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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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 <소년이 온다>1980년 광주, 계엄군에 맞서 싸운 소년 동호와 그곳에 남아있던 사람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올해 읽었던 한국소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소설 중에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작품.

리뷰 : 소설은 어떻게 시작될까?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질문을 한번쯤 던져봤을 것 같다. 이 질문을 작가에게 옮긴다면 나는 왜 쓰는가로 변주될 것이다. 책과 소설가들의 강연을 기웃거린 결과 몇몇 답변들을 얻을 수 있었다. 천명관 소설가는 핑크라는 단편이 대리운전을 하는 당신의 친구가 해준 이야기의 첫 문장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에서 시작됐다고 말해주셨다. 이렇게 한 문장에서 출발하는 소설도 있고, 특정 이미지에서 출발하는 소설도 있다.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는 소설도 있고, 작가가 가장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실존적 질문에서 출발하는 소설도 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한다(문학동네 문학이야기 팟캐스트를 참조했다). 한강이 쓸 수 있는 가장 밝은 이야기라고 설명한 <희랍어시간>을 쓰고 나서 더 밝은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내면을 찬찬히 살핀 결과 80년 광주의 기억과 만났다고 설명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독일속담이 인용되는데 사실 어떤 한 번모든 것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을 가감 없이 보여준 80년 광주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은 한강은 아마도 이 한 번이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음을,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이란 존재를 완전히 끌어안고, 긍정하는 건 자기기만임을 직감했던 것 같다. 소년은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오기 시작했다.


4쇠와 피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버거운 잔인한 고문의 기억을 담담한 언어로 서술하고, 6꽃핀 쪽으로에서는 동호 어머니의 구수한 사투리가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과 마찰하면서 더 짙은 비의를 전달한다. 작가는 쓴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p167)’로 시작하는 처참하고 처절한 증언불가능성에 대한 증언을,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p192)’ 동호의 맑은 영혼의 목소리를 불러내는 기억을, 소년들의 무덤 앞에서 슬픔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p192)’ 자신이 써야() 할 것을 (p211)’ 쓰기 위해 묵묵히 죽음의 자리를 응시하는 곧은 자세를. 그러면서 그녀는 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광휘에 대해 쓰고(p116), 부서짐으로써 존재를 증명한 영혼에 대해 쓰며(p130), 존엄의 순간(p213)에 대해 쓴다. 한강은 폭력으로 짓밟힌 폐허 속에서 인간을 정당한’, ‘정확한이유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불가능해 보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촛불 같은 한 줄기 미세한 빛줄기를 길어올리기 위해 그녀는 <소년이 온다> 집필 당시 잠자다가도 악몽에 시달려 벌떡 일어났다고 했다. 그 불면(不眠)이 있었기에 광주의 노래가 살 속으로, 뼈 속으로 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노래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5) :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봄날(임철우),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조르조 아감벤), 죽음의 푸가(파울 첼란),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김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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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51

홍대 칼국수집 두리반은 작은 용산이었다

용산에서 5명이 망루에 올라가 불타 죽었지만두리반에서는 뮤지션-예술가들이 공연을 하면서 1년여가 넘는 장기간 동안의 투쟁을 통해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홍대의 땅값이 비싸지는 바람에 공연할 공간을 잃어버린 뮤지션들과 재개발을 이유로 적당한 보상금을 '먹고 떨어지라'는 식으로 주며 자본의 폭력을 행사하려는 대기업에 저항한 두리반 사장님들의 연대가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었다. 이렇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집'을 잃어버린 이들의 '우리 집 지키기 프로젝트',의 성공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한받과 객원댄서 이랑, 하헌진, 강정 jam docu에서도 본 적 있는 밤섬해적단, 회기동단편선 등의 뮤지션이 파티51에 동참했고, 씨네토크에 출연해주신 심보선 시인을 비롯해 1월 11일 동인이 낭독회를 적극적으로 열었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듣고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예중앙에 연재 중인 '가사 울림통'에 나온 4명이 모두 두리반-파티51에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야마가타 트윅스터, 회기동 단편선, 이랑, 1월 11일 동인인 밴드 MOT의 이이언까지.

