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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닐 때 ~~살아남기 시리즈를 즐겨 읽었다.
화산에서 살아남기,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아마존에서 살아남기 등등
중간중간에 껴있는 과학설명도 빼놓지 않고 읽었지만 만화서사를 따라가는 몸으로 읽어낸 과학설명은 순간적으로 지적 쾌락을 채워주는 고급 디저트였을 뿐이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밥은 아니지만 혀를 즐겁게 해주는 디-저트.
이 시리즈의 새로운 버전을 생각해본다. 한국에서 살아남기, 북한에서 살아남기, 일본에서 살아남기, ~~ 살아남기... 오히려 이전의 살아남기 시리즈에서 다뤄졌던 오지가 '문명'사회보다 살아남는 데 더 수월해보이기도 한다. 오지에서 인간은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면 되지만 문명사회에서 인간은 자연이 된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경쟁 논리로부터, 그 논리를 내면화한 인간들로부터, 자신을 법에 기입된 시민이 아닌 '벌거벗은 생명'으로 탈바꿈시킬 지도 모르는 법으로부터, 자신이 먹는 음식에 들어 있을 지도 모르는 방사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극한의 난이도이다.
이렇듯 최근 몇 년 사이 재난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재난이 현 사회/세계를 읽는 콘텍스트가 되었다고 봐도 무리 없을 듯 싶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폭풍공감'을 이끌어내며 하나의 트렌드가 된 미생은 이렇게 한국사회를 요약하고 있지 않은가. 직장 안은 전쟁터고, 직장 바깥은 지옥이라고.
세상은 살기 더 좋아졌을지 모르나 바로 그 살기 좋아진 '삶'이라는 것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적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자 그대로 미생. 이 미생의 문제성은 '새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식의 '진정한' 자아의 발견, 자아의 완정성 추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젊은작가 수상집에 금정연 평론가가 적은대로 스펙과 자기계발의 시대에 윤대녕 소설에 나오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이야기는 이제 철 지난 유행가처럼 들릴 뿐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지도 모른다. 청년실업률이 높다고 하는데 그게 다 대기업이나 공기업 같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그런 거 아니냐, 힘든 일을 기피해서 그런 거 아니냐, 단순육체노동해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은 벌 수 있다.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은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먹고 사는 게 인생의 지상목표가 되는 삶이라면, 사회라면, 우리가 낭만적으로 '꿈'이라 부르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불가능한 삶이라면 삶은 삶이지만 더 이상 삶이 아닌 그 무엇이 된다. 이를 테면 삶-기계.
미래는 현재와 구별되는 시간이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시간이다. 우리는 편의상 시간을 공간화해 과거/현재/미래를 도식적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베르그손이 예전에 보여줬듯 시간은 '지속'하며, 서로 끊임없이 삼투하는 시간의 운동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모티프로 다뤄졌고, 다뤄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다뤄질 것이다. 살아온 날들의 총합이 지금의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내용과 형식, 실재와 실존, 이 이항대립적 도식으로 시간들을 설명할 수 없는 건 삶이 변증법적 도식에 갇히지 않는 잠재성의 보고이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의 존재론. 우리가 절망을 느끼는 지점은 재난이 일어난 현재일 때도 있지만 더 이상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 자체가 재난이 되어버린 전망없음/미래없음의 현재일 때가 더 많다. 생명이 진화/변화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현재에 가둬두게 만드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이 표백된 무색의 미래다. 미래를 색이 없는, 어떤 생명/변화의 징조도 발견할 수 없는 죽음의 지대로 바라보게끔 하는 현재의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삶은 고도성장을 이룩하며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을 갖도록 장려한 시대의 삶과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사사키 아타루를 읽으면서 현 시대에 대한 파국의 진단(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진단인지를 떠나서)이 얼마나 유효한지 회의를 갖게 되었다. 과연 우리는 이 사회가 이대로 가다간 끝날 수밖에 없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 공포를 현실개혁의 에너지로 역전시킬 수 있을까. 알랭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 적었듯 우리는 부정/지양의 정치학이 아닌, 그렇다고 실재를 외면하는 맹목적 긍정론도 아닌 긍정의 정치학을 발명해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애초의 문제설정, 명제를 이렇게 바꿔야 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가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대한민국에서 살기. 파국과 종말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현실을 해석하는 철학이 아닌 현실을 변혁하는 철학을 말한 맑스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