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따라 살기 - 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 현대의 지성 157
김수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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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1일과 2일, 양일에 걸쳐 <책에 따라 살기> 강연을 들었다. 12월 1일은 한예종에서 추계특강으로 강연을 했고, 12월 2일은 서강대 근처 문화공간 숨도에서 심보선 시인, 정혜윤pd/작가, 김남시 교수, 박성도 뮤지션과 함께 북콘서트를 했지만 강연보다 오히려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겹치는 부분도 있었지만 오히려 반복을 통해 이해 증진 및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었다(6장과 7장에 이 '차이와 반복'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책이 나오자마자 도서관에 신청해 강연 전에 입고된 상태였지만 연체기간이 끝나지 않아 책을 읽지 못한 상태로 강연을 들었는데 오히려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고, '책에 따라 살기'란 주제를 책의 부제에 해당하는 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의 프리즘을 통과하지 않고 생각해본 다음에 책을 읽어 대화적 독서가 원활히 진행되었다. 물론 순서가 바뀐다고 해서 대화적 독서가 불가능해지는 건 아니지만 10월경 홍대북페스티벌에서 책에서도 인용되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저자 사사키 아타루가 참여한 컨퍼런스에서 '책읽기는 혁명이다' 명제에 꽂혀 '책에 따라 살기'란 명제를 (말하자면) 사사키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조적으로 <책에 따라 살기>/로트만의 관점이 좀 더 흥미롭게 읽히는 효과는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서구 유럽의 문화를 러시아에 갑자기 이식해 러시아를 개조하는 바람에 러시아인들은 자국에서 이방인이 되어야 했다고 한다. 페테르부르크는 그 과격한 실험의 장이었고,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와 고골의 인물들이 잉태되었다. 러시아는 서구 기독교의 3원론적 세계관(천국-연옥-지옥)과 달리 연옥이 없는 2원론적 세계관에 따라 새로운 사회로 변화하는 데 있어 과거와의 단절로 미래로 곧장 나아가는 극단적이고 과격한 면모를 보여줬다. 책의 제목이 된 2005년에 발표된 논문의 부제는 러시아적 문화 유형의 매혹과 위험인데 이 급진성/과격함에 양가적 면모(매혹과 위험)을 보여준다. 

 러시아에서 문학은 문학 이상의 무엇이라고 한다. 정치, 법 등 사회의 다른 분야의 몫을 문학이 모두 감당하는 기형적 면모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이라고 하는 역사적 맥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러시아의 비평가 벨린스키는 푸시킨을 러시아의 모든 것(기억이 정확하게 나지 않는데), 이런 느낌의 찬사를 하기도 했다. 푸시킨은 결투에 휘말려 최후를 맞았는데 김수환 교수님에 따르면 푸시킨의 인기가 너무 높아진 데 위협을 느낀 황제가 술수를 써 푸시킨을 처리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또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 돌아와서 모교에서 교양강의를 했을 때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는데 인상 깊어서 옮겨적는다.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을 하고 있는 철학과 학생이 김수환 교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교수님, 러시아 문학,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을 읽다 보면 여기에 니체가 있고, 쇼펜하우어가 있고 다 있는데, 제가 러시아 철학자 이름은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습니다. 러시아에는 철학자가 없는 건가요?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대답했다고 한다) 그건 말이지. 러시아는 철학도 문학으로 하는 나라라서 그래. 

 즉흥적인 답변이었지만 나중에 곰곰 생각해봐도 이것보다 적절한 답변이 없을 정도로 탁월한 답변이었다는 김수환 교수님의 자평이 있었다는 후문... 

 

 '책에 따라 살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풀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현실적인 삶이 있고 책에서 이상적인 삶을 그린다. 우리는 현실을 이상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반대다. 이상, 책이 중심이다. 러시아인은 이상을 현실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아니면 이렇게 표현하는 건 어떨까? 현실이어야 하는 현실에 맞춰 현실인 현실을 개혁한다고. 러시아 정신의 정언명령과 당위는 신이 아닌 책/문학에서 비롯되었다. 나도 이 러시아적 문화 유형의 매혹과 위험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유용성/교환의 논리로 책읽기를 보기 시작하면 당장 책을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까지 들지 않지만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현실주의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지상에서 한 두 발짝 떨어져 공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가 사랑하는 스승은 '중요한 것은 시가 불모의 세계에 대해 유용한 결과물을 내놓는 식으로 세상과 거짓 화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모의 세계가 지닌 불모성을 '무용한' 예술적 형식으로 드러내는 정직한 시적 자의식을 강인하게 견지하는 일이다.'라고 적은 바 있으나 그게 문자 그대로 실현하기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정직한 시적 자의식을 강인하게 견지하는 일' 요즘 주문처럼 외우면서 살지만 이러다 진짜 인생 X되는 거 아닌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인 건 아닌가 두려움과 불안이 공포의 얼굴로 육박해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런데 사실 현실주의적 노선으로 선회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에 하루하루 좀 더 노력하는 것말곤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반대로 이론 없는 실천처럼 세계의 복잡한 구조에 대한 탐구 없이 '단순한 것이 명쾌하고 좋다'는 태도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 효과에 천착하는 데 현혹되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는 실천이 필요한 순간에 뒤로 꽁무니를 빼거나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우유부단하게 중립을 지키는 소극적/회피적 태도가 아니라  자기확신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인 옳음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리고 이 부분과 관련해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을 드렸다(12월 1일에 엄청난 열기로 질문공세가 이어져 질문의 기회를 잡지 못했고, 2일에 겨우 발언권을 얻을 수 있었다). 질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론과 실천을 하나인 건 알겠는데 책상 밖을 벗어나지 않고 이론적 실천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학습한다면 실존적 자아가 실천보다 이론의 길을 자연히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니 이론과 실천이 하나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실천의 우위를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쨌든 우문에 현답을 받아 큰 도움이 되었다.

 답변의 골자는 지하실에 처박혀 있던 주인공에게('지하로부터의 수기') 도끼를 쥐어주기까지('죄와 벌')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지하실에서 고민하고 사색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도끼를 쥐어주고 찍어버리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었을 거라고.

 

 2부 영화에 대한 글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로 하이라이트는 3부 6장과 7장이었다. 로트만과 바흐친. 시와 소설... 대화. 심보선 시인이 <눈앞에 없는 사람>에 수록된 <the humor of exclusion>의 탄생비화(?)에 대해 설명해주시면서 '대화는 존재에 선행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표현하면 그 말을 '들어버린 것입니다'). 로트만의 기호계, 사유하는 구조, 김수환 선생님의 다른 저작들을 찾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들끓었다. 평소 막연하게 하던 생각이 이론의 언어로 논리적으로 정리될 때의 쾌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어떤 이론의 '인증'을 받지 않은 잡생각의 잡함 - 이를 테면 타자성을 극대화해 나만의 독창적 사유로 발전시킬 수 있는 사유의 근력과 근지구력을 향상시키는 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에 따라 살기. 후속작이 빨리 나오길 응원해본다. 대화의 수행적 성격. 어떤 결정적 균열을 포착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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