아마 용산 이후로 '예술/문학과 정치'가 다시 화두로 떠오른 것으로 알고 있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예술의 정치성, 미적인 것의 정치성, 예술과 정치의 접점을 찾으려는 다각적 시도가 이뤄져 왔다. 대산문학상 수상 당시 이광호 평론가가 예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만남을 자신의 비평적 화두로 삼는다는 식의 소회를 밝혔고, 이는 문학과 정치를 탐구하는 다른 평론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장'의 중심에 있었던 진은영 시인의 <문학의 아토포스>는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읽지 않을 수 없는 책일 것이다. 문득 진은영 시인은 두리반 투쟁에 참여하셨을지 궁금해졌다. '베프' 심보선 시인과 함께 참여했을 거란 예상 ^^

용산 사건은 한국 문단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문학인들은 <작가선언 6.9>을 발표하고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문집을 냈다. 뿐만 아니라 이시영 시인의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를 비롯해 많은 작가들이 용산을 문학화하고, 증언하고자 했다. 세월호 사건 이후의 반응도 비슷한 것 같다. 문학인들의 시국선언과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문집 발간.

 

파티51 관람 후 내게 남은 이미지는 이랬다. 자본보다 무서운 법. 법보다 더 무서운 자본과 유착한 법. <법의 힘>. 현재 법이 자본으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지 잘 모르겠고, 법이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정의 - 옳은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힘이 약하고, 힘이 강한 사람들은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권력/폭력과 정의 사이의 괴리가 있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멈추고 정의실현이라고 하는 법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치. 정치의 올바른 작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치의 올바른 작동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로선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만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앞으로는 정치가 역사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k[1,2])고 말했을 때 정치는 자본주의 시대니까 ~~ 해야 한다 같은 식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주체들의 자기복제적 중얼거림이 아니라 이 이데올로기의 꿈으로부터 각성해 이전부터 존재했으나 현실화되지 못한 '오래된 미래'를 지금-여기에 도래시키는 언어, '문자의 사슬을 끊고 나오는 해방된 산문', 임재하는 진리의 언어로 말해지는 그 무엇이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파티51은 유쾌한 영화였다. 무엇보다 두리반 현장에서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춤추고 열광하며 즐긴 청중들이 부러웠다. 고2나 고3였을 텐데 그때 두리반-파티51을 경험했다면 지금의 나와는 조금, 혹은 많이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마지막으로 회기동 단편선의 라이브 무대 정말 좋았고, 언젠가 꼭 한 번 한받 님과 '돈만아는저질' 댄스를 같이 추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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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8657.html

 

초등학교 다닐 때 ~~살아남기 시리즈를 즐겨 읽었다.

화산에서 살아남기,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아마존에서 살아남기 등등

중간중간에 껴있는 과학설명도 빼놓지 않고 읽었지만 만화서사를 따라가는 몸으로 읽어낸 과학설명은 순간적으로 지적 쾌락을 채워주는 고급 디저트였을 뿐이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밥은 아니지만 혀를 즐겁게 해주는 디-저트.

 

이 시리즈의 새로운 버전을 생각해본다. 한국에서 살아남기, 북한에서 살아남기, 일본에서 살아남기, ~~ 살아남기... 오히려 이전의 살아남기 시리즈에서 다뤄졌던 오지가 '문명'사회보다 살아남는 데 더 수월해보이기도 한다. 오지에서 인간은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면 되지만 문명사회에서 인간은 자연이 된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경쟁 논리로부터, 그 논리를 내면화한 인간들로부터, 자신을 법에 기입된 시민이 아닌 '벌거벗은 생명'으로 탈바꿈시킬 지도 모르는 법으로부터, 자신이 먹는 음식에 들어 있을 지도 모르는 방사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극한의 난이도이다.

