질이 끼어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21세기의 위생주의. 엄기호가 단속사회 에필로그에서 오디세우스는 타자를 자신의 성장을 위해 소비하는 유형이라 지적했듯 타자 역시 '블루오션' 같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다뤄지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쉽게 안 바뀐다는 말이 있다. 저급한 리비도에 중독된 아이들이여, 그 진창에서 탈출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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