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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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을 읽었다. 300페이지 가량의 책인데 180페이지 가량 읽었으니 읽었다고 하기도 뭐하고 안 읽었다 하기도 뭐하고 읽다 말았다고 하면 뭔가 섭섭하고 들춰봤다고 하면 아깝고 해서 그냥 읽었다,로 퉁치기로 하자. 시몬 베유의 이름을 제대로 본 건 복도훈 평론가의 페이스북에서였다. 한강 소설가의 <소년이 온다>에 대한 감상평을 하면서 시몬 베유의 이름을 언급했다. 당시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의 저자 성해영 선생님께 신비주의 강의를 듣고 있던 터라 신비주의 관련 텍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태여서 시몬 베유의 이름이 강하게 각인되었다. 이후 불 같이 타오른 만큼 빠르게 꺼져버린 관심으로 인해 한 동안 잊고 지냈다가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김연수 소설가 편에서 시몬 베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보고 바로 도서관에 가서 <중력과 은총>을 빌렸다.

 

 중력. 존재를 밑으로 끌어당기는 힘. 은총. 신적 세계로의 상승운동, 도약.

 

 누가 소설은 성공담이 아닌 실패담을 다룬다고 했던가. 수많은 실패들 중 실패로운 실패, 실패다운 실패, 실패스러운 실패들을 모아놓은 소설장르답게 소설 제목으로 하강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몰락하는 자(토마스 베른하르트) 

 전락(알베르 카뮈)

 어셔 가의 몰락(애드거 앨런 포)

 낙하하다(황정은)

 추락(존 쿳시)

 

 그런 실패담을 다루는 문학을 몰락 이후의 첫 번째 표정이라 정의한 신형철 평론가의 <몰락의 에티카>까지. 이 매력적인 실패담의 리스트에 빠트릴 수 없는 한 작품을 만났다. 필립 로스의 전락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1. 본능적으로 연기해도 마스터피스였던 사이먼이 연기하는 법을 까먹는다. 연기능력을 상실한다.

2.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다.

3. 자신의 동료 연극배우의 딸과 사귀기 시작한다. 사이먼이 그녀의 외모를 여성적으로 꾸미기 시작한다.

4. 딸은 레즈비언이고, 그녀의 직장상사 격이었던(대학 학장) 여성이 배신감을 느껴 여자의 부모에게 둘의 연애사실을 꼰지른다.

5. 부모는 사이먼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경력이 있으며, 나이차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둘 사이에 작은 균열을 낸다.

6. 사이먼과 사귀는 도중에도 여성과 성관계를 즐겼던 딸과 사이먼이 호텔 바에서 만난 여성을 꿰어 성관계를 맺는다.

7. 사이먼이 아이를 가질 계획을 꿈꾸기 시작하고 병원에 다녀온다.

8. 딸이 사이먼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9. 딸이 떠나고, 사이먼은 권총으로 자살한다.

 

 <전락>은 '왕년'에 잘나갔던 배우 사이먼의 전락을 다룬 소설이다. 그가 전락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마력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예술적 직관과 육감이 뛰어난 예술가를 보곤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존의 예술체계와 문법을 벗어난 새로운, 그러니까 '예술적'인 것을 뚝딱 만들어내는 사람을 보면 타고났다, 선천적 재능이 뛰어나다는 평가와 함께 '천재적'이란 수식을 붙인다. 예술적 능력이 노력에 비례하지 않고, 재능에 크게 빚지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참고로 에디슨이 말한 1% 영감과 99%의 노력은 노력이 영감보다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영감이 노력보다 중요하다, 1%밖에 안 되지만 이게 나머지 99%를 좌지우지한다는 뜻의 말이라고 한다,고 누군가 설명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을 어느 날 하늘이 다시 거두어간다면 이 인간이 겪어야 할 삶의 낙차는 지상과 하늘 간 거리보다 작지 않을 것 같다. 천사는 추락하면 지상으로 떨어지지만, 인간은 추락하면 추락한 채로 지상에서 살아야 한다. 천부적 재능이 사이먼에게 지상에서 허구적 높이를 갖게 해줬다면 재능이 사라지면서 그가 누렸던 온갖 명성과 지위는 총체적으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에게 남은 거라곤 쇠약한 육체와 지난 날의 명성이 남긴 배설 같은 돈뿐이었다. 이 돈을 어린 여인에게 쏟아부어 존재에 한복판에 생긴 공동空洞(서울시에서 집중적으로 재배되고 있는)을 메꿔보려 했으나 대부분의 균열이 그렇듯 원상복귀는 불가능했다.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기어도 시간의 불가역성 앞에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사이먼의 무기력한 전락을 관찰하면서 새삼스레 떠올렸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자신이 망할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확실한 전락이 아닌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 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될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스스로의 전락을 향해 다가가는 전락, 아무 것도 할 수 없음만을 할 수 있는 완전한 무능. 자신을 신의 자리로, 혹은 신을 자신의 자리로 끌어내려 '대결'하는 큰 인간/영웅이 아닌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치 않은 신에게 버려진 작은 인간. 

 

 필립 로스가 그려낸 전락의 초상. 그는 프랜시스 베이컨의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처럼 균열이 없어 보이는 평화로운 일상에서 지옥을 포착해내고, 사실적으로 묘사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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