 

이렇듯 최근 몇 년 사이 재난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재난이 현 사회/세계를 읽는 콘텍스트가 되었다고 봐도 무리 없을 듯 싶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폭풍공감'을 이끌어내며 하나의 트렌드가 된 미생은 이렇게 한국사회를 요약하고 있지 않은가. 직장 안은 전쟁터고, 직장 바깥은 지옥이라고.

세상은 살기 더 좋아졌을지 모르나 바로 그 살기 좋아진 '삶'이라는 것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적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자 그대로 미생. 이 미생의 문제성은 '새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식의 '진정한' 자아의 발견, 자아의 완정성 추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젊은작가 수상집에 금정연 평론가가 적은대로 스펙과 자기계발의 시대에 윤대녕 소설에 나오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이야기는 이제 철 지난 유행가처럼 들릴 뿐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지도 모른다. 청년실업률이 높다고 하는데 그게 다 대기업이나 공기업 같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그런 거 아니냐, 힘든 일을 기피해서 그런 거 아니냐, 단순육체노동해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은 벌 수 있다.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은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먹고 사는 게 인생의 지상목표가 되는 삶이라면, 사회라면, 우리가 낭만적으로 '꿈'이라 부르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불가능한 삶이라면 삶은 삶이지만 더 이상 삶이 아닌 그 무엇이 된다. 이를 테면 삶-기계.

 미래는 현재와 구별되는 시간이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시간이다. 우리는 편의상 시간을 공간화해 과거/현재/미래를 도식적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베르그손이 예전에 보여줬듯 시간은 '지속'하며, 서로 끊임없이 삼투하는 시간의 운동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모티프로 다뤄졌고, 다뤄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다뤄질 것이다. 살아온 날들의 총합이 지금의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내용과 형식, 실재와 실존, 이 이항대립적 도식으로 시간들을 설명할 수 없는 건 삶이 변증법적 도식에 갇히지 않는 잠재성의 보고이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의 존재론. 우리가 절망을 느끼는 지점은 재난이 일어난 현재일 때도 있지만 더 이상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 자체가 재난이 되어버린 전망없음/미래없음의 현재일 때가 더 많다. 생명이 진화/변화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현재에 가둬두게 만드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이 표백된 무색의 미래다. 미래를 색이 없는, 어떤 생명/변화의 징조도 발견할 수 없는 죽음의 지대로 바라보게끔 하는 현재의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삶은 고도성장을 이룩하며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을 갖도록 장려한 시대의 삶과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사사키 아타루를 읽으면서 현 시대에 대한 파국의 진단(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진단인지를 떠나서)이 얼마나 유효한지 회의를 갖게 되었다. 과연 우리는 이 사회가 이대로 가다간 끝날 수밖에 없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 공포를 현실개혁의 에너지로 역전시킬 수 있을까. 알랭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 적었듯 우리는 부정/지양의 정치학이 아닌, 그렇다고 실재를 외면하는 맹목적 긍정론도 아닌 긍정의 정치학을 발명해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애초의 문제설정, 명제를 이렇게 바꿔야 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가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대한민국에서 살기. 파국과 종말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현실을 해석하는 철학이 아닌 현실을 변혁하는 철학을 말한 맑스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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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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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을 읽었다. 300페이지 가량의 책인데 180페이지 가량 읽었으니 읽었다고 하기도 뭐하고 안 읽었다 하기도 뭐하고 읽다 말았다고 하면 뭔가 섭섭하고 들춰봤다고 하면 아깝고 해서 그냥 읽었다,로 퉁치기로 하자. 시몬 베유의 이름을 제대로 본 건 복도훈 평론가의 페이스북에서였다. 한강 소설가의 <소년이 온다>에 대한 감상평을 하면서 시몬 베유의 이름을 언급했다. 당시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의 저자 성해영 선생님께 신비주의 강의를 듣고 있던 터라 신비주의 관련 텍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태여서 시몬 베유의 이름이 강하게 각인되었다. 이후 불 같이 타오른 만큼 빠르게 꺼져버린 관심으로 인해 한 동안 잊고 지냈다가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김연수 소설가 편에서 시몬 베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보고 바로 도서관에 가서 <중력과 은총>을 빌렸다.

