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더 이상 걸음마를 할 수 없다. 걸음을 걸어버린 우리는. 


아도르노는 계몽주의자, 합리주의자였다. 그래서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는 일종의 소설이라고 프로이트를 비판했다(실제로 어떤 평론가는 프로이트를 최고의 소설가 중 한 명이라 하기도 했다). 통과제의적 성격을 지닌 오이디푸스 단계에 대해서도 둘의 의견을 갈렸다. 프로이트는 분리와 미분리 상태를 명확히 구별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아도르노는 두 상태가 중첩돼 있다고 보았다. 아도르노는 동물/인간의 도식에서 동물이 분리/통과 이전에 이미 인간의 자의식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달팽이의 더듬이의 은유가 흥미로웠다. 달팽이는 하나의 육질덩어리인데 달팽이집에서 나오면서 육질덩어리가 더듬이로 변했다고 한다. 이는 미분리 상태(더듬이가 몸에 붙어 있으므로)이면서 동시에 분리 상태(더듬이가 바깥으로 나와 있으므로)-중첩 상태를 보여준다. 육체이면서 동시에 의식인 달팽이의 더듬이는 통과제의 이전의 미분리 단계에 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그러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말 것!).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분리의 고통/상처는 끊임없이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열린 상처이다   
기존의 명제들이 반복학습되었다. 

아이는 달팽이라고 볼 수 있는 존재다. 아이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모든 사물에 다가간다. 즐거움을 위해 욕동하는 순수한 호기심에 몸을 맡긴 부드러운 존재. 하지만 그는 상처를 입게 된다. 이 상처로 인해 생긴 경계심이 호기심을 억누른다. 

 mimic과 mimesis의 비교. 

 mimic은 똑같아 지려는 것이고, mimesis는 비슷해지려는 것이다. 
위협당한 벌레를 보자. 그는 살아 있으나 죽음을 mimic모방한다. 죽은 척. 그는 살기 위해 죽음에 잠시 몸을 내맡긴다. 그는 부활하기 위해 죽는다. 죽음에 언제든지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위태로운 삶의 피신처로서의 죽음이라는 토포스. 

 벌레만 죽은 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k.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하면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수동성은 묘하게 적극성을 띤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k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법.(k는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그는 어떤 일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일단 행동을 하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다가오는 미래를 끊임없이 유예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 그는 현재라는 지점/모멘트에 당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행복한 분리는 없다. 분리는 불행하게 이뤄진다. 문명/문화라는 이름으로 실행되는 폭력. 
문화를 또 이렇게 설명한다. 참을 수 없는 기억(크리스테바 식으로 비체)을 쫓아내기 위한 시스템. 비체는 배설물이나 피 같은 것이다. 생명의 근저를 이루지만 밖으로 '드러났을' 때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현대문명은 샘-위생적인 (그렇게 보이는) 하얀 변기를 발명해내며 더러운 배설물로부터 인간들을 분리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뱃속은 똥으로 가득 차 있다. 아도르노는 아담이 죽인 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약자에 대한 최초의 원초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명은 폭력, 문명이 극복하고자 했던 야만보다 더 야만적인 폭력으로 이뤄진 신화라는 것.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모든 문화는 쓰레기라고 고발한다. 

 다시 아이들. 
아이들은 질문한다. '나 어디서 나왔어? 나 어떻게 태어났어?' 억압되지 않은, 분리되지 않은 영혼은 순수한 질문을 던진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한다. 보이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이들에게 그 발화는 폭로가 된다. 이 굴절은 보임과 보이지 않음, 뭔가를 보게 만들고 보지 않게 만드는 시선-말의 지배하는 통치성에 기인한다. 그 그물에 포섭되지 않은 아이와의 대화는 우리의 잠들어 있는 부분을 일꺠운다. 아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놓치고 있었던 부분, 대답을 받아냈어야 할 근원적 질문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아이들의 입을 틍러막는 폭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혹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기존의 체제에 균열이 생길 것을 염려한 어른들의 검은 손이 아닐까. 기형도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개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적었듯 문명/폭력의 양식에 가담하고 있는 어른들의 세계에 내던져진 아이들은 상처의 기원을 찾지 못한다. 그렇게 멜랑콜리에 빠지게 된다. 이 상처의 내면화는 타자화로 부를 수도 있다. 우리가 말하는 건강한 주체는 사실 자신을 타자화시킴으로써 만들어졌다. 시스템이라는 왜곡의 양식에 적응해내면 왜곡이 정상이 왼다. 

 많은 사람들은 이 통과제의를 나름대로 해내지만 여기에 결정적으로 불화한, 실패한 하위주체들이 있다. 괴물들(프랑코 모레티의 <공포의 변증법>은 이런 관점에서 흥미롭게 읽힌다). 요괴, 구미호 등등... 그들은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인간이 되긴 됐는데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 되지 못한 이들. 정상적인 표준질서에 편입되고자 했으나 태생적으로 인간이 아니었던 이는 인간이 되어도 그 과정 속에서 고통 떄문에 인간이 아닌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근원적 불화. 
 이 고통은 의식에 기입되지 않지만 몸에 기입된다. 몸은 증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대부분 이 증상을 읽어내지 못한다. 병든 사람들. 병들었는데 병든 줄도 모르는 사람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날 이후 모두 병들었고 모두 아픈데 고칠 생각을 안 하고 더 나쁜 쪽으로 달리는 사람들. - 돈을 그렇게 많이 벌고 있으면서 세금/겅강보험료를 뺴돌리는 부자들... 물신, 도착... 언제 잠깨는가

 마취에 대해. 클로로포름. 고통이 척추[중추]에 모였닥 뇌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하고 발명된 마취의학. 뇌는 고통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몸은 기억한다, 모두. 우리는 문명화가 인류의 집단마취는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전신마취, 심한 마취에서 깨어난 이를 본 적 있다면 떠올려보라. 깨어 있으나 깨어나지 않은 것 같은 그 멍한 얼굴을.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자신이 병들었는지 아닌지, 상처의 기원이 어디인지 알아야 최소한의 치유의 길이 열린다.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배회하고 있는 멜랑콜리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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