 

 중력. 존재를 밑으로 끌어당기는 힘. 은총. 신적 세계로의 상승운동, 도약.

 

 누가 소설은 성공담이 아닌 실패담을 다룬다고 했던가. 수많은 실패들 중 실패로운 실패, 실패다운 실패, 실패스러운 실패들을 모아놓은 소설장르답게 소설 제목으로 하강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몰락하는 자(토마스 베른하르트) 

 전락(알베르 카뮈)

 어셔 가의 몰락(애드거 앨런 포)

 낙하하다(황정은)

 추락(존 쿳시)

 

 그런 실패담을 다루는 문학을 몰락 이후의 첫 번째 표정이라 정의한 신형철 평론가의 <몰락의 에티카>까지. 이 매력적인 실패담의 리스트에 빠트릴 수 없는 한 작품을 만났다. 필립 로스의 전락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1. 본능적으로 연기해도 마스터피스였던 사이먼이 연기하는 법을 까먹는다. 연기능력을 상실한다.

2.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다.

3. 자신의 동료 연극배우의 딸과 사귀기 시작한다. 사이먼이 그녀의 외모를 여성적으로 꾸미기 시작한다.

4. 딸은 레즈비언이고, 그녀의 직장상사 격이었던(대학 학장) 여성이 배신감을 느껴 여자의 부모에게 둘의 연애사실을 꼰지른다.

5. 부모는 사이먼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경력이 있으며, 나이차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둘 사이에 작은 균열을 낸다.

6. 사이먼과 사귀는 도중에도 여성과 성관계를 즐겼던 딸과 사이먼이 호텔 바에서 만난 여성을 꿰어 성관계를 맺는다.

7. 사이먼이 아이를 가질 계획을 꿈꾸기 시작하고 병원에 다녀온다.

8. 딸이 사이먼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9. 딸이 떠나고, 사이먼은 권총으로 자살한다.

 

 <전락>은 '왕년'에 잘나갔던 배우 사이먼의 전락을 다룬 소설이다. 그가 전락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마력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예술적 직관과 육감이 뛰어난 예술가를 보곤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존의 예술체계와 문법을 벗어난 새로운, 그러니까 '예술적'인 것을 뚝딱 만들어내는 사람을 보면 타고났다, 선천적 재능이 뛰어나다는 평가와 함께 '천재적'이란 수식을 붙인다. 예술적 능력이 노력에 비례하지 않고, 재능에 크게 빚지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참고로 에디슨이 말한 1% 영감과 99%의 노력은 노력이 영감보다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영감이 노력보다 중요하다, 1%밖에 안 되지만 이게 나머지 99%를 좌지우지한다는 뜻의 말이라고 한다,고 누군가 설명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을 어느 날 하늘이 다시 거두어간다면 이 인간이 겪어야 할 삶의 낙차는 지상과 하늘 간 거리보다 작지 않을 것 같다. 천사는 추락하면 지상으로 떨어지지만, 인간은 추락하면 추락한 채로 지상에서 살아야 한다. 천부적 재능이 사이먼에게 지상에서 허구적 높이를 갖게 해줬다면 재능이 사라지면서 그가 누렸던 온갖 명성과 지위는 총체적으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에게 남은 거라곤 쇠약한 육체와 지난 날의 명성이 남긴 배설 같은 돈뿐이었다. 이 돈을 어린 여인에게 쏟아부어 존재에 한복판에 생긴 공동空洞(서울시에서 집중적으로 재배되고 있는)을 메꿔보려 했으나 대부분의 균열이 그렇듯 원상복귀는 불가능했다.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기어도 시간의 불가역성 앞에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사이먼의 무기력한 전락을 관찰하면서 새삼스레 떠올렸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자신이 망할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확실한 전락이 아닌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 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될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스스로의 전락을 향해 다가가는 전락, 아무 것도 할 수 없음만을 할 수 있는 완전한 무능. 자신을 신의 자리로, 혹은 신을 자신의 자리로 끌어내려 '대결'하는 큰 인간/영웅이 아닌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치 않은 신에게 버려진 작은 인간. 

 

 필립 로스가 그려낸 전락의 초상. 그는 프랜시스 베이컨의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처럼 균열이 없어 보이는 평화로운 일상에서 지옥을 포착해내고, 사실적으로 묘사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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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라 살기 - 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 현대의 지성 157
김수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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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1일과 2일, 양일에 걸쳐 <책에 따라 살기> 강연을 들었다. 12월 1일은 한예종에서 추계특강으로 강연을 했고, 12월 2일은 서강대 근처 문화공간 숨도에서 심보선 시인, 정혜윤pd/작가, 김남시 교수, 박성도 뮤지션과 함께 북콘서트를 했지만 강연보다 오히려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겹치는 부분도 있었지만 오히려 반복을 통해 이해 증진 및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었다(6장과 7장에 이 '차이와 반복'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책이 나오자마자 도서관에 신청해 강연 전에 입고된 상태였지만 연체기간이 끝나지 않아 책을 읽지 못한 상태로 강연을 들었는데 오히려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고, '책에 따라 살기'란 주제를 책의 부제에 해당하는 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의 프리즘을 통과하지 않고 생각해본 다음에 책을 읽어 대화적 독서가 원활히 진행되었다. 물론 순서가 바뀐다고 해서 대화적 독서가 불가능해지는 건 아니지만 10월경 홍대북페스티벌에서 책에서도 인용되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저자 사사키 아타루가 참여한 컨퍼런스에서 '책읽기는 혁명이다' 명제에 꽂혀 '책에 따라 살기'란 명제를 (말하자면) 사사키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조적으로 <책에 따라 살기>/로트만의 관점이 좀 더 흥미롭게 읽히는 효과는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서구 유럽의 문화를 러시아에 갑자기 이식해 러시아를 개조하는 바람에 러시아인들은 자국에서 이방인이 되어야 했다고 한다. 페테르부르크는 그 과격한 실험의 장이었고,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와 고골의 인물들이 잉태되었다. 러시아는 서구 기독교의 3원론적 세계관(천국-연옥-지옥)과 달리 연옥이 없는 2원론적 세계관에 따라 새로운 사회로 변화하는 데 있어 과거와의 단절로 미래로 곧장 나아가는 극단적이고 과격한 면모를 보여줬다. 책의 제목이 된 2005년에 발표된 논문의 부제는 러시아적 문화 유형의 매혹과 위험인데 이 급진성/과격함에 양가적 면모(매혹과 위험)을 보여준다. 

 러시아에서 문학은 문학 이상의 무엇이라고 한다. 정치, 법 등 사회의 다른 분야의 몫을 문학이 모두 감당하는 기형적 면모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이라고 하는 역사적 맥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러시아의 비평가 벨린스키는 푸시킨을 러시아의 모든 것(기억이 정확하게 나지 않는데), 이런 느낌의 찬사를 하기도 했다. 푸시킨은 결투에 휘말려 최후를 맞았는데 김수환 교수님에 따르면 푸시킨의 인기가 너무 높아진 데 위협을 느낀 황제가 술수를 써 푸시킨을 처리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또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 돌아와서 모교에서 교양강의를 했을 때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는데 인상 깊어서 옮겨적는다.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을 하고 있는 철학과 학생이 김수환 교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교수님, 러시아 문학,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을 읽다 보면 여기에 니체가 있고, 쇼펜하우어가 있고 다 있는데, 제가 러시아 철학자 이름은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습니다. 러시아에는 철학자가 없는 건가요?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대답했다고 한다) 그건 말이지. 러시아는 철학도 문학으로 하는 나라라서 그래. 

 즉흥적인 답변이었지만 나중에 곰곰 생각해봐도 이것보다 적절한 답변이 없을 정도로 탁월한 답변이었다는 김수환 교수님의 자평이 있었다는 후문... 

 

 '책에 따라 살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풀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현실적인 삶이 있고 책에서 이상적인 삶을 그린다. 우리는 현실을 이상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반대다. 이상, 책이 중심이다. 러시아인은 이상을 현실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아니면 이렇게 표현하는 건 어떨까? 현실이어야 하는 현실에 맞춰 현실인 현실을 개혁한다고. 러시아 정신의 정언명령과 당위는 신이 아닌 책/문학에서 비롯되었다. 나도 이 러시아적 문화 유형의 매혹과 위험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유용성/교환의 논리로 책읽기를 보기 시작하면 당장 책을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까지 들지 않지만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현실주의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지상에서 한 두 발짝 떨어져 공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가 사랑하는 스승은 '중요한 것은 시가 불모의 세계에 대해 유용한 결과물을 내놓는 식으로 세상과 거짓 화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모의 세계가 지닌 불모성을 '무용한' 예술적 형식으로 드러내는 정직한 시적 자의식을 강인하게 견지하는 일이다.'라고 적은 바 있으나 그게 문자 그대로 실현하기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정직한 시적 자의식을 강인하게 견지하는 일' 요즘 주문처럼 외우면서 살지만 이러다 진짜 인생 X되는 거 아닌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인 건 아닌가 두려움과 불안이 공포의 얼굴로 육박해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런데 사실 현실주의적 노선으로 선회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에 하루하루 좀 더 노력하는 것말곤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반대로 이론 없는 실천처럼 세계의 복잡한 구조에 대한 탐구 없이 '단순한 것이 명쾌하고 좋다'는 태도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 효과에 천착하는 데 현혹되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는 실천이 필요한 순간에 뒤로 꽁무니를 빼거나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우유부단하게 중립을 지키는 소극적/회피적 태도가 아니라  자기확신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인 옳음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리고 이 부분과 관련해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을 드렸다(12월 1일에 엄청난 열기로 질문공세가 이어져 질문의 기회를 잡지 못했고, 2일에 겨우 발언권을 얻을 수 있었다). 질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론과 실천을 하나인 건 알겠는데 책상 밖을 벗어나지 않고 이론적 실천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학습한다면 실존적 자아가 실천보다 이론의 길을 자연히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니 이론과 실천이 하나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실천의 우위를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쨌든 우문에 현답을 받아 큰 도움이 되었다.

 답변의 골자는 지하실에 처박혀 있던 주인공에게('지하로부터의 수기') 도끼를 쥐어주기까지('죄와 벌')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지하실에서 고민하고 사색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도끼를 쥐어주고 찍어버리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었을 거라고.

 

 2부 영화에 대한 글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로 하이라이트는 3부 6장과 7장이었다. 로트만과 바흐친. 시와 소설... 대화. 심보선 시인이 <눈앞에 없는 사람>에 수록된 <the humor of exclusion>의 탄생비화(?)에 대해 설명해주시면서 '대화는 존재에 선행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표현하면 그 말을 '들어버린 것입니다'). 로트만의 기호계, 사유하는 구조, 김수환 선생님의 다른 저작들을 찾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들끓었다. 평소 막연하게 하던 생각이 이론의 언어로 논리적으로 정리될 때의 쾌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어떤 이론의 '인증'을 받지 않은 잡생각의 잡함 - 이를 테면 타자성을 극대화해 나만의 독창적 사유로 발전시킬 수 있는 사유의 근력과 근지구력을 향상시키는 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에 따라 살기. 후속작이 빨리 나오길 응원해본다. 대화의 수행적 성격. 어떤 결정적 균열을 포